대북

 




1. 개요
2. 역사
3. 대북의 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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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 붕당의 한 일파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인의 한 계열. 광해군 시기 권력을 독점하다가 인조반정 당시 사실상 소멸된다. 이이첨, 정인홍 등의 인물이 대북의 주요 거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이 뿌리이다.

2. 역사


같은 동인이었다가 정여립의 난 당시 남인과 갈라선 북인 계통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타협(주화오국)을 했다는 이유로 남인 계열의 유성룡을 탄핵하고 1602년 정권을 장악한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정치 공세일수도 있지만, 북인 계열의 인물들(대표적인게 곽재우)이 다수가 의병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탄핵이 딱히 정치적 공세만이라고 보긴 힘들긴 했다.[1]
1606년 무렵에 이르면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는데, 그 촉매제가 바로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둘러싸고 누구를 후계자로 밀지에 대한 북인 사이의 의견 대립. 대북은 임진왜란 시기 분조를 이끌면서 성공적으로 세자의 임무를 수행한 광해군을 지지했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밀어주었다. 덧붙여 대북쪽 인물들로는 기성관료가, 소북쪽 인문들로는 신진관료들이 다수 분포했다.
선조의 마음은 영창대군에게 크게 기울어 있었기에 북인의 분열 직후 정국의 주도권을 진 쪽은 소북. 아마 선조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아마 대북은 망했어요를 면치 못했겠지만, 1608년 선조가 급서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전세는 역전. 이후 정인홍이이첨이 대북을 주도하게 된다. 여담으로 허균도 대북계열이다. 그런데 반란을 꾀하다가 끔살 크리.... 다만 정인홍은 학식과 나이 등을 고려한 상징적인 리더였고 실세는 이이첨이었다.
이후 대북은 폐모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영창대군만 죽여야 한다는 골북(骨北), 인목왕후도 죽여야 한다는 육북(肉北), 둘을 모두 살려야한다는 중북(中北)으로 나뉘었다. 이이첨 등 실권자들이 주로 가담한 것은 육북이었고,[2] 강경파인 육북이 주도한 대북세력은 갖은 옥사와 타당파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적 태도로 인해 거센 반발을 맞게 된다.[3]
마지막에 이르면 임금인 광해군조차 이이첨 등 대북 강경파들에게 권력이 너무 몰려 있다고 걱정을 할 정도였다. 당장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궐을 점령한 직후 도망친 광해군이 했다고 전해진 말이 "이이첨이 (반란을) 일으켰느냐?"이다.
게다가 인조반정이 여러 차례 계획이 새나갔음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게 대북이 주도한 너무 잦은 옥사에 신물을 느낀 광해군이 미온적으로 대처해서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대북계열은 깔끔히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몰살당한다.
여담으로 이 일파는 여진(=후금, 청)에 대해서는 서인보다 더 골수 강경파였는데, 광해군 때 후금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금과 친선 못맺습니다!" 라고 했다.[4] 반면 서인의 경우 몇 명이긴 하지만[5] 정묘호란 때 "부득이하면 칭신도[6] 가능합니다. 고려 때도 그랬잖아요." 라고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젊은 대간층은 둘 다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저버렸다며 탄핵했고 좀 나이와 지위가 있는 층이 사태를 잘 돌아보았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류가 "나가면 위태로울 확률이 반 보존될 확률이 반인데 계속 버티면 백이면 백 다 망할 겁니다."라며 사태를 제대로 짚었지만,[7] 물론 이때도 명분에만 집착한 대간층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대북이라면 아마 "망하고 말고는 모르겠고 계속 버팁시다."라는 주장이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은 지독한 아가리 파이터 그 자체 대북 세력의 말대로 친명배금의 태도를 취한다면 첫번째로 세워야 할 방침은 만일 후금군이 '조선에 쳐들어올때 어떻게 막을것인가?' 이것부터다. 광해군은 이를 인지하고는 저들이 꼭 성을 함락시키며 내려올 리가 없으니 중도에서 막을 대책을 찾아보라고 비변사에 지시해도 "강화도나 남한산성에서 장기농성하면 각지에서 구원군이 올테니 문제없음" 이라는 식의 답변만 돌아왔고[8] 이것 정도라면 무능이라 할 순 있어도 뭔가 해본거 아니냐는 말을 할 순 있지만 진짜 문제는 광해군이 대금 정책과 관련해서 대책을 내놓는 자리를 마련하면 또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인조 정권에서는 그래도 나름은 대책을 세워볼려고도 하고 무엇보다도 신하들도 이 일과 관련해서 손 놓고 있던건 아니었던 만큼 대북들은 서인보다도 더 비현실적에 무책임자들이었다.[9] 결국 광해군이 "기세등등한 이적을 잘 미봉하는게 국가를 위한 상책이다."[10],"저들이 쳐들어오면 그대들은 말로 물리칠 것인가? 붓으로 공격할 것인가? 저들이 한강에서 말들을 물먹이는 일은 없게 해야하지 않겠는가?"[11],"안으로는 힘쓰지 않고 밖으로만 큰소리친다. 무장들도 결전을 벌이자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건 가상히 생각하나 서쪽 변경을 죽는곳이라고 여기는 양 두려워 하는가?" 등으로 질책하는 등 별 짓을 다했지만 이 집단은 끝까지 들어먹지 않았다.
나중에 홍봉한의 북당계 인물들이 정조에게 "저하께서 외가를 붙들어주지 않으면 무신년 무리가 대북이 되고 말텐데 어쩌시렵니까?"[12] 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2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라도 대북은 욕먹는 대상이 된 모양이다.

3. 대북의 영수


  • 정인홍: 인조반정 때 88세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고령의 나이로 처형을 당하였다(당시 80세 이상의 노인은 처형하지 않았음).
  • 이이첨: 대북은 정인홍이 (상징적인) 리더였지만 실제 리더는 이이첨이었다.
  • 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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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정작 얼마 안가서 기유약조를 맺는다.[2] 정인홍은 중북 계열이었다. 단 이이첨이라고 해서 미친 건 아니었기에 죽여야 한다는 주장은 공식적으로 펴진 못했다.[3] 그 수준은 가히 조선판 매카시즘이라 봐도 좋을 정도 장령 배대유는 폐모론 시기 올린 상소에서 "도적질했다가 잡힌 뒤 (죄를 면하기 위해) 고변하는 자도 있습니다!" 라고 했을 정도로 심했다.[4] 사실 대북의 수장인 이이첨이 이것을 명분삼아 유자로서의 인망을 찾아 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는 해석도 있다.[5] 정확히 말하면 이귀나 최명길같은 '''인조반정 핵심 공신들'''.[6] 신하임을 칭하는것.[7] 최명길도 "그래도 지금 결단을 내리면 만에 하나의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8] 이게 얼마나 오류였는지는 병자호란 참조[9] 하다하다못해 광해군 시기엔 후금에 도발걸자는 미친 주장을 하는 인간도 나왔다. 인조 시기엔 이런건 없었다. 대간들조차 오랑캐와 관계를 끊어야 마네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단독으로 후금을 치자는 미친 소리는 안했다. 후에 송시열이 북벌론을 제기하고 효종도 이를 내세우지만 이는 그냥 구호일 뿐 진짜 그랬다기 보다는 흉내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서로 구상도 달랐고.[10] 사르후 전투 이후 강홍립 처분을 놓고 일어난 논쟁에서 한 말[11] 어느 날 비변사에 던진 질문. 그러나 비변사는 앞에 나온 나라가 망할지언정 중국을 따르겠다는 대답을 한다. [12] 해석: 홍봉한 편을 안들어주면 소론(이라지만 사실 김귀주를 노리고 한 말이다. 물론 김귀주는 홍봉한과 같은 노론이나 남당계다.)이 홍봉한(을 비롯한 북당계)을 다 죽일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