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1893)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석호는 1893년 4월 2일 경상도 초계현 덕곡면(현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포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 때인 1911년 8월 우물가에서 알몸으로 몸을 씻으며 거드름을 피우던 일본인을 '게다' 짝으로 폭행한 뒤 그 길로 만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군사학을 익힌 뒤 1919년 동빈현(東賓縣) 마가점(馬家店)[2] 남산 밑에 신촌이라는 한인농장을 세워 동포들을 정착시켰다.
그는 6개의 자치농장을 세웠는데, 때로는 마적과 일본헌병에 쫓겨 농장을 네 번이나 옮기는 곤경에 처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한인농민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계몽하고 우수한 열혈 청년들을 뽑아 낙양무관학교에 보내기도 했으며, 농장의 각 부락마다 60명씩 산림유격대를 조직, 낮에는 농사일, 밤에는 독립군으로 싸우게 했고 공동정미소를 차려 쌀을 유학생과 군의 군량미로 보탰다.
1923년 신민부가 수립되어 집행부위원장에 김혁, 군사위원장에 김좌진이 임명되었을 때, 그는 재무부장을 맡아 군량미와 군자금을 댔다. 또한 같은 해 조직된 청년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민부에 참의원(參議院)이 구성되자 안용수(安龍洙)·이백향(李白香)·이장녕·남극 등과 함께 참의원(參議員)에 선출되어 일하였다.
1929년에는 하동(河東)자치농장을 운영하면서 유격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등 지하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30년 7월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31개월간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후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지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고령에 내려가 하천부지를 개간하며 땅콩을 재배했다. 주위에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그는 "내가 내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이 무슨 공이 되느냐"며 사양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고령군 고령면 장기동 향리에서 중풍과 가난에 시달리다 1970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석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