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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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에서 등장하는 최익현이다.
2. 상세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원 역사와 달리 피 끓는 젊은이일 때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조선의 개항이 열강의 침탈 없이 무탈하게 이루어져 이른바 양이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더 유연하다. 지금도 성현의 도리가 그 대의만은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파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조선이, 나아가 유학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아 고루해졌음을 인정하게 됐다. '조선을 근대화하는' 것이 아닌, '조선이 근대로 나아가는' 광경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상징하는 인물.
3. 행적
신창 현감 시절 도탄에 빠져 땅 위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 백성들을 보고 과연 정학의 가르침만이 정답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였다. 그렇게 방황하던 차에 개화당의 영수 박규수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양이의 기물과 기예를 들여와 올바른 도로 교정하여 그 바른 길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위정척사를 고집하는 스승 이항로를 숭모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여 차마 개화당이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벼슬을 제수한다는 것을 누차 사양하고 포천에서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귀남식 군밤버전 흑묘백묘론과 탕평론에 감화된 이항로가 물러나면서 스승 눈치보지 말고 출사하여 뜻을 펼쳐보라고 응원해주어 다시 조정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을축변법에 대해 청나라의 양해를 받고자 파견된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조선을 방기하겠다는 입장을 취한 청나라에 적잖이 실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국조차 어쩌 하지 못하는 양이를 조선이 홀로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후 큰 꿈을 품고서 지금껏 배워온 정학의 틀 바깥을 살피러 유럽 파견 사절단에 참가하였고 젊은 유학생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 남아 서양의 사정을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막연히 저들의 정예한 화포와 기기를 들여오고 빼어난 재주를 배워오면 절로 나라가 부강해지리라 생각하였는데 그 기술에 나름의 도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자 없이 전자만으로 무언가를 이룩하려 한다면, 이는 결국 사상누각에 그칠 것이라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꼬박 2년 동안 도서관과 숙소를 오가며 서책에 몰두하였고 때때로 유럽 식자들과 편지를 교환하였다.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창시자 앙리 뒤낭을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보불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누군가는 이 모든 사정을 기록하여 당대와 후대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공사 서형순과 함께 파리에 남았다. 이때 위풍당당히 친정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혀 항복을 선언하자 수도에서 새로운 조정(?)이 꾸려지는 것을 보고 토목의 변을 떠올렸다. 프로이센군의 포위에 지친 신 정부가 결국 항복했을 때는 병자호란이 생각나 남 얘기 같지 않아 동정하기도 했다. 이후 농반진반 주코뮌 조선대사로서 뒤낭과 함께 파리 코뮌과 정부군 사이를 훌륭히 중재하였고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망명을 원하는 코뮌 시민 일천여 명에 그 가족들까지 대동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활약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무슈 최'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귀국한 이래 벼슬이 예조참의로 올라 당상관으로 훌쩍 품계가 뛰어올랐다. 이후 외무만 전담하다가 육조와 통리기무아문을 통합하는 관제 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조판서에 임명됐다.[1] 이후 예조판서를 역임한다. 현재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귀남의 도덕주의적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근래 다른 곳도 아니고 스승인 이항로의 아호를 딴 화서학원에서 자강사라고 하여 얼치기 청년 제국주의자들의 모임이 생겨 골머리를 썩는 중이다.
1887년, 감투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정 내 반세도 유림파 관료들이 사조직을 꾸려 자신을 차기 총리로 미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중 영의점 겸 총리대신 자리를 추거의 법도로 정하게 되자 거칠 게 없어져 예조판서직을 내려놓고 박은식을 끌어들여 실용적 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자유당을 차렸다. 이듬해 총리대신 추거에서 당당히 승리하여 조선 역사상 최초로 백성들이 선택한 총리가 됐다.
총리대신 임기를 마친 뒤에는 참의대부 자리에 나아가진 않았지만 여전히 자유당 영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유당에 아직 마땅한 인재가 없어 적어도 십년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거라는 평을 듣는 중이다.
[1] 육조와 통리아문 아래 12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어디가 무슨 업무를 맡는지를 두고 부서간에 싸움이 붙어 육조의 옛 관헌과 아문의 새 관료들이 모두 신뢰하는 최익현이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를 맡아 교통정리를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