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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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昌益
1896년 ~ 1957년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 북한의 정치인. 1896년 - 1957년. 그의 아내는 허정숙이다.[1] 이명으로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健宇)가 있다.
1896년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출신이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공산당 ML파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1930년대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합류했다 그를 떠나 연안으로 가서 김두봉과 함께 중국공산당 지휘 하에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다. 조선독립동맹에서는 위원장 김두봉 밑에서 한빈과 함께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북한으로 입국했으며 정부 수립 이후 부수상(재정상) 등의 요직을 맡았다. 북한 체제 수립 과정에서 최창익은 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곧 계급투쟁이라는 북한식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그는 연안파의 최고실력자[2] 로서 김일성을 실각시키고 본인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려는 계획을 짰고 이 과정에서 중국, 소련과 접촉하기도 했다. 즉, 8월 종파 사건의 최대 배후. 그러나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미코얀, 중국의 펑더화이가 북한으로 와 김일성에게 그의 복권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눈치보다 결국 최창익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1957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은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사건'으로도 불리며 현재까지 최창익의 이름은 종파분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출신에 1920년대 ML파 활동부터 1940년대 조선독립동맹 활동까지 공산주의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여러모로 김일성의 라이벌 격이었던 인물이지만 치밀한 준비 없이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을 끌어내리겠다는 안일한 인식과 외세에 의존했던 점 등은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다.
崔昌益
1896년 ~ 1957년
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 북한의 정치인. 1896년 - 1957년. 그의 아내는 허정숙이다.[1] 이명으로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健宇)가 있다.
2. 항일 운동
1896년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출신이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공산당 ML파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1930년대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합류했다 그를 떠나 연안으로 가서 김두봉과 함께 중국공산당 지휘 하에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다. 조선독립동맹에서는 위원장 김두봉 밑에서 한빈과 함께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3. 광복 이후
북한으로 입국했으며 정부 수립 이후 부수상(재정상) 등의 요직을 맡았다. 북한 체제 수립 과정에서 최창익은 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곧 계급투쟁이라는 북한식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그는 연안파의 최고실력자[2] 로서 김일성을 실각시키고 본인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려는 계획을 짰고 이 과정에서 중국, 소련과 접촉하기도 했다. 즉, 8월 종파 사건의 최대 배후. 그러나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미코얀, 중국의 펑더화이가 북한으로 와 김일성에게 그의 복권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눈치보다 결국 최창익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1957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4. 평가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은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사건'으로도 불리며 현재까지 최창익의 이름은 종파분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출신에 1920년대 ML파 활동부터 1940년대 조선독립동맹 활동까지 공산주의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여러모로 김일성의 라이벌 격이었던 인물이지만 치밀한 준비 없이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을 끌어내리겠다는 안일한 인식과 외세에 의존했던 점 등은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