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건

 


1. 개요
2. 6.25 전쟁 이전 북한의 권력구도
2.1. 주요 정치 파벌
2.2. 소련의 김일성 선택 과정
2.3. 김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3. 6.25 전쟁 이후의 갈등
3.1. 전후 복구 방향에 대한 이견
3.2.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3.3.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
4. 전개
5. 결과
6. 숙청, 또 숙청
7. 후폭풍
8. 8월 종파사건이 성공했다면
9. 대중매체에서
10. 관련 문서


1. 개요


1956년 8월에 김일성이 자신의 중공업 우선 정책과 수령제에 반대해서 자신을 실각시키려 한 연안파와 소련파의 공격을 분쇄하고 이들을 모조리 숙청한 사건. '''조선로동당이 사회주의 정당에서 1인 독재 정권의 추종세력으로, 북한이 1당제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공화국에서 1인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숨 막히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바뀌게 된 단초'''라 평가되고 있다.

2. 6.25 전쟁 이전 북한의 권력구도


초기의 북한 정권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일당제 인민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였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하고 많이 달랐다. 조선로동당은 출신 배경과 성향이 다른 여러 좌익계 세력들이 소련의 강요로 합병해서 출발한 정파연합정당으로 사실상 이 때의 정부 구성은 연립정부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맞다. 이런 형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위성국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소련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동독 지역에서 독일 사회민주당독일공산당을 강제로 합병해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만들고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던 공산주의자 발터 울브리히트를 서기장으로 세웠다.

2.1. 주요 정치 파벌


  • 만주 빨치산파
김일성, 김책, 김광협, 최용건, 강건(북한) 등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 무장빨치산 활동을 했던 그룹이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후에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연합 항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긴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자체가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만주 지방에 군웅할거하던 수많은 항일 무장세력의 연합체 같은 것이어서, 일방적인 지휘계통은 아니었다. 이들은 국내에 조국광복회라는 통일전선체를 만들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신빙성과 규모를 의심받고 있다. 이들은 만주지역의 조선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보천보 전투, 간삼봉 전투를 주도했고, 1930년대 말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이 격화되자 1940년을 기점으로 차츰 소련령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김일성이 1940년에 가장 먼저 넘어갔고, 김책이 1943년도에 가장 늦게 월경하였다. 이후 소련군 장교 계급을 받고 극동군88저격여단에 편입돼서 군사 훈련을 받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자 1945년 10월 소련군 장교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왔다. 이후 소군정의 후원 아래 조선로동당조선인민군의 핵심을 차지했고 김일성은 내각 수상으로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단 한 번도 독자적으로 활동한 적이 없으며 항상 중국인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할 때도, 이후 연해주로 피신해서 소련군의 극동군88저격여단 소속일때도 언제나 조선인과 중국인이 섞여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극동군88저격여단 소속의 중국인들은 중국공산당으로 복귀해서 2차 국공내전에 뛰어들고,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따라서 북한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조중군사동맹은 이런 역사적 뿌리가 있는 혈맹 관계이다.
박금철, 이효순, 고혁, 김도만 등 1930~40년대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 활동했던 그룹이다. 이들 상당수가 함경남도 갑산[1] 출신이라 '갑산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만주파와 연계해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도 만주파와 함께 했기 때문에 크게는 만주파의 일부로 본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에 김일성이 지도했다는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다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현대사 연구자들은 조국광복회의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시 빨치산들이 선전용으로 부풀린 페이퍼조직이란게 정설인데 사실 이런 행태는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역사에서 흔하다. 빨치산이 만주파의 직계라면 이쪽은 방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갑산파 그룹은 계속되는 권력 투쟁에서 언제나 김일성을 지지했기 때문에 아래 서술되는 다른 세력들이 모두 숙청된 이후에도 한동안 권력 핵심부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이들이 사라지면서 북한 정권에는 김일성의 친인척과 빨치산 시절 직계 부하들만 남게 된다. 견제세력이 사라진 완벽한 김일성 1인독재가 완성된 것이다.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김두봉, 김무정, 허정숙, 최창익, 윤공흠, 박일우, 서휘, 방호산처럼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에 참여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그룹. 이들의 상당수는 1930년대 말부터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혹은 김무정처럼 아예 중국 공산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 때문에 국공내전기 중국 공산당의 수도였던 연안의 이름을 따서 연안파라고 부른다. 6.25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만주파와 대립하다가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숙청당했다.
  • 소련파
박창옥, 허가이, 남일, 방학세 등 소련 출신 그룹. 주로 중앙아시아와 연해주의 고려인 2, 3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현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소련 공산당원을 찾다보니 북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만주파와 손을 잡고 남로당파를 숙청하는 일에 관여했다. 1956년 2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를 계기로 하여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도전했으나,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2월 전원회의를 거치면서 숙청되었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여 김삼룡, 이주하, 리강국, 리승엽, 허헌, 이관술일제강점기 시절 국내 특히 서울 중심으로 항일운동 및 공산당 활동을 했던 그룹. 이들은 일제 패망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정예당원 10만, 방계조직 100만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면서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를 주도하였다. 이후 다른 좌익계 정당인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 약칭 남로당을 만들었다. 박헌영이 주도하던 이 그룹은 처음에는 우익 및 미군정과 협력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전면적인 찬탁 노선을 채택하면서(동아일보의 고의적인 오보 탓도 있다) 대중적인 입지가 좁아지게 되고, 미군정의 통치가 굳건해지자 전면 총파업과 무장봉기 등 강경 노선을 채택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대구 10.1 사건이다. 미군정의 날조로 밝혀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결국 이러한 활동이 모두 실패하고 남조선로동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 리승엽 등 지도부와 정예당원 수천여 명이 집단 월북하였다. 미군정이 좌익계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치공작과 탄압을 가해서 남로당을 강경 투쟁으로 유도한 것인지, 남로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강경 노선으로 선회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8.15 해방 직후 초기에 박헌영이 주도한 좌익계들은 우익과 통일전선을 만든다는게 기본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경 우익인 이승만조차도 초창기에는 조선공산당과 연대하려고 했다. 어찌되었든 연안파무정이 숙청된 이후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숙청되어 북한에서 가장 먼저 실각한 파벌이다.
이렇게 여러 정파가 소련군정의 압력으로 한데 묶인 것이 바로 조선로동당이었다. 이들은 6.25 전쟁까지만 해도 서로를 견제하고 있긴 했으나 '''전시상황'''이었기에 어쩔수 없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직후부터 북한의 정파갈등은 골이 깊고 김일성에 대한 불신 불만의 분위기는 있었다. 일례로 김무정은 '중위나 대위 달고 들어온 놈들이 무슨 장군이냐!'는 말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전쟁 전에는 김일성의 견제로 인해 스스로의 영향력만큼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고 심지어는 625 전쟁 중에 낙동강 공략 실패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정전 협정 직후 총성이 멈추자 각 "파"들의 북한에서 권력을 가지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각 파벌 별로 노선적, 사상적 차이도 엄청났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연안파는 모택동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소련파는 당초 소련식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다가 흐루시초프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현실사회주의적 집단지도체제를 지지한다. 전후 경제 재건 때도 만주파는 급속한 협동농장화를 주장하고 중공업을 중시했지만, 소련파와 연안파는 자영농 허용, 경공업/소비재 위주의 경제 건설을 주장했다. 소련파의 이러한 주장은 소련이 적백내전 직후 자영농과 소기업 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인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후 재건을 이룬 경험과 연관이 있다.[2] 이러한 이유로 인해 김일성을 비롯한 각 세력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김일성 권력을 끌어내려 한 것이 바로 8월 종파사건이었다.

2.2. 소련의 김일성 선택 과정


1945 광복 직후 북한에서의 김일성 권력은 그렇게 절대적이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위의 정파설명처럼 북한 정권 성립된 이후부터 그의 만주 빨치산 그룹( 넓게는 그들과 연합한 갑산파)은 허가이의 소련파, 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파 등 여러 정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소련파가 아니었는데 소련에서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내세웠다. 그 이유는 소련파에 인지도가 높은 최고지도자감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파의 상당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초기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의 2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말이 통하는 소련공산당원을 급하게 찾다보니 데려온 것이다. 소련파 인사들은 국내 기반이 전혀 없었으며 대개 고려인 2세들이다 보니 조선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서투른[3] 인물들도 많았는데, 소련파의 대표격인 허가이도 그러했다. 고려인 2세가 아니라 1930년대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가 너무 떨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최고지도자를 대중들이 전혀 모르는 생뚱맞은 인물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련파는 소련공산당 내부에서도 그렇게 명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고려인이 소련 볼셰비키 주역이 될 리는 없고 대체로 소련파 인물음 실무자급인 하급 관료나 위관급 장교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을북한 간판 지도자로 내세울 수가 없었다. 대중적 인지도도 떨어지고 지위나 경력, 능력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이들을 내세운다는 것은 조선인들의 반발을 살 것을 소련군정측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소련파는 북한 내에 물적, 인적 기반이 전혀 없고 오로지 소련의 지원이 있을 때만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 말 그대로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소련의 후원으로만 연명하는 괴뢰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4]
따라서 소련군정에선 이들 대신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김일성박헌영을 최고지도자의 후보로 두고 계속 민심을 살피다가, 만주 지역의 항일빨치산 활동과 보천보 전투 등으로 많은 명성을 쌓고 있던 김일성과 만주빨치산파를 권력 핵심으로 세운 것이다. 대신 소련파를 선전과 언론부서에 집중 배치해서 만주파를 견제하게 하였다. 1946년 박헌영 김일성이 모스크바 비밀회의에 불려간 것은 일종의 면접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만주파 계열도 1940년대에 연해주로 넘어가 소련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는데 대부분 소련군 88저격여단에 편입돼서 장교 계급을 받고 한반도 침투를 위해 군사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김정일이 이 시기에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김일성이 1940년에 연해주로 월경하고 김책이 1943년에 가장 늦게 넘어갔다.
원래 소련은 동유럽에서 위성정권을 세울 때도 결코 소련계 동유럽인을 머리로 내세운 적은 없고 대체로 소련과 연줄이 있는 현지의 공산주의자를 내세웠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이 북한 지역에서 이름이 잘 알려져 있고 소련과도 연줄이 있는 김일성을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박헌영도 1930년대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과 동방노력자대학에 유학하면서 공산주의를 학습했기 때문에 소련과 관련이 깊지만 김일성처럼 소련의 충견이 아닌 점(엘리트 스타일), 북한내부의 대중기반이 없는 점에서 탈락한다.

2.3. 김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그러나 전쟁은 북한 지도부의 기대와는 완전 다르게 진행되었다. 개전 초기에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면서 승전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지만, 예상과 달리 미군이 참전한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빠른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면서[5]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북한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중공군의 참전과 소련의 지원으로 간신히 패전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궁지에 몰린 김일성 정권은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쟁 실패의 잘못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전 북한 내무상, 내가 치른 북한의 숙청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중국인민지원군 수십만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연계된 연안파를 정면공격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소련군정이 직접 심어두고 간 소련파 간부들에 대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남로당계는 인원은 상당하고 간부들의 명성은 높았지만, 국내 기반은 부실하고 외부 후원자는 전무했기에 가진 것은 많은데 지킬 힘은 없는 처지였다. 박헌영과 남로당계 수천여명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쪽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미군정과의 관계가 파탄나고 총파업과 무장봉기가 실패하자, '''할 수 없이''' 자신들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맨몸으로''' 월북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다들 경력은 화려하지만, 정작 북한에는 기반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명성만큼의 지위를 얻지도 못하였다. 당연히 이들은 오매불망 남한으로 돌아가기만을 원하였다.
그러던 참에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할 계획을 들고 나오자 이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고, 박헌영은 "조선인민군이 진격을 개시하면 남조선에 남아 있는 과거 당원들과 좌익계 대중들이 들불처럼 봉기해서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들은 일단 통일만 된다면 자신들의 본거지인 남한의 지역적 기반을 활용해서 전후에 자신들이 정권을 주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남로당계는 남쪽과의 접촉이 완전히 봉쇄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온 좌익계 대중조직, 구 남로당 조직이 아직도 지하에 유지되고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면 자신들의 발언권이 크게 강화될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하지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남쪽에선 인민군을 돕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이미 대구 10.1 사건, 여순사건, 제주 4.3 사건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좌익계 대중조직, 구 남로당 조직은 모조리 괴멸되었고, 대부분의 간부들은 월북 또는 전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승만 정권이 좌익계 활동 경력이 있으면 이미 전향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가서 대량학살해버렸기에 남쪽에는 그야말로 사회주의 및 좌파 진영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사건인데 좌익계 간부 출신은 물론 단지 좌익쪽 집회에 몇번 나갔을 뿐인 단순참여자에 아무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까지 마녀사냥식으로 학살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장봉기는 커녕 파업 비슷한 것도 없었다. 김일성은 전세가 뒤집힌 다음에 "남조선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물자 수송을 3일만 막아줬어도 전쟁 이겼다"면서 박헌영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렸을 때 국군은 궤멸 상태였고, 미군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만약 부산, 대구 등지에서 민중봉기 혹은 노동자 파업으로 군수품 수송이 지체가 됐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박헌영의 호언장담이 김일성 정권이 남침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었다. 박헌영과 남로당계도 전쟁 실패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남한 침공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도 쉬웠다. 실제로 김일성은 그야말로 빡돌아서 박헌영에게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라고 외치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까지 집어던졌다고 한다.
더욱이 남로당계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경우 해당 시기 김일성을 아득히 능가하는 개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개인 숭배라고 하면 김일성을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박헌영에 대한 개인 숭배가 훨씬 심했다. 일제강점기부터 공산주의 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인데다가,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강고하게 투쟁했기에 국내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받고 있었다.[6] 해방 직후 서울 시내에 "박헌영 동무는 우리의 부름에 답하라"는 전단이 나붙고, 월북 후에도 사무실에 박헌영 사진이 걸리는가 하면 박헌영 지지자들이 '''박헌영 선집'''을 발간해 바칠 정도였다. 특히 분단 이후 월북한 남쪽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이 조직적인 세력화를 통해 김일성에게 맞서기 시작한다면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가능성도 컸다.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무정을 실각시켰다. 하지만 무정은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 죄수부대장을 지내다가 8로군 시절부터 무정의 전우들이 많았던 중국측의 요구로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전쟁중에도 김일성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고,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미제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변하면서 권력을 계속 강화해 나갔는데, 북한이 정전 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기념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여기에 스탈린 우상화를 따라한 김일성의 개인 숭배 현상과 맞물려서 김일성파의 권력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연안파와 소련파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은 김일성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각각 중국소련의 후원 아래 김일성을 견제하였고 김일성 또한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당과 내각, 그리고 군을 점점 장악하여 갔다.
소련파의 눈에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쟁이 무장단체 두령이었고, 연안파의 눈에는 자신들이 중원에서 수백만 국민당군과 교전할 때 만주 산구석에서 수백명을 데리고 장군놀이를 하던 산적두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카리스마나 권모술수, 조직장악력은 절대로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내부에서조차 배신자가 나와서 김일성파에 가담하여 김일성의 정권 장악에 일조했다. 예를 들어 총참모장 남일이나 내무상 방학세 같은 경우는 소련파였으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옛 동지인 소련파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3. 6.25 전쟁 이후의 갈등



3.1. 전후 복구 방향에 대한 이견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중요 도시인 평양, 원산을 비롯해 각종 인프라 시설들이 폭격으로 인하여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종전 직후부터 사회주의 국가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전후 복구, 특히 산업 발전의 방향을 두고 김일성과 반대파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는 소련과 같은 중공업 산업 위주의 전후 복구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비해 소련파와 연안파는 당장 인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경공업 산업 위주의 전후 복구를 추진해야 함을 역설한다. 경제 정책에서의 이러한 대립은 권력 투쟁의 한 부분으로서 두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여담이지만, 사실 '민생 개선을 위한 경공업 우선 노선'과 '국력 신장을 위한 중공업 우선 노선'의 충돌은 20세기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의 이행 수순을 겪은 나라 대부분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가능한 한 빨리 산업(공업)기반을 확충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자본을 어느 영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인 것. 이 갈등을 겪지 않았다면 1)현대와 같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기 이전, 19세기 무렵에 이미 산업화가 진행되어 축적된 자본을 통해 비교적 여유있게 산업구조 발달을 감당했거나[7] 2)아직 산업기반이 확충되지 않은 상태인 저개발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8] 당장 가까이는 산업화 시기의 한국 역시 비슷한 사례를 겪었고 멀리는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 역시 일국사회주의론과 연속혁명론의 충돌에서 이 문제가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사례에서 이 갈등이 보인 특수한 양상은 이것이 단순히 국내 경제 노선 갈등이 아니라 정치외교적 대외 노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동구권(공산주의 진영) 구성 국가의 상당수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이 때문에 동구권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서구권(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를 근거로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 등의 제한 주권론이 등장하기도 했다.[9]
그리고 이 당시의 소련은 자국의 강한 영향력과 그에 기반한 진영 내부의 높은 통일성 및 유기적 연합성을 근거로 일종의 '공산주의 국제 분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각 국가가 각각 독자적으로 산업을 육성할 경우 진영 전체로 보면 심한 중복투자가 일어나게 되니 각 국가마다 유리한 분야를 찾아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자는 것. 즉 한 국가 내에서 이뤄지는 지역별 특화 산업 육성을 국가를 넘어 진영 전체 단위로 하자는 말이었다. 당시 서구진영에 비해 경제력 및 생산력이 열세이던 동구권의 입장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서구권에 맞설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이었기는 하나, 실현이 어려운 무리수에 가까웠던 점 역시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장 한 나라 안에서도 특정 지방에 고부가가치 산업이 집중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자기 지역이 소외되었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데, 지방자치단체도 아니고 (위성국이라곤 하지만) 주권을 가진 국가 사이에서야... 필연적으로 기술집약적 중공업을 가져간 나라가 광업이나 농업 등 저부가가치 산업을 가져간 나라에 갑질하려 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상에서 북한이 이미 상당한 산업기반을 갖춘 동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중공업이나 기술집약산업을 배정받기는 어려웠다(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북한에 배정될만한 산업은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한 광업 및 (평야는 부족하지만)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 경공업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으로는 극동에서 일본/남한을 거점으로 하는 미국을 상대하기 위한 군사적 거점 역할을 기대할 수 있고, 이를 위해 제한된 중공업 육성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북한 바로 옆(...)인 만주에 일제가 건설한 공업 기반들이 있는 상황에서 중공업에 대한 투자가 크게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결국 '경공업 중심 복구'를 주장한 소련파나 연안파는 친소/친중 성향이 강했고 따라서 '소련/중국을 맹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의 일부'로서 중공업 영역은 소련이나 중국에 기댈 수 있다는 입장이었던 데 비해 이들만큼 중국/소련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입장이었던 만주파는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식으로 독자적 산업기반 육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3.2.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시에는 스탈린의 개인 숭배가 추진되었고 스탈린은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스탈린의 신격화는 중지된다. 이후 소련 지도부는 집단 지도 체제를 형성하면서 자본주의 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게 되었고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극단적인 권력 투쟁의 형태는 많이 약화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의 리더로서 자의 반 타의 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변화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가던 김일성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위기였다. 반대로 김일성의 숙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대파에게는 김일성을 비판하고 실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3.3.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막대한 물자와 군사력을 북한에 지원하였기 때문에 연안파를 통하여 북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1958년도까지는 전쟁 방지라는 명분 아래 중공군도 북한 내에 진주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은 한국전쟁 당시 방관의 자세로 북한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초강대국이자 공산주의 진영의 지도국가였다. 또한 소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립 이후부터 8월 종파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북한을 위성국으로서 간접 지배하고 있었다. 즉, 북한은 소련은 물론 중국의 내정간섭을 일정 부분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단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의 분열을 이용하여 양쪽을 오가면서 삥을 뜯었고 덕분에 북한은 엄청난 외교적 이득을 보았다. 이들은 이런 김일성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70년대까지 소련으로 하여금 "우리 말 더럽게 안 듣는 동쪽의 작은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고 1980년대에는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두고 조롱거리로 삼기까지 이른다. 박노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많은 가정에서 북한 선전책자를 구독해서 '''유머 잡지'''처럼 활용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소련은 북한을 동맹국으로 인식한 적이 없으며 소련 지도층은 북한을 매우 싫어했다고 증언했다. TV조선의 모란봉 클럽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한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당시 소련에서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이상하고 웃긴 나라, 미친 독재국가'''였다고 발언했다. 그래서 김일성 대신 각각 자신들과 친밀한 인사들이 정권을 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의 반대파인 박헌영최창익, 김두봉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조선의 레닌'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명망 있는 공산주의자였다. 소련과 중국은 여러 차례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중국 또는 소련으로 보낼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하였는데 김일성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박헌영을 제거해버렸다. 김무정은 숙청된 후 중국의 요청으로 인하여 중국으로 보내졌다. 특히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중국과 상의도 없이 연안파를 대거 숙청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4. 전개


위에서 서술한 소련공산당에서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이후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1956년 4월에 예정되어있던 조선로동당 3차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과 당 운영의 민주화가 논의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인숭배 움직임과 관련하여 오히려 엉뚱하게 개인숭배를 박헌영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며 자아비판을 거부했다. 게다가 중공업 위주의 정책노선은 수정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조선로동당 3차대회를 소련공산당은 비판하면서 이를 정식 대회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실망하고 점차 반김일성 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이 두 달간의 동유럽 순방을 위하여 북한을 비운 사이 소련파와 연안파는 '''김일성 실각'''을 위하여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전면에는 최창익, 윤공흠, 서휘 등의 연안파가 나서지만, 그 배후에는 소련의 지지가 있었다. 이는 불가리아 공산당이 흐루쇼프의 지원을 얻어 지도자 벌코 체르벤코프를 실각시켜버린 전례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소련은 전면적으로 김일성 정권을 전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당시 소련 대사가 최창익 등 연안파의 주요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은연중에 반김일성 운동을 부추겼다. 다만 소련이 전면에 나섰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하여 연안파를 전면에 내세워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 반대파의 움직임은 최용건을 필두로 한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포착된다. 최용건은 반대파의 움직임을 즉시 김일성에게 알렸고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에 박정애남일을 파견하여 소련에게 더 이상 반대파 인사들과 접촉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등 자신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다.
여기서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파의 조직력이었다. 다른 계파들, 즉 소련파는 아예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연안파는 고만고만한 지도자들이 많은 데다가 남로당파는 박헌영 및 남로당 쪽 지도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서 거의 와해 직전이었다. 반면 김일성파는 만주 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을 정점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에 이런 권력 투쟁시에 다른 계파에 비해 전투력이 강했다.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발언한 김일성의 지지파들은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을 비판했는데, 이는 김일성 지지파가 반대파의 중심인물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반대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윤공흠이 김일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김일성 지지자들이 다수였던 전원회의 참석자들을 자극하였고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내려오게 된다.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는 윤공흠이 김일성의 간부들, 특히 당시 당 간부들의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비정치적 과오'였다고 생전의 회고에서 밝히고 있다.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신의주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은 김일성 반대파들의 권력투쟁에서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오후에 계속된 회의에서 김일성 지지파들은 반대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반대파의 대표였던 최창익은 "당의 노선에는 문제가 없으나 개인 숭배의 움직임에는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후였다. 소련파인 박창옥은 "자신은 어떤 그룹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하였지만 주석단과 회의장에서의 항의가 들끓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서휘와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즉, '''반대파의 정치적 숙청'''으로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은 이렇게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5. 결과


8월 전원회의의 조치는 즉시 중국과 소련에 알려졌다. 중국에 망명한 서휘와 윤공흠, 그리고 당시 주소 북한대사인 이상조 등은 중국과 소련에게 북한에 개입하여 이러한 결과들을 수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중국과 소련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아나스타스 미코얀[10]펑더화이를 단장으로 하는 어마어마한 연합 대표단을 파견,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의 조치를 철회하고 관련자들을 다시 복권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코얀은 소련의 총정치국 부서기장으로 러시아 혁명을 눈으로 본 사람이기도 했으며, 헝가리 등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잠재우고 마오쩌둥 단일 주석 체제를 집단 지도 체제로 바꿀 겸 중국에 왔다가 겸사겸사 방문한 것이었다. 중국 측의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의 조중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마오의 오른팔이었으나 '''김일성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이런 거물들이 파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소련과 중국이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자명하다.
사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과 소련이 회담을 하는데, 독재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중국을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이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관련, 독재 체제는 무너져야 하며, 집단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중소회담 내내 언급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도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말들이었기에 맨 처음 어느 정도는 말을 맞받아쳤다. 하지만 소련의 회담 상대 미코얀은 위에도 상술하였다시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고, '''결과적으로 전혀 게임이 안되었다.''' 덕택에 소련에 의해서 독재 체제에서 집단 체제로 바뀐 전례가 있던 중국은 이날 또 털렸다. 그렇다고 중국 입장에서는 소련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만했다. 그런데, 그 회담 바로 뒤에 연달아서 중국과 북한이 면담을 했다. 잔뜩 화난 중국은 다음날 비행기로 북한으로 미코얀과 같이 방문하겠다고 선언했고, 상기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일성은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참석한 9월 전원회의에서 자신에게 과오가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최창익과 박창옥의 죄를 입증하고 자신이 취한 조치가 정당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술핵으로 무장한 주한미군과 한국전쟁으로 대폭 증강된 한국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동맹국들의 요구를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방문단의 포스가 너무 강력했다.''' 결국 김일성은 굴복, 최창익의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고 자중하는 모양새를 펼친다.
하지만, 실질적인 복권 절차는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끌었다. 윤공흠과 서휘 등 중국으로 망명한 김일성 반대파들 또한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김일성은 도리어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반대파들을 회유하는 한편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수반의 자리에서 내쫓아 실각시킨다.
이후 1958년, 소련과 중국이 공산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충돌하면서 김일성의 단일 체제 수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협상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원시적 형태의 주체사상이 처음 등장한다. 중국과 소련 외세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점으로 주체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대국에 흔들리지 않는 외교 자체는 옳은 것이다. 하지만 이걸 사회의 모든 분야에 확대시키면서 정교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사상을 짜맞추기 시작해서 결국 1970년대에 가면 김일성 개인 숭배와 세습을 정당화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완전히 대체한다.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들어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서적은 금서로 지정했고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지금은 아예 공산주의도 부정하고 있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과 접촉해 지지를 약속하는 대신 북한에 주둔 중이던 중공군을 철수시키고 펑더화이의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는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김일성 반대파를 지킬 방패막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코얀과 펑더화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부지했던 최창익과 박창옥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숙청당했고 기타 김일성 반대파들 역시 비슷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러한 숙청은 1960년까지 이어졌고 김일성의 숙청을 피하여 소련이나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만 수만여 명에 달했다.
즉,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을 막기 위하여 내정간섭까지 불사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견뎌내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오히려 김일성은 더 많은 반대파들을 숙청, 제거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주체사상을 결합시켜 자신을 완벽하게 신격화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세습을 정당화하며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아닌 봉건주의 사상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스탈린주의조차도 세습에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 봉건주의라며 비판을 한다. 권력을 세습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도 실현하지 못한 전근대 봉건왕조 사회에서나 하는 것인데, 북한은 그걸 하고 있으니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낙후되고 후진적인 사회인 것이다.
지금까지도 북한과 중국은 겉으로는 우애를 과시하지만 속으로는 불신과 대립이 여전하다. 당시 철군문제와 연안파 숙청으로 관계가 더 냉랭해졌고, 김일성은 "수십만의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자 소련은 "중국지원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는 것이 조선 인민과 모든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서 주둔을 지지하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1954년 중국군 7개 사단이 철수했고, 55년 3월에 6개 사단이 추가로 떠났으며 1956년 4월 북-중 관계가 심각해졌을 때도 44만의 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당시 기사

6. 숙청, 또 숙청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자가 아니라면 같은 파벌인 갑산파라고 해도 숱하게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충복이었던 자들도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먼 친척까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시골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최창익의 재종손녀인데 최창익의 재종질인 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고 자신은 다행히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아 어머니와 함께 회령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창익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는 황장엽의 탈북 이후의 숙청으로 인한 피해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고 하니, 그 혹독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는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종파주의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박헌영 역시 이때 목숨이 달아났다. 최종 재판은 이루어졌지만 그가 미군정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우길 단서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이에 김일성은 당시 내무상 방학세에게 "방 동무, 리론가 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됐느냐.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라고 묻다가 나중에는 아예 "증거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오늘 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말하여 당일 비공식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사망 시기는 빠르면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7월, 늦어도 1956년 12월에서 1957년 초로 추정되고 있다.

7. 후폭풍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만 해도 북한에는 제한적이지만 나름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 있었다. 이전에는 이러한 시처럼 조직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고, 소련 등에서 들여온 해외 문화의 유입으로 문화적으로도 비교적 풍요로웠으며, 자유로운 이동과 거주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1인 독재가 공고화되면서 그러한 자유는 모조리 사그라들게 된다.

8. 8월 종파사건이 성공했다면


만일 8월 종파 사건에서 김일성이 실각했다면? 아니면 최고 지도자의 자리는 유지하더라도 권력이 제한되고 여러 정치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정도의 상막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방식이 되었다면 북한은 현실의 김일성이 신격화되는 김씨 세습 왕조 체제가 아니고 구 소련, 구 동유럽, 중국, 쿠바, 베트남, 라오스 등의 다른 공산 국가들처럼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당, 정, 군의 최고위 간부들이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지도체제의 형태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경우 구소련이나 몽골, 동유럽 국가들처럼 자본주의로의 복귀 열풍이 불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권 자체가 무너졌을지, 아니면 중국이나 베트남, 라오스, 쿠바처럼 내부 통제에 성공해서 사회주의 체제 자체는 유지하되 내부 개혁으로 관료 체제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정도에 그쳤을지에 대해선 어느 쪽으로 흘러갔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집단지도체제로 흘러갔을 경우, 자본주의로 완전히 복귀하거나, 쿠바처럼 관료적 계획경제 체제의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기보다는, 1980년대 중국베트남이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국가계획경제 체제는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이지만 상당 부분 도입할 때 북한도 함께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랬다면 북한은 중국처럼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개발에 올인하는 개발독재의 길을 걸었을 것이고, 현재의 중국-대만 관계나 1980년대 동독-서독 관계처럼 남북한도 완전한 통일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대규모 군사대치와 위협을 그만두고 무역과 문화교류가 자유로운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국 최고지도부는 1980년대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여러 차례 김일성에게도 함께 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북한 경제 관료 일부가 중국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개혁개방 정책을 공부하고, 1984년 '합영법'을 발표하면서 조총련계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했지만, 결국은 그냥 시늉에 그쳐버렸다. 그래서 중국 지도부는 북한의 이런 자세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
베트남도 1986년부터 '도이모이' 정책을 표방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11] 및 자본주의적 요소의 부분적 도입에 나섰으며 옆나라인 라오스도 이를 본받아 개혁 개방에 나섰다. 따지고 보면 십수년간 전쟁을 했던 베트남도 미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군사협력,[12] 경제교류를 하고 있는데 북한만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북한이 지금과 같은 막장 상태가 되진 않았을 것이고,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 상황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똑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일당제 인민민주주의 체제라도 북한의 개막장 세습 왕조 체제와, 당 관료와 군부가 적당히 권력을 균점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당 안팎에서도 국가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획책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의 다양성은 보장하는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김일성도 이 사건의 배경이 스탈린 사망 이후의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과 다른 파들의 존재 그 자체에 있음을 깨닫고 완전한 독재체제를 위해 진행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아무튼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이 실각하지 않고, 지금의 김정은까지 이어지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틀어쥐게 된 것은 북한 국가 자체나 북한 인민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소련파의 주장대로 당내 비판으로 실각시킬 수 있을 것이란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 연안파 중 강경파들의 의견대로 김일성을 암살했더라면 일은 오히려 쉬워졌을 것이다.

9. 대중매체에서


현재까지 대중매체에서 다뤄진건 1981년에 방영된 MBC제1공화국이 유일하다. 1982년 1월 7일 방영된 34회 '김일성과 숙청극' 편으로 국정환이 김일성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는 실제 사건과는 달리 작은 회의실에서 10여명의 간부들끼리 논쟁을 벌이는 식으로 묘사된다.

10. 관련 문서



[1] 북한 행정구역상 량강도 갑산군. 이북5도 기준으로는 함경남도 관할이다.[2] 물론 이러한 신경제정책은 그대로 계속 밀고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충분한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서유럽으로의 혁명 수출을 전제한 것이었다. 레닌은 생산력이 충분한 서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생산력이 부족한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향한 본격적 이행에 돌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고,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생산력을 끌어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유럽으로 혁명을 수출하기 위한 시도를 벌인 것이다.[3] 해외교포들을 보면 세대가 지날수록 언어 구사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3세, 4세쯤 되면 전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4] 훗날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다가 1989년 소련군이 철군하자마자 무자헤딘 반군의 공격으로 바로 몰락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탈레반의 헬게이트가...[5] 미 24사단의 스미스 부대가 겪은 오산 전투 이후 인천상륙작전까지 미군은 주일 미군과 미국 본토로부터 가용한 부대를 최대한 빠르게 한국 전선에 투입시키려고 난리를 쳤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에서 정말 레이스였다.[6] 민족주의 계열에서도 박헌영의 이런 면모에 대해선 상당히 높게 평가하였다.[7] 이 부류에 속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에 이미 열강의 지위를 얻어 현재까지 선진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다.[8] 국제적 투자의 규모가 거대해지고 산업구조가 더욱 발달한 20세기 후반~21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산업화 발전 모델의 등장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기는 하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하기 어렵다.[9]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제적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이 이런 노선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10] 미코얀 구레비치 설계국의 창립자인 아르티옴 미코얀의 형이다.[11] 사실 베트남의 대미 관계 개선은 파리 협정 이후로 줄곧 계속되었다. 미국과의 전쟁을 경험한 베트남은 전후 베트남의 재건과 발전에 있어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미국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소련보단 미국과 친한게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 패망, 미군 유해 문제로 인해서 관계 정상화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이 때문에 베트남은 일시적으로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는 노선을 채택했다.[12] 한때 베트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남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캄란 만 해군기지를 미 해군 태평양 함대에 임대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도 임대는 아니지만, 미 해군 함정들이 종종 캄란 만 군항에 입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