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연대'''
1900년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
2. 사건
2.1. 아시아
2.1.1. 한국
2.1.2. 동양
2.2. 미국
2.3. 유럽
2.4. 중동
3. 문화
3.1. 음악
3.2. 패션
4. 1920년대생
5. 이 시기의 상징
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7. 192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개요


서기 1920년부터 1929년까지를 가리키는 말.

2. 사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했다. 미국 vs 소련의 국제적인 구도가 시작됐으나, 익히 알려진 냉전과는 다르다.[1] 진정한 의미의 냉전은 1945년 2차 대전 이후부터 시작된다.
한국을 비롯하여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은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독립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을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고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결국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은 2차대전 후에나 이루어졌다.[2]

2.1. 아시아



2.1.1. 한국


3.1 운동의 여파로 일본에서 문화 통치를 실시했으나, 이는 친일파를 기르고 우리 민족을 분열시켜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동안 조선만의 근대 문화가 꽃을 피웠고 수많은 독립 계몽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0~1910년대의 의병들이 독립운동가로 거듭나고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1.2. 동양


중화민국국부군군벌간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중국 공산당이 1921년 창당되었고 이 시기에 처음으로 국공 합작이 있었다.
일본 제국은 이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며 낭만적인 시기로 기억한다. 사실 이때도 1차대전 승전국이라는 타이틀에 묻어가면서 호황기를 맞이했다가 역시 대공황으로 무너져 버렸고, 이는 군부 세력이 더욱 폭주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2.2. 미국


미국에서 이 시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리며 워런 G. 하딩캘빈 쿨리지의 시장방임주의 정책에 힘입어[3] 미국식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소비문화가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다. 한마디로 활황기였던 것.[4] 이러한 호황으로 당시 미국은 자동차와 라디오가 대중화될 정도로[5]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누렸고 그에 따라 전국에 수백개의 민영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났다. 덕분에 재즈를 위시로 한 대중음악도 유행했으며, 할리우드 영화 산업도 세계 영화 산업의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당대부터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6], 생산의 자동화로 인한 실업 문제, 유효수요가 따라가지 못하는 과잉생산[7] 등 문제점이 쌓여가고 있었고 이를 정부가 방치하면서 결국 20년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산시장이 붕괴, 1929년 대참사가 터지고 만다. 쉽게 말해 거품경제였다는 것이다. 대공황이 터지자 몇년 안가 미국 GDP는 약 60%, 시가총액은 약 90%가 증발하고 만다.
정치적으로는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혁신주의가 시들해지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시장의 자유는 강화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금주법이 시행되고[8] 인종차별, 반이민을 내세운 KKK도 절정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좌익에 대한 공포는 사코와 반제티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2.3. 유럽


러시아적백내전 끝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독재 국가인 '''소련'''이 수립되었고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1차대전의 패전과 프랑스영국과도한 전쟁 배상 요구로 인해 피폐해졌고 지옥같은 인플레까지 겪어야만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인플레를 해결하고 다시 부흥하나 싶었는데 대공황으로 경제가 도로 파탄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2.4. 중동


오스만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터키가 수립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3. 문화



3.1. 음악


미국 흑인들의 전통민요라 할 수 있는 블루스 음계를 기반으로 연주한 초창기 재즈 뮤직이 댄스 클럽, 바에서 유명세를 받아 미국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엔 뉴올리언즈 지역의 뮤지션들이 있었다. 이로서 이전 시대를 대표했던 래그타임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초창기 재즈 뮤지션들은 큰 인기에 힘입어 연주곡, 보컬 등을 녹음한 음반을 만들어 음반시장을 키워갔고 수많은 재즈 명곡들도 이시기 쏟아졌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뮤지션 중 하나가 루이 암스트롱.

3.2. 패션


여러모로 여성 의류에 있어서 일대 혁명이 일어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가브리엘 샤넬이 한참 활동하던 시기였고, 리틀 블랙 드레스도 이때 나왔다. 단발머리와 무릎까지 오는 드레스가 유행하게 되고, 플래퍼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의 여성 의류가 중근세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매우 길고 치렁치렁한 롱 드레스에 장발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였으나 이 시대를 기점으로 현대적인 캐쥬얼 의상과 패션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모자도 정장의 일부로 여겨져서 남성들은 양복 차림에 중절모나 밀짚으로 만든 각진 원통형의 스키머 햇(skimmer hat)을 주로 썼고, 여성들도 일명 플래퍼 룩이라고 하는, 모피코트와 스커트 차림에 리본이나 꽃장식을 한 클로슈 모자(cloche hat)를 썼다.

4. 1920년대생


1920년대생들은 현재 생존했다면 90대[9]로, 2021년이 된 현 시점에서 대부분 자연사하였다.[10] 만약 생존해 있는 1920년대생이 있다면, 굉장히 장수하는 셈이다.
1920년대생은 1927~1936년 사이에 보통학교를 입학했으나, 여자는 입학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입학했더라도 세는나이로 9~13살에 입학한 경우도 있어 1920년대생이 1930년대 후반에 입학하기도 했다. 중등교육기관은 보통 1933~1942년 사이에 입학했다. 이들 중 몸뻬 강요 이후에도 학교를 다녀서 몸뻬를 입고 등교한 경우도 있을 정도.
한국의 1920년대생들은 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이른바 문화통치 시행 이후부터 태어났던 세대들로 어린 시절부터 동아, 조선일보도 접했던 이들이었다. 1920년생은 2020년에 100살이 되었다.
10대에 창씨개명, 국민복/몸뻬 강요[11], 황국신민서사 암송 등을 경험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사용하게 하고 일본어만 배워 지금도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막힘없이 읽고 쓸 정도이다.
20대에 가서는 일제의 마지막 발악과 해방을 직접 경험하였고 일제 말기 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10대 후반 - 20대의 젊은이들이었던 1910년대 중후반생 ~ 1920년대생들을 대상으로 강제 징용을 하거나 정신대, 위안부로 끌고 가면서[12]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1954년 월드컵 때 출전한 선수들 중 3명만 빼고 모두 1920년대 출생이며, 박재승 1명만 빼고 모두 사망했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 등의 인사들이 암살된 소식도 듣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를 경험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식 국적을 성인이 되어서야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분단으로 20대부터 '''북한으로 직접 오갈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10대까지는 일제 치하라 북한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30대가 되는 1950년에 6.25 전쟁을 경험하면서 많은 수의 20년대 생들이 20대였던 30년대 생들과 함께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전사자들도 많았던 편. 여자의 경우 이 연대생들을 기준으로 미망인들이 늘어갔던 편이었다.
40대에는 4.19 혁명을 경험하였고 50대까지 박정희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6순 환갑이 지나서 전두환, 노태우 정부를 보게 되었고 서울올림픽을 보았으며 70대에 가서야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경험한다. 80대에 이를 무렵 2002년 한일월드컵을 경험했으며 이때를 전후해 다수는 사망하게 된다. 물론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이 연대에 바로 3김 정치인이라 불렸던 김영삼(1927년생), 김대중(1924년생), 김종필(1926년생)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 논객으로 불리우는 김동길(1928년생)도 이 연대에서 태어났으며, 6.25 전쟁때 활약한 백선엽(1920년생), 문선명(1920년생), 김창규(1920년생),도 이 연대에 태어났다. 재계에서는 신격호(1921년생)와 구자경(1925년생), 서성환(1924년생) 등이 있고, 연예계에서는 송해(1927년생), 구봉서(1926년생), 최무룡(1928년생) 신영균(1928년생) 등이 이 연대에 태어났다. 또 대부분의 원로 정치인과 법조인, 관료들 중에 1920년대생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악명높은 위안부를 경험하였던 위안부 할머니들 대부분이 이 연대생들이다.[13] 2020년대 현재는 이 할머니들도 거의 별세[14]를 한 편이라 그나마 생존한 분들도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960년대 6.3 항쟁에도 참가하였는데 이 때는 할머니들 연세가 40대라 고령으로 접어든 2010~20년대에 비해서 활동이 왕성하였다.
이 세대의 여성은 젊은 시절 몸뻬 강요를 겪기도 했다.[15] 당시에는 시대 분위기상 남자만 가르쳤기 때문에 90대 이상인데 한글을 아는 여성들은 간이학교서당, 혹은 노인복지시설에서 배우거나 교육을 받은 오빠의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전부였을 정도였다.
1946년에 보성전문학교로 불렸던 고려대학교가 명칭을 변경하면서 1920년대생부터 '''고대생'''이라는 명칭이 불려졌다.
일제강점기 중 문화 통치기, 민족 말살 통치기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의 피해자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일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거나 기미가요를 부를 줄 아는 경우도 있다.[16] 다만 이들 중 상당수는 학생 시절에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당시 교육과정상 소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고[17], 영어는 중학교에 가서야 배웠는데, 이들 세대는 중학교에 다니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직까지 숫자를 일본어로 세거나 구구단을 일본어로 외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학생 시절 대부분 보자기를 메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18]과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여성[19]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태어났다. 구제중학교, 구제고등여학교, 구제고등학교, 간이학교, 보습학교, 구제전문학교 졸업생들이 이 세대이다. 당시 성적은 ‘갑을병정’ 4단계로 나갔기 때문에[20] 이 연배의 사람들은 ‘조선어 과목은 항상 ‘갑’을 받았다’거나, ‘학교 다닐 때 몸이 병약해 체조 과목에서 ‘병‘을 한 번 받은 것을 빼면 모든 과목 점수가 ‘갑’ 아니면 ‘을’이었다.’, ‘학교 다닐 때 조선어 썼다가 걸려서 푸세식 변소 청소를 했다.’[21]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 연호로[22] 연도를 말하기도 한다.
1920년대생들은 사실상 마지막 보통학교 출신들이라 볼 수 있으며, 이 연대에 태어난 할머니들 중 한글을 읽거나 쓸 줄 몰라 어르신 한글교실 등을 통해 뒤늦게 한글을 배운 케이스도 있다. 이들 중에는 한글은 몰라도 일본어는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모두 읽고 쓸 줄 아는 경우가 있고[23], 구구단을 외우거나 숫자를 셀 때 일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1920년대생들 중 일부는 서당에 다닌 적이 있어 한자 실력이 좋은 경우도 있다. 이들 중 졸업 앨범이나 졸업장 등에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이 적힌 경우도 있고, 학교 동창 중에 일본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9살이나 10살, 심하면 11살 때 보통학교를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3~26년생들은 해방 후 최초의 대학생, 1927~29년생은 해방 후 최초의 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교복을 입고 다녔다. 일제시대 간이학교[24] 출신들도 1920~30년대생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1920~30년대생들이 모이면 ‘무슨무슨 과목에서 갑을 받았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당시 성적이 갑을병정 체계로 나갔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반생들은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백선엽, 김창규 3명이 장군과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가 세대의 인물들 중 상당히 장수한 인물이라 평가받지만 2020년 자연사했다.
1920년대 초반생들은 필립 마운트배튼, 김영주, 김형석, 필리프 드골 등 2021년 기준으로 아직 4명이 생존하는 사람이 있다. 톰 무어, 조지 P. 슐츠 2명이 2021년 자연사했다.

4.1. 해외


유럽의 1920년대생들은 시기적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이했던 세대라고 볼 수 있다. 기존까지 쭉 유지되어온 유럽의 황금기격인 벨 에포크가 끝나는 것을 태어나자마자 목격한 세대이며 특히 독일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대공황+정치적인 불안감을 목도하며 자랐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에는 1910년대생과 함께 병사로서 참전하여 많은 목숨을 잃은 세대이기도 하다. 전후에 파괴된 세상속에서 경제 성장을 이끄는 노동자 역할을 하다가 68혁명 때 많은 청년 세대들(1930년대 후반생~1940년대생)[25]에게 사회적 주류를 뺏기고 1970, 1980년대에 힘잃은 기성세대로 전락하여 퇴장하였다. 여러모로 일생이 혼란스럽고 빛을 보지 못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26]
할리우드에서 1950년대 이 시대에 태어난 여배우들이 붐을 일으킨다. 대표적으로 마릴린 먼로(1926~1962)가 있다.
미국의 1920년대생들은 태어나서 청소년기때나 아동기때 대공황의 영향을 받았다.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로 주로 1920년대생들이 사병 군인으로 약 1000만 이상이 참전해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5년뒤엔 상당수의 1920년대생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즉 2차 세계 대전 말에 병으로 참전했다면, 한국전쟁 때는 부사관으로 참전한 것이다. 10여년뒤 베트남전쟁 시기에는 1920년생들이 주로 장교로 전쟁에 참여했다. 유럽의 동세대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불운한 아동/청소년기를 보냈지만[27] 전쟁이 끝난 이후부턴 다시 미국의 리즈 시절을 보냈다. 참고로 그들 상당수가 전쟁영웅들로 전체주의/나치주의/파시즘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세계를 구해 가장 존경받을만한 세대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1924년 10월 1일에 태어난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다.
또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국왕이자 현재 전세계 최고령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도 현역으로 정정하게 살아있다.

5. 이 시기의 상징



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7. 192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양대 강국의 대립과 전면전의 위기 보다는 사회주의에 의해 국가 체제가 전복될 수 있다는 우려에 가깝다.[2] 그것도 일본 치하에 있었던 곳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곳은 인도(1947년 독립)를 제외하고 1950년대~1960년대까지 식민지 상태였다.[3] 다만 하딩은 미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명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뭘 했다고 보기도 애매하고 임기도 2년밖에 안돼서.(...)[4] 첫번째라고 보긴 어렵다. 당장 더 과거를 논할 것도 없이 남북전쟁 이후 19세기 중후반 전후 복구기가 있었으며 20세기 초반에 이미 미국은 제국주의화되어 서구열강으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 (물론 초강대국 반열은 2차 세계 대전 전후부터) 당장 1차 세계 대전만 해도 미국의 개입으로 끝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전후 복구기였기에 활황기를 맞았다고 볼 수도 있다.[5] 참고로 한국에서 라디오가 대중화 된 것은 1960년대이고 자동차가 대중화 된 것은 1980년대 후반~90년대의 일이었다.[6]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인 1920년대 중반부터 농촌은 가격하락과 가뭄으로 불경기를 겪고 있었다.[7] 192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 생산이나 주택건설이 정체되기 시작했다.[8] 1930년대 민주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폐지된다.[9] 1920년생과 생일이 지난 1921년생은 100세가 넘었다.[10] 자연사한다는 가정 하에 2000년대에 많이 타계했다. 물론 이전인 1970~1990년대나 이후인 2010~2020년대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11] 남자는 국민복, 여자는 몸뻬.[12] 때문에 이 세대에서 조혼이 많았고, 일부러 학교를 늦게 입학시키는 경우도 많아 1920년대생이 13살에 초등학교 1학년인 경우도 흔했다.[13] 그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에는 위안부를 보내지 않기 위해 조혼을 시켰고,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고등여학교를 보내 이 사태를 피하도록 했는데, 시집간 여자와 학생들은 위안부로 잡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14] 2021년 2월 12일 기준 240명 등록자 중에서 15명 생존.[15] 몸뻬 강요 당시 1920년생은 20대였고, 1935년생은 국민학생이었다. 남성의 경우는 국민복 강요를 겪었다.[16] 게다가 한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지만 일본어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셋 모두를 읽고 쓸 줄 아는 여성들과, 한글은 물론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까지 모두 읽고 쓸 줄 아는 여성들도 있을 정도이다. 당시에는 국어(일본어) 과목에서 가타카나를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히라가나를 배웠다. 이런 이유로 80대가 넘은 사람들이 일본어를 표기할 때 쇼와 초기처럼 가타카나로 적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17] 당시 우리말은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배웠다. 그 시기 소학교의 교과목은 수신 (현대의 도덕에 해당), 국어 (일본어), 조선어 (이 과목이 현대의 국어이다.), 산수 (현재의 수학에 해당), 지리, 국사 (지리와 국사는 현대의 사회에 해당하며, 일제 당시 국사는 일본사였다.), 이과 (현대의 과학에 해당), 직업 (현대의 실과에 해당), 창가 (현대의 음악에 해당), 도화 (현대의 미술에 해당), 체조 (현대의 체육에 해당), 가사 (여학급 전용)이었다. 당시에는 조선어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 세대 사람들 중 1부터 100까지를 일본어로 세거나, 월화수목금토일을 일본어로 말하거나, 일본어로 된 책을 막힘없이 읽는 경우도 있다. 다만, 조선어 수업의 시수는 1~2학년 때 5시간, 3~4학년 때는 3시간, 5~6학년 때는 2시간이었으나 국어(일본어)는 1학년 때 10시간, 2~4학년 때 12시간, 5~6학년 때 9시간으로 조선어 수업이 일본어의 절반도 안 됐고, 간이학교는 국어가 12시간, 조선어가 3시간으로 국어가 조선어의 4배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 말기에는 강압적인 일본어 교육의 영향으로 수의과목(선택과목)으로 격하됐다가 아예 빠져 버렸다.[18] 이런 영향으로 이 시기에 태어난 여성들이 소학교만 졸업하고, 혹은 아예 학교 문턱도 밟지 못한 상태에서 일찍 결혼했거나,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아예 고등여학교를 보내 이 사태를 피하도록 했다. 당시 위안부 징집 기준에서 결혼한 여성과 학생은 제외됐기 때문이다.[19] 출연 여성들 중 4명이 85세 이상, 최고령은 88세이다.[20] ‘갑’, ‘을’, ‘병’은 합격, ‘정’은 불합격이었다. 오늘날 대학 학점으로 치면 각각 'A', 'B', 'C', 그리고 'F'학점.[21] 당시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불렸는데, 학교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다가 걸리면 국어상용패를 받거나 딱지 10장을 나누어 주고 조선어를 사용할 때마다 딱지를 하나씩 뺏는 등으로 처벌을 했다. (이 딱지를 일본어로 '후타'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국어상용패를 소지하고 있었거나 딱지를 모두 뺏기면 벌금 납부나 화장실 청소 등의 벌을 받았다.[22] 주로 어린 시절을 가리킬 때 '소화 몇 년' 하는 일본 연호를 썼다고 한다. 벌교 부용교의 이칭(異稱)이 '소화다리'인 이유가 여기 있다.(소화 6년(1931년)에 건설.)[23] 그나마 한글을 안다는 1920년대생 어르신들은 '아래아'까지 해서 자음 14자, 모음 11자, 총 154자를 배웠다. 그 당시에는 한글을 배울 때 현재와 같이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하는 자음 순서로 배우지 않고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하는 모음 순서대로 배웠고 (1학년 4월에 입학하자마자 한글 낱글자와 통글자를 모두 배웠고, 조선어와 국어(일본어) 시간에 받아쓰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어 역시 히라가나보다 가타카나를 먼저 배웠다.[24] 보통학교에 부설된 2년제 초등교육기관. 입학은 대체로 10세에 했다.[25] 이 시기는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힌다. 1920년대생~30년대 초반생이 주도하던 클래식 시대를 끝내버리고 비틀즈, 롤링 스톤스같은 1940년대 젊은 세대들이 문화계를 주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이후부터 '고전'이라기보다는 '그냥 옛날'의 느낌이 난다.[26] 대표적으로 오드리 헵번의 경우 어린 시절 전쟁때문에 개고생했으며, 부모님이 파시즘 활동을 한 덕에 유명해지고 나서도 고생하고, 클래식 시대의 말엽인 196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나 1967년 즈음 비틀즈를 필두로 한 음악계와 뉴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계에서 일어난 문화계 대격변 이후로 정점에서 서서히 퇴장하여 나중에는 자선사업가로 일하게 된다.[27] 다만 청소년기는 이미 뉴딜 정책 등으로 상징되는 경제회복기긴 했다. 전쟁이 지속되던 혼란기였다는 점에선 불운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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