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수영

 


1. 개요
2. 상세
3. 충청 수사


1. 개요


조선 시대 수영 중에서 충청도에 존재하던 수영이다.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위치했다.

2. 상세


1509년에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길이 3,174척(1650m), 높이 11척, 우물 4, 못 1, 옹성 5, 성문 5이었다. 성내에 있던 건물은 동헌, 아사, 영보정 등 33동 312간에 달하였다. 임란부터 18세기 중반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북문과 원산창, 군향고, 관노비청, 교방, 십물고, 현고, 양무고, 대주원과 진휼고 등 성내의 많은 영사와 창고등이 건축되고 보수되어왔다. 이러한 내력이 충청수영 사례집에 개략 기록되고는 있으나 그 규모와 위치, 건물용도, 건축 과정을 주도한 장인, 공역에 투입된 공장수나 물목 등에 관한 의궤가 없고 다만 수영을 운영해온 재정적 상황을 밝힌 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안보다는 경기도 방어를 주요 임무로 맡았기 때문에 임진왜란기에는 활약하지 못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는 보령현(保寧縣) 서쪽 대회이포(帶回伊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중대선(中大船)이 6척, 중맹선(中孟船)이 18척, 쾌선(快船)이 4척, 군사 없는 중대선이 6척, 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이 6척, 선군(船軍)이 1천 7백 66명, 선직(船直)이 1백 14명이다. 】
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는 태안군(泰安郡) 서쪽 오근이포(杇斤伊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兵船)이 11척, 추왜별선(追倭別船)이 2척, 무군선(無軍船)이 2척, 선군(船軍)이 1천 4백이다. 】
우도 도만호(右道都萬戶)는 남포현(藍浦縣)이 구정(龜井)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兵船)이 16척, 별선(別船)이 2척, 무군선(無軍船)이 1척, 선군(船軍)이 1천 3백 2명이다. 】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는 장암포(長巖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이 16척, 선군이 7백 97명이다. 】
고만량 만호(高巒梁萬戶)는 보령현(保寧縣) 서쪽 송도포(松島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이 10척, 선군이 6백 61명이다. 】
파치도 만호(波治島萬戶)는 서산군(瑞山郡) 북쪽 대산포(大山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별선(別船)이 2척, 무군선 1척, 선군이 7백 90명이다. 】
당진 만호(唐津萬戶)는 당진현(唐津縣) 북쪽 박지포(朴只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선군이 7백 90명이다. 】
대진 만호(大津萬戶)는 홍주(洪州) 임내(任內) 신평현(新平縣) 북쪽 대진(大津)에 머무른다.【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선군이 7백 94명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 보령현 서쪽 20리에 있다.
마량진(馬梁鎭) 남포현 서쪽 33리에 있다.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서천포(舒川浦)를 관할한다.
○ 수군만호(水軍萬戶)관할 서천포영(舒川浦營)이 서천군 남쪽 26리에 있다.
소근포진(所斤浦鎭)/우근이포(杇斤伊浦) 태안군 서쪽 33리에 있다. ○ 수군첨절제사(僉節制使)가 당진포(唐津浦)와 파지도(波知島)를 관할한다.
○ 수군만호관할 당진포영(唐津浦營)이 당진현 서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관할 파지도영(波知島營)이 서산군 북쪽 35리에 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소속한 읍(邑)과 진(鎭) :
홍주(洪州). 한산(韓山). 서천(舒川). 면천(沔川). 서산(瑞山). 임천(林川). 태안(泰安). 결성(結城). 보령(保寧). 남포(藍浦). 비인(庇仁). 해미(海美). 당진(唐津).
평신(平薪). 안흥(安興). 소근(所斤). 마량(馬梁). 서천포(舒川浦)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 소근포진(所斤浦鎭)후근이포(朽斤伊浦)라고도 하는데, 태안군의 서쪽 33리에 있다. 수군첨절제사.
○ 안흥진(安興鎭) 태안군(泰安郡)의 서쪽 34리에 있다. 소근첨사(所斤僉使)가 군사를 나누어 수비.
○ 평신진(平薪鎭) 서산(瑞山) 수군첨절제사
○ 마량진(馬梁鎭) 비인현(庇仁縣)의 서쪽 33리에 있다. 수군첨절제사.
○ 서천포영(舒川浦營) 서천(舒川)군의 남쪽 26리에 다. 수군만호
충청 수영은 왜란과 같이 남부에서 침입이 발생할 경우, 삼도수군통제영에 소속되어 통제사의 지휘를, 호란과 같이 북부에서 침입이 발생할 경우에는 삼도수군통어영에 소속되어 통어사의 지휘를 받았다. 상황에 따라 상급 부대가 바뀌었던 셈.

3. 충청 수사


정유재란기에 최호가 맡았었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의 부관이자 임진왜란순천 부사였던 권준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