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세스타
[image]
1. 생애[5]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세스타는 1919년 고향팀인 1.시메링어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테플리체 FK, 비너 AC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1931년 오스트리아 컵대회에서 우승하여 첫 타이틀을 따냈다.
1934년부터는 오스트리아의 명문인 FK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뛰면서 1936년 미트로파 컵 우승에 힘을 보탰다. 아우스트리아 빈은 1935, 1936년 두 차례 ÖFB-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세스타는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1943년, 아우스트리아 빈을 나온 이후 세스타는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다 1946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1.2. 국가대표팀
세스타는 1932년 프라하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는 곧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발돋움했고 오스트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총 44경기에 출전했다.
1934년 월드컵에서는 오스트리아의 4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오스트리아의 4강 진출을 이끌었고 3, 4위전에서는 추격골이자 대표팀 경력 중 유일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 월드컵 본선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인 1941년, 독일 대표팀에 처음 소집되었을 때 세스타는 이미 35세의 노장이었지만 1942년까지 3경기를 독일 대표팀 소속으로 뛰기도 했다.
1.2. 이후
세스타는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축구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칼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더팀의 주전 풀백.
공격수로 데뷔했기에 공격 가담도 가능한 현대 축구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빠른 스피드와 태클 능력으로 작은 신장을 만회하였다.
3. 뒷이야기
- 세스타가 대표팀에 데뷔할 무렵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잉글랜드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시합을 치른 적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잉글랜드에 3대4로 패배했지만 세스타는 인상깊은 활약을 펼쳤고 이에 당시 영국 왕자였던 켄트 공작 조지(조지 5세의 셋째 아들)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 세스타는 조지에게 잉글랜드 대표 선수들이 나쁜 수단을 쓰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그들 또한 나쁜 수단을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전하.
(Sie haben aber auch keine schlechte Hackn, Majestät.)'''
카를 세스타
- 세스타는 오스트리아의 아마추어 레슬링 챔피언이기도 했으며, 1932년 런던에서 상을 받기도 할 정도로 노래 실력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4. 수상
4.1. 클럽
- ÖFB-컵 우승 3회: 1930–31(비너 AC), 1934–35, 1935–36(FK 아우스트리아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6(FK 아우스트리아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36-37(FK 아우스트리아 빈)
- ÖFB-컵 준우승 1회: 1931–32(비너 AC)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31(비너 AC)
4.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준우승 1회: 1933-35
[1] 표준 독일어 발음으로는 제스타가 맞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맨 앞의 s는 ㅅ로 발음한다.[2] Sesta외에 Sesztak로 표기되기도 한다.[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