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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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 영국의 왕가인 윈저 왕조의 창시자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백성은 곧 나를 일컬음이라.'''
2. 칭호
즉위 직후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조지 5세 폐하(His Majesty George V,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였었다. 그런데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인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영국령 아일랜드 대부분이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자 1927년에 칭호법을 개정(Royal and Parliamentary Titles Act 1927) 다음과 같이 칭호를 변경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조지 5세 폐하(His Majesty George V,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이때 국명의 경우엔 1927년 법 개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됐지만[1] ,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연방 탈퇴 전까지 영국 국왕을 군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했다. 때문에 왕의 칭호에서는 '아일랜드'를 '북아일랜드'로 고치지 않고 남겨서 여전히 아일랜드 전체의 군주임을 나타내고, 대신 '연합 왕국'을 왕의 칭호에서 뺌으로써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가 더 이상 연합 왕국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공식적인 칭호상의 문제일 뿐 실질적으로 조지 5세는 여전히 연합 왕국(UK)의 왕이었다.
3. 전반적인 생애
본명은 조지 프레데릭 어니스트 앨버트로 에드워드 7세(184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1844년 12월 1일 ~ 1925년 11월 20일)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왕비는 테크의 메리(Mary of Teck)였는데 원래는 형 앨버트 왕자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앨버트 왕자가 결혼 직전인 1892년 1월 14일에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요절해서 조지가 형의 약혼녀 메리를 신부로 맞은 것이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른 결혼이었으나 둘은 평생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후계자인 형이 있었기에,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형의 몫이었고 조지 5세는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형 앨버트 왕자가 급사하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왕이 되어, 전유럽의 군주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굳건한 의지와 책임감으로 왕실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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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왕국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드 1세, 포르투갈 왕국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그의 왕실이 본래 독일의 대공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2] 이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반독일 감정을 고려해 영국 왕실의 역사적 거주지인 윈저 성의 이름을 따라 가문을 윈저로 개명하였다.
이 때 덩달아 강제로 개명된 가문 이름이 독일의 명문가 바텐베르크(Battenberg)[3] .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berg)'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마운트(mount)'로 고치고, '바텐(Batten)'을 영어식 독음인 '배튼'으로 바꾼 뒤 본래 배열과 바꿔서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개명했다. 조지 5세의 바텐베르크 가문 친척들은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성을 갈아버리는 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4] 사촌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즐거운 아낙네들'[5] 을 봐야겠다"라고 빈정댔다.
그래도 이 바텐베르크 가문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한다. 이들은 독일어를 영어로 바꾼 수준으로 개명했지만, 독일과의 연관이 더 큰 가문들은 얄짤없이 원래 이름을 내다버려야 했다. 예를 들자면 메리 왕비의 테크 공작 가문은 원래 이름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캠브리지 가문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 친척들은 독일의 본가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폐위되어 버리는 안습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15년에 있었던 낙마 사고와 제 1차 세계대전, 지속적인 흡연 등으로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만성적인 기관지염으로 세 차례나 요양을 갔고 1928년 11월에는 패혈증에 걸렸다. 말년에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의식이 오락가락 했다. 어쩌다가 의식이 있을 때는 노망이 든 모습을 보여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계속 했으며[6]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1986년에 공개된 주치의 도슨의 일기에 따르면, 안락사를 옹호했던 도슨은 국왕의 위엄있고 평안한 죽음을 위하여 '''조지 5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치사량의 약물을 주입했다. 강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던 메리 왕비와 왕세자는 이를 분명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계속 비밀에 부쳐지다가 한참 뒤인 1986년에 공개되었다. 그렇게 조지 5세는 1936년 1월 20일 서거하였다.
생전에는 자식들한테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한데 이게 좀 막장부모 수준이였다.[7] 그러나 성격이 난폭했다거나 자식들에게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젊은 시절부터 해군에서 보내온 탓에 배운 인간관계가 군대식 인간관계뿐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에는 나름 다정하게 대해줬는데, 좀더 자라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할때가 되었을때가 문제였다. 아는게 군대식 교육법뿐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넌다인 교수는 조지 5세에 대해서 '국민의 아버지 노릇은 완벽하게 했으나, 정작 자기 아이들 아버지 노릇 하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것때문에 차남 조지 6세가 애를 좀 먹었고[8] 에드워드 8세는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을 많이 하였다. 그래도 차남인 조지 6세는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많이 편애했다고 한다. 다만 손녀들이 태어난 뒤로는 할아버지 노릇은 잘 했다. 오죽하면 말년에 장남대신 차남이 왕이 돼서 손녀한테 물려줬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9]
아내인 메리 왕비는 1953년까지 생존하여, 살아있는 동안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부터 두 아들(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그리고 손녀(엘리자베스 2세)의 왕위 계승[10] 과 증손자(찰스 왕세자), 증손녀(앤 공주)의 출생까지 다 지켜보았다.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도플갱어?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는 서로 이종사촌 형제 관계로 조지 5세가 세 살 연상이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와 헤센카셀의 루이세 카롤리네 사이에는 3남 3녀가 있었는데, 장녀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와 혼인해서 조지 5세를 낳았고 차녀이자 넷째인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3세와의 사이에서 니콜라이 2세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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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왼쪽이 러시아의 황후가 되는 다그마르(마리아 표도로브나)
자매였던 어머니들이 쌍둥이처럼 빼닮았듯 사촌이었던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 또한 몹시나 닮았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쌍둥이로 보일 정도. 덕분에 사촌형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신랑으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황족들이 모조리 죽어나가는 와중에 모국인 덴마크로 망명한 이모 마리아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18]
반면 성격은 정반대였는데 조지 5세는 근엄하고 엄격하다 못해 혹독한 일면이 있는 성격인 것에 비해, 니콜라이 2세는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끌려다니는 성격이었다. 일국의 통치자로서의 면모도 정반대였다. 조지 5세는 가족에게는 가혹할 지언정 나라를 전쟁의 위기에서 지킨 반면, 니콜라이 2세는 가족에게는 다정할 지언정 나라를 파탄내고 멸망시켰다.
한번 비교해보자. 세 사진 모두 오른쪽이 조지 5세이다. 이 둘은 성격 차이 때문에 인상이 서로 다른데 조지 5세는 군인 성격 때문에 인상이 억세고 니콜라이 2세는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빌헬름 2세와도 고종사촌 관계[19] 이지만 이 쪽은 그렇게 닮은 편은 아니다. 빌헬름이 형이다.
외모뿐 아니라 평소 취향도 닮은 편이었고, 나름 사람들에게 인기도 받는 편인데, 진짜 '''자녀 교육 방식은 각자 다르다.''' 조지 5세 집안은 아들부잣집에 딸 한 명이 있고, 니콜라이 2세 집안은 '''반대로''' 딸부잣집에 아들 한 명이 있는데, 니콜라이 2세는 정말이지 자식들에게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지만, 조지 5세는 다혈질에 군인 특유의 괄괄한 성미 때문에 자녀들에게 항상 화만 냈고 특히 큰아들과의 사이는 '''설명 안 해도 알 것이다(...)''' 또한 정치 성향도 정반대였는데 내치에 전력을 다한 조지 5세와는 달리 니콜라이 2세는 나라를 천하의 쓰레기에게 맡긴 채 사실상 방치해버렸다. 그 결과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은 혁명이 일어나는 와중에 비명횡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조지 5세와 그 일가족은 천수를 다 누렸고 그의 손녀는 '''지금도 영국의 국왕이다'''.
6. 불행했던 일생
미소년 - 미청년 - 미중년 라인을 달리던 왕이었으나, 노년에는 스트레스로 딱히 미노년이라고 할 만한 포스가 없어서 미노년 항목에는 없다. 가정을 내팽겨치는 바람기 많은 막장 아버지와 항상 구설수에 오르다가 단명한 큰형, 그리고 나치 비호까지 하는 희대의 막장 장남이 있기에 가족들 문제에 골치를 많이 썩었다.
- 형 앨버트 왕자가 일찍 죽었다. 조지 5세는 형과 우애가 좋았으며 이미 밀덕으로 길러진 성격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는 딱히 유능하지도 않고, 딱히 무능하지 않은 평범인(?)이 되었다. 앨버트 왕자와 조지 5세는 미소년 시절에 화보(?)를 찍었다.
- 사랑을 잃었다. 조지 5세는 친사촌 여동생 에든버러의 마리[20] 를 사랑했지만 양쪽 모친의 반대로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에든버러의 마리는 루마니아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 동안에 고생했다.
- 재위 초기에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 705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이로 인해 자칫 재위 초반부터 평판이 안좋아질 위험에 놓였지만, 이후 원만하게 대처 및 수습하여 고비를 잘 넘길수 있었다.
-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사실상 군주제의 종말[21] 이나 다름없었던 그 전쟁에서 조지 5세가 이끌던 영국이 승리하면, 고종사촌 빌헬름 2세[22] 를 비롯한 적국들의 수장이 폐위될 것을 알면서도 영국을 위해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전쟁을 지휘했다.
- 이종사촌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어 그의 가족들과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되었을 때, 고종사촌 빌헬름 2세보다 아꼈던 니콜라이 2세를 구하고 싶어했으나, 각료들의 반대로 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23]
-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즈음 건강이 악화되었다. 조지 5세 재위 중에 세계 대공황은 그나마 해소되는 편이었으나 이 때 조지 5세는 임종 직전의 위독한 상태였다.
-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차남인 조지 6세는 나름대로 유능하고 성격도 좋았지만 말더듬이 심하고 병약해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 속을 썩였다. 3남과 4남무능하거나 난폭한 성격은 아니지만 군주감이 아니고, 5남은 요절하여 자신보다 앞세워 보냈다. 고명딸은 이미 백작과 결혼해 자녀를 뒀는데, 무엇보다 강적은 장남 에드워드라고 할 수 있다. 왕실 역사 상 전례가 없는 이혼녀와의 결혼을 하려고 왕위를 내던져 버린 것은 그렇다 쳐도 "나치 만세!"를 외친 건 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 여동생들을 잃었다. 루이즈(1867년 ~ 1931년), 빅토리아(1868년 ~ 1935년 12월 1일), 모드(1869년 ~ 1938년 11월 20일) 중 루이즈와 빅토리아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조지 5세는 큰 실의에 빠졌고, 말썽 부리는 자식들, 두 여동생들의 죽음, 사촌들이 끔살 혹은 폐위되는 상황 속에서 노르웨이로 시집갔던 막내 여동생 모드도 점차 위독해지자 '이제 짐의 시대는 끝난 것 같다.'며 비통해하다가 세상을 떴다.
7. 기타
그의 취미는 우표수집으로, 조지 5세의 우표수집 컬렉션은 역대 영국 국왕들에게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왕세자 시절에 보좌관이 아침에 출근해서 조지에게 농담 삼아서 "전하, 제가 오늘 신문을 보니까 어떤 바보멍청이가 우표 한장에 수백파운드나 되는 돈을 썼다는 기사가 다 실렸더군요"라고 말을 건네자, "내가 바로 그 바보멍청이일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문신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대표적인 일화로 1881년 일본에 방문했을 때 팔에 용문신을 새기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영국의 신문사들이 당시 말단 선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화살이 코를 관통하는 문신’을 새겼다며 일제히 오보를 쏟아내면서 영국 의회에서까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 소동은 조지 5세가 본국으로 돌아와 사실무근임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백성은 곧 나를 일컫는다.'라는 발언이 유명한데, 루이 14세가 했다고 알려진 '짐이 곧 국가다'와 매우 극명하게 대비되는 말.[24]
그의 이름을 딴 전함이 바로 킹 조지 5세급 전함으로, 2차례 건조되었다.[25] 첫번째는 1911년에 건조된 킹 조지 5세로, 당시 조지 5세가 즉위하여 이름이 붙었다. 두번째는 1939년에 건조된 전함으로, 2차 대전기 영국 해군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당시 즉위했던 에드워드 8세가 자신의 퇴위를 예감하고 조지 5세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즉위한 조지 6세 때는 함명을 바꾸자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왕은 아버지를 기념하고 싶다고 사양하였으며, 2번함에는 형을 기념하여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붙이고 3번함에는 자신을 지칭하는 듀크 오브 요크를 붙인다.
파리 지하철 1호선에는 조지 5세의 이름을 딴 조지 5세 역이 있다.
키가 168cm로 아버지(173cm)하고 장남(170cm) 또는 차남보다 키 작다.
그가 재임했던 기간에 대영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었다. 다시 말해 조지 5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군주였다.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largest_empires
8. 현대 매체에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알버스 덤블도어로 유명한 배우인 마이클 갬본이 맡아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와 히틀러가 설쳐대는 와중에 왕이란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직업이 되었다면서 무슨 놈의 왕이 국민들에게 아부하는 광대꼴이냐고 전제군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6세에게 "너희 형이 저렇게 정신줄 놓고 있는데 네가 아니면 누가 귀족과 노동자들을 지켜내겠느냐"며 왕족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이 말을 한 때가 바로 조지 6세가 크리스마스 대국민 연설을 머뭇거릴 때였는데, 엄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부분. 마지막에는 병환으로 거의 정신줄을 놓고[26] 자신이 서명한 법안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다가 숨을 거둔다.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선 킹스맨의 프리퀄로 가상의 역사이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등장한다. 배우는 톰 홀랜더가 맡는다. 이 외에도 니콜라이 2세, 빌헬름 2세까지 1인 3역을 맡는다.[27]
Paradox Interactive사의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1936년 시점에 영국 국왕으로 있는데 국가의 안정도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시작 후 금방 사망해서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도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면 다시 안정된다.
위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차대전이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되고, 이어지는 독일과 영국의 건함경쟁 끝에 피폐해진 영국에서 생디칼리슴 혁명이 일어나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그 와중에 본인의 건강(주로 정신적인 쪽으로)도 나빠져 독일과 생디칼리스트들에 대한 분노로 미쳐버렸다는 평까지도 듣고 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1936년 초에 사망하며, 죽기 전 유언은 영국으로 돌아와 묻히는 것. 진행에 따라 캐나다가 영국 수복에 성공하면 이 유언을 이루게 된다.
[1] 그런데 영국이 아일랜드를 분리시킨 건 1922년이다. [2] 당시 가문의 당주는 막내 사촌동생인 카를 에두아르트[3] 19세기 중엽, 헤센-다름슈타트 대공 루트비히 3세의 동생 알렉산더와 평민인 율리아 하우케의 귀천상혼으로 생겨난 가문이다.[4] 다만 바텐베르크의 경우는 세계대전 당시 제1해군경에 있었고 얼마 뒤 중순양함 세척이 독일 유보트에 '''1척에게''' 격침된 사건으로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다. 격침된 것 자체가 비난받을 건 아니고 고작 잠수함 1척에게 중대형함이 격침당하는 건 분명 해군성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고 그 스파이는 독일계인 바텐베르크 가문일거라는 이야기. 결국 해군성의 바텐베르크는 사직하고 화병으로 사망하고, 가문은 결국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한다. 이 해군성의 바텐베르크의 아들이 2차 대전의 영웅이자 마지막 인도 총독 루이 마운트배튼.[5] 원제는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다.[6] 영화 킹스 스피치에 묘사된다.[7] 아무래도 원래는 국왕이 아닌 해군 쪽으로 전직하려고 했기 때문에 군인 정신이 매우 강했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는 조지 5세의 자식들과 자주 놀아주며 손주들을 많이 예뻐해줬다.[8] 조지 6세 본인은 눈물도 많고 소심한데 자세교정 때문에 말더듬 증세까지 생겨버렸다.[9]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다.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퇴위하자, 차남인 조지 6세가 왕이 되고 그의 장녀가 후계를 이어 엘리자베스 2세가 되었다[10] 다만 대관식 3개월 전에 사망하여 대관식은 보지 못했다.[11] 조지 3세의 4남이다.[12] 프레데리크 5세의 손녀이다.[13] 프레데리크 5세의 손녀이다.[14] 엘리자베스 2세,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15] 본명은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앨리스 메리’. 작위에 퍼스트 네임인 빅토리아가 아닌 마지막 이름 메리를 사용했다. 통칭 메리 공주. 작은오빠 조지 6세도 퍼스트 네임인 앨버트 대신 마지막 이름인 조지를 작위로 사용했다.[16] 메리 공주의 가계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고 구성원이 많은 편이다. 사생아들도 상당한 데다가 다들 자식들을 비교적 많이 낳았기 때문. 사생아의 사생아라는 가계도 있다.[17] 요르요스 1세의 손녀이자 필립 공과는 사촌지간이다.[18] 사실 마리아 황태후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죽은 아들이나 손자, 손녀를 사칭하는 자들이 있으면 호통을 치며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19]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이자 에드워드 7세의 누나로, 조지 5세의 고모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가 빌헬름 2세의 어머니다.[20]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2남 알프레드 왕자의 장녀이다.[21]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승전국과 패전국, 그리고 양쪽의 식민국들 대부분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22] 단 이쪽은 조지 5세에게 아버지이자 자신에게 삼촌되는 에드워드 7세에게 패드립을 친 바 있다.[23]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이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대독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아 알렉산드라 황후까지 망명시킬 경우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였다.[24] 실제로는 한 적이 없다. 다만 루이 11세가 '짐이 곧 프랑스다'라고 한 적은 있다.[25] 첫번째는 건조되기 전에 HMS Monarch로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제외하면 2차례.[26] 약간 치매 증상을 보인다.[27] 이러한 1인 다역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서술된 문단에서도 보다시피, 서로가 친척지간인데다 특히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와 도플갱어로 착각할 정도로 많이 닮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