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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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바흐, 베토벤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음악의 신동(神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어도 '''모차르트'''의 이름은 알고 있으며, 설령 이름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의 음악은 들어봤을 것이다. 특히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할 만한 음악을 남겼기 때문에 음악 역사상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불세출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35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 수만 무려 쾨헬 번호(K.) 626편에 이르는 곡[2] 을 남긴 괴수[3] 이며 단순히 곡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수의 작품들이 음악성 측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음악역사에 중요기점이 되고있다. 그의 음악은 불멸의 반열에 올랐으며 모든 사람들이 곡명은 몰라도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들이 많이 있다.
모차르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면 모차르트가 살아생전 작성했던 편지를 모아 완역한 서적 <모차르트의 편지>를 읽어보기 바란다.
2. 생애
3. 음악
3.1. 오페라
3.2. 모차르트 작품 연주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지휘자로는 네빌 마리너, 카를 뵘 등이 있다. 특히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상당한 양의 레코딩을 남긴 카를 뵘 같은 경우는 아직도 대다수가 폐반되지 않아서 구하기도 쉬운 편.[4] 시대연주 관련해서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나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등도 있다.
모차르트의 건반음악은 비교적 간단한 노트에도 불구하고 난이도가 악랄하기로 유명하다. 악보 읽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간단한 만큼 한 음도 헛되이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연주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모차르트 곡은 한 음 틀리면 티가 확 나는데다 기계적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음악을 페달도 밟지 않고 감정을 살려서 연주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쇼팽 에튀드를 암보하는 음대 입시준비생에게 모차르트의 소품을 들이밀었더니 욕을 먹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5]
모차르트의 음악을 백조에 비유한 이들도 있다. 잔잔한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수영하는 백조의 다리는 쉴틈없이 바둥바둥거리고 있다나? 이런 표현을 돌직구로 느끼고자 한다면 그 간단하다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을 들어보면 되겠다.
피아노를 조금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차르트의 곡들은 옥타브가 많다거나 하지 않다. 손이 작아도 무리없이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장 음악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악곡들이 연주하기 힘든 것은 트릴과 어마어마한 노트들 때문.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항상 즐겁고 가볍게,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모차르트의 악곡들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런 느낌이 필요하다. 마치 날아가듯이 연주해야 듣는 사람이 모차르트 곡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냥 가볍고 빠르게 치다 보면 음이 모조리 빠지고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모차르트의 악곡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낌을 살려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건반을 둥글게, 정확히 누르는 타건법, 그리고 손가락과 손목에 무리한 힘을 싣지 않고 자유자재로 치는 법, 악보에 표현된 이음줄과 붙임줄[6] 을 정확히 구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모차르트 악곡은 거의 페달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며 베토벤 이후의 악곡에서 느껴지는 페달을 사용한 장엄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음줄 등의 악상 기호를 정확히 표현해야만 느낌을 살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많은 연습과 훈련 위에 통통 튀는 느낌으로 연주하는 것이 모차르트 악곡 표현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옥타브 이상으로 손가락을 벌릴 필요가 없어 손이 작아도 연주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7] 경쾌하고 산뜻하게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내면의 깊이를 담아 연주해야 하기 때문인지, 모차르트의 스페셜리스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여류 피아니스트들이 많으며, 모차르트 피아노 음악의 명반을 꼽을 때 주로 거론되는 음반도 여성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것들이다. 클라라 하스킬, 잉그리드 해블러, 마리아 조앙 피레스, 알리시아 데 라로차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프리드리히 굴다 등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남긴 음반도 명반들이 많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그의 후배들인 베토벤, 리스트, 쇼팽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방식으로 연주했다가는 본연의 느낌을 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들은 울림을 중시하고 기교를 부린다는 생각으로 연주하기 보다는 순수하게 음표에 집중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모차르트의 곡들을 기교적 측면에서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연주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모차르트는 일부 파이프오르간 작품도 남겼는데, 《환상곡 f단조 K. 608》 같은 경우는 오르간 전공자들 입장에서 난이도가 헬이라고 한다. 비록 대중적으론 알려지지 않은 곡이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대위법을 연구한적이 있는 음악사적으로 유서깊은 곡이다. 약간 바흐스러우면서도 여기저기 모차르트 특유의 오페라풍 극적 효과나 반음계적 진행이 등장하고 있다.
연주자로서의 모차르트는 '''즉흥 연주를 많이 했다.''' 출판된 악보에 간단하게 표현된 노트는 그냥 기본적 멜로디를 표기한 것일 뿐, 본인이 연주할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덧붙여서 야단법석일 정도로 화려한 애드리브를 펼쳤다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의 연주를 들리는 대로 적어놓은 종이 조각이 전해지는데,'''음표가 엄청나게 많다.''' 또한 모차르트의 악보는 고쳐쓴 흔적이 거의 없다.[8] 한 마디로 머리 속에 있는걸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대중적이면서도 기억에 오래남는 선명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작곡한 곡에 조바뀜이 계속 일어나는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는 등 청자에게는 굉장히 감성적으로 다가오지만, 연주자에게는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기교를 요한다.
4. 후대의 평가
'''"나는 항상 나를 모차르트의 가장 위대한 숭배자로 여겨 왔으며, 내가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9]
"'''
'''"앞으로 100년 동안 다시는 그런 재능을 볼 수 없을 것이다.[10]
"'''
- 요제프 하이든, 모차르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모차르트여! 이 멋진 나은 세상의 모습을 당신이 주셨나이까? 가볍고, 밝고, 좋은 날들이 내 평생 동안 내게 머무를 것입니다. 멀리서와 마찬가지로 모차르트 음악의 마법의 음표는 여전히 우아한 방식으로 내게 떠오릅니다[11]
"'''
- 프란츠 슈베르트
"'''서로 연결되는 안락함과 우아함으로서 이토록 즉흥적이고 명확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만약 우리가 모차르트의 음악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 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의 순수성을 글로 담아내보려고 하자.[12]
"'''
- 요하네스 브람스
"'''모차르트는 음악 창작에 있어 전 영역을 아우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내 부족한 머리로 이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는 것일 뿐이다. [13]
"'''
- 쇼팽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베토벤은 그 자신의 음악을 창조하였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순수함과 미를 지녔는데, 그것은 우주에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내적 아름다움의 일부가 숨겨져 있다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14]
"'''
"'''모차르트는 매우 장대한 규모의 창의력을 보여서 사람들은 사실상 그가 그 자신을 계속해서 위대한 걸작에 내던졌다고 말하곤 한다.[15]
"'''
-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
"'''모차르트의 음악은 특히나 연주하기 어렵다. 그의 감탄할 만한 명쾌함은 그 음악이 매우 청백함을 입증한다. 그의 연주에서 약간의 실수만 해도 그것은 백지위의 검은 점 처럼 두드러진다. 때문에 그의 곡은 음 하나하나가 정확히 연주되어야 한다.[16]
"'''
- 가브리엘 포레
"'''모차르트의 엄청난 천재성은 그를 역대 모든 예술가들중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17]
"'''
- 리하르트 바그너
"'''모든 음악적 야망은 모차르트 앞에서 절망이 된다.[18]
"'''
- 샤를 구노
"'''모차르트는 위대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범접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19]
"'''
- 아르투르 슈나벨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사들을 지상으로 내려오도록 유혹할 만큼 매우 아름답다. [20]
"'''
- 클루게
"'''어떤 난관에 부딪히면, 모차르트가 당신에게 해결책을 준다. [21]
"'''
- 페루초 부소니
"'''인간 내면의 영혼과 그 에너지의 깊이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바흐, 베토벤, 바그너의 곡들에 감탄할 만 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신성한 본능이다.[22]
"'''
- 그리그
"'''베토벤은 일주일에 두 번, 하이든은 네 번, 그리고 모차르트는 매일 연습한다![23]
"'''
- 로시니
"'''우리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자주 들을수록 그의 음악이 더 새로워 보이지 않는가? [24]
"'''
- 슈만
"'''모차르트는 음악적 예수 그리스도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영역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미의 정점이다.[25]
"'''
- 차이콥스키
"'''모차르트는 정의되기 이전에 어떤 행복이다.[26]
"'''
- 아서 밀러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했어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모차르트 음악은 아이러니한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음악은 기쁜데 슬픈 감정이 있고, 슬픈 음악인데 기쁜 감정이 느껴지고. 저는 사실 이게 예술의 끝이라고 보거든요. 열려 있는 해석이 가능한.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완벽미’ 때문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의 음악이예요."'''
- 피아니스트 손열음
5. 주변 인물들
5.1.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5.2. 모친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1720~1778)는 찰츠부르크 태생으로 본명은 안나 마리아 페르틀(Pertl)이었으며 부친은 찰츠부르크의 공무원으로 알려져 있다.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는 종종 여행을 다닌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찰츠부르크에서 살았던 찰츠부르크 토박이였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살에 1살 위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결혼했는데 결혼식도 찰츠부르크에서 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7]
생전에 7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사망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녀가 36살에 낳은 막내였다.
- 요한 레오폴트 요아힘 모차르트(Johann Leopold Joachim Mozart, 1748) - 6개월만에 사망.
- 마리아 안나 코둘라 모차르트(Maria Anna Cordula Mozart, 1749) - 며칠만에 사망
- 마리아 안나 네포무케나 발푸르기스 모차르트(Maria Anna Nepomucena Walpurgis Mozart, 1750) - 2개월만에 사망
-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1751-1829) -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마리안네)
- 요한 칼 아마데우스 모차르트(Johann Karl Amadeus Mozart, 1752) - 3개월만에 사망
- 마리아 크레센티아 프란시스카 드 파울라 모차르트(Maria Crescentia Francisca de Paula Mozart, 1754) - 2개월만에 사망
-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The Mozart
그녀의 유해는 파리의 성 유스타슈 묘지(Saint-Eustache Cemetary)에 안장되었는데, 어디에 묻혔는지 오리무중인 아들과 달리 현재에도 그녀의 묘지는 잘 보존되어 있다.
5.3. 아내 콘스탄체와 처형/처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과정에 대해서는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 부분을 참고하자.
콘스탄체는 그간 영화 아마데우스를 비롯 각종 매체에 나온 철부지 이미지와[29]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몹시 마음에 안 들어했던 전력 때문에 남편을 말아먹은 악처 또는 남편의 음악을 이해 못하고 사치만 즐겼던 여자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는 많이 왜곡된 평가이다.''' 또 그녀가 남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라는 평도 있었으나, 이는 모차르트 부부가 자주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사교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나온 소문일 뿐이며 실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30]
기본적으로 베버 집안의 4자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는 모두 음악가가 되기 위한 교육과 글을 쓰는 교육을 받은 교양을 갖춘 여성들이었으며,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짜로 콘스탄체가 별볼일 없는 천박한 사람이었다면, 모차르트와의 관계도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버 집안의 4자매는 다들 성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친딸급의 자매들. 장녀 요제파와 차녀 알로이지아는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를 휘어잡은 명가수가 되었으며[31] 3녀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언니들처럼 전업가수가 될 수 있는 성악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성악에 재능이 있어 성악가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후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를 위해 다수의 아리아를 작곡했으며(K 383, K 416, K 418, K 419, K 538) 종종 오페라의 배역도 맡겼다.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의 콘스탄체 역은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었다.[32] 또 돈 지오반니의 비엔나 초연 때에도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를 담당했다. 요제파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역으로 열창하여 절찬을 받았다. 셋째 딸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의 결혼으로 전문 가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 K. 427》를 보면 그녀가 전문 성악기 못지 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그녀가 직접 소프라노 독창을 불렀다. 모차르트가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을 작곡할 때 그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을 정도로 성악에 대한 재능과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콘스탄체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다 사교생활로 인해 모차르트 생전에는 남편 못지않은 낭비벽을 자랑했다. 벽난로를 지필 땔감이 없어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한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게 산 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사치스럽게 살았던게 문제였다.[33] 콘스탄체에 대한 후대의 비난들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콘스탄체가 당시의 일반적인 아내들처럼 집안일과 내조에 충실하지 않고 사교 모임에나 나가고[34] 남편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결국 집안이 빚에 허덕이고 남편이 일중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부부가 겪었던 자금난의 근본 원인은 사치와 당구도박에 빠져 있던 모차르트 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계속 닦달하여 과로사로 죽게 했다던가 돈을 보고 모차르트와 결혼했다는 식의 관점은 본말이 전도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해 버리자 콘스탄체는 절망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간 철모르는 안방마님이었던 콘스탄체는 극강의 생활력을 발휘했다. 우선 콘스탄체는 이미 주문받은 레퀴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여러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이어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또한 남편의 작품들로 공연을 기획하여 수익을 얻기도 했다. 또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연금을 받는데도 성공했다. 이처럼 콘스탄체는 돈과 관련된 일을 잘 챙겨서 빚도 모두 갚고 생활도 금세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어느정도 여유 있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콘스탄체는 덴마크의 귀족이자 빈 주재 외교관이었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와 가까워졌고 나중에 결국 재혼했다. 폰 니센과 콘스탄체가 가까워진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은 서로 다른 내용의 두 가지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은 평소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던 니센이 먼저 모차르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도와줄 명목으로 콘스탄체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폰 니센이 콘스탄체가 세를 내놓은 집에 거주하게 되어 세입자와 세입주로 알게 되었다가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콘스탄체와 니센은 서서히 가까워졌고 자연히 니센은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 및 유품을 정리, 보존하고 악보를 출판하는 일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1798년경부터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 다만 공식적인 재혼은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서 출가한 후, 콘스탄체[35] 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09년에야 했다. 이듬해인 1810년에 니센은 오랜 빈 주재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본국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10년간 유럽 각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생활했다. 콘스탄체 역시 1810~1820년 10년간 새 남편과 함께 코펜하겐 및 유럽 여러 곳에서 생활했다.
니센이 정년퇴직을 한 후, 니센과 콘스탄체 부부는 그동안 모았던 유품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기로 했고, 제대로 모차르트 연구를 하기 위해 1824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정착했다. 모차르트의 친누나인 마리안네와도 조우하였고, 마리안네가 가지고 있던 모차르트의 자료도 넘겨받게 되었다. 충분한 자료를 확보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데 착수했다. 하지만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문만 조금 작성한 채 1826년 사망했다. 이후 이 전기작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사람이 매달린 끝에 1828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한편 1826년 니센이 사망한 후 콘스탄체는 언니 알로이지아와 동생 조피에게 잘츠부르크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당시 큰 언니 요제파 베버는 1819년에 사망했고 알로이지아 베버는 1795년 남편 요셉 랑어와 사실상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37] 막내 조피는 남편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신 가수겸 작곡가 야콥 하이벨(Jakob Haibel)이 하필 니센과 같은 해인 1826년에 사망한 탓에 미망인이 된 상황이었다. 이런 정황 덕분에 알로이지아와 조피는 콘스탄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세 자매는 함께 찰츠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알로이지아는 1839년, 콘스탄체는 1842년, 조피는 1848년에 차례로 사망했는데, 조피가 사망했을 때 상속자가 없는 관계로 세 자매의 재산은 잘츠부르크시에 증여되었다.[38]
여담으로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야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이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3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서 발기했다"라는 등의 내용을 편지에 쓰고 이웃들에게 농담 삼아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런데 콘스탄체도 천생연분답게 비슷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편지내용은 그 시대에 유행한 농담이었을 뿐, 두 사람이 변태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이런 섹드립들을 나중에 니센은 모차르트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정도가 심한 내용들은 살짝 편집하거나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지워버리도 했다.[39]
모차르트 팬이라면 이런 민망한 편지나 자료들도 일절 버리지 않고 보존에 힘썼던 콘스탄체와 니센에게 감사하자.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는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아는 게 적었을 것이다.
5.4. 누나 나넬(마리안네)
나넬[40] (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은 일찍 죽지 않고 생존한 모차르트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남동생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모차르트보다 5살 위로 어렸을 때에는 모차르트와 같이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남매 신동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시에는 여자가 전업 음악가를 한다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41] , 1770년 이탈리아 연주여행부터는 남동생과 같이 다니지 않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20대 초반에 남자친구가 생겼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했다.
마리안네는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집안에서 어머니 역할을 떠맡아야 했으며 음악교사로 집안의 생계도 꾸려가야 했다, 이런 탓인지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인 32살이 되어서야 잘츠부르크 법관이었던 프란츠 폰 베르흐톨트 추 존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와 결혼하여 자신의 집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길겐(st. Gilgen)에 정착했다. 이 존넨베르크는 이미 결혼을 2번이나 했고 전처에게 낳은 자식도 5명이나 있었는데, 다만 돈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마리안네와 존넨베르크는 3명의 아이를 낳는데 첫째 아들은 외할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길렀으며 막내 딸은 1년만에 죽었다.
1801년 결혼 18년만에 남편이 죽자 마리안네는 4명의 의붓자식과 2명의 친자식을 데리고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의붓 자식들이 장성해서 슬슬 독립한데다 넉넉하게 유산을 물려받아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소일거리 차원에서 음악교사를 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복귀할 당시 이미 나이가 50살이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와 관련해서 마리안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820년 콘스탄체와 니센 부부가 잘츠부르크에 오면서 부터이다. 마리안네는 그간 며느리를 몹시 싫어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콘스탄체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모차르트 사후 두 사람은 일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런 사정때문에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에 재혼남을 데려온 콘스탄체를 처음에는 쌀쌀맞게 대했다. 하지만 콘스탄체와 니센이 자신의 남동생 모차르트의 연구와 자료수집에 열중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직접 그의 고향까지 찾아온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모차르트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악보 등의 중요한 자료 일체를 콘스탄체 부부에게 제공하였으며, 모차르트와 가깝게 지냈던 증인으로서 그의 행적을 증언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마리안네는 1825년경부터 시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1829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기 얼마 전 마리안네는 조카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계부 니센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간 희미하게 존재여부만 알고 있다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5.5. 자식들
모차르트 부부는 총 6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전술했다시피 차남과 막내아들 2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나머지 자식들은 1년 내에 모두 사망했으며 한 명은 사산했다.
- 라이문트 레오폴트 - 1783.6.17.~1783.8.19. 장남.
- 카를 토마스 - 1784.9.21.~1858.10.31. 차남.
-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 1786.10.18.~1786.11.15. 3남.
- 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 - 1787.12.27.~1788.6.29. 장녀. 다른 요절한 자녀들 중에서는 그나마 6달 동안 살아 있었다.
- 안나 마리아 - 1789.11.16. 사산(死産).
- 프란츠 사버 볼프강 - 1791.7.26.~1844.6.29. 4남.
이 두 아들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직계는 여기서 다 끊겨버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남은 후손들은 모두 방계다.
6. 관련 일화
6.1. 성격
모차르트는 우아한 옷을 좋아했다. 테너 가수 미하일 켈리가 회상한 리허설에서의 모차르트는 "그는 진홍빛 펠리스[44] 와 금빛 레이스가 달린 삼각모를 입고 무대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45]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저는 천박한 놈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 음악은 그렇지 않아요.[43]
―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모차르트의 목소리에 대한 콘스탄체의 증언으로는 "말하는 데는 다소 부드럽고 노래에는 섬세한 테너였지만, 어떤 것이든 그를 흥분시키거나 흥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땐 힘차고 활력이 넘쳤다."[46]
그는 당구와 춤을 즐겼고 카나리아와 찌르레기, 개등을 키웠다. 그리고 승마도 즐겼다.[47]
모차르트는 빈 음악계의 중심에 살았다. 따라서 동료 음악가, 연극 공연가등 다양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요제프 하이든과도 친구였다. 호른 연주가 로이트게프와도 친구였는데, 모차르트가 쓴 호른 협주곡 4곡은 전부 그를 위한 곡이다. 모차르트와 로제트게프는 종종 친근하고 짖궂은 농담을 주고받았다.[48]
그리고 마감일이 다가옴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작곡을 마무리했고, 긴 시간동안 열심히 작업했다. 그도 스케치를 하고 난 후 작곡하곤 했는데, 베토벤의 것과는 달리 모차르트가 죽은 후 콘스탄체가 그것들을 없에려고 했기 때문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건 별로 없다.[49]
또,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재능을 알아보고 2년동안 무료 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훔멜은 모차르트의 한 공연에서 9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다.[50]
그는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대결을 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는 즉흥연주를 하거나 자신의 작품 중 여러 곡을 연주해야했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에 대해 "클레멘티는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3악장 구절에서 발휘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크뢰처[51] 만큼의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 요컨대 그는 단순히 정비공이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에 대해 "나는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정신과 우아함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특히 그의 아다지오와 변주곡에 압도되었다."
두 사람을 라이벌로 묘사하려는 후대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들의 만남이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당시 클레멘티는 좀 더 거장적이고 현란한 스타일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그를 폄하한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52]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음모로 인해 그의 오페라가 올려지는데 장애물이 생긴다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특정 직업에 대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두 작곡가의 관계가 이를 넘어서 신랄했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친구나 동료로 생각했고, 서로의 일을 지지했다. 살리에리는 악장으로 임명 되었을 때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한 적이 있고, 서로 작곡을 같이 하기도 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가르치기도 했다.[53]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는 지저분한 유머를 즐겼다. 그는 엉덩이를 핥아라 등의 카논을 작곡해서 친구들과 함께 부르곤 했다. 슈뢰더라는 학자는 18세기에는 지저분한 유머가 훨씬 더 대중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 당시 독일의 인기 극장에서는 그런 지저분한 유머에 관한 코미디를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앨런 던데스는 그런 유머가 독일 민족 문화의 특정한 특징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 근거로 독일 민속학에서 항문에 관련된 지나치게 먾은 문헌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었다. 그가 쓰거나 부른 몇몇 구절들은 독창적인 게 아니라 당대 민속과 문화의 일부거나 민요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모차르트가 심리적 병이 있었을거라고 생각했다.[54]
모차르트가 말년에도 고소득을 꾸준히 유지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론 해가 지날수록 모차르트의 수입은 곤두박질쳤다. 실제로 1789년 5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많은 찬사를 받은 연주회지만 정작 수입은 터무니 없이 적다."라는 글귀가 있으며, 이것은 모차르트 생애 마지막 3년과 시기가 정확히 일치한 제8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1791)이랑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시기에 수도 빈에선 경기 침체로 인해 중산층의 문화예술 소비가 크게 줄어 오페라 활동이 상당수 중단되었으며, 연주회도 상당수 흥행 실패하는 등 전반적으로 음악가 및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으로 혹독한 시기였다.
빈에서 머물렀던 시절인 1783년부터 1791년 사이 모차르트의 평균 수입을 살펴보자면, 현금 소득만 따지면 1700 플로린, 선물 등 비금전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2500플로린에 육박할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튀르크 전쟁 중 모차르트의 수입이 급감한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모차르트 전성기 기준 벌이에 비한 것이지 일반인들과 비해서는 많이 버는 편이었다. 특히 모차르트가 죽은 해인 1791년의 수입이 5700플로린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는데, 이는 당시 궁정 중상급 관리 연봉 500플로린의 10배가 넘는 액수였다.
정리하자면 모차르트의 수입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으나, 전쟁이나 병약한 아내의 요양 크리 같은 당시 상황, 수입이 나아지자 바로 좋은 아파트로 이사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빵점 수준의 재무관리 수준이 맞물려 모차르트가 죽을 무렵 상당히 맞은 부채를 갖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외에도 모차르트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 이미지가 있고 영화《아마데우스》도 그런 이미지를 상당히 부각시켰지만 특별히 다른 여자를 사귀었거나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후술되는 아내 콘스탄체와 마찬가지로 사교모임을 즐겼던 덕분에 잘 논다는 이미지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돈 조반니를 한창 작곡 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차르트를 찾아온 자코모 카사노바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오페라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을 정도. 사실 카사노바의 행동이 모차르트가 보기에도 너무 도를 넘긴 했다. <돈 조반니>를 작곡할 당시에도 '꼭 이런 부도덕한 호색한을 주인공으로 해야만 하나'하고 갈등했고, 결국 작곡이고 뭐고 다 때려칠까 하다가 "어차피 오페라의 스토리는 돈 조반니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각본가의 말을 듣고 작곡을 계속했을 정도였다.[55]
6.2. 모차르트와 베토벤
모차르트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보다 한세대 앞선 인물이지만 같은 빈 고전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둘을 서로 자주 비교하는데, 대체로 신이 내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에 반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신체적 약점마저 극복해 낸 '수재' 베토벤이라는 식으로 비교를 한다. 대중적으로는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 베토벤은 하늘로 올라간 천재"''' 라는 말도 있을 정도. 이는 2명 중 누가 낫다라고 우열을 내릴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모차르트 역시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덥썩 명작을 양산했던 것은 아니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작곡가였다.[56] 모차르트 생전에도 이런 평가가 많았는지, 본인의 편지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거야"라면서 푸념했다고 한다.
후에 로시니는 "모차르트는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일생동안 베토벤을 존경한 브람스는 말년에 베토벤이 화성의 깊이와 전반적인 작품성에서 모차르트보다 못하다고 베토벤을 은근슬쩍 까기도 했다. 그만큼 후대의 평가에서 베토벤에 밀릴 게 전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모차르트이다. 애초에 모차르트와 베토벤 둘 중 누가 더 위대하고 누가 밀린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확실한 건 이 두 명은 클래식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작곡가라는 점이다.[57]
하루는 베토벤이 빈 거리를 걷다가 어느 집에서 연주되고 있던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듣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크라머! 크라머! 우리는 절대로 이런 곡을 쓸 수 없을 걸세!"라고 찬탄했다는 일화가 있다.[58]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과 같은 다단조 조성의 곡이며 모차르트의 영향이 이곳저곳에서 드러난다.
6.3.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한 모차르트?
6살의 모차르트는 1차 연주여행에서 당시 합스부르크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던 빈의 궁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장난을 치다 넘어지자 모차르트보다 1살 많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59] 가 일으켜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때 모차르트는 대담하게 공주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혹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당돌하게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더 큰 후에 보자"고 했다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모차르트의 당돌하고 조숙한 귀여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중에 보자고 답해줬을 가능성은 낮다. 당시 유럽의 귀천상혼 관습에 따르면 지배 가문의 자식은 다른 귀족도 안 되고, 오직 다른 왕가의 자식과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지배 가문은커녕 봉신 영주나 가신도 아닌 평민 남성과 공주의 결혼이라는 건...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정치적 조롱을 감당해야 하며, 왕가의 공주가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데 대한 국내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심하면 반란)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60] 그냥 마리아 테레지아가 꼬마 모차르트의 귀여운 제안에 장단을 맞춰준 것에 가까울 것이다. 굳이 귀천상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6살짜리 꼬마의 청혼에는 당연히 장난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왕족급의 귀족들에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절대 아니라 일종의 사업이자 정치였다. 그 정략결혼은 오늘날에도 동서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현대의 경우에 이런저런 차별이 실존한다 해도 일단은 '모든 인간의 평등'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근세 유럽에서는 격에 맞지 않는 결혼(귀천상혼)은 아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졌음을 명심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이 악단을 꾸리자, '돈도 없는데 그런 짓을 왜 해'라고 편지를 보냈다.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국제전쟁과 검소한 성품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긴 통치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6.4. 사기적인 음감
모차르트가 7살이었던 때,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반음 올릴 때와 반음 내릴 때의 음높이가 다른 건가요?"라고 질문했고,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아노를 쳐주며 "그건 네가 잘못 들은 거고 반음을 올리든 내리든 반음만큼의 음높이는 일정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온음, 반음 개념을 초월하여 음을 18등분해서 들을 수 있었던 컴퓨터급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5/18반음(27 cents)과 4/18반음(22 cents)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음감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한 상대음감 능력이라 볼 수 있다.
당대 바로크 시대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표준적인 조율방식이 아니었으며, 음계를 구성하는 비율 뿐 아니라 기준음의 기저주파수 자체가 연주회 장소마다 달랐다. 구체적으로 현대음악에서 A4=440 Hz인데 17세기의 베니스에서는 465 Hz, 18세기 프랑스는 392 Hz, 독일은 415 Hz였으며,[61] 교회는 반음[62] 낮은 튜닝을, 연주회장은 반음 높은 튜닝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현대음악에서 의미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는 엄청 괴로운 음악적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연주회 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가 매번 가는 곳마다 오케스트라를 갈아 뒤엎고 하프시코드까지 새로 두드려 맞추지 않은 이상 예민한 상대음감이었을 수 있다.
6.5. 난무하는 모차르트 관광지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더불어 관광지와 기념관/박물관을 마구 양산하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25년이나 살았던 그의 생전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잘츠부르크가 정작 그의 사후에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란 이름으로 매년 막대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모차르트가 이 작은도시 하나 벗어나려고 엄청나게 발버둥 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러니. 여튼 국제 모차르트 재단 본부도 여기 있으며 음악대학의 이름은 아예 라틴어로 모차르테움(Mozarteum)이라고 지었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 도시가 되면서 정말 불쌍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전술한 요제프 하이든의 아우인 미하엘 하이든(1737~1806).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지 못해 안달을 냈던 모차르트와 달리 무려 43년간 잘츠부르크에서 충성스럽게 음악활동을 했고 잘츠부르크에 있던 시절의 천방지축 모차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였다. 당시 콜로레도 대주교가 모차르트를 별 망설임없이 내쫓았던 것도 미하엘 하이든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잘츠부르크 시민들 상당수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정도니 정말 안습. 하긴 하이든이라면 형 요제프 하이든은 유명해졌지만 미하엘 하이든은 왠만한 사람은 모르는 판국이긴 하다. 조국 오스트리아나 잘츠부르크도 이러는 판국. 이러다보니, 현재 잘츠부르크에는 미하엘 하이든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고사하고 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경인데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혹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는 모차르트팬이 있다면, 모차르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미하엘 하이든에게 마음 속으로 안부라도 전하고 오자.
일전에 잘츠부르크는 동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도 캐치프라이즈는 '모차르트의 고향'이었다. 이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에 관련된 기념품 이것저것 많은데 특히 모차르트 초콜릿 혹은 모차르트 봉봉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 쿠겔'''이 유명하다. 1890년 파울 퓌르스트(Paul Fürst)라는 사람이 개발한 초콜릿으로, 오리지널 모차르트 쿠겔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내수공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지며 미라벨이나 레버 등 다른 브랜드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도 있다. 물론 오리지널은 잘츠부르크 현지에서만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많이 보이는 모차르트 얼굴 찍힌 초콜릿은 다 미라벨 같은 데서 만든 유사품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도시가 바로 프라하. 현재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머물렀거나 다녀간 곳이 모조리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되어 있다. 실제로 생애 후반에 모차르트는 오히려 빈보다 프라하에서 더 각광을 받았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비롯해서 교향곡 38번(일명 프라하)이나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등의 중요한 작품들이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현재에도 프라하는 모차르트 생전부터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준 도시였다는 이유로 '모차르트 도시'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좀 오바스럽기는 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도 대부분 프라하에서 이뤄졌다.
한편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에서도 해마다 음악회가 벌어지는데, 이곳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딱 하나 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여행 도중 마차의 말을 갈아타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다는 것.''' 실제로 이곳은 잘츠부르크가 인접한 오스트리아의 국경과도 가까운 동네이기도 하다.
독일 남서부 만하임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이 도시에 며칠 거주하는 동안 미사를 드렸다는 표지석이 붙어있다.
그런데 각 도시들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우습게 보는 도시가 있는데 바로 빈. 당연히 빈에도 모차르트와 관련된 기념시설들이 넘쳐난다. 또한 모차르트 외에도 베토벤, 슈베르트 등 세계 음악사를 빛낸 여러 대작곡가들이 모두 빈에서 주요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아마 만하임이나 로텐부르크 수준으로 이들이 거쳐간 곳을 마구 기념했다가는 아예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 되버릴 것이다.
사실 유명인이라면 이런 게 흔하다. 베토벤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베토벤의 고향 본과 일생 대다수를 살다가 간 빈이 서로 베토벤의 고향이라며 홍보하듯이 모차르트나 슈베르트,하이든 등등 유명 음악가들도 여러 도시가 이렇게 홍보한다.
1991년, 그의 사망 200주기를 기념하여 전세계적인 모차르트 열풍이 불어닥쳤다. 우리나라에선 남양유업의 꼬모란 유산균 요구르트 광고에 모차르트의 초상을 CG로 입히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했던 배한성의 '모차르트도 넘어간 맛'이라는 나레이션까지 삽입된 광고까지 나왔었다.
6.6. 콘스탄체와 파혼할 뻔 했던 모차르트
연애시절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양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독하게 지냈던 잉꼬커플이었지만 한 때 파혼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이유는 모차르트의 질투 때문이었다. 1782년 봄 경에 어떤 파티에 참석한 두 연인은 사람들과 게임을 했는데, 콘스탄체가 내기에 져서 어떤 젊은이가 콘스탄체의 엉덩이 사이즈를 재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벌이 실제 실행되자 이를 장난으로 받아넘기지 못한 모차르트가 완전 빡쳐버렸다.[63]
당연히 파티가 끝나고 둘은 큰 싸움을 벌였고 이 사소한 일로 인해 급기야는 파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행히 얼마 간의 냉각기 끝에 모차르트의 화가 풀려서 파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6.7. 리히노프스키 공작과의 소송
베토벤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리히노프스키(1761-1814)공작이 모차르트와도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모차르트와 리히노프스키는 같은 프리메이슨 소속으로 관련 모임에서 종종 만난 적이 있었다. 1789년 모차르트는 베를린 연주여행때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동행하기도 했다.
1789년경 공작은 모차르트에게 거액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씀씀이가 헤펐던 모차르트는 이 돈을 갚지 못했고, 공작은 이 돈을 받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오스트리아 법원은 1791년 11월 이 돈을 갚으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선고가 내려진지 한달도 안돼서 모차르트가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채무 변제도 흐지부지 되었다. 다만 모차르트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황궁에서 후원 차원에서 빚의 일부를 갚아주었다고 한다.
7. 죽음을 둘러싼 의혹
7.1. 모차르트의 죽음
모차르트는 한참 명성을 구가하고 있던 35세 나이에 급사한다. 40살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천재는 단명한다'라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 인물. 뭐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모차르트는 평균은 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평균의 함정으로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너무 높아서[64] 청년기를 맞이한 사람치고 단명한 것은 맞으므로 전체 평균에 대입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인간은 히드라처럼 전 생애에 걸쳐 사망률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만 1세 이전 사망률이 매우 높고 아동기 후반에서 청소년기 초반으로 갈 때 가장 사망률이 낮으며,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갈수록 사망률이 증가하고, 노인기에서는 예외없이 전부 죽는 형태다. (대체적으로 60세 전후가 당시 수명)
모차르트는 병에 걸린 지 15일 만에 사망했는데, 주치의는 모차르트가 죽을 당시의 상태만 가볍게 기록하고 부검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고, 추측만 무성했다. 사인은 '열과 발진, 사지통(四肢痛)'.
7.2.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독살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많이 퍼져 있다. 한국에서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4)가 크게 히트하면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설이 널리 퍼녔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살리에리가 살아있을 때부터 있었던 소문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독살했다는 주장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희곡에서 다루어지며 1898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Mozart et Salieri)》(1898)를 작곡하기도 했다. 20세기에서는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1979)와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전술한 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들에게 살리에리 독살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피터셰퍼의 희곡(및 영화)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의 음악활동을 방해하고 심적 압박을 가해서 죽게 만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1823년 11월, 베토벤의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65] 는 당시 노환으로 투병중이던 살리에리를 만나 그 소문에 대한 진실까지 질문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살리에리는 처음에 면회를 거부했으나,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그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모셀레스는 의사와 살리에리의 딸 요청으로 그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요구대로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모셀레스는 베토벤에게 이걸 이야기했는데, 비서인 안톤 쉰들러[66] 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를 미워하고 말이라는 칼로 그를 상처낸 범인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말했다. 이에 모차르트, 살리에리 모두에게 음악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베토벤은 "나로선 누가 범인이니 뭐니 구분할 생각이 없거니와, 살리에리를 믿는다"고 의견을 밝히며 그 소문을 못미더워했다."모차르트를 죽도록 싫어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죽는데 난 털끝만큼도 그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나에게 그런 오명은 반갑지 않다."
또한 살리에리는 당대에는 빈에서 가장 잘나가는 음악가였으며 영화에서는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75살로 죽기 1년 전까지 비인 황궁의 악장으로 재직했을 정도로 한평생을 평온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는 당시 빈에서 19세기 초반까지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후에 대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많은 젊은 음악학도들을 가르쳤는데, 심지어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도 살리에리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최근의 연구결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서로 불편한 관계이긴 했지만 철천지 원수지간 까지는 아니었으며 상황에 따라 서로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는 그런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보았다시피 그는 일에 매달리다가 몸 관리를 못해서 사망했으며 살리에리는 딱히 모차르트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자세한 것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항목으로.
단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 였다. 당시 모차르트 살해 의혹을 받은 사람들은 살리에리 말고도 대법원장, 궁중대신들, 귀족, 다수의 음악가들도 포함되었이었다. 그러다가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그리고 영화 아마데우스가 이를 진실이냥 표현시켜 그 오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7.3. 죽음의 원인에 대한 현대의학적 관점
2001년 전염병 전문가 Jan V Hirschmann, MD가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돼지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인 선모충증이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돼지고기를 날로 먹거나 덜 익혀 먹었을 경우 걸리며, 고열이 나고 근육통을 일으키며 쇠약해지는, 지금도 적합한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바로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찌나 돼지고기를 좋아했던지, 아내 콘스탄체에게 돼지고기를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모차르트가 병에 걸리기 44일 전에 보낸 편지. 선모충증의 잠복기는 약 50일이다. 비록 선모충증 이론이 모차르트의 증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병의 진행 과정을 고려해 볼 때, 특히 선모충 감염의 최종 단계인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사랑하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내가 지금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알겠소?
바로 포크 커틀릿이지. 어찌나 맛이 좋은지!
나는 당신의 건강을 축원하며 먹는다오.
사실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오랜시간 관심을 끌고 온갖 설이 난무하는 주제로, Faith T Fitzgerald, MD는 Mozart의 사망원인에 대해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하여 논문도 발표했다. 위의 BBC 기사에서 Dr. Fitzgerald는 선모충증 이론이 '150개의 가설더미 위에 그냥 하나 더 얹은 것 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의 진단은 "acute rheumatic fever, with carditis, polyarthritis, erythema marginatum, and possibly, chorea"(...)라고 한다.[67]
모차르트의 가계에서 어떤 단명에 관한 유전적 요인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의 누나인 마리안네, 아버지 레오폴트, 그리고 그의 막내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가 전부 환갑을 넘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 학자간에서 이견이 그나마 없는 죽음의 원인으로는 모차르트 그 자신이 몸을 막 다루었다는 사실이 있다. 모차르트는 주스가 되었든 물이 되었든 술이 되었든 과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결정타는 마지막 해 1791년, 오페라 2곡을 동시에 작곡하면서 레퀴엠까지 떠안은 결과 나타난 과로였다.
모차르트 부검 결과에는 '속립진열(粟粒疹熱: 발열과 발진을 동반한 급성 질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병으로 인한 증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여동생이 전하는 기록이다. 그녀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크게 기침을 하더니 검은 밤색 액체를 뿜은 뒤 쓰러졌다.
7.4. 그의 장례식
명성과는 달리 장례식에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친척들을 포함한 일부만이 참석했는데, 눈보라가 치는 기상여건속에서 모두 빨리 돌아가 버리고 매장자 홀로 묘지로 향했다는 섬뜩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유해는 빈 외곽에 위치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묘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빈의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던 베토벤의 장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그런데 이런 모차르트의 장례는 원래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가 그랬던 것을 생각할 때, 결코 초라하거나 막 치러진 게 아니다. 시신이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진 게 아니다. 다만 매장지까지 아무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칙에 따라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르는 데다, 사후 묘지 관리도 좋지 않아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 시절 황제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로서 사회 전반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시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장례절차에 관한 규정이었다. 요제프 2세는 전염병에 따른 피해를 막고자 '''전염병으로 죽었거나 죽었다고 의심되는 환자의 사체는 반드시 개인매장이 아닌 공동묘지에''' 묻도록 했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 반대함에 따라 개인매장을 허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나중에 잡혔지만, 그 때 '''티푸스 의심 환자로 보였던 모차르트는 전혀 없었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서 모차르트는 12구 가량을 공동 매장하는 곳에 묻혔고,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한해선 영화 <아마데우스>의 묘사대로다. 하지만 이건 아내가 무슨 돈을 엉뚱한 데 쓰고 다니느라 돈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 법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물론 앞서 설명했듯이 사진 속의 위치에 모차르트가 묻혔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공동묘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을 반영해서 세워졌을 뿐이다. 성묘를 가는 이들이 있다면, 착오 없기를.
이후 DNA 분석을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까지 동원하는 등의 엄청난 노력을 들여 시신을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전혀 진전이 없다. 남아있는 건 적갈색인 그의 머리카락 일부분.
8. 이름
그의 성 ''''모차르트(Mozart)''''는 모첸(motzen, 남부 독일 방언: motschen)과 하르트(hart)의 합성어인 '모츠하르트(Motzhardt)'의 변형으로, 뜻은 '험담하는 사람' 혹은 '조잡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주장과, 중세 고지 독일어로 습지를 의미하는 모스(mos)와 하르트(hart)의 합성어라는 주장이 있다.[68] 아쉬운 것은, Mozart(Mozahrt)가 기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 14세기이므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더 자세한 추측은 어렵다는 점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로 굳어졌지만, 생전에 그가 성인이 된 후 사용했던 이름은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였다. 이름의 미들네임이 고틀리프에서 아마데우스로 바뀌게 된 것은 그의 사후 미망인인 콘스탄체 때문이었다. 그밖에 어렸을 때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연주여행을 했기 때문에 각국 언어 관습에 따른 다양한 버전으로 이름이 각색되기도 했으며, 모차르트 본인이 성년이 되면서 본인의 취향이 반영되기도 했기 때문에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이다. 세례명의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Wolfgangus Theophilus)' 부분을 독일식인 '볼프강 고틀리프(Wolfgang Gottlieb)'로 고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 Gottlieb Mozart)''''를 일반적으로 모차르트의 풀네임으로 본다. 풀네임에서 첫 두 이름을 뺀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에서 독일식의 고틀리프(Gottlieb)를 라틴식으로 바꾼 아마데우스(Amadeus)를 채용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현재 굳어졌다.
풀네임에서 생략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ysostomus)''''는 '황금의 입'으로 알려진 교부(敎父)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69] 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볼프강(Wolfgang)''''은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던 고향의 호수 이름[70] 에서 따온 것이다. 지명이 아니더라도 볼프강은 독일어권에서 남자 이름으로 흔히 사용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테오필루스(Theophilus)''''는 대부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라틴화된 그리스어이다. 뜻은 '신의 사랑을 받은 자(Theo-Philus)'라는 의미이며 이를 독일식으로 쓰면 고틀리프(Gottlieb, Gott-Lieb), 이를 다시 라틴식으로 쓴 것이 아마데우스(Amadeus, Ama-Deus)였다.
모차르트가 성년이 된 후 그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독일식인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라 표기되었다. 모차르트 생전에 열린 콘서트 포스터에는 거의 모두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라고 표기되어 있다. 프라하 등에서 열린 콘서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장난기가 많았고 언어유희를 좋아했던 모차르트는 사적인 편지에서 ''''아마데(Amadé)''''라는 프랑스식 이름도 즐겨 썼다. 이러한 표현은 대부분 가족이나 지인과의 편지에서 사용되었고,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은 사실상 없었다. 모차르트가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정식 라틴어 표기를 사용한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마데우스를 쓴 경우에도 ''''우올프강구스 아마데우스 모차르투스(Wolfgangus Amadeus Mozartus)''''라는 식으로 이름 전체를 라틴어로 표기했는데, 이는 재미로 고대 로마식 이름을 흉내내서 써본 것이며, 결코 대외적으로 정식으로 사용한 이름은 아니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생전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라고 표기한 적은 1787년 5월 단 한번 있다고 한다.
이렇게 생전에 공식적으로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였던 그의 이름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라고 바뀌게 된 것은 그의 사후, 그의 작품의 판권을 상속받아 소유하고 있던 미망인 콘스탄체의 개인적 의지 때문이었다. 미망인 콘스탄체는 모차르트 서거 직후부터 자신의 공식적인 서명으로 '콘스탄츠 모차르트(Konstanz Mozart),[71] 결혼 전 베버(Weber), 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미망인'이라는 서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콘스탄체의 서명과는 관계없이 모차르트 추모 콘서트를 포함해서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라는 표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차르트 서거 후 1798년 그 유명한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서 모차르트 미망인 콘스탄체의 허가를 받아 모차르트 전 작품을 악보로 출판했는데, 이 때 모든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72]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라틴식 미들네임이 사용된 것은 모차르트 전 작품의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미망인 콘스탄체의 의사가 반영되었다고 보여지고 있다. 악보계의 바이블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사에서 출판된 모차르트 악보가 유럽 각지에서 사용되면서 이 이름이 완전히 굳어지게 된 것이다.
되도록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올바른 한글 표기이다.[73] 하지만 '모'''짜'''르트'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외래어 표기법이 정착되기 전인 1980년대만 해도 이 명칭이 더 흔하게 쓰였다.
한국의 경우 모제도(慕帝道)라는 음차한 이름도 있었으며 해방 직후까지 이 음차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9.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
9.1.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74] 회원이었고, 자신이 속한 지부의 Master Mason이 되기까지 헌신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75] 말년에 모차르트의 경제 상황이 넉넉지 않았을 때 그는 프리메이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76] 모차르트 사후 모차르트의 가족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또한 프리메이슨은 모차르트의 음악 활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마술피리를 통해 누설하여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당시 프리메이슨 서약에는 "나는 정화시키며 비밀을 지킨다. 어기면 내 목을 자르거나 혀를 내 머리에서 뽑는다."라는 조항이 있긴 하였다. 그러나 마술피리의 총책임자인 에마누엘 쉬카네더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고, 그는 1812년에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뜬다. 그래서 모차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모차르트가 죽은 지 3년 후인 1794년, 프리메이슨 결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결국 사라지고 만다.[77]
9.2. 프리메이슨 음악
그는 프리메이슨을 위해 상당한 수의 작품을 작곡했고, 이들 상당수가 작품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프리메이슨 음악들은 형식적이고 율동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음악들 모두가 프리메이슨을 위하여 작곡된 곡들은 아니다. 이중에는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사용된 음악들도 포함되어 있다.
- K. 53 An die Freude
- K. 93 De Profundis Clamavi.
- K. 148 O Heiliges Band
- K. 273 Sancta Maria, mater Die
- K. 345 Thamos, König in Ägypten
- K. 410 Canonic Adagio for 2 Basset Horns & Basson
- K. 411 Adagio for 2 Clarinets & 3 Basset Horns
- K. 429 Dir, Seele des Weltalls.
- K. 468 Gesellenreise
- K. 471 Die Mauerfreude [78]
- K. 477 Mauerische Trauermusik [79]
- K. 483 Zur neugekrönten Hoffnung
- K. 484 Zur gekrönten Hoffnung
- K. 543 Symphony No. 39
- K. 546 Adagio and Fugue in C Minor
- K. 617 Adagio & Rondo for Glass Harmonica in C Minor
- K. 618 Ave Verum Corpus
- K. 619 Die ihr des unermesslichen Weltalls Schöpfer ehrt
- K. 620 Die Zauberflöte[80]
- K. 623 Laut verkünde unsre Freude
- K. 626 Requiem[81]
10. 매체에서의 등장
10.1. 영화
10.2. 뮤지컬
10.3. 게임
- 모바일 게임 Fate/Grand Order의 서번트로 등장했다. 클래스는 캐스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Fate 시리즈) 문서로.
10.4. 애니메이션
- 애니메이션 클래시컬로이드에 출현했다. 자세한 것은 모차르트(클래시컬로이드) 문서로.
11. 기타
- 스펀지에 따르면 거꾸로 봐도 연주되는 카논이 있다고 하며 이를 '역행 카논'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흐도 <음악의 헌정>에서 이 역행 카논을 사용한 적이 있다. 또한 주사위로도 작곡을 한 적이 있었는데, 먼저 악보를 만든 다음 주사위를 던져서 해당하는 악보를 정리해서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16개의 미뉴에트를 이런 형식으로 만들 경우 무려 1,518,999,334,332,964가지가 가능하다고 한다.
- 유네스코에서는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모차르트 메달을 수여한다.
- 2016년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 한국에서 빅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모차르트의 영향력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이어 2위로 나타났다.
- 모차르트 vs 인공지능 작곡 대결을 한 적이 있다.
- Falco의 Rock me Amadeus에서는 그의 일생이 간략하게 묘사됐는데, 영어 가사로 되어 있다.
- 오스트리아와 독일 두 나라에서 서로 자기 나라의 음악가로 주장하는 인물인데, 출신국을 기준으로 보면 오스트리아지만 주로 활동한 나라는 독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차르트를 독일 음악가라고 하면, 오스트리아 사람이 그는 자국 음악가라며 강하게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정치를 한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하면 불편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