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고르타리[1]
Carlos Salinas de Gortari, 1948.4.3 ~
멕시코의 정치인으로,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인물.
1. 생애
2. 정치 활동
3. 1988년 대통령 선거
4. 대통령
5. 퇴임 이후
6. 여담


1. 생애


멕시코시티에서 경제부 장관을 지낸 라울 살리나스 로사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4세 때인 1951년 집에서 식모로 일하던 마누엘라에게 총격을 가해 죽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 아직도 끔찍한 일로 기억되는지 훗날 이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 시절에는 제도혁명당의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동시에 승마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71년 팬아메리칸 게임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1970년대에는 미국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관료 출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이에다가 미국 유학파라는 점은, 멕시코에서는 남다르게 여겨지는데 살리나스는 그러한 이 중 하나였다.

2. 정치 활동


이러한 출신 배경은 살리나스가 유능한 인재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2년 새로 취임한 미겔 데 라 마드리드가 그를 방송예산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으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개시했다. 당시 나이가 단 34세였는데, 이러한 나이에 장관으로 오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뛰어난 수재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다만 이러한 경험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살리나스는 국회의원을 한 번도 지낸 적이 없었는데, 이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였다. 애초에 정치세계에는 갈등과 비난, 공세 등이 비일비재하며 아무리 잘해도 적이 꼭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인데, 원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에 익숙하다보니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잘 아는 편이다. 그런데 관료 성향이 강했던 살리나스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후에 대통령에 오르고도 각종 문제점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라 되었다.
원내 경험이 있으면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 뿐 아니라 일단 최소 4년 정도는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각 정당에 아는 얼굴이 생기고 인맥이 생기면서 원내정당들이 선을 넘어서서 함부로 대하는 일이 적어지는 일도 있다. 당장 어떤 정당 정권이든 상관없이 한국에서도 국회의원 출신인 장관 후보자 청문회와 일반인 출신 장관 후보자 청문회의 청문회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는것이 하나의 예다. 실제로 임기 내내 얼굴을 맞대고 협의를 하면서 사람 자체가 익숙해짐과 동시에 협상을 하면서 연결고리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 하지만 국회의원 경험이 없다면 그냥 타인이고 공격대상일 뿐이다.

3. 1988년 대통령 선거


1987년 10월 5일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 장관직을 사임했다. 곧바로 경선에 뛰어들어 제도혁명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는데, 이 때 나이가 단 40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연소 대통령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전에 대통령을 지낸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39세에 취임했기 때문. 여하튼 당시만 해도 제도혁명당의 1당 독주체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살리나스가 가볍게 낙승할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제도혁명당이 우경화하면서 이에 반발한 진보/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탈당해 국민민주전선을 창당하면서 상황이 불안하게 흘러갔다. 사실 1982년 대선에서 국민행동당파블로 에밀리오 마데로 후보가 처음으로 15% 이상을 득표해 미미하게나마 불안조짐이 보이기도 했으나, 그래도 당시에는 제도혁명당이 가볍게 낙승했으므로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도혁명당에서 이탈한 세력들이 급격하게 몸을 불리면서, 일각에서는 60%는커녕 과반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국민민주전선이 라사로의 아들인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를 후보로 선출하면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원내 경험이 없는 순수 관료 출신인 살리나스는, 상원의원 출신에다가 미초아칸의 주지사를 지내 행정 경험이 풍부했던 콰우테목에 비해 불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때문에 대선은 박빙으로 흘러갔다.
투표 결과 살리나스는 50.7%를 득표해 바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거꾸로 콰우테목은 31.1%만을 득표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문제가 많았는데, 초기 개표에서는 콰우테목이 우세를 보였고 개표 중반까지도 이 기세가 이어졌는데 정권교체가 예고된다는 소식에 당황한 제도혁명당에서 의도적으로 정전을 시킨 후에 투표함 바꿔치기 전술을 통해서 자당 후보를 50%를 겨우 넘는 득표율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후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마드리드 대통령은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이 선거가 부정선거임을 시인하고 당시에 사용되었던 투표용지는 1991년에 전부 소각했다고 밝혔다.
비록 부정선거로 이기긴 했으나 개표 초반까지 제도혁명당 후보가 아닌 야당 후보가 앞섰던 것은 멕시코에서 엄청난 일이었고 부정선거로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이후 선거개혁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야권의 세가 넓어지는 계기도 되었다.

4. 대통령


살리나스는 경제 전문가로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처음에는 국부에 가까운 칭송을 받았다. 선거 전부터 미국NAFTA 협정을 체결할 것을 공약했고, 이를 바탕으로 임기 말인 1994년 1월 1일 미국과 FTA를 정식으로 체결한다.
'''그런데 이게 독이 되고 말았다.''' 당초 살리나스는 이 협정이 멕시코 경제에 플러스 요소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된 것. 안 그래도 제도혁명당이라는 단 하나의 정당이 60년 이상을 장기집권하면서 그로 인한 악습들이 지속되어 왔는데, 나프타는 여기에 결정타를 가하고 만 것이다.
결국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살리나스 정권은 급격하게 레임덕이 걸리고 말았다. 애초부터 턱걸이 과반 득표로 당선된 것만으로도 살리나스 정권은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커다란 실책을 벌였으니, 정권 붕괴는 시간 문제였다.
또한 수많은 멕시코 국영 기업들을 민영화하였는데, 정경유착으로 헐값에 인수 받아 억만장자가 된 사람들만이 이득을 보았다. 대표적으로 카를로스 슬림도 이때 국영기업을 인수 받아 빌게이츠와 세계 최고의 부자 1위를 다투게 되었다.
연임 제한으로 1994년에 물러났지만, 국가 혼란 사태가 발생하면서, 후임자로 내정되어 있던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 후보가 선거 유세 중 의문의 암살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2] 다급해진 제도혁명당은 콜로시오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에르네스토 세디요를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지만, 48.7%밖에 득표하지 못해 처음으로 과반 득표에 실패한다. 그리고 제도혁명당은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5. 퇴임 이후


일단 제도혁명당이 가까스로 정권은 연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살리나스는 집권 당시의 실책이 발목이 잡히면서, 결국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세디요 정권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귀국했지만, 이는 새로 출간한 저서를 발표하려는 차원이었다. 게다가 저서를 통해 세디요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잘했다는 뉘앙스 때문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며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2000년 국민행동당비센테 폭스가 집권하면서, 72년의 제도혁명당 정권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6. 여담


1991년 말레이시아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퇴임 후 세계무역기구 초대 총재 자리를 노렸으나 퇴임 후에 터진 각종 부패 혐의로 결국 낙마, 그리하여 WTO 초대 총재는 레나토 루지에로 이탈리아 상무장관이 지명되었다. 당시 한국은 김철수 당시 상공자원부 장관을 WTO 총재 후보로 내세웠지만 이미 지명도부터 앞의 둘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던지라 김철수 장관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아시아권에서조차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3]
대한민국의 일부 진영에서는 살리나스를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예시
미드 나르코스: 멕시코 시즌2편에 등장한다. 어렸을적 식모 살해사건은 고의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선 고의로 그려진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해 호세 페데리코 베니테스 경찰서장을 비롯한 15명이 의문의 살해를 당했다고 한다. 2018년 멕시코 정부는 콜로시오 암살 사건 파일을 일반에 공개했다.[3] 당시 김철수 장관을 WTO 총재 후보로 입후보시킨 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실패에 따른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김영삼 문민정부의 의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