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사로 카르데나스
'''Lázaro Cárde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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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로 카르데나스 델리오[1]
Lázaro Cárdenas del Río
1895~1970
멕시코의 44대 대통령. 미초아칸 주 출신이며 멕시코 혁명 때 알바로 오브레곤 계열 혁명군에 가담해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권과 싸웠다. 우에르타가 몰락하고 혁명군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오브레곤 진영과 판초 비야&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으로 갈라졌을 때도 나중에 멕시코 대통령이 될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Plutarco Elías Calles)[2] 와 함께 오브레곤 세력을 지지했다.
혁명전쟁이 끝나자 카르데나스는 군대에 남아서 우에르타 잔당 및 가톨릭 반란군[3] 을 진압하다가 카예스가 만든 제도혁명당에 입당했고 1934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된다. 당시 카예스는 1924년에 오브레곤이 가톨릭 광신도 호세 토랄에게 암살당하자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승계받은 후, 임기가 끝난 후에도 자신이 다루기 쉽다고 판단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비선실세 비슷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당연히 카예스는 카르데나스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지만 카르데나스는 카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어서 토지 개혁 및 노동자 처우 개선, 지방 카우디요 권력 축소와 같은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카예스파와의 내부 정쟁에서 승리하여 카예스는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4]
남은 재임 기간에 카르데나스는 의무교육 확대, 석유 국유화[5] , 군인 처우 개선, 토지개혁과 같은 개혁 정책을 실시했고 1940년에 동료인 마누엘 카마초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우파 후보인 후안 알마산을 꺾고 당선되자 카마초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은퇴 후에도 제도혁명당의 조언자 역할을 했고, 미국의 쿠바 정부 전복 시도와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도 벌였다가 향년 75세의 나이로 1970년에 사망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멕시코의 산업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멕시코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만든 기반을 쌓아올렸다는 평을 듣고 있다. 포퓰리즘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이나 브라질의 바르가스와는 달리 멕시코가 부침없이 상당히 장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덕택에 그 정도는 약한 편이고 멕시코에서 존경받는 대통령 순위권에 꼭 드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과 이에 관련한 문제점을 인정하였고,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막식을 하루 앞두고 벌어진 틀라텔로코 학살사건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우경화 되어가는 제도혁명당에 반발하여 여러 좌파정당들과 연합하면서 민주혁명당을 창당했고[6]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부정선거 때문에 초반개표에서 앞섰음에도 제도혁명당 후보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에게 낙선했고, 이후로도 1994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서 대선 출마를 했지만 결국 3위로 낙선당하며, 무관의 세월을 보내야했다.[7] 그래도 멕시코 좌파의 대부로 많은 존경을 받는 편이며 오브라도르에게 선배이자 은사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AMLO의 승리를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그리워하는 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임자 알바로 오브레곤과 플루타르코 카예스가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급진 가톨릭 크리스테로 반란군을 사면하는 등 정치적으로 필요할 땐 유연함도 보였으나 근본적으로 멕시코 혁명 시절 겪은 급진주의적 좌파 국제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서 스페인 내전 당시 열강도 아니었던 멕시코의 국력으로 온갖 생색과 깽판을 쳤던 소련과 달리 비교적 순수한 조건으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중과부적으로 공화국이 패전한 이후 전 세계로 좌파, 민주주의자, 세속주의자 스페인 망명객들이 퍼지자 이들을 많이 받아들여 전후 영화, 문학 등 멕시코 문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참고자료: 백종국 저 <멕시코 혁명사>
1. 멕시코 전 대통령
[image]
라사로 카르데나스 델리오[1]
Lázaro Cárdenas del Río
1895~1970
멕시코의 44대 대통령. 미초아칸 주 출신이며 멕시코 혁명 때 알바로 오브레곤 계열 혁명군에 가담해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권과 싸웠다. 우에르타가 몰락하고 혁명군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오브레곤 진영과 판초 비야&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으로 갈라졌을 때도 나중에 멕시코 대통령이 될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Plutarco Elías Calles)[2] 와 함께 오브레곤 세력을 지지했다.
혁명전쟁이 끝나자 카르데나스는 군대에 남아서 우에르타 잔당 및 가톨릭 반란군[3] 을 진압하다가 카예스가 만든 제도혁명당에 입당했고 1934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된다. 당시 카예스는 1924년에 오브레곤이 가톨릭 광신도 호세 토랄에게 암살당하자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승계받은 후, 임기가 끝난 후에도 자신이 다루기 쉽다고 판단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비선실세 비슷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당연히 카예스는 카르데나스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지만 카르데나스는 카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어서 토지 개혁 및 노동자 처우 개선, 지방 카우디요 권력 축소와 같은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카예스파와의 내부 정쟁에서 승리하여 카예스는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4]
남은 재임 기간에 카르데나스는 의무교육 확대, 석유 국유화[5] , 군인 처우 개선, 토지개혁과 같은 개혁 정책을 실시했고 1940년에 동료인 마누엘 카마초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우파 후보인 후안 알마산을 꺾고 당선되자 카마초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은퇴 후에도 제도혁명당의 조언자 역할을 했고, 미국의 쿠바 정부 전복 시도와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도 벌였다가 향년 75세의 나이로 1970년에 사망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멕시코의 산업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멕시코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만든 기반을 쌓아올렸다는 평을 듣고 있다. 포퓰리즘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이나 브라질의 바르가스와는 달리 멕시코가 부침없이 상당히 장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덕택에 그 정도는 약한 편이고 멕시코에서 존경받는 대통령 순위권에 꼭 드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과 이에 관련한 문제점을 인정하였고,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막식을 하루 앞두고 벌어진 틀라텔로코 학살사건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우경화 되어가는 제도혁명당에 반발하여 여러 좌파정당들과 연합하면서 민주혁명당을 창당했고[6]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부정선거 때문에 초반개표에서 앞섰음에도 제도혁명당 후보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에게 낙선했고, 이후로도 1994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서 대선 출마를 했지만 결국 3위로 낙선당하며, 무관의 세월을 보내야했다.[7] 그래도 멕시코 좌파의 대부로 많은 존경을 받는 편이며 오브라도르에게 선배이자 은사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AMLO의 승리를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그리워하는 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임자 알바로 오브레곤과 플루타르코 카예스가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급진 가톨릭 크리스테로 반란군을 사면하는 등 정치적으로 필요할 땐 유연함도 보였으나 근본적으로 멕시코 혁명 시절 겪은 급진주의적 좌파 국제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서 스페인 내전 당시 열강도 아니었던 멕시코의 국력으로 온갖 생색과 깽판을 쳤던 소련과 달리 비교적 순수한 조건으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중과부적으로 공화국이 패전한 이후 전 세계로 좌파, 민주주의자, 세속주의자 스페인 망명객들이 퍼지자 이들을 많이 받아들여 전후 영화, 문학 등 멕시코 문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참고자료: 백종국 저 <멕시코 혁명사>
2. 지명
- 라사로 카르데나스(미초아칸) : 미초아칸 주 동남부에 있는 해안도시.
- 라사로 카르데나스(킨타나 로오) : 킨타나 로오주 서북부에 있는 광역권. 홀복스가 이쪽에 속해있다.
- 라사로 카르데나스(틀락스칼라) : 틀락스칼라주에 있는 광역권.
2.1. 교통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본명은 프란시스코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캄푸사노 (Francisco Plutarco Elías Campuzano).[3] 대통령에 취임한 오브레곤과 카예스는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때 가톨릭 반란군과 멕시코 정부군의 전쟁을 크리스테로 전쟁이라고 부른다.[4] 이후 카예스는 멕시코의 석유 국유화로 미국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미국을 이용해 정권을 탈환하려 했다. 하지만 카예스가 파시스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본 미국 정계는 거리낌없이 카르데나스 정권을 승인했다.[5] 이 때문에 사투르니노 세디요 마르티네스가 카르데나스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에 성공했다.[6] 2014년에 탈당했다. 멕시코 좌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면 대표적인 인물이 콰우테목 카르네나스와 로페스 오브라도르인데 둘다 창립멤버면서 탈당해버렸으니 구심점이 사라진 민주혁명당은 이후 큰 타격을 받았다.[7] 그나마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멕시코 시티 시장을 지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