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리 마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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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름'''
'''코모리 마나미'''
小森まなみ (こもり まなみ)
'''직업'''
성우, 가수, 작가
'''출신지'''
일본 도쿄도 시부야
'''생년월일'''
1959년 10월 16일 (64세)
'''혈액형'''
B형
'''소속사'''
Pro☆Fit
'''활동'''
1980년~2011년, 2019년~
'''관련 사이트'''
공식홈페이지
1. 소개
2. 출연작


1. 소개


일본의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 가수, 성우, 수필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소속사는 Pro☆Fit. '''1959년''' 10월 16일 도쿄 시부야 구에서 태어났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1959년생으로, 모 기묘한 만화가보다 1살 더 많다!'''
아버지는 위암 치료의 권위자였던 내과학자 오구로 야나오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회화나 말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푸는 '마음의 의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어, 2006년부터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괴로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용 가발 회사 '엔젤릭'(アンジェリック)을 설립하고 대표로 취임했다.[2]
[image] [image]
'''동안류 甲'''
좌측 사진이 2010년도 사진이고 우측이 2011년도 사진이다. 이래 봬도 1990년생 대학생 아들이 있으신 어머니. 저 동안 때문에 여러가지 에피소드도 있는 듯.[3]
구글이나 유투브 등에 찾아보면 나오는 사진이나 영상들을 비교해 보면,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등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데 정작 얼굴에서 세월이 비켜가는 걸 볼 수 있다.
84년도 TV출연영상
2000년 키즈스테이션 애니파라 출연영상[4]
대표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mami의 RADI컬 커뮤니케이션과 코모리 마나미의 Pop'n! 파자마 EYE가 있으며, 각각 84년, 95년에 방송 시작한 장수 라디오다. 이 중 Mami의 RADI컬 커뮤니케이션은 09년 10월로 사반세기에 이르는 대장정을 뒤로하고 방송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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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이 mami의 RADI컬 커뮤니케이션 24주년 기념방송 사진. 청취자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될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인기가 많아, 기념 야외 이벤트시에는 수천명씩 모여든다고 한다.
다만 2011년 6월 26일부터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모든 활동을 쉬고 있는데, 2012년 모 생방송에 전화연결로 목소리를 들려준 것 이외에는 2015년 말까지도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공식적인 발표 없이 약 5년여동안 일을 쉬고 있는데, 그 때문에 기존에 하던 것들은 그대로 종영하거나 다른 성우들에게 대타를 맡기고 있다.
그러나 2019년 들어 신작 서적을 집필하고 복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더니 9월 1일부로 정식으로 복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첫 공식활동은 mami의 RADI컬 커뮤니케이션 부활 라디오 생방송.#
참고로 마츠자키 레이의 경우 코모리 마나미를 동경해 성우가 된 케이스라고 하는데, 마나미의 뒤를 이어 쿠라도베리 잼 역할을 맡게 된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을 블루라지에서 토로한 바 있다.[5]

2. 출연작



[1] 참고로 해당 사진은 2019년 9월 22일 촬영된 사진이다. 즉, 이제 60대에 접어든 여인의 사진이다.[2] 아버지의 뜻을 이음과 동시에 동갑내기이자 연예계에서 그녀의 실질적 동지였으나 2004년 위암 발병으로 인한 패혈증성 쇼크로 사망한 오카자키 리츠코에 대한 마음도 가발 회사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코모리 마나미와 오카자키 리츠코는 가족이 둘의 사이를 공인한 절친이었다.[3] 이벤트 후에 신칸센을 타려고 기다리던 역에서 가출소녀로 오인받거나, 친구들과 온천에 갔을때 여종업원이 어린이용 유카타를 갖다 줬다거나 하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4] 당시 40대, 이때 이미 초등학생 아이가 있었다. 40대에 양갈래머리가 이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 참고로 바로 옆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이즈카 마유미는 1977년생으로, 코모리 여사와 18살 차이이다(...) 참고로 이이즈카 마유미코모리 마나미는 아티스트적인 부분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는데 바로 90년대 오카자키 리츠코가 참여해서 제작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음반의 곡들 상당수를 오카자키 리츠코가 작곡했다.[5] 정확하게는 그녀에 대한 동경심과 길티기어에 대한 관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버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