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사카 마코토(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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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No.74
코사카 마코토(小坂誠/Makoto Kosaka)
'''생년월일'''
1973년 7월 2일
'''국적'''
일본
'''출신지'''
미야기와타리야마모토
'''포지션'''
유격수, 2루수
'''투타'''
우투좌타
'''학력'''
미야기 현 시바타 고등학교
'''프로 데뷔
1996년 드래프트 5위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1997~2005)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6~200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9~2010)
'''지도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야수 육성코치 (2011[A])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1[A])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야수 육성코치 (2012~201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4~2016)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내야수비 ·주루코치 (2017)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8[A])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내야수비·주루코치(2018[A])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9~)
'''1997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신인'''
1996년
카네코 마코토
(닛폰햄 파이터즈)

'''코사카 마코토'''
'''(치바 롯데 마린즈)'''

1998년
오제키 타츠야
(세이부 라이온즈)
'''1998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1997년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62도루

'''코사카 마코토'''
'''(치바 롯데 마린즈)'''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43도루'''

1999년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32도루
'''2000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1999년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32도루

'''코사카 마코토'''
'''(치바 롯데 마린즈)'''
'''33도루'''

2001년
이구치 타다히토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4도루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1. 선수 시절



1.1. 치바 롯데 마린즈


미야기현 시바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JR 히가시니혼 도호쿠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그의 재능을 엿본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스카우터 사토 타카오[1]가 야쿠르트 측에 영입을 제안했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2] 거절당하자, 야쿠르트 코치 시절 상관(감독)이었던 치바 롯데 마린즈GM 히로오카 타츠로를 찾아가 '''"키는 작지만 수비범위가 넓은 선수다"'''라며 어필해 코사카의 영입을 제안했고, 이를 히로오카가 받아들여 1996년 드래프트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에 5위 지명으로 입단했다.[3][4]
입단 이후, 프로 첫 해인 1997년부터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아 위의 사토 타카오가 기록했던 46개를 뛰어넘는 '''신인 한 시즌 최다도루 기록'''인 56도루를 달성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도루왕 2회(1998, 2000), 골든글러브(NPB)를 4번(1999 ~ 2001, 2005)이나 수상하고 최다 희생타를 2번, 최다 3루타를 4번이나 기록하는 등 빠른 발과 좋은 수비력을 자랑하며 치바 롯데 마린즈의 부동의 유격수로 활약한다. 특히나 1998년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기록한 '''40도루 - 40희생타'''는 그 백미.
니시오카 츠요시가 입단 후 코사카의 수비 모습을 보고 기가 죽기도 했지만, 2005년 유격수 코사카 - 2루수 니시오카의 키스톤 콤비를 이뤄 그 해 팀을 31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데 일조했다. 다만 그 해 포스트시즌에선 니시오카가 주로 유격수로 나오는 바람에 코사카는 활약은커녕 출전 기회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엔트리에 들어서 우승반지를 끼긴 했다는게 그나마 위안이지만..[5]
2005년 시즌 종료 후, 현금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6][7] 코사카가 떠나면서 니시오카는 2루수에서 유격수로 보직을 바꾸며 주전 정착에 성공. 2루수와 유격수 포지션에서 모두 맹활약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2. 요미우리 자이언츠


당시 요미우리에는 니오카 토모히로라는 공격형 유격수가 버티고 있었기에 코사카는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겼는데, 타율이 1할대에 머무르는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입지가 대폭 줄어들었다. 2008년 니오카가 개막전에서 종아리 부상을 당하며 유격수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도 그 자리는 신인 사카모토 하야토에게 주어졌고, 결국 코사카는 2008년 시즌 종료 후 고향인 센다이를 연고로 하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했다.

1.3.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입단 첫 해인 2009년, 코사카는 백업 멤버로써 주전 내야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 이탈을 대신 메꿔주는 등의 활약을 하며 팀의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2010년 시즌엔 추간판 헤르니아(허리디스크) 등으로 인해 출장기회를 얼마 잡지 못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코치 부임을 결정하였다.

2. 지도자 경력


은퇴 후 곧바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코치로 취임해 2013년까지 근무했고, 이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직을 맡았다가 2018년 고향팀 치바 롯데 마린즈 코치로 복귀해 활동중이다,

3. 플레이 스타일


167cm, 63kg라는 작은 체구에다가 타격도 돋보이지 않았지만(통산 타율 .251), 빠른 발과 견실한 수비 능력으로 이를 만회했던 선수.[8] 특히 골든글러브 4회 수상이 말해주듯 유격수 수비에 있어서는 일본 최고라고 할 정도의 선수였다. 그가 2002년에 기록한 유격수 수비율 .994는 2016년 현재까지 퍼시픽리그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또한 첫 2년을 제외하고는 수비율 .980 아래로 내려가본 적이 없는 수비에 있어서는 본좌. 일본 언론이 다른 유격수보다 넒은 그의 수비범위를 '코사카 존'이라고 따로 부를 정도다.[9]
전성기 시절에는 마츠이 카즈오와 수비, 주루 부문에서 라이벌 관계였지만, 마츠이에 비하면 타격이 매우 부족하고 수비에서도 화려한 맛은 덜했던데다 비인기구단인 롯데에 오래 재적한 탓에 조금 묻혀버린 감이 없잖아 있다(...).
마츠이와의 에피소드로 둘 간의 도루왕 경쟁이 있었던 1998년, 10월 12일 시즌 최종전에 있었던 고의 보크 사건이 있다. 세이부와 롯데가 직접 맞대결을 했는데, 이미 세이부가 10월 7일 킨테츠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승리하면서 리그 우승을 결정지었고, 롯데도 그 즈음 최하위(...)[10]로 순위가 결정되었는지라 이미 순위 경쟁은 의미가 없고, 코사카와 마츠이 중 누가 도루왕을 차지하냐가 중요 사안이었는데, 3연전의 2차전 경기에서 마쓰이가 한 경기 도루자 3회[11]를 기록하는 등 타이틀 경쟁이 과열 양상에 있었다. 최종전인 10월 12일 경기의 7회초, 코사카가 43도루. 마쓰이가 42도루로 도루 1개 차이로 마쓰이를 앞서는 상황에서 3루선을 꿰뚫는 2루타성 타구를 때렸다. 하지만 코사카는 도루를 노리면서 '''2루로 진루하지 않고 1루에 멈춰섰다'''. 다음 타석에서 세이부의 투수가 던진 1루 견제구가 악송구가 되어 진루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코사카는 역시 도루를 노리며 '''2루로 진루하지 않았다'''. 이에 세이부 벤치는 투수에게 '''고의로 보크할 것을 지시해''' 코사카를 강제로 2루로 보내버린다(...). 이후 코사카는 3루 도루를 시도하나 실패하고, 다음 회 말공격에서 마쓰이가 1루에 진루한 주자 1,2루 상황에서 '''더블스틸을 시도해''' (2루 주자를 희생하는 대신) 1루 주자 마츠이의 도루를 성공시키면서(...) 둘은 몹시 석연치 않은 방식으로 공동 도루왕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A] A B C D 시즌 도중 보직변경[1] JR 히가시니혼 도호쿠 경식 야구부의 전신인 센다이 철도국 사회인 야구팀에서 뛴 경험이 있었기에 코사카에겐 회사 대선배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전신인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1952~1963년까지 뛰었으며, 1952년 데뷔 첫해 당시 신인 최다 기록이었던 42도루를 달성하여(그리고 후술하다시피 코사카가 이 기록을 깬다) 신인왕을 획득하였고 1957년엔 22홈런으로 홈런왕까지 차지했다. 은퇴 후 야쿠르트, 한신 등에서 코치, 스카우트로 근무했으며 야쿠르트 코치 시절인 1979년엔 당시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사임한 히로오카 타츠로의 대행으로 시즌 종료 때까지 감독대행을 맡았다. 2005년 사망.[2] 그뿐만이 아니라 야쿠르트에선 이미 뛰어난 수비를 자랑하던 미야모토 신야가 주전 유격수로 정착하던 상황이었다.[3] 훗날 히로오카가 몸담았던 요미우리에서도 뛰게 되었다.[4] 히로오카도 비록 체구가 크지 않지만 요미우리의 주전 유격수를 오랫동안 맡았다.[5] 사실 그 무렵에 경미한 부상이 있던 탓도 있다. 때마침 2루수 호리 코이치도 부상으로 출전에 제약이 생기면서 유격과 2루를 오가던 니시오카의 유격수 고정에 백업급 선수들이 2루를 보는 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다.[6] 공교롭게도 치바 롯데 시절부터 동료였던 이승엽 역시 그 해 요미우리에 입단하면서 계속 한솥밥을 먹게 된다.[7] 연봉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8] 한국에서 이와 비슷했던 선수로는 (유격수는 아니지만)김광수김성갑 등이 있다. 플레이 스타일이나 성적 자체는 김종국과도 유사하지만, 김종국은 미들 인필더로서는 작지 않은 키(180cm)를 가지고 있었다.[9] 유투브에서 이름이 Kosaka Zone인 그의 수비 영상을 보자.[10] 이 해엔 시즌 도중까지 상위권으로 잘나가다가 6월부터 역대 최다인 '''18연패(...)'''를 찍고 제대로 무너졌다.[11] 당시 퍼시픽리그 타이 기록. 이 날 마츠이는 4번의 도루시도 중 1번을 성공했고, 코사카는 2개의 도루자만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