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오카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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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년에 그친 미네소타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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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WBC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니시오카.
'''니시오카 츠요시 (西岡剛/Tsuyoshi Nishioka)'''
'''생년월일'''
1984년 7월 24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부 다이토시
'''포지션'''
내야수 (2루수, 유격수, 3루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2002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2003~2010)'''
미네소타 트윈스 (2011~2012)
한신 타이거스 (2013~2018)
토치기 골든 브레이브스[1] (2019~)
'''응원가'''
카츄샤 (2005~2009)[2] [3]
Oi-SKALL MATE-Bring On Nutty Stomper fun (2010)
구단 자작곡 (2013~2018)
'''SNS'''
인스타그램
<color=#373a3c> '''2005~2006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2004년
카와사키 무네노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2도루

'''니시오카 츠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41도루(2005년)
33도루(2006년)'''

2007년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라이온즈)
38도루
<color=#373a3c> '''2010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2009년
텟페이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327

'''니시오카 츠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346'''

2011년
우치카와 세이이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338
<color=#373a3c> '''2010년 퍼시픽리그 최다 안타'''
2009년
나카지마 히로유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73안타

'''니시오카 츠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206안타[4]'''

2011년
사카구치 토모타카
(오릭스 버팔로즈)
175안타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2005'''
'''2010'''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반지'''
'''2006'''
1. 개요
1.1. 개인 수상 타이틀
4.1. 2014 시즌
4.1.1. 2014년 일본시리즈 고의 수비방해 의혹
4.2. 2015 시즌
4.3. 2016 시즌
4.4. 2017 시즌
4.5. 2018 시즌
5. 독립리그로 떠나다
6.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
7. 기타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스위치 히터 단일시즌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이다.
등번호는 치바 롯데 시절에는 7번, 트윈스에서는 1번. 한신에선 다시 7번을 달았다가 이토이 요시오의 입단으로 5번을 달게 되었다.

1.1. 개인 수상 타이틀


도루왕:2회(2005년, 2006년)
베스트 나인:2회(유격수 부문・2005년, 2007년)
골든 글러브:2회(2루수 부문・2005년, 유격수 부문・2007년)
월간 MVP:2회(2005년 3월・4월、2010년 5월)
올스타 게임 출장:5회(2005년-2008년, 2010년)
치바시 시민 영예상(2006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8시합 31타수 11안타 2홈런 8타점 4삼진 6볼넷 5도루 타율 0.355)
2008 베이징 올림픽 일본 대표

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2006 WBC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표팀으로 뽑혀 일본 선수임에도 국내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선수. 원래 어릴 때부터 PL학원고등학교[5]에 진학하여 야구를 하는 게 꿈이었으나 떨어져서 오사카 토인고교로 가게되었다. 참고로 PL학원고교, 토인고교 둘 다 오사카를 대표하는 야구명문 고등학교다. 이 내용은 본인이 찍은 아디다스 광고에서도 나온다. 상당한 쇼크를 받았던 모양. 고치현의 고시엔 단골출전교인 메이토쿠기주쿠(明徳儀塾)고등학교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PL학원을 이기려면 오사카부 지역 학교를 가야하기 때문에 오사카토인고교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PL학원이라면 악을 품었는지 토인고교 시절 PL학원 상대로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때 고교 선배로 1년 선배 나카무라 다케야 , 이와타 미노루 등이 있었다.[6][7]
이후 1라운드 지명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는데, 센트럴 리그 팀으로 가고 싶었던 니시오카는[8] 처음엔 롯데 입단을 내키지 않아 했으나 스카우터였던 마츠모토 나오키[9]의 설득으로 끝내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지명 당시에는 냉정하게 1라운더 급은 아니란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2005년을 기점으로 포텐이 터지면서 1라운더에 걸맞는 선수가 되었다.
고교 시절에는 2루수였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유격수도 함께 병행하였다. 2005년까지만 해도 2루수로서의 출장 빈도가 높았으나, 팀의 주전 유격수였던 코사카 마코토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6년 이후로는 붙박이 유격수로 출장했다. 지금이야 테이블 세터지만 고교 시절에는 홈런을 '''통산 42개'''나 쳐냈을 정도로 상당한 장타자였다.[10] 심지어 니시오카 전용 시프트까지 있었을 정도. 좌타자였지만 프로 입단 후 스위치 히터로 전향.
상당한 연습벌레로 알려져 있다. 김성근 감독이 치바 롯데 마린즈 코치로 있었을때 3번이나 맞았다.
국가대표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2009 WBC에서 대표팀 선발이 되지 못하자 연봉을 자진 삭감하였다.[11] 2010년에는 포수 사토자키 토모야를 대신해 주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주장이 된 해에는 치바 롯데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2010년 개인 통산 시즌 첫 200안타를 달성하였으며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최다안타 1위를 차지했다. 역대 일본리그 단일시즌 200안타 타자는 통산 3명[12] 뿐이었으나 2010년 한 해에만 3명이나 나왔다. 한신맷 머튼, 야쿠르트아오키 노리치카 그리고 치바 롯데니시오카 츠요시 본인이다. 시즌 최다안타는 한신맷 머튼이 214안타로 1위에 올랐고 니시오카는 206안타로 퍼시픽 리그 1위에 올랐다. 덤으로 이 시즌에 144경기 전 경기를 1번타자 유격수로 무교체 풀이닝 출장을 기록한 덕택에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 역대 최다 타석인 692타석에 들어서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해 니시오카의 기록은 2017년 현재까지도 스위치 히터로서는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다.
2010 시즌 타율 0.346, 206안타 11홈런 59타점 121득점 22도루 OPS 0.904의 커리어 하이 성적을 찍으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3. 미네소타 트윈스 시절


'''본인 - 케빈 코레이아 - 리키 놀라스코 - 박병호로 이어지는 2010년대 미네소타 FA 잔혹사의 시작이자 본인의 커리어 하향세의 시작'''
2010년 시즌을 마치고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했으며, $5.329M의 이적료에 미네소타 트윈스에 낙찰, 계약조건은 2011~2013년까지 연봉 300만 달러, 2014년 옵션 400만달러 바이아웃 25만달러로 총 925만달러로 합의하고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한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는 타율 .345를 기록해 2루수메이저에 데뷔한다. 하지만 시즌 개막전부터 에러성 플레이가 나온데다 4월 8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뉴욕 양키스전에서 경기 도중 1루 주자 닉 스위셔와 부딪혀 왼다리 종아리뼈가 골절되어 약 두 달간 결장했다.
11 시즌 최종성적은 68경기 출장 50안타(2루타 5개) '''0홈런''' 19타점 2도루(4실패) 타율 0.226 출루율 0.278 장타율 0.249 OPS 0.527... 아 망했어요...
'''뛰는 야구'''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데려 왔지만 현실은 도루도 못했다.(...)[13] 여기에다 니시오카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시즌 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된 J.J. 하디는 '''30홈런'''[14]을 치며 대폭발해 미네소타 팬들의 속을 벅벅 긁어놓았다.(...) 게다가 원래 일본에서도 그다지 수비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듣는 선수이긴 했지만 타구 질의 차원이 다른 메이저리그에서는 수비에서도 가히 블랙홀 급의 임팩트를 주며 먹튀 기미가 보이는 조 마우어, 저스틴 모노와 함께 미네소타 현지언론의 집중포격을 받았으며 미네소타 팬들한테는 공격도 안되고 수비도 안되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았다.(...)
시즌 전 ESPN의 칼럼니스트 키스 로는 타격왕을 차지한 전년도의 성적은 BABIP이 높아 뽀록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92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에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평가했는데 정말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강속구에 배트 스피드가 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니시오카가 메이저리그에서 폭망하는 바람에 바로 다음해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일본인 야수들은 찬바람을 면하지 못했는데[15] 세이부 라이온즈유격수 나카지마 히로유키는 헐값+백업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한 뉴욕 양키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어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됐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일본 정상급 외야수 아오키 노리치카밀워키 브루어스와 2년계약(+1년옵션)을 맺긴 했는데 연평균 연봉이 고작 125만달러로 일본에서 받았던 연봉에 3분의 1로 토막이 났다. 그리고 가와사키 무네노리일본 선수 잘 데려가는 시애틀로부터 '''마이너리그 계약에 스프링 트레이닝 초청선수''' 신분으로 계약을 하기까지 했다.
2012시즌, 시범경기에서도 삽질을 거듭하며 트리플A로 강등되었다. 트리플A에서도 타/출/장 245/309/301로 고전 중. 8월 중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는데 3게임에 에러 2개를 범하는 등, 타격, 수비 모두 안되는 상태로, 올라온지 일주일만에 다시 트리플A로 내려갔다.
그리고 9월 28일 스스로 팀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잔여연봉 525만 달러를 전부 자진 반납했다.''' 실제로 니시오카는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발언을 하고 그냥 눕더라도 꽁으로 받아갈 수 있는 큰돈을 스스로 포기하고 팀을 떠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메이저리그 초유의 일이었다.
니시오카가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서 분석한 기사도 나왔다.#
미네소타 퇴단 이후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하겠다"라고 쓰고 일본 복귀를 선언 하여 사실상 일본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요 몇년간 폭망중인 한신 타이거스가 대놓고 "담 시즌 주전 3루수는 이미 정해졌음, 우리는 4억정도를 이미 장전하고 성의 있게 교섭할 것임" 이라고 발언하면서 니시오카를 영입후 3루수로 쓰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4. 한신 타이거스 시절


2012년 11월, 한신과 2년 6억엔의 계약을 맺었다. 주로 2루수로 출장하면서 리드오프 역할을 맡고 있다. 2013 시즌 한신의 상승세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 성적도 성적이지만, 주로 무뚝뚝한 형님들이 모여 있는 한신 덕아웃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간사이 출신 선수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은 한신 야수진에서 몇 안되는 오사카 토박이. 2013시즌부터 등장했던, 홈런이 나왔을 때 선수들이 일제히 스탠드를 향해 손을 뻗는 특유의 홈런 세리머니도 니시오카가 제안한 것.[16][17] 타구단 팬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좋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자, 결국 구단 측에서는 2014시즌부터는 이걸 하지 않기로 결정 했다. 이대로 영영 못볼 것 같았던 이 세리머니는 2014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첫 시합을 사흘 정도 남겨두고 언론을 통해 클라이맥스 시리즈 한정으로 부활 될 것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4연승을 거머쥐며 CS 우승을 확정하는 순간까지 니시오카를 포함하여 이 세리머니를 행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4.1.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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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뜬공을 처리하려던 도중 우익수 후쿠도메 고스케와 충돌하여 완전히 몸이 공중에 뜬 채 머리부터 떨어져 정신을 잃고 구급차로 후송되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흉부에 타박상을 입은 것과 동시에 코뼈 골절과 왼쪽 어깨 탈골이란 진단을 받고난 뒤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다.
이 무렵 오승환니시오카를 위해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모자에 니시오카의 등번호를 새겼는데[18], 경기가 끝난 후 심판에게 주의를 받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모자에 스티커 같은 걸 부착하거나 글로 무언가 표시하는 것이 금지 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덕분에 고액 계약이라 까이던 오승환의 이미지가 반대로 크게 상승했다. 일본야구에서는 흔하지 않은 동료애 표현법이라 임팩트가 커서인지 팬들 중에서는 오히려 그정도는 괜찮지 않냐며 심판을 욕하는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
이후 6월 말에 다시 1군으로 복귀했지만 아직까진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지라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한 채 얼마 안 있다가 2군으로 말소되었고 이후 9월달에 완전히 1군으로 복귀했다.
참고로 니시오카는 부상으로 인해 2014년 시즌엔 출전한 경기가 몇 안되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2014년 올스타전 팬 투표 1위 선수로 선정 되었다. 복귀한 이후에도 활약을 하건 못 하건 그저 니시오카가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환영하는 팬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4연승으로 꺾고 2014년 일본시리즈에 진출 하여 1승까지 거머쥐며 연승 고공 행진을 달리고 있던 한신 타이거스에게 후술된 사건으로 니시오카는 한동안 한신 팬들로부터 가루가 되도록 신명나게 까이며 전범 취급을 받게 된다. 그게 바로......

4.1.1. 2014년 일본시리즈 고의 수비방해 의혹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 시리즈 1승 3패에 9회초 0:1로 뒤지던 1사 만루 상황에서 어처구니 없는 3피트 라인 위반으로 더블 아웃되면서 한신일본시리즈 도전을 끝장내는 바람에 사실상 금지어행이 되었다.
니시오카는 경기후 인터뷰에서 "왼손타자는 (타격 후에)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라인) 안 쪽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까. (뛰어가면서) 서서히 (원래 뛰어야 할 주로로) 돌아갔다. 고의로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다."라고 변명을 했다. 그러나 수비방해를 선언한 1루심 아즈마 도시오(東利夫) 심판은 "명확하게 처음부터 (파울라인) 안 쪽으로 달리고 있어서 아웃을 선언했다. 타격후 처음에는 라인 안 쪽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오른손 타자라면 몰라도 왼손타자가 처음부터 안쪽을 달리려고 했던 것은 명백하게 수비방해의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송구가 몸에 맞은 것도 파울라인 안 쪽이었다."라고 판정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위의 리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니시오카는 타격 직후에는 파울라인 바깥쪽을 뛰고 있다가 본인의 변명과는 반대로 도리어 라인 안쪽으로 들어와서 뛰다가 베이스를 밟는 순간에야 밖으로 살짝 빠져나가려는 자세를 취한 것이 보인다. 게다가 공식 인터뷰에서의 변명과는 반대로 자기의 페이스북에는 "규칙 상 안쪽으로 달려서 공이 몸에 맞으면 수비방해인 건 나도 알고 있다. 타구가 맞은 순간 병살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뛰어야 되는 것을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달리면서[19] (송구가) 몸에 맞으라고 생각하면서 달렸다. 나는 송구가 등에 맞을 때 다리가 바깥쪽에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달렸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는 규칙에 잘하면 안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한 플레이였다."라고 글을 남기면서 결국 라인 안 쪽을 뛰었던 주루가 '''수비방해를 의도한 고의였음을 자백했다'''.
이 사건(?)은 곧 시즌 후 동료 선수의 개그네타로 사용 되기도 하였다. 2014년 11월 22일 개최 된 한신 타이거스 팬 감사데이 이벤트에서 매년 개최 되는 이벤트마다 특정 선수의 모노마네를 하는[20] 한신 내야수 이마나리 료타가 니시오카의 수비방해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이걸 지켜본 니시오카 본인은 "저 스스로도 아직까지 (마음 속에서) 질질 끌고 있는 부분인데,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내년엔 수비방해 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후 2015년 프리미어 12 결승전에서도 4회 미국의 수비방해에 의한 아웃이 선언되자 해설위원 이승엽이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4.2. 2015 시즌


2014시즌이 끝난후에 중견수로 전향한다고 한다. 토리타니 다카시메이저리그 진출을 대비하여 이전에 중견수를보던 야마토를 유격수로. 영입에 공들이고있는 나카지마 히로유키3루수로. 3루를 보던 니시오카중견수로 전향할 계획이다. 이에 구단은 5억엔을 들여 낡은 구단펜스를 교체할계획이라고 하는데, 시즌 후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니시오카의 부상방지 측면이 크다.
토리타니메이저 진출과 상관없이 본인은 2루수 자리를 두고 경쟁할것이라 밝혔다. 2014 시즌 중에 본인이 부상으로 빠졌을때 우에모토 히로키가 2루수로 자리잡았고, 본인은 부상복귀 후 3루수로 뛰었다.
2015시즌엔 2루수 주전 자리를 두고 경쟁하겠다고 본인 입으로 단언 한 것 치곤 오픈전부터 시작해서 정규시즌 초반인 지금까지 경기 내내 줄곧 2루수가 아닌 3루수로서 선발 출장하고 있다. 한신이 설레발을 떨던 나카지마 히로유키오릭스 버팔로즈로 가버렸기에 중견수 변환 계획은 붕 떠버린 셈인데, 불안했던 3루 수비가 작년보단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믿고 맡길 만큼 안정적인 수비도 아니기 때문에 팀이 3점차 이내로 리드하고 있는 중요 상황에서 9회가 되면 마무리 투수 오승환과 교체 되면서 자연스럽게 니시오카 수비 위치엔 대수비요원 사카 카즈히코가 들어가는 것이 이젠 그냥 공식이 되어버렸다. 4월 초반인 현재까지 타격 쪽에선 더할 나위 없는 대활약을 펼쳐주고 있다. 개막전부터 줄곧 선발 라인업으로 출장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타율 3할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중. 하지만 4월에 접어들면서까지 좋았던 페이스는 어디가고 팀이 급격하기 삐걱대기 시작한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고 있지 못한 채 타율은 2할대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5월 22일, 요코하마와의 원정경기에서 1회말 3루 수비를 보는 도중 상대 타자 휴우마의 타구를 처리하던 중 땅에 무릎이 강하게 부딪히며 무릎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 경기에서 전력 질주하면서 증상이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23일 경기, 1군에서 말소 되었다. 원래부터 3루 수비가 미흡했었던데다가 부상까지 겹치게 된 걸 감안하여 제외한 듯 보인다. 5월 26일부터 치뤄질 교류전에서의 주전 3루수 후보에서 제외된 걸 보면 장기간 출장 결장 할 것으로 예상 된다. 8월 23일 현재, 좌타석에서 31개의 연습 스윙을 소화하며 복귀를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아직 오른쪽 팔꿈치가 완전히 회복이 된게 아니라서 수비 훈련은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9월 4일 현재, 수비는 아직이지만 타격에는 무리가 없다고 한다. 아마 9월 중순경에는 올라올 수 있을 듯하다. 17일, 웨스턴 히로시마전에서 4개월만에 실전을 소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25일, 드디어 1군에 재등록되었다. 그러나 결국 부상의 여파로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한 채 시즌을 끝마쳤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성적에 실망했는지 구단에 연봉 삭감을 요구하고 FA 자격을 행사하지 않는 등 나름대로 동기부여를 했다.

4.3. 2016 시즌


7월 20일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좌전안타를 치고 주루하던 중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카트에 실려나갈 정도로 큰 부상이며 시즌 아웃. 상기 서술된 '14년 후쿠도메와의 충돌로 인한 부상이후 길고 긴 재활을 했던 것처럼, 다시 불운한 재활의 길에 들어섰다.

4.4. 2017 시즌


7월 17일 드디어 1군 경기에 복귀했다. 2루에 우에모토 히로키 가 레귤러로 자리를 잡았고 도중에 영입한 용병 제이슨 로저스의 주 포지션이 1루라 외야알바를 뛰기도 했다.. 8월에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컨디션이 올라오나 했으나 주루중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는데, 아킬레스건에 부담이 갈까 우려한 구단에 의해 다시 1군에서 말소당했다. 9월 5일에 다시 1군에 올라오긴 했으나 이번엔 등에 통증을 느끼며 다시 등록말소.. 일본 복귀후 완전히 유리몸이 되었다.

4.5. 2018 시즌


딱히 부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타격부진이 길어지며 5월 18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그후 9월 21일 4개월만에 1군에 복귀했다.
시즌 후 결국 방출. 롯데에서 주워가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롯데에서는 지금 팀 리빌딩 중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방출 통보 받은 그 다음날도 대타로 1군 출장을 기록했다. 은퇴하는 선수도 아니고 전력외 통지로 방출예정인 선수를 1군에서 출장시키는건 좀 모양새가 웃긴지라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이유로 한신 프런트와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은 오늘도 신나게 까였다. 물론 결과는 대타 삼진.[21]
시즌 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와 4타수 1안타 2삼진으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그 1안타도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루세 요시히사를 상대로 친 거라... 거기다가 트라이아웃 날 롯데에서 젊은 선수들 중심으로 팀을 개편할 계획이며 니시오카는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확인사살을 날려버렸다. 팬들의 반응도 이제는 은퇴할 때가 온 거 같다는 반응이 대세. 그래도 웬만하면 팀우승에 공헌도 했으니 그냥 마지막 한 해 정도 친정팀 유니폼이라도 입혀서 은퇴시켜주자는 반응도 나올만 한데 구단도 그렇고 팬들의 반응도 전혀인 걸로 봐서는 구단이나 팬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 2010년 롯데의 우승 시기에 핵심인물이었던 니시오카 츠요시뿐만 아니라 나루세 요시히사, 오마츠 쇼이츠 역시 구단에서는 영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고, 팬들도 영입하자는 말이 없다. 셋 다 기량 악화가 완연하다는 것도 있지만, 뿐만 아니라 니시오카메이저리그 이후 일본 복귀 당시 친정팀인 롯데에서도 재영입 제의가 왔지만 롯데가 아닌 한신으로 이적한 것 때문에, 나루세는 FA 당시 프런트와 불화를 일으키고 야쿠르트로 이적한 것 때문에 인해 롯데 프런트와 팬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준 듯. 그나마 나루세의 경우는 2010년 롯데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감독이었던 니시무라 노리후미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새로 부임하게 되면서 옛정 덕분에 입단 테스트 기회를 얻고 합격해서 입단하게 되었다.
해를 넘겨 2019년 시즌 개막 직전인 2월 22일 현재까지도 별 소식이 없다. 이대로 은퇴하든가, 아니면 사회인 야구나 독립 리그, 해외 리그 등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는 방법밖엔 없을 듯 한데 아무 소식도 없는 걸로 봐선 이대로 조용히 은퇴하는 방향으로 갈 듯 하다..였는데..

5. 독립리그로 떠나다


2019년 3월 12일, 독립리그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작년에 무라타 슈이치가 이 팀에서 뛰면서 현역 재기를 노리다가 결국 재기를 이루지 못하고 은퇴했는데 과연 니시오카무라타와 달리 재기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듯.
여러모로 20대 초반부터 주전 1번 타자로 자리잡으며 도루왕, 수위타자, 최다안타를 꿰차고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했던한 시대를 풍미한 교타자치고는 다소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일단 프로야구계를 떠났다.[22]
9월 24일 후쿠우라 카즈야의 은퇴경기에서 독립리그 유니폼을 입고 메시지를 보냈다. 똑같이 독립리그에서 뛰던 오마츠 쇼이츠가 양복을 입고 메시지를 보낸 것과는 다른 모습. 현역 연장에 아직도 미련을 보이는 것 같다.
2020년 치바 롯데 마린즈 캠프에 참가한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 테스트는 아니고 단순한 동행이라는 듯.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와는 계약갱신을 유보하고 있다가 9월 1일 갱신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6.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


한국 선수가 자기 팀 소속이 되면 발 벗고 나서서 신경 써주고 잘해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앞서 거론된 것처럼 각각 다른 시즌이긴 했지만 치바 롯데 마린즈 선수였던 시절엔 이승엽김태균에게 잘해주었고[23] 김태균김석류의 결혼식 때는 고등학교 선배 나카지마 히로유키와 함께 한국까지 날라와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해줬다. 또한 개인 후원회에도 초대해주었다고 한다. 지금 현재 소속 되어있는 한신에선 오승환에게 시즌 들어가기 앞서 훈련할 때부터 말을 걸며 가까워지고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중에서도 특히 오승환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것 같이 여겨지는 모습이나 일화 등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2014년 9월 21일 주니치전에서 9회 말 한신 공격, 오승환이 한일 통산 프로 첫 안타를 때려냈을 때 사용했던 야구 방망이는 니시오카에게 빌린 것이다. 이후 9월 26일 히로시마전에서 9회 말 타석에 들어섰을 때 역시 니시오카의 야구 방망이를 사용했다. [24]
[image]
오승환의 그림 같은(?) 베이스런닝 모습을 흉내내며 본격 능욕 들어가는 니시오카
  • 오승환도 다른 팀 동료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니시오카를 부를 때 "츠요시"라고 부른다.[25]
  • 2015년 3월 오픈전 시기에 한신 외야수 이토 하야타, 일본 개그맨 그리고 오승환과 함께 가라오케를 갔고 새벽 다섯시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니시오카 본인이 얘기한 게 아니라 이때 한 자리에 있었던 개그맨 타무라 켄지가 자기 라디오에 나와 얘기한 것. 물론 다음날은 오픈전 시합 일정이 없었다.

7. 기타


  • 간사이 출신 답게 평소에 말할 때도 간사이 사투리를 사용한다.
  • KAT-TUN카메나시 카즈야와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서로를 "츠요군" "카메군"이라고 부른다고(...)
  • 좌우명이 선우후락. 즉 <세상 사람보다 먼저 앞일을 걱정하고, 즐기는 일은 세상 사람들에 뒤져서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 2010년에 1984년생 모델 토쿠자와 나오코와 결혼했지만 2년 뒤에 이혼했다. 니시오카는 이 무렵 불륜 의혹도 있고 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 2006년 본선 1라운드 A조 6경기에서 2사 만루상황에 타석에 들어선 일본 타자로, 봉중근의 공을 쳐냈으나 이진영에게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며 이닝을 마무리 지은 타자가 바로 니시오카 츠요시. 이진영의 국민 우익수 대관식을 마련해 준 선수라 할 수 있다...
  •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에 포스팅 되었을 때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고 둘이 비교되기도 하였다. 다만 니시오카트윈스 입장에선 실패작에 가까운지라(...) 이런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2008년 친한 팀 동기 하야사카 케이스케와 밥을 먹고 돌아다니는데 택시 무임승차범을 발견하고 둘이서 쫓아가서 체포했다고 한다(...) 참고로 니시오카는 1군 도루왕을 두 번이나, 하야사카는 2군 도루왕을 세 번이나 한 매우 빠른 발의 소유자들. 무임승차범은 100미터 정도만에 잡혔다고 한다.(...)
  • 잘나가던 시절에는 한국에서 고영민, 박기혁과 비교되었다. 다만 대부분 니시오카의 실력이 더 위라고 평가했다.
  • 한량같은 이미지지만, 주변 동료들에 의햐면 의외로 야구에 대한 태도는 진지했다는 평이 많다. 또한 2009년에 구단 응원단이 바비 발렌타인 퇴임 반대운동이랍시고 과격한 현수막을 내걸자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일침을 놓는 등 할 말은 확실히 하는 성격인 듯하다.
  • 이승화, 김주찬, 이원석 등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치바 롯데 마린스 해외 전지훈련에 파견됐을 때 니시오카와 잘 지냈다.
  • 고교 시절 1년 선배인 나카무라 타케야가 본인보다 발이 더 빨랐다는 증언을 해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냈으나 실제로 그랬다고 강조했다. 세이부-롯데 경기에서 니시오카가 1루에 출루하면 니시오카는 나카무라의 배를 만지는 장난을 치고는 했다.
  • 김별명이 치바 롯데 시절 스프링캠프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니시오카의 할아버지는 한국인이라고 한다. 니시오카가 자기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해줬다고.# 다만 니시오카 본인이 이에 대해 자신이 한국계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어서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1] 독립리그 야구단.[2] 니시오카 이전에는 마츠모토 나오키(니시오카를 지명할 당시엔 스카우터)의 응원가였다.[3] 전주도 있었는데 '새가 되어 날으리' 였다.[4] 일본프로야구 스위치 히터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자 유일한 시즌 200안타 기록.[5]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마쓰이 카즈오, 후쿠도메 코스케, 마에다 켄타나무위키에 쓰일 정도로 잘 알려진 선수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격전지인 오사카 지역에서도 최강자로 인정받는 학교였으며, 당연히 고시엔 대회에도 여러 차례 진출하였다. 하지만 폭력사건 등 여러 구설수에 휘말린 끝에 현재는 무기한 휴부중. 오사카의 패권도 니시오카가 나온 오사카 토인이나 T-오카다, 야마다 테츠토 등을 배출한 리세이샤 등에 내주었다.[6] 나카지마 히로유키가 고교 2년 선배로 이전에 서술되어 있으나, 이타미북고교 출신이다.[7] 재미있게도 롯데 시절 니시오카와 함께 타선의 축을 이룬 선수들 중에는 오오무라 사부로이마에 토시아키 등의 PL 출신 선수들이 있었고 니시오카가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한 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해에는 PL 출신의 후쿠도메 코스케도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8] 세리그엔 고향팀인 한신 타이거스, 니시오카가 한떄 동경하던 이케야마 타카히로가 뛰던 야쿠르트 스왈로즈, 니시오카를 3~4라운드 정도에서 뽑으려고 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이 있었다.[9] 스카우터가 되기 전에는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롯데에서 내야 유틸리티로 활약했다.[10] 하지만 아직도 일본 고교야구에서는 알루미늄 배트를 쓴다는 점에서...[11] 딱히 니시오카가 이 시즌에 부진한 건 아니다. 타율 3할을 마크했으며 13개의 홈런을 쳤다. 유격수임을 감안하고, 또 올림픽에 나가는 동안 못나간 게임 수를 생각해보면 부족한 누적 스탯도 커버가 된다. 올림픽에서도 팀이 정신 못차리고 휘청거리는 와중에 아오키과 더불어 제일 잘한 야수 중 한명이었다.[12] 스즈키 이치로, 아오키 노리치카, 알렉스 라미레스.[13] 도루왕을 몇 번 먹었던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에도 도루 실패가 많아 도루 성공률은 안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선 출루 자체가 안되다 보니...[14] 2011시즌 트로이 툴로위츠키와 더불어 유이한 메이저리그 유격수 30홈런이다.[15] 물론 NPB의 통일구 도입으로 눈에 보이는 성적이 크게 하락한 원인도 있겠지만. 아오키 : 2010년 타율 0.358 14홈런→2011년 타율 0.292 4홈런, 나카지마 : 2010년 타율 0.314 20홈런→2011년 타율 0.297 16홈런.[16] 'Gratitude'를 줄여서 'Gratiii'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만 이 세리머니를 요란스럽다고 좋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었다.[17] 2013년 삼성 라이온즈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었던 순간 마운드에 모여 취했던 세리머니가 이 세리머니다.[18] 2014년 4월 3일 주니치전 홈경기[19] 여기에 대해서도 아즈마 심판은 "달릴 때 '''양쪽 발이 모두''' 파울라인 바깥쪽에 있어야 된다. 한 쪽발만 안쪽으로 들어와도 안 된다. (그런데 니시오카는 한 쪽발 정도가 아니라 양쪽 발이 모두 파울라인 안 쪽에 있었다.)"라면서 쐐기를 박았다.[20] 오승환의 투구폼 흉내를 낸 적도 있다.[21] 사실 이번 시즌 라쿠텐에서도 방출 통보를 한 선수를 전력외통보 이후에 1군에서 기용했다. 바로 용병타자 오코에 딕슨.[22] 니시오카한신에서 방출당한 해에 은퇴한 동갑내기 드래프트 동기 카나자와 타케시는 통산 176경기에 나올 정도로 2군에만 박혀 있다가 아주 가끔씩 1군에 올라오는 불운한 선수생활을 했으나 원클럽맨으로 음지에서 묵묵히 팀에 공헌해줬다는 이유로 은퇴경기에 은퇴식까지 거하게 치르고 코칭스태프 자리까지 얻으며 명예롭게 은퇴했다. 니시오카와 정반대의 말년을 보낸 셈.[23] 이승엽롯데에서 활약한 2004~2005년 동안 이승엽과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24] 여담이지만 이대호는 무거운 배트를 쓰는 강타자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무거운 배트를 사용한다. 대략 930g에서 950g 정도 되는데(다른 선수들은 평균적으로 850~900g의 배트를 쓴다) 기본적으로 무거운데다가 장타를 염두하여 배트 머리부분에 무게가 집중되게 설계하므로 단타를 노려야하는, 그리고 타격할 상황이 많지 않은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이 쓸만한 배트는 아니다.[25] 출처는 한신 타이거스 잡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