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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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現 KIA 타이거즈의 주루코치. 선수 시절에는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1번 타자[2] 이자 KIA 타이거즈의 대표적인 로컬 보이 겸 프랜차이즈 선수였다.[3]
특징은 통산 타율이 .247에 시즌 최고 타율이 .287일 정도로 타격이 좋은 편이 아닌 전형적인 수비형 내야수였으나, 그 수비 실력이 워낙 뛰어나 기본기가 확실히 잡혀있었으면서도 안타가 될 법한 공을 신기에 가깝도록 쉽게 잡아내는 빼어난 수비를 보여준 2루수였다. 사실 유격수로써도 훌륭했으나[4] 그가 2루수로 정착한 건 어깨부상 때문,[5] 수비에 있어서는 워낙 교과서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6] 그 뿐 아니라 작전 수행능력과 도루 능력만 보면 당대 프로야구에서도 손꼽힐 정도였으며, 2002년에는 도루 1위를 기록하면서 이종범, 전준호, 정수근도 이긴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종범과 함께 2000년대 초반 KIA 타이거즈의 테이블 세터를 이뤘다.
별명으로는 수비력이 좋아 2루 자리에 성벽이 있는 것 같다는 의미의 '종국성', 이 별명은 형의 서남 방언인 '성'과 발음이 같아 종국이 형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동명이인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에서 유래한 '한남자'가 있으며 잘할 때는 '한남신'으로 업그레이드 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플레이가 달라졌다고 해서 '딴남자'라고도 불렸는데, 타격 센스가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크지만, 바로 전년도에 1년에 에러 2개[7] 밖에 안 냈던 선수가 한 경기에서 에러 2개를 저질러 '''악마와 거래를 해서 타격과 수비를 바꿨다'''는 말이 나온데서 나온 별명이다. 이외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돌출된 입과 고글 때문에 '제트오리', '고글덕' 등의 별명도 있었으며, 국제전에서 특히 좋은 활약을 보였기에 '국제용 2루수'로도 불렸다. 이래저래 야구에서 지명타자도 있듯이 지명수비제도가 있었다면 이종열, 김재걸과 더불어 주가가 더 높았을 선수.
그러나 그가 활약한 해태 타이거즈에서 그가 활약한 포지션에서 이종범과 홍현우가 나란히 30-30을 기록하며 프로시절 초반부터 샌드백이 되어버린 선수.
2. 선수 생활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96년에 입단했다.[8][9] 단 3년만에 평가가 역전된 입단동기 장성호가 1억을 받고 입단한 것과 달리 입단 당시 2억 3천만원이라는 해태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10] 그리고 영원히 평가절하되는 이유가 아마시절 라이벌이었던 박재홍이 프로 무대에서 대활약한 점도 있다. 야구선수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덩치이지만 호타준족이고 야구센스가 뛰어나다는 점이 이종범과 흡사하였으며 또한 3년 선배인 이종범의 대히트로 인해 그만큼 해태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11] 하지만 프로 초년 시절 그는 박진만과 더불어 프로 최악의 물방망이로 전락하고 만다[12] 그래서 장성호와 이호준 과는 달리 90년대 후반 시점에서는 먹튀로 불리기 충분했다.
학창시절에는 유격수가 주 포지션이었으나, 입단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는 한창 때의 이종범이었기 때문에 2루를 맡게 되었다. 어쨌든 한대화의 LG 이적에 이은 홍현우의 3루 이동으로 한참 동안 비어있다시피했던 2루수 자리를 지키며 2년 연속(1996, 1997 시즌) 우승에 공헌했다.그러나 이는 언제까지나 수비나 주루에 한정된 것이고 공격은 답답할 정도로 못쳤다.[13] 100타수에서 21안타 치는 선수가 2년간 전 경기 출전했으며 그렇다고 한 해에 딱 홈런 10개 치는 수준으로 이건 잠실구장도 아니고 당시 홈런치기 만만한 광주에서 친 것이었다. 더불어 원정홈런의 대부분은 비슷하게 만만한 오히려 좌-우측은 더 짧았던 대구에서 친것,[14] 전체적으로 투고타저시즌 이었던 96년은 그렇다치더라도 타고투저의 흐름이 시작된 97년에 성적이 더 떨어져 버렸으니 그에 대한 실망은 30-30까지 기록하며 잘 나가던 박재홍과의 비교까지 되었기에 보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에서는 제2의 이종범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첫 시즌 초반에만 잠시 고전했을 뿐 순식간에 2루에 적응해 들어가며 뛰어난 수비를 펼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5] 그 덕에 96-97년의 타이거즈의 내야는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였던 최해식과 함께 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뛰어난 센터라인을 자랑했다.[16]
1998년에 이종범이 일본으로 가면서 공백이 생긴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지만 시즌 도중에 부상을 당하며 99년 시즌도 제대로 출장하지 못한다.[17] 2000년에 간신히 재활에 성공하며 80여 경기 동안 타율 .259 15도루를 기록하며 주전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2001년 이후 김종국에 비해 공격력이 뛰어난 홍세완이 유격수를 맡게 되면서 완전히 2루수로 고정되었다. 사실 주 포지션이 유격수이다 보니 유격수 수비는 당연히 가능하지만 큰 부상 이후 어깨가 많이 약해졌던 탓에 캐치를 잘 해놓고 내야안타를 만드는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홍세완의 잦은 부상으로 인해 2009년 초반까지 계속해서 2루수 뿐만 아니라 유격수로도 활약한다. 2007년에는 홍세완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2루를 맡던 손지환과 키스톤 콤비를 이루며 유격수를 주 포지션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1세기 접어들면서 이게 20세기에 봤던 김종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타격 실력이 향상되었다. 이 시기 평균 타율은 2할 7푼 5리로 100안타 이상을 때려내며 상급 테이블 세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특히나 01년과 02년에는 2년 연속 규정타석을 채우면서 2할8푼의 타율을 기록해 해태의 마지막 1번타자가 될 수 있었고, 2002년에는 커리어하이를 기록, 타율 0.287, 도루 50개를 기록하며 2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았고 정수근, 전준호 등을 제치고 도루왕 타이틀을 얻기까지 했다.[18]
이를 바탕으로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김종국의 누적 도루기록은 152개로 이종범에 이어 정수근과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하면서 당시 타이거즈의 득점루트의 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해당 시즌에도 특유의 수비력이 빛을 발해 총 133경기에 출장했음에도 실책은 단 9개에 불과할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보였다. 그러나 03년부터 2할 5푼대로 다시 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04년 이후엔 '''수비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현재의 김종국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타격 능력은 분명 동시대 유명한 2루수들인 박정태, 박종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완벽한 수비력으로 국가대항전에 자주 선발되었고,[19] 신기하게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타격까지 좋아져서 김종국의 국가대표 선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20] 이름값 있는 2루수들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선수생활을 보냈다..
2008년에는 그 수비실력이 정점을 찍는데, '''113경기 785이닝 동안 실책이 단 2개[21] , .996의 수비율을 기록'''하며 당시 3루와 유격을 오가던 이현곤[22] 이 함께 키스톤으로 출장할 때면 수비력으로는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키스톤을 구성했다. 그 해 최고의 2루수로 평가받던 고영민이 넓은 수비범위와 화려한 수비를 보여주면서도 고작 8개의 에러를 기록하며 2익수, 고제트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시즌종료 후 기록을 통해 역시 2루 수비만큼은 김종국이 여전히 리그 최고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음이 드러났다. 다만, 당시김종국의수비영상을 보면 빠른 발과 판단력을 통해 누구보다 먼저 이동하여 뛰어난 풋워크와 핸들링으로 어떤 타구든 깔끔하고 쉽게 처리하는 굉장히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의 수비수였기 때문에 당시 중하위권이었던 팀 성적과 맞물려 정작 시즌 중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9년이 되자 노쇠화로 인한 실책을 종종 하기 시작하여 유격수 출신 고졸신인 안치홍에게 주전 2루수를 넘겨주게 되었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야구 내적으로는 대주자나 대수비로 가끔 등장한 것 이외의 별 활약은 없었지만, 서재응과 정근우의 마찰로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사태 때 오버하면서 맹활약. 순식간에 검색어 3위로 떠오르는 한편, 6차전 때의 싸인 훔치기 논란 때도 홀연히 등장하여 정근우에게 삿대질의 일침을 가하며 한남신의 위용은 필수요소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행동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식으로, 서재응이나 김종국이나 단순히 고참 버프로 상대팀 키 플레이어인 정근우를 윽박질러 위축시키려는 졸렬한 모습은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남을만 하다. 그나마 김종국은 간접적으로 기사를 통해 사후 사과라도 하였으나 서재응은... 한편 많은 KIA팬들은 그날 팀은 졌는데 갤러리는 흥한다고 웃을지 울지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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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동적인 포즈 덕분에 수많은 합성짤을 낳았다. 우사인 볼트 옆에 붙인다든가, 짜장면 배달이라거나...
우승 후 고백한 바로는 이 때 다소 오바를 한 이유가 덕아웃을 지키며 팀내 고참으로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KIA 선수들이 고참급[23] 을 제외하면 전무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김종국의 오버는 그의 말대로 팀의 선배로서 필요한 제스처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신경전에 있어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SK를 상대로 KIA가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엔 그의 오버질이 한 몫 했다는데 전문가들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은 선배로서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참고로 정근우는 그 군기 세다는 고려대의 9년 차이나는 직속 후배.[24] 은퇴 전 기사를 통해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실 선후배 관계가 어느 학맥보다 중요한 고려대이기에 그저 우승 때문에 후배에게 졸렬한 행위를 한 것은 본인도 속이 편하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이 해태-기아를 모두 경험하고, 나름대로 고참으로써 후배들을 잘 다독이며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했다고 평가받는 김종국에게 가장 큰 흑역사이긴 하다. 다만 당시에는 여기저기서 많이 까이기도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한남신의 위용" 이라는 둥, 기아 팬이나 타 팀 팬이나 대부분 하나의 추억과 이야기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2010년 4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와 관련한 글에서는 지난 선수 생활과 한국시리즈에서의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술회되었다. 한국시리즈, 정근우에 대해서도 사과하였다. 은퇴와 더불어 팀 내 자체적으로 만든 3군에서 코치로 활동한다고 한다. 2009년 우승도 했고, 타격이 늘어날리는 없고, 최고를 자랑하던 수비력도 줄어든게 느껴지는 상황이니 미련없이 떠오르는 2루수 안치홍과 세대교체를 하는 느낌이었다. 은퇴식은 2010년 9월 15일이 되어서야 치렀는데, KIA 타이거즈 팬들에게 그렇게 사랑받은 선수인 것 치고는 관중수가 그야말로 안습을 넘어 안폭이었다.[25]
은퇴식 사진
통산 성적은 14시즌 동안 1359경기 출장, 타율 0.247, 604득점, 254 도루, '''실책 112개.'''[26] 분명 타격성적만 보면 대학 시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27] 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출신으로 단 한 번도 팀을 떠난 적이 없는 순혈 선수이며, 선수 시절 내내 별다른 구설수 없이 성실했고, 시즌 전체를 말아먹어버린 부상도 종종 있었지만 시즌 전경기 출전을 무려 4차례나 했을 정도로 내구성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며,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28] 선수생활 내내 올스타에만 7차례나 선정되었을 정도로 KIA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선수 중 하나였다.[29]
3. 지도자 시절
코치 생활을 시작한 이후 2군 작전주루코치로 있었다가 2012년 백인호 코치 2군행의 반대급부로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전임자가 워낙 무능했던 탓에 평가는 좋은 편이다.
2012년 7월 26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더위를 먹었는지 정신줄을 놓은 주루 지도를 하여 까이기도 했다. 그래서 백인호를 잇는 백종국, 백남자라는 별명을 획득했다. 이 무렵에 당시 수석코치였던 이순철에게 덕아웃 앞에서 질책을 당하는 모습도 방송화면이 잡혔다.
2013 시즌도 특별한 홈 주루사 없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즌 후 팀의 부진에 의한 1, 2군 코치진 전폭 교체에도 살아남았으며 일부 KIA 팬들은 감독 수업이나 제대로 받게 연수 보내달라고 원성 중.
2014 시즌에도 별 나쁜 평은 없었으나, 이대형의 도루 개수가 적은 것과 도루 성공률이 높지 않은 것이 코칭능력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것은 이대형 탓이 되어 그대로 kt로 보내 버린다.
2015년 7월 25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2개의 판단미스로 인하여 선수들이 주루를 하다가 아웃당하며 박정수의 홈 첫 승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롯데 박세웅에게 첫 승을 헌납하게 되며 팀이 아쉽게 패하였다.
2016 시즌에는 은근히 선수들의 도루가 적어지고 뇌주루가 많아졌는데, 이것에다 자꾸 3루에서 세워서 득점력이 낮아졌다. 기아의 노답타선과 결합되어 만루잔루가 많아진 편. 4월 16일 경기에서 기아선수들 주루의 총체적 난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5월 5일 경기에서는 나지완이 김종국의 제지를 씹고 희생플라이 득점에 성공했고, 5월 6일 경기에서 역시나 뇌주루코칭으로 김호령을 아웃시켜 버렸다.
5월 15일 경기에서 김호령의 안타에서 가뜩이나 느린 이범호를 돌렸다가 아웃 시켰다. 한동안 어그로를 안 끌었으나, 7월 12일 3대 2 한 점차 경기에서 주력이 느린 필을 서동욱의 2루타 때 돌리다가 죽였다. 다시 잠잠하더니 9월 8일 NC전에서 이해못할 선풍기질로 3루 주자를 홈에서 아웃시켰다.
2017 시즌엔 리그 분위기 상 도루를 많이 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예전보다 실수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주루코칭 미스가 보였다.
6월 14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최형우의 2루타때 1루 주자 버나디나를 무리하게 돌려 아주 여유롭게 아웃되었다. 애초에 버나디나는 홈인은 힘들걸 파악했는지 3루까지 슬슬 뛰고 있었고 그걸 보면서도 롯데 유격수가 공을 잡은 상태에서 돌려버린 것이다. 게다가 무리하게 주루하다가 홈에서 강민호의 스파이크에 손가락이 밟혀 부상을 입은건 덤이다. 다행스럽게도 구단 공식 트위터에서는 버나디나에게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시즌 초에는 버나디나가 뇌종국의 제지를 쿨하게 무시하고 과감하게 홈으로 쇄도하여 득점에 성공했었다.
8월 12일 김민식의 에러 타구때 2루주자 이범호를 무리하게 돌려 아웃시켰다.
2019년 8월 24일 SK전 3대4로 뒤진 9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안치홍의 좌익수 앞 짧은 안타때 2루주자 오정환을 무리하게 돌려 홈에서 아웃시켰고, 이날 판독센터와 함께 팀 6연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 여담
- 외국인 선수들에게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광주일고 시절 및 KIA 타이거즈 인수 초창기에는 군기반장이었으며 주장을 한 적도 있다. 광주일고 후배인 이호준은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특히 김종국에게 많이 맞았다고 털어놓았다.[30][31] 선수생활 말년에도 그 기질이 있었는지 말년에 잠깐 선수생활을 함께했던 최경환도 박명환의 유튜브 채널인 박명환야구TV에 나와 관련 이야기를 풀었는데, 당시에도 김종국이 후배들의 기강을 굉장히 잘 잡았다(...)라고 회상했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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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코치로 전향한 이후 김종국의 "트레이드 마크"인 안경이 사라졌다. 라식 수술을 받은 뒤로 안경과 작별했다고.
- 김종국의 선수시절 등번호였던 16번은 김종국의 은퇴 후, 김희걸이 가져갔으나[32] 2012년 시즌 중반에 삼성 조영훈과의 트레이드로 이적하면서 온 조영훈이 16번을 달게 되었다. 조영훈이 안경을 쓰고 16번을 단 모습이 김종국과 유사해 일부 KIA팬들은 흥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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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사람을 같이 세우고 보니 좀 닮았다. 물론 조영훈은 왼손잡이 좌투좌타, 김종국은 오른손잡이 우투우타이기 때문에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하지만 조영훈이 2012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으로 이적하면서 이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 앞서 나왔던 것처럼 곱상했던 20대 시절엔 해태 시절이나 KIA나 아저씨팬 비중이 높은 타이거즈 선수치고 여성팬이 많은 편이었다. 은퇴한 후에도 종국 코치를 연호하는 여성 팬들이 보이는 편이다. 홍세완이 김종국의 여성팬과 결혼했고 본인도 이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듯. 여기
- 마구마구에서는 3슬롯에 하이점프캐치를 단 준수한 레전드 카드로, 타이거즈 계열 세트덱에서는 필수 카드였"지만" 1999 홍현우 엘리트 카드 베테랑이 가능해지면서 290만 거니를 호가하던 카드에서 50~60만 거니 선에 거래되는 쩌리로 전락했다. 물론 지금도 간간히 쓰고 있기는 하지만...
5. 역대 성적
[1] 이 응원가는 후배인 안치홍이 물려받긴 했으나, 실제론 별로 쓰이지 못했다. 안치홍 문서 참조. 응원가 가사는 기아의 김종국~오오오오오~기아의 김종국~당신뿐이라오~[2]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라인업은 1번 김종국-2번 최익성-3번 장성호-4번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5번 신동주-6번 이동수-7번 김창희-8번 김상훈-9번 홍세완 이었다.[3] 출생지도 광주에, 광주일고-고려대 출신으로 흔히 말하는 성골 출신이다. 은퇴 이후로도 KIA 코치로 2011 시즌부터 공백없이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2021 시즌 기준 25년 타이거즈맨.[4] 해태에는 이종범이 있었다. 그가 2루수로 정착하고 나서는 덩치 큰 유격수 홍세완이 있었다. 그는 유격수 100타점을 기록할 정도로 전도유망했으나, 아쉽게도 감종국보다 네임드가 낫다. 이게 다 무등구장 잔디 탓.[5] 2루수는 유격수에 비해 송구실력을 덜 요구하기 때문이다.[6] 총 14시즌 동안 통산 실책이 단 112개.[7] 참고로 이 기록은 '''역대 2루수 1시즌 최소 실책 타이기록'''이다.[8] 동기생인 박재홍과는 광주일고 시절 3번, 4번 타순을 함께 담당했지만, 대학 시절 박재홍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여기에 김종국이 광주에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선수로 남은 반면, 박재홍은 현대와 SK 등 인천 연고 구단에서 대부분의 프로 생활을 하여 오늘날 광주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입장.[9] 고려대 92학번 동기로는 조성민, 김지훈(이상 신일고), 홍원기, 손혁(이상 공주고), 유진호(중앙고), 그리고 2016년 10월까지 광주일고 감독을 맡았던 고교동기 김선섭이 있다. 동기생이 7명이어서 칠갑산회라는 동기회를 유지하고 있다.[10] 김진우는 기아 인수를 노리고 계약한 것이니 번외로 치자.[11] 대학시절 리그를 평정했으며 입단 당시만 해도 해태에서는 '''이종범이 또 한 명 들어왔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으니.[12] 공교롭게도 1996년에 입단한 점과 데뷔 초 부터 수비에서는 리그 정상급이라 꾸준히 주전으로 출장한 점, 둘 다 2000년 이후 방망이의 실력이 급성장한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13] 당시에는 쌍방울에서 이적해 온 송인호가 2루를 맡았으나 수비는 물론 공격력도 김종국에 비해 나을게 없었다.[14] 당시 광주 98-114-98, 대구 95-117-95[15] 96년에 자신의 한 시즌 최다 실책인 17개를 기록했으나, 이듬해 실책을 한 자릿수로 줄여버리는 놀라운 수비실력을 보여주었다.[16] 중견수에는 공격력은 노쇠했으나 수비와 주루만큼은 건재했던 이순철과 그 이순철을 밀어버릴정도로 적절한 공격력과 견고한 수비를 자랑하는 김창희가 있었다. 타이거즈 역대로 따져도 센터라인은 최고였던 시기였다.[17] 그 이후 해태의 유격수자리는 박계원, 김호, 정성훈, 홍세완이 경합을 벌인 춘추전국시대였으며, 그들의 공통점은 '''그래도 김종국보다 타격은 좋았다''' 였고, 또한 '''김종국보다 수비가 떨어진다.''' 역시 공통된 의견이었다.[18] 더구나 이 성적은 2010년대의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좋은 성적인데, 2할 8푼대 타율에다가 출루율이 3할 6푼대를 기록하면서 테이블세터의 미덕인 출루에 있어서 본인 몫을 훌륭하게 해냈으며, 구장+포지션+시대 보정을 받는 wRC+를 봐도 109.8을 기록하며 2루수로서 평균 이상의 타격을 보여줬다. 더구나 도루를 50개씩 하면서도 실패가 단 '''9개'''로 성공률이 84.7%에 달했는데, 이는 도루왕 경쟁을 했던 정수근이나 전준호보다도 높은 성공률이었다. 도루가 많으면서도 가치있었다는 뜻.아쉬운 점은 삼진을 116개나 당했다는 것. [19] 02년 아시안게임, 03년 아시아야구 선수권 대회, 06년 WBC 대표팀으로 3차례 선발되었다.[20] 전성기를 다소 지나서 출전한 2006년 WBC에서 타율 4할을 기록할 정도였다. 다만 이때는 4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나 부상을 당해서 그 뒤의 경기는 김민재가 출전했다. 김민재의 WBC 타율 기록은 2할 7푼. 여튼 여러모로 정규시즌에 비해 국제대회에서 임팩트를 더 강하게 보이는 정대현과도 비스무리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21] 심지어 그 중 한 개는 주 포지션이 아닌 유격수 자리에서 실책한 것이다.[22] 도중에 이탈한 용병 발데스와 불안한 뜬 공 수비가 많았던 김선빈 대신 유격수로 출장할 때가 잦았으며 이현곤 본인도 체력문제로 인해 11년까지 기아의 유격수 자리는 특출나게 고정된 선수 없이 이현곤과 김선빈이 번갈아 들어가곤 했다.[23] 이종범, 김종국, 장성호, 이대진 이렇게 4명 밖에 없었다.[24] 김종국은 체교과 1992학번, 정근우는 체교과 2001학번.[25] 이는 당시 KIA 타이거즈 순위와 관련있는 사항이다. 애초 조범현 감독은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면 김종국을 엔트리에 넣을 예정이었지만 16연패로 가능성이 사라지자 프론트는 8월 즈음 휴일 홈경기에 은퇴식을 계획했다. 하지만 팀이 8월에 급상승세를 타면서 4강 싸움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은퇴식은 미뤄지고 미뤄지다 4강 희망이 없어진 9월 홈경기 때 은퇴식을 치루게 된 것. '''남은 홈경기 중, 휴일 경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일 은퇴식이 불가피해졌다.[26] 부상으로 날린 1999년을 빼고 계산해도 한 시즌 평균 실책이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27] 이게 바로 알루미늄 배트 효과라는 것이다. 알루미늄 배트 그것도 미국제 -5드롭 배트의 반발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만 김종국의 경우에는 대학 시절 어깨를 다친 적이 있다. 투수만큼은 아니지만 야수의 어깨부상은 타격시 비거리와 같은 부분에서 큰 영향을 끼치는지라 이 점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28] 대학시절 유망주였던 김종국을 돈 많은 타 팀에서 탐내기도 했지만 김종국은 돈 없는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를 선택했다. 2006년 FA 당시에도 다른 팀과 계약하려는 페인트 모션 하나 없이 스스로 KIA 타이거즈 프론트를 찾아가 계약했다.[29] 또한 20대 시절에는 나름 날렵하고 곱상한 외모덕에 장성호와 함께 여성팬들이 많아 이상윤-이강철에 이은 90년대 말 00년대 초의 타이거즈의 아이돌이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형편없던 타격때문에 김종국을 보러왔던 여고생들이 아재들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고..[30] 이 전에 이호준이 한 말은 "재홍이 형이 진짜 많이 때렸지"라고 하니까 옆에서 스윙 연습하던 박재홍이 갑자기 "야! 누가 그러면 진짜 내가 때린 줄 알잖아~"하고 푸념섞인 원망을 했다. 당황한 이호준이 타겟을 바꾼 인물이 김종국이다.[31] 하지만 프로에 와서는 성격을 바꾼 듯, 점잖은 학구파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2009년 한국시리즈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32] 참고로 이 번호를 탐내던 또 다른 KIA 선수는 짐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