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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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오스, '''콘스탄티노스 3세''' 그리고 이라클로나스가 찍혀있는 솔리두스 금화.
'''제호'''
콘스탄티노스 3세(Κωνσταντίνος Γ', 그리스어/Constantine III, 영어)
'''휘'''
헤라클리우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Heraclius Novus Constantinus Augustus, 라틴어)
'''생몰 년도'''
612년 5월 3일 ~ 641년 5월 25일
'''재위 기간'''
641년 2월 11일 ~ 641년 5월 25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콘스탄티노스 3세는 641년 중 채 100일 남짓 동안 재위했던 황제였다. 그는 헤라클리오스(이라클리오스)와 그의 첫 부인 에우도키아의 적자였다. (다만 첫째 아들은 사생아 요안니스)
콘스탄티노스의 이름은 태어날 때 헤라클리오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로 지어졌고, 이후 쭉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 [1] 공식적인 제국의 명명법의 관점으로는 그의 아들 콘스탄스 2세가 더 '콘스탄티노스' 3세로 어울릴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콘스탄티노스는 원래 이름이 '이라클라오스(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노스'였기에 원래대로라면 아버지와 똑같이 '이라클리오스', 즉 '''이라클리오스 2세'''를 황제명으로 삼아야 했으나,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그 전에 활약이야[2]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큰 땅을 잃은 실지(失地)황제'''로 황제 커리어를 마감하고 죽었기에 이라클리오스라는 이름을 차마 쓸 수가 없어 버리고 그 뒷이름인 콘스탄티노스로 황제명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생애


콘스탄티노스는 613년 1월 22일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촌 니케타스(Nicetas)의 딸, 즉 6촌 누이와 약혼했다. 사실 이 부부는 족보상으로 근친상간에 속했지만... 아빠도 근친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충 넘어갔다. 거기에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조카 마르티나랑 결혼하면서 온갖 비난을 탱킹한 점도 있다.
콘스탄티노스와 그레고리아는 629년, 또는 630년에 결혼을 했으며 그해에 첫 아들 콘스탄스, (이후 콘스탄스 2세)를 낳는다. 둘째역시 아들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테오도시우스였다. 콘스탄티노스 부부는 이후 딸도 한명 낳는데, 이 딸, 마얀(Manyanh)은 이후 사산왕조의 마지막 황제가된 야즈네게르드 3세와 결혼한다.
641년 아버지가 죽자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로 즉위한다. 콘스탄티노스는 단독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하고[3]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의 두번째 부인이자 본인의 사촌인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와 공동통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 달 만에 결핵[4]으로 29세요절하였다. 제위[5]는 후임 황제인 이라클로나스 가 이어받았지만, 원래 근친혼으로 시민들과 종교계로부터 인기가 없는 모자라 그런지 몇 달 못 버티고 이 콘스탄티노스의 아들인 또 다른 콘스탄티노스에게 공동황제를 허용한 후 결국 뺏겼다. 여기에다가 그는 코가 잘렸고 어머니 마르티나는 혀가 잘린 후 사이좋게(...) 로도스 섬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이런 일련의 절차에는 언뜻 유명무실해 보이던 콘스탄티노플 원로원 의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여기에는 콘스탄티노스의 복안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쪽 측근인 발렌티누스를 동부군 사령관으로 심었고 그가 그 해 9월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복위를 이끌었다. 하지만 발렌티누스는 딸을 새 황제에게 시집보내고 실권자가 된 후 야심을 품어 2년 뒤 공동황제위[6] 혹은 제위 자체(즉 찬탈)[7]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다가 성난 수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
[1] 이후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약어로도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대 역사서에 표준이 되었다. 수도의 창건자이고, 11세까지 쓰였으니까. 참고로 그 다음 많이 채택된 황제명은 요안니스와 미하일로, 둘 다 8세까지 쓰였다.[2] 그래서 땅하고 성십자가를 찾고 딱 타이밍 좋게(...) 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If론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3] 공동통치가 아버지의 유지였다. [4]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 실제로도 세 달 전에 먼저 죽은 아버지 입장에서, 저렇게 금방 따라 죽을 것 같았으면 아예 황제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 법 하다.[5] 공동 황제를 맡고 있었다고 했지만, 좁은 의미의 제위는 당연히 선임 황제, 즉 정제(正帝 : Augustus)위를 의미한다.[6]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의하면[7] 영어 위키백과에 의할 경우 : Valentinus_'''(usurper)(찬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