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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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존(John, King of England)
'''별명'''
결지왕 존(John Lackland / Jean sans Terre)
'''부왕'''
잉글랜드의 헨리 2세
'''모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생몰년'''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49년 301일)
'''재위기간'''
1199년 4월 6일 ~ 1216년 10월 19일(17년)
'''대관식'''
1199년 5월 27일
1. 소개
2. 왕위에 오르기까지
3. 실패로 점철된 재위기간
4. 사망
5. 존 왕이 상실한 영토
6. 평가
6.1. 인기 없는 왕
7. 현대 매체에서


1. 소개


영어: John (존)
중세 프랑스어: Johan (조앙)
프랑스어: Jean (장)
라틴어: Iohannes (요한네스)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남동생이자 헨리 2세의 막내 아들. 별명인 랙랜드(Lackland)는 원래 어렸을 때 봉토를 받지 못하여 붙은 것으로 '결지왕(缺地王)'이라 해야겠지만, 프랑스 쪽의 영토를 대폭 잃은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히 새겨졌기에 실지왕(失地王)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듯 하다. 안습. 결지왕이라는 별명이 좀 낯설어서 '무영토왕(無領土王)'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그가 남긴 유산이라면 귀족들의 협박마그나 카르타를 남겼다는 것.
영국의 많은 왕들 중 워낙 유명한 이름인 요한에게서 비롯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사후 그의 이름을 가진 왕이 없는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 1세로 불리지 않는다. 스티븐 왕, 빅토리아 여왕, 앤 여왕과 비슷한데, 두 여왕은 여왕이 드물다 보니 같은 이름을 가진 여왕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불과하지만(더군다나 빅토리아는 불과(?) 100여년 전이다.), 존 왕은 영국 정부 행사에서조차 무능한 왕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앞으로도 존이라는 이름의 왕은 나오지 않을 테니 아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존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 같다.(스티븐 왕도 사촌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으려다 내전으로 번진 과오 때문에 피휘되는 이름이 되었다.)[1]

2. 왕위에 오르기까지


원래 부왕 헨리 2세의 다섯 아들 중,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이었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알짜 영지인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고 무지 애를 썼다. 심지어 4남 제프리의 상속분을 없애서라도 아키텐을 물려주려 하자, 세 아들 헨리, 리처드, 제프리[2]와 아내 엘레오노르가 결사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란은 결국 헨리 2세에게 개발살났지만 결국 아키텐의 상속은 포기해야 했으며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가 총애한 존은 정작 형 리처드 1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원래는 헨리 2세에 붙었지만 전황이 리처드 쪽으로 기울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에게 붙었다. 참고로 이 일로 헨리 2세가 엄청나게 실망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이후, 리처드 1세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자신이 리처드 1세의 후계자이자 실질적으로 왕조의 지배자임을 내세워 왕이 되려고 이리저리 꼼수를 부리고 필리프 2세에게 붙어, 형을 배신하고 반역질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여담으로 이때 리처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필리프 2세가 존 왕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가관인데 "그대의 몸을 돌보시오. 악마가 풀려났소.(Look to yourself: the devil is loose)" 1194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엘레오노르의 간곡한 설득에 당시 존이 27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신하에게 휘둘린 어린애였을 뿐"이라면서 존을 용서했다.[3]
1199년 리처드 1세 사후에, 넷째 형인 제프리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서[4]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된다.

3. 실패로 점철된 재위기간


한편 1200년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3~15세의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한다.[5] 사실 보상만 잘 해줬다면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건만 존 왕은 그럴 깜냥이 못되었다. 이에 뤼지냥 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여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원칙적으로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여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가 주군이 되고 존은 봉건 가신의 입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6][7] 물론 존은 프랑스의 법정에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필리프는 이를 기회로 존 왕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령을 몰수하고 이 영지를 아서에게 내렸다. 물론 몰수령을 내린다고 호락호락 영토를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필리프의 존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다.
1203년, 아서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8]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든다. '''3차 십자군 때 활약했던 리처드 1세의 부하들도 이때 포로로 붙잡혀서 아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아서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이 아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마감(Margam) 수도원에는 '''"존 왕이 아서를 붙잡고 술에 취해 직접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는 세느 강에 무거운 돌을 달아 던져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그냥 음모론이 아니라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직접 죽였건 명령을 내렸건 존 왕이 아서를 죽였을 거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9]
이 부분은 중세 봉건제를 이해해야 하는데 동양식 절대군주제라면 반역자를 처형하는 것이 왕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유럽의 봉건제도에서는 좀 다르다. 봉건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주군과 봉신과의 관계는 상호계약관계로 원칙적으로 봉신의 봉신은 주군과 주종관계가 아니다. 다만, 실제로는 평시에 공작의 봉신인 백작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10] 문제는 여기처럼 공작이 왕에게 반기를 든 경우다. 이 경우 백작은 중세법상 원칙적으로 자신의 주군인 공작편을 들어야 한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많은 변수가 있어서, 반란 명분이 약하거나 할 경우 그냥 왕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왕이 반란을 진압하면 서약위반을 이유로 공작의 작위를 몰수할 수 있고, 왕이 백작의 직속상관이 되면서 반기를 든 백작을 좋게볼리 없으니 공작에게 붙을지 왕에게 붙을지 눈치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백작이 공작을 따라 왕과 싸웠다해도 봉건계약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므로 그게 중세법상 죄가 되지는 않았다.[11] 때문에 '''왕이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도 승자의 권리로 몸값정도는 받을 수 있었지만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므로 이를 처형한다면 폭정이 된다.'''[12] 존 왕이 공개적으로 귀족들을 처형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처형도 아니고 감옥에서 비참하게 귀족들을 굶겨죽인 것은 당시 시각에서 명백히 폭정이므로, 프랑스령 귀족들이 존 왕을 버리고 필리프 2세에게 붙었다 해도 먼저 중세법을 위반한건 존 왕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에서도 후세에도 별 문제제기 없이 그대로 프랑스령이 된 것이다.
한편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했다. 존은 이런 필리프를 상대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가야르 성을 공성 중인 필리프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좋아보이는데 실제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전'''이라 실패했고[13] 필리프 왕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하였다. 그 결과 존 왕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14]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모두는 존 왕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한편 존 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 것이 두고두고 억울했던지 1214년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의 높은 원성에도 불구하고[15]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 로마 제국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여들여 프랑스령을 침공했다. '''이론적으로는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프랑스 남부를 공격해 필리프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에 오토 4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완벽한 작전인 듯'''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자 루이가 존 왕의 군대를 격퇴하여 아키텐으로 후퇴했고 신성로마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지자 필리프 2세가 북쪽 연합군을 요격에 나서 의 외곽 부빈에서 회전이 벌어졌다. 이 회전에서 연합군은 유리한 입장[16]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프랑스군 사망 1,000명, 연합군 사망 1,000명+포로 약 9,000명).
비보를 전해들은 존 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불운하다! 이토록 운이 없는 건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존 왕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비(+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지불한 막대한 금액)만 왕창 쓰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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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인기가 없었는데 부빈에서의 패배는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존 왕에게 결정타였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 왕에게 귀족들은 더이상 세금을 못 내겠다고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1215년에 맺은 마그나 카르타였다.
재위 마지막에는 억지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후 교황에게 호소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파문하는 등 반격을 하였다. 이에 귀족들은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17] 그러나 1216년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여 반란은 흐지부지 되었다.

4. 사망


사인은 다름아닌 '''과식'''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질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는데 그걸 치료한답시고 '''익힌 고기와 과실주를 많이 먹는''' 처방을 자신에게 내렸다가 급체로 사망했다. 이래저래 막장. 리처드의 경우에는 일단 살해당한 거고, 부하가 병크를 터뜨려서 죽은 것이었다. 게다가 죽은 뒤에는 늑대인간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배를 갈라보는 시체 훼손을 벌였다고 한다.

5. 존 왕이 상실한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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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필리프가 직접 지배한 직할지, 녹색은 필리프의 봉신의 영토, 노란색은 교회령, 빨간색이 잉글랜드왕의 프랑스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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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200년의 지도로 1199년 리처드 1세가 죽은 다음 존왕에게 물려준 영토를 보여준다.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가 있던 동안 필리프가 잉글랜드령을 일부 빼앗았지만, 리처드가 돌아오고 나서 필리프를 몰아내어 프랑스 남동부를 제외하면 1180년의 영토와 거의 변함이 없다.
이렇게 존 왕은 저 넓고 생산력 많은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당연히 후세의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1154년부터 존 왕이 프랑스령을 완전히 상실하는 1214년까지 잉글랜드왕이 지배한 지역을 합쳐서 영국에선 '''앙주 제국'''(Angevin Empire), 프랑스에선 플랜태저넷 제국(L'Empire Plantagenet)이라고 부른다. 당시 프랑스령의 생산력이 엄청나서 아키텐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으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의 절반을 계속 지배했다면 후대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영국인들은 '리처드 1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하고 아쉬워하며, '앙주제국이 계속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What if the angevin empire survived?) 하고 영미권의 IF놀이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이다.

6. 평가


'''존 왕은 최악의 왕을 대표'''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최고의 군주를 대표한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 2015년 마그나 카르타 선포 800주년 기념 '''정부 주관 행사''' 中.#[18]

영국에서의 평가는 두말할 필요 없는 '''최악의 막장왕'''이지만, 전투 능력은 '무딘칼 존'이라는 조롱 어린 후세의 평가와는 달리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존은 직위 초기 내치나 '''행정 부분에서는 꽤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19] 또한 해군의 육성, 리버풀의 건설,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의 지배 확립 등에는 일정 부분 업적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일선에서의 지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는 말도 존재한다. 왕자 시절 어머니가 미라쥬 성(프랑스 아키텐 소재)에서 프랑스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을 때 수백 기사들만을 이끌고 이틀 만에 130km를 주파, 기습하여 역으로 포위군의 지휘부를 제압한 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몽토방(프랑스 미디피레네 소재) 성채를 공성하여 함락시킨 전과가 있다. 따라서 야전 지휘능력은 아버지와 형을 닮아 최소 평균 이상은 되었으며, 의회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되자 영국 남부로 피난하여 교황의 지지와 용병의 고용이 완료된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 의기양양하던 귀족들 중 아무도 그의 군사를 막기 위해 선뜻 나서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어찌 중요한 길목의 요새 로체스터 성채에서 막기는 했지만.
그러나 최일선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일지도 모르나 노르망디에서의 공격 실패나 1214년의 실패 등으로 미루어 보면 최고 군사 지휘자로서의 전략적 판단에는 분명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뭔가 작전을 세울 때는 양면공격 등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데, 작전이란 건 단순할수록 실행하기 쉽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단순하지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작전을 세우며, 전쟁의 화신이던 형 리처드 1세나 전투보다는 모략에 능했던 군주였지만, 군사적 능력도 우수했던[20] 필리프 2세와 다른 점이다.
또한 '''정치, 외교적으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필리프와 전쟁 초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의 영주들은 존 왕을 따랐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영주를 무시한다든지 포로를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는 봉신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렸다. 리처드 1세는 자신을 열받게 하면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인간이었지만, (괜히 악마라 불린 건 아니다.) 그 못지않게 이성적이라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21] 그는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 그 상처를 입힌 병사를 용서해 주는 등,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관용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리처드 1세벌여놓은 일들의 여파로 잉글랜드의 막장스런 내정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애초에 필리프가 지배한 영토는 존 왕이 지배한 영토의 반도 안 되었고 세금 수입도 그만큼 적었다. 게다가 존 왕이 세금을 적게 거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존 왕이 영지를 잃어버린 건 재정이 궁핍해 군대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령의 봉신들이 전부 필리프 2세에게 붙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존 왕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 문제이지 잉글랜드의 내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6.1. 인기 없는 왕


그의 인기는 형 리처드 1세에 반비례하여 형편없이 낮으며 이미지도 상당히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아이반호로빈 후드 이야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멜 브룩스의 못말리는 로빈 후드라는 코미디 영화에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이제부터는 영국의 화장실을 존(john)이라고 불러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실제로 소문자로 시작하는 존(john)은 화장실이라는 속어다.
'''이미지가 하도 개판이라 이후 영국의 왕은 (Joh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도 존 베일리얼(John Balliol)이라는 왕이 잠시나마 잉글랜드의 괴뢰로 옹립된 일이 있어서 왕의 이름으로 존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스튜어트 왕조의 로버트 3세는 왕자 시절에는 이름이 존이었지만 이걸 꺼려서 로버트로 이름을 갈았다. 다만 이후의 플랜태저넷 왕조에 존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처드 1세십자군 활동을 위해 잉글랜드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그로 인한 민중의 궁핍까지 전부 존의 책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회군해야 했던 이유가 존의 반란 때문이라서 고생하고 성과 없이 돌아오게 만든 원흉인지라 책임이 있는 건 맞다. 거기다 이 사람도 막대한 세금을 거둔 건 마찬가지다. 다만 형이 거둔 세금까지 악평이 더해졌다는 것 정도. 의심이 많은 데다가 귀족들과 싸우면서 찌질하고 비겁한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전쟁하면 맨날 져서 영토는 계속 줄어들고(...).
어쨌든 그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화나면 두렵지만 굉장히 쿨했던 친형 리처드와는 다르게 매우 오만하였으며, 무엇보다 패자나 약자를 관용하는 정신이 전무했다. 이는 그의 온갖 무능과 패착이 겹쳐져 후세의 오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형제간에 확 갈리는 평가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영국의 왕통이 리처드 1세가 아닌 존 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이어지게 된 점은 재미있는 점이다.

7. 현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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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코에이원조비사에선 그저 그런 잡무장 A. 그나마 고증 반영인지 전투, 지휘는 C라 부하로는 쓸 만하지만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 매력이 D 이하라 조금 쓰레기 같은 면이 있다. 시나리오4 세계 제국으로의 길에선 형인 리처드 1세의 친족 부하로 등장. 친족이라 배신도 잘 안 해서 지방영주나 전투 지휘관으로 적당히 쓸 만하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영국 소속 장수. 하지만 능력치는 전투종족인 형에 비해 캐안습. 정치 41, 전투 52, 지모 37에 특기는 어쩐지 외교 특기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교 특기는 지모가 높아야 효과가 상승하는데 여기서는 존의 지모에서 보다시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또한 실제 역사대로라면 형 리처드는 시나리오 개시 시점에서 10년 남짓해서 사망해야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실제로는 사고로 죽었다는 점 때문에 리처드의 수명이 비교적 길게 설정되어 있어서 후계자가 될 기회도 없다.
그나마 병과적성이 수군 제외하고는 전부 C라서 굳이 사용하고 싶다면 친척 장군이라서 병력을 많이 인솔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전쟁에서 형이나 로빈 후드를 서포트하는 역할로 삼는 게 낫다.
  • 프랑스와 영국을 컴퓨터에 맡겨 놓으면 필리프 2세가 존을 충동질하여 영국 왕위를 일시적으로 찬탈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며 PK의 경우 신세력을 작성할 때의 튜토리얼 이벤트에서 형 리처드를 뒷담화하다가 리처드에게 욕먹는 이벤트도 있다. 이 게임에서는 이래저래 찌질한 악역으로 설정된 듯.


  • 디즈니로빈 훗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갈기가 멋지게 나있고 매우 간지나게 표현되어 그야말로 사자심왕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등장하는 과는 달리, 어린 사자같이 갈기도 없고 빈약하게 생겼으며 불쌍해보일 정도로 심히 못나고 찌질하게 나온다. 왕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인지 왕관이 머리에 맞지 않아서 귀를 눕혀서 머리 위에 공간을 확보한 후 왕관을 머리 위에 어거지로 올려 놓는 형편이며, 뭔 난리만 나면 이 왕관이 머리에서 떨어지기 일수고 심지어 목에 대롱대롱 걸리기도 한다. 늘 형에게 열폭하며 특히 걸핏하면 엄마~(mommy~)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쪽쪽 빠는 모습이 압권. 거기에 위에 동영상에서 광대왕(Phony King of England)이라는 조롱까지 획득했다. 결국 결말에서 형이 돌아오면서 죄수 신세가 된다. 한국판 성우는 설영범.
  • 랜달 개릿의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는 과거 리처드 1세가 샬뤼 포위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카 아서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존 왕이 등극하지 못하고 계보까지 끊겼는데, 작중 서술자가 존 왕의 핏줄은 불량한 핏줄이라서 후손이 끊겨서 다행이라고 대놓고 까고 있다. 게다가 존 왕이 즉위를 하지 않아서인지 왕 이름으로 존을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작중에서 등장하는 왕의 이름은 존 4세이다.
  • 대항해시대 3에서는 존 왕의 술잔이 발견물로 등장한다. 낚시게임으로 얻는 발견물로, 시장에서 모조품 금도금 술잔을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위치도 유럽이고 낚시게임이 작중 미니게임 중 가장 쉬운 게임으로 손꼽히므로 그냥 발견하는게 낫다.
  • 직접적인 등장은 아니나, 늑대와 향신료에서 로렌스호로가 윈필 왕국을 방문했을 때 브론델 수도원과 윈필 국왕의 대립이 이어지며 윈필 국왕이 교회와 척을 지고 브론델 대(大) 수도원이 관리하던 양모 무역권을 박탈해 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배경 설정이 나오는데 존 왕 시절 있었던 교회와의 대립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역사대로 헨리 2세의 5남이자 Meath의 공작으로 나온다. 영국령 아일랜드와 기타 영지를 고증대로 상속받은 모습인데 음모력만 13이고 나머지 능력치는 없는 수준이다. 만약 리처드 1세를 플레이한다면 제거대상 1순위. 왕으로 시작한다면 후세를 기약해야할 정도로 무능력하지만 게임의 한계로 체급 차이 때문에 플레이어가 잡으면 프랑스를 역으로 이길 수도 있다.
  • Fate/strange Fake에서 그의 형이 언급하는데, 자신을 배신했음에도 그다지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있고 리처드가 죽었다고 언론플레이하는 중에도 백성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이 처량했다고 한다. 형제의 정은 가지고 있었는지 시간을 보낼 때 "존 왕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서 존 왕이 형은 영웅이니까 자신의 어릿광대 짓을 보고 웃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존은 자신에게 내정을 떠맡기고 툭하면 전쟁하러 가지만 존경하는 영웅이었던 형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왕자나 공주의 경우에는 존과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쓴 사람들이 여럿 있다.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는 2명이 있었으나,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는 프로이센으로 시집갔고,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빅토리아''' 공주는 이미 왕위 계승자인 오빠가 2명이나 있는 데다가 자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35년 죽어서 이제는 없다.[2] 각각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차남, 3남, 4남이다. 장남이었던 푸에티에 백작 윌리엄(기욤 9세)는 3살의 나이로 요졀했다.[3] 존은 필리프 2세보다 한 살 적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후대에 쓰여진 소설이 바로 월터 스콧의 대표작 《아이반호》다.[4] 형이었던 제프리(브르타뉴의 공작 제프리 2세)가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와 결혼해서 낳은 외아들이다. 콩스탕스는 아서를 파리로 보내고, 필리프는 아서를 왕세자 루이와 같이 키웠다. 제프리 사후 유복자인 아서가 뒤를 이었으나, 리처드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숙부인 존과 전쟁을 벌였고 심지어 할머니 엘레오노르를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존에게 사로잡힌 후 행방불명됐는데, 존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아서의 큰누나 엘레오노르는, 존이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의 상속권을 박탈하기 위해 평생 결혼시키지 않고 연금시켰으며, 1241년 60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작은누나 마틸다는 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영국이 잠시나마 먹었던 브르타뉴 공작위는 콩스탕스가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제프리 사망 후 재혼한 남편 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릭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5] 앙굴렘의 이사벨(1186/1188~1246). 현대 역사가 Thomas. B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아름다웠고, 이 점과 존 왕과 루지냥가의 전쟁 동기를 연관시켜 그녀를 "중세의 헬레네"라고 언급한다. (동시대 목격자의 기록에서 트로이의 헬레네, 그리고 심지어 폴릭세네라헬까지 방불케 한 여인은 필리프 2세의 왕비 덴마크 공주 잉에보어가 유일하다) 존 왕의 이미지가 하도 개판이라 당대에도 존 왕에게 강제로 납치당해 결혼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졌으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한다. 이사벨은 헨리를 낳았지만 섭정도 못 했고 존 왕 때문에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했으며 그가 실정을 저지르자 한 것도 없는데 같이 욕을 먹었다. 존 왕 사후에 이사벨은 위그 9세의 아들인 뤼지냥의 위그 10세와 재혼한다.[6] 물론 그렇다고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에 한해서만 중세법적으로 그렇다는 것뿐.[7] 정확하게는,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은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왕 '''개인'''이 사사로이 보유하는 것이지,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아니다. 실질적(de facto)으로 같은 인물이 다스리기에 정책적으로 같은 움직임을 보일 뿐, 프랑스 내 영지는 엄연히 법률 상(de jure) 프랑스 왕국의 영토로, 프랑스 왕국의 공공 법률이 적용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군주나 제후의 국적을 초월한 다중신분과 그에 따른 군주·제후 개인 하 영역공동체의 존재는 중세 유럽사를 통틀어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8] 이 사람은 존 왕이 아서를 공격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1214년 부빈 전투 때는 오히려 필리프에게 붙어 존 왕 측을 공격한다.[9] 얼핏 듣기에는 어떻게 영주들이 자기네 왕이 아니라 다른 나라 왕을 섬길까 하지만, 이들은 영국왕 존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프랑스 대영주 중 하나로서의 존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네 대영주가 왕과 전쟁을 벌이기에 도와주었지만 오히려 무시만 당하자 대영주 대신 왕 편에 선 것뿐이다.[10] 알기 쉽게 말하면 내리갈굼. 예를들어 왕-공작-백작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백작은 공작의 명령을 들을 의무는 있지만 왕의 명령을 들을 의무는 없다. 하지만 백작이 왕의 명령을 무시했다간, 왕이 공작 불러다가 "쟤 내 말 안 듣는데 밑에 애들 관리안하냐?"고 하면 꼬리내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11] 반란 자체로는 죄가 아니지만 실제로는 이런저런 잘못을 했다는 핑계를 붙여 작위몰수 정도는 할 수도 있었다. 이것도 심하면 반발을 살 수 있으니 어느정도 눈치껏 해야했다.[12] 예를 들면 1260년대 2차 남작 전쟁에서 에드워드 1세는 반란주모자인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를 전사시키고 사지를 잘랐지만, 레스터 백작을 따라 반란에 참여한 귀족들은 작위만 몰수했다가 곧 벌금을 받는 조건으로 사면하고 영지를 돌려주었다(출처: Plantagenet England, 1225-1360 p117 저자 Michael Prestwich). 그것도 원래 벌금 선불이었던걸 영지 먼저 돌려주고 벌금 후불이라는 조건으로 바꿔주었다. 이것도 에드워드 1세와 왕당파 측이 복수심에 불타서 반란 귀족들의 작위를 몰수한 것이지 처형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에드워드 1세는 적에게 무자비하다는 평임에도 이 정도다. 이런게 중세 유럽의 방식이었다. 다만, 백년전쟁 무렵인 중세 말기부터는 적이라도 귀족이면 대우해주는 이런 관습이 점점 약해지고, 장미 전쟁 시기부터는 그런거 없이 귀족이건 아니건 적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13] 육지와 강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면 큰 혼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무전기도 없던 중세에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잘 될 리가 없다. 게다가 조수 계산조차 실패해 프랑스 군의 보급로도 못 끊었다. [14] 전부터 노르망디에 대한 통제권이 희미해진 상태였는데 이 지역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프랑스 왕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나섰다고 한다.[15] 영국왕의 프랑스령은 영국의 영토가 아니라 영국왕 개인이 프랑스에 가진 땅이라, 잉글랜드 귀족들 입장에서는 영국에서 거둔 세금을 왕 개인의 땅을 늘리는 전쟁에 소모하는 셈이니 달가울 리가 없다.[16] 프랑스군 15,000명 vs 연합군 25,000~30,000명 추정.[17] 이를 1차 바론 전쟁이라 부른다. 자세한 사항은 헨리 3세 항목에서 확인.[18]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발언은 현재 재위하고 있는 군주인 만큼 어느 정도 립서비스 성이라고 치더라도 '''고위공직자가 공식석상에서''' 저렇게 말할 정도니 영국인들이 존 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19] 하지만 이것도 약간 애매한 게 학설에 따라서는 단지 존 시기의 행정 관련 문서가 어쩌다 보니 이전 시대에 비해 잘 보존되었을 뿐 과연 존이 이전 왕들에 비해 더 내정을 잘 가꾼 것이 많은지는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냥 '기본은 했다' 정도. 최근에 존의 재위 기간 잉글랜드의 GDP 연구가 있는데 숫자놀음 취급 당할 뿐이다. [20] 다만 리처드에게는 털린 걸 볼 때 리처드에 미치지는 못했다. [21] 살라딘에게 먼저 협상을 제의해 혼담을 제의한 것이 리처드다. 서로 조약을 맺자 무조건으로 포로를 돌려주었으며, 살라딘의 조카에게 기사작위를 선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