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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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연성공'''
'''정체'''
孔令貽
'''간체'''
孔令贻
'''한국식 독음'''
공령이
'''영문'''
Kong Lingyi
''''''
곡손(谷孫)
''''''
연정(燕亭)
'''출생'''
1872년 11월 29일 청나라 산동성 곡부현
'''사망'''
1919년 11월 8일 중화민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image]중화민국 [image]
'''학력'''
가정교육
'''직업'''
정치가
1. 개요
2. 생애
2.1. 31대 연성공
2.2. 태어나지 않는 아들
2.3. 최후
3. 여담
4. 저작 목록
5. 주요경력
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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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자의 76대 직계 후손으로 31대 연성공을 지냈다.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아버지다.
胎자와 貽자가 비슷하게 때문에 공영태로 잘못 쓴 경우도 있다.

2. 생애



2.1. 31대 연성공


1872년 산동성 곡부현에서 30대 연성공 공상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5세의 나이로 연성공을 세습받고 광록대부에 봉해졌다. 공자 집안의 종손인 만큼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스스로도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아 서예·매화 그림에 능하였다. 이로 인하여 곡부 사람들은 모두 새해가 되면 공령이가 쓴 연화를 사서 집에 붙였다고 한다. 높은 작위에 오른 사람이었지만 겸손하고 온화하고 붙임성이 좋았으며 활달하고 도량이 넓고 뽐내는 티가 없었다는 평판을 얻었다. 또한 상당히 깨어 있는 인물이라 여러 귀인들 말고 평민들과도 두루 교우관계를 맺어 의형제 결의를 하기도 했다. 한 번은 극단의 배우로 나선 적이 있었는데, 공령이가 하인 역을 맡아 관리 역을 맡은 다른 배우에게 무릎을 꿇었더니 연극을 보던 사람들이 '연성공이 무릎 꿇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하자 "극은 극이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주변을 달랬다고 한다. 당연히 다른 배우들은 크게 감동하였고, 얼마 후 공령이의 집에 불이 나서 황제가 하사한 상주 시대의 제기인 '십공'이 불탈 위기에 처하자 어느 배우가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십공을 구하기까지 했다.
곡부현 고반지 공부의 행궁에 서당을 세우고 안형·증자의 후손들과 함께 사씨사범학당을 건립하여 총장을 맡았다. 또한 청 조정의 명령에 따라 산동성 학무를 검사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광서 15년 한림원시강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4차례 관리를 파견하여 공자의 제사를 지내게 도왔고 이에 답례하기 위해 4차례 북경을 찾아 황제를 배알하여 많은 상을 받았으며(이 시기 이홍장과도 교류하였다) 쌍안화령을 달 수 있는 권리와 자금성 안에서 말을 탈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1905년, 유인석과 서신으로 교류하며 청나라와 대한제국의 공동 항일 전선 구축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1906년에는 유인석에게 곡부로 오면 적극 지원하겠다며 중국 망명을 권유했다(이는 유인석의 병환이 심해져서 포기하게 된다).

2.2. 태어나지 않는 아들


맨 처음 이부 우시랑 손유문의 딸인 제녕 사람 손씨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고 손씨는 1894년에 사망했다. 이어 곡무의 풍씨를 첩으로 들였으나 역시 자식을 보지 못했다. 1905년, 산동 대명부 지부 도식윤의 딸 북경 사람 도숙의와 다시 정식으로 결혼을 올렸다. 결혼 후 서태후를 알현하였고 서태후는 도숙의를 1품 부인에 봉하였다. 도숙의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다.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를 알현하였다. 당시 어머니 팽태부인은 환갑을 맞이했는데 공령이는 아직 생존 중인 어머니를 위해 패방을 세우고자 청하여 광서제의 허락을 받았다. 광서제가 공령이의 나이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서른여섯 살입니다. 신이 어릴 적에 어머니는 많은 위험을 겪었고, 공령이를 사람으로 키우느라 쉽지 않았기에 신은 태후와 황제의 은전을 빌려 어머니에게 편액 하나를 상하면 자기 절에 패방을 세워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신은 여러 번 성은을 입어 감히 경망히 황제께 상주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감동받은 광서제가 "다들로 응당 효도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것도 너의 효심이다."라고 칭찬했다. 서태후도 감동하여 그에게 여의와 옷감을 상으로 내렸으며 직접 복수(福壽) 두 글자를 써서 내려주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성격이 솔직하였기 때문에 광서제가 산동의 정황에 대해 묻자 수해와 빈곤에 대해 솔직히 고해바쳤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이듬해 선통제가 퇴위함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어 공화국의 시대가 열렸으나 북양정부는 <숭성전례>를 발표하여 연성공 작위의 유지를 선언했고 공령이에게 매년 봉록을 주도록 규정하였다. 1915년 홍헌제제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령이를 군에 봉하였다. 1915년, 그때까지도 자식이 없던 공령이는 초조한 마음에 도숙의가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 왕보취를 첩으로 들였는데 왕보취와의 사이에서 공덕제, 공덕무 두 딸을 낳았다.

2.3. 최후


1919년, 도식윤이 사망하자 문상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였으나 등에 악성 종기가 발생하여 앓아누웠다. 곡부에서 동행한 의사 유몽영이 치료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당시 왕보취가 공령이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으나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새 연성공이 탄생하는 것이지만 딸이 태어날 경우 공자 가문의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공자 가문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이에 공령이는 대총통 쉬스창에게 글을 올렸다.
령이는 병세가 위급하니 베개에 엎드려 구슬프게 울면서 구술로 마지막 상신을 드리오니 삼가 후일을 부탁드립니다. 동로의 령이가 우매하고 별다른 학식이 없음에도 전청 광서 2년에 작위를 계승하고 연성공의 직책을 받았습니다. 민국이 성립한 후에도 전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연성공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8년 동안 여러 총통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을 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10월 4일, 령이의 장인 도식윤의 상을 입어 북경에 조문을 왔다가 갑자기 등에 악성 종기가 생겨 바로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하였으나 불행히도 효험이 없어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사성조례 제1조에는 연성공은 예전의 관례에 따라 전대의 영접을 받고, 작위를 세습하는 종자는 지방장관을 통하여 내무부에 심사를 요청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령이 나이가 근 50으로 아직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나 다행히 측실 왕씨가 임신한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 만약 남자아이를 낳으면 규정에 따라 연성공을 세습할 수 있을 것이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집안사람들이 함께 의논하여 후계자를 찾을 것입니다. 다만 령이의 병이 중해서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임묘에 급한 일이 있을 때 내무부에서 봉위관을 정해 도와주기로 하여 령이 사람을 선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성장과 의논하여 이전 청나라 때의 하남 대도의 지현 공광달을 쓰기로 하고 위임하여 줄 것을 청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임묘의 각종 일들은 봉위관 공광달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후 령이의 아들이 장성하면 그때 그에게 일들을 넘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집안의 가정사는 령이의 사촌형 공령예가 돌볼 것입니다. 삼가 부탁드립니다. 허락하여 주시고 영을 내려 임묘의 사무에 차질이 없도록 해주시면 령이는 구천에서도 은혜에 감사드리고, 합족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은혜를 바랍니다.
근정
대총통
연성공 공령이
또한 청나라 소조정선통제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아뢰는 글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채 신은 병이 위급하여 베개에 엎드려 구슬프게 울면서 일을 부탁드리나이다. 신 우둔하고 배운 것이 없음에도 성은을 훔쳐 광서 2년에 작위를 계승하였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많은 폐를 끼쳤나이다. 황상으로부터도 많은 총애를 받았나이다. 황상의 하사에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나이다. 금년 정월 황상의 생신을 맞이하여 관품의 순위에 따라 생신을 출하드렸고, 황상을 만나 뵐 수 있어서 기뻤으며, 또한 자금성에서 말을 탈 수 있도록 허락받았는데 이와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은 영광에 깊이 감동하였으며, 하루 빨리 보답을 드리고 싶은 마음 가득합니다. 10월 4일 신의 장인 직예도원 도식윤의 상이 있어 조문을 위하여 북경에 도착하여 황상의 자애로운 얼굴을 만나 보면서 황상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였나이다. 그런데 도착 다음날 등에 악성 종기가 나 급히 의사를 찾아 치료를 하였지만 효과가 조금도 없나이다. 요즈음 병세가 점점 위중해지고 있어 장차 일어나지 못할까 두렵나이다. 신은 나이 50이 되도록 아직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하나이다. 다행히 측실 왕씨가 임신 중인데,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작위를 계승할 수 있나이다. 신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서도 아직 보답을 하지 못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신은 천자께서 날로 덕이 높아지고, 꾸준히 학문에 힘쓰시기를 바라나이다. 장차 공교로 나라를 다스리고, 조상을 숭배하며, 백성들이 황상의 큰 덕과 자비에 감명하고, 나라가 계속 흥성하기를 바라나이다. 그러면 신은 죽어서도 산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황상의 은혜에 감사하며 작은 성의로 구술하여 마지막으로 아뢰나이다. 황사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신 연성공 공령이
음력 9월 16일,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베이징 태복사 성공부에서 사망했다. 사망할 즈음에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어 두 손가락으로 배와 가슴을 가리키며 왕씨가 아들을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걱정했다고 한다. 사망 후 공령이를 돌보던 조경이 대총통과 내무부에 이를 보고하고 부고를 돌렸다. 이에 쉬스창은 북경 경윤 윤왕달을 연성공부에 보내 조문하게 했고 청나라 황실도 대표를 보내 조문했다.
한달 후 영구를 곡부로 옮겼으며 국무총리 진윈펑이 대총통령을 내려 위문하고 장례비 3천은원을 하사하였다. 또한 곡부에서의 장례식에 쉬스창이 육영계를 파견하여 다시 조문하였고 영구가 지나가는 각지의 관리들이 나와 조문하였다. 영구 기차가 요천역에 멈추자 연주 진수사가 파견한 기병대가 영접하였고 지방 관리, 신사, 의장대가 시신을 공부로 운구하였다. 제사 주재자로 4살 밖에 안된 장녀 공덕제가 맡았는데 공부 역사상 이렇게 어린 주제는 처음이라 사실상 유생들이 장례식을 지도했다. 이후 1년 2개월 간의 장례식 준비 끝에 민국 9년 11월 29일에야 발인을 하였다. 연성공의 장례식을 보면 평생 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다행히 아들 공덕성이 유복자로 태어나면서 연성공 직계는 끊기지 않았다.

3. 여담


공림에 묻힌 공령이의 운명은 편하지 않았는데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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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에 나왔던 레지널드 존스턴이 공령이를 만난적이 있다. 이때 에드워드 7세의 어진이 전달되었다고.

4. 저작 목록


  • 만공가
  • 지족가
  • 인송가
  • 권인독서가

5. 주요경력


'''역대 연성공'''
30대

31대

32대
공상가

공령이
(1877 ~ 1919년)

쿵더청

6. 참고문헌


  • 가란, 공자 家 이야기(서울: 선,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