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바르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2차대전
2.3. 남미로의 도피
2.4. 체포와 최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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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aus Barbie. 1913.10.25 ~ 1991.9.23
'''리옹의 도살자(Boutcher de Lyon)'''. 게슈타포 대위로 활동하면서 레지스탕스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악명높았다.

2. 생애



2.1. 초기


1913년 10월 25일 본에서 태어났다. 훗날 광신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문은 프랑스계였다. 본래는 신학을 전공할 것을 꿈꾸던 비교적 평범한 청년이었으나, 1차대전 참전후 PTSD에 시달리던[1]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서 나치 친위대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곧 능력을 인정받아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으로 발령을 받는다.

2.2. 2차대전


2차대전 발발 후 바르비는 독일이 점령한 외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가 1942년에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지역으로 파견되어서, 리옹 지역을 총괄하는 게슈타포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리옹의 도살자'''로의 행적이 시작된다. 리옹의 테르미누스 호텔에 게슈타포 본부를 세운 바르비는 온갖 잔혹한 고문 행위로 악명을 떨쳤으며,[2] 종전 시기까지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수는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뮬랭을 비롯하여 무려 1만4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3]

2.3. 남미로의 도피


상술한 악행에서 불구하고 종전 후 바르비는 그 대가를 곧바로 치르지 않았다. 바르비는 게슈타포 시절 얻어낸 독일 내의 공산주의 세포조직들에 대한 첩보를 미국에 넘기는 것으로 사법거래를 시도하였고 소련의 세력 확대를 걱정한 미군 측이 바르비의 첩보 능력을 높이 사면서 그를 CIC에 고용한 것(...) 바르비의 악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프랑스는 궐석 재판을 통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미국 측에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군 측은 이를 거부하고는 클라우스 알트만(Klaus Altmann)이라는 가명을 준 채로 그를 볼리비아로 피난시킨다.[4]

2.4. 체포와 최후


볼리비아에서 바르비는 볼리비아 높으신 분들의 비호 하에 조용하지만 풍족하게 살았고, 그렇게 죗값을 받지 않는듯 보였으나 1971년 전범 사냥꾼 클라르스펠트 부부[5]에 의하여 바르비가 볼리비아에 은신해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바르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루이스 테하다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볼리비아 군부 측에서 그를 보호해주었으나, 1982년 에르난 수아소가 이끄는 민주 정부가 수립된 이후 바르비는 프랑스로 끌려갔다.
1987년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바르비는 전후 알제리 전쟁베트남 전쟁에서 프랑스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근거로 자신의 죄를 부인하였으나, 당연히 이러한 주장은 무시됐고,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1991년 감옥에서 77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한다.

[1] 이 때문에 유년기에는 학대도 상당하게 받았다고 전해진다.[2] 사냥개를 이용한 고문, 전기 고문, 성고문 등등이 실제로 자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마르셀 오퓔스 감독의 1988년작 다큐멘터리 영화 <호텔 테르미누스>를 보면 레지스탕스의 가죽을 벗기고, 암모니아를 뿌려버렸다는 증언까지 나온다.[3] 그 외에도 유대인들을 절멸수용소로 이동시킨 혐의도 있다.[4] 심지어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후 1960년대까지 서독 정보국 역시 그를 고용하고, 해외 정보를 수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5] 아내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1966년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나치의 선전부에서 근무하였던 경력을 지닌 서독의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의 뺨을 때려서 체포된 경력이 있었다. 2012년에는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가 좌파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2015년에 나치 전범 체포에 기여한 공로로 부부가 함께 독일 정부로 부터 훈장을 수여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