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독일연방공화국 제3대 연방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Kurt Georg Kiesinger[1]
'''
'''출생'''
1904년 4월 6일
독일 제국 에빙겐 (Ebingen)
'''사망'''
1988년 3월 9일 (만 83세 11개월 3일)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튀빙겐 (Tübingen)
'''정당'''
(1933~1945)
(1946~1988)
'''재임기간'''
1966년 12월 1일 ~ 1969년 10월 21일
(만 2년 10개월 20일)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전반기
2.2. 초기 정치 활동
2.3. 총리(1966년~1969년)
2.4. 말년
3. 평가
4. 어록
5. 동시대인들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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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2]독일연방공화국(구 서독)의 제3대 총리로, 정반대 성향의 기민당사민당을 하나의 정부로 묶는 대연정의 과정에서 보여준 뛰어난 언변과 중재술로 유명하다.[3] 다만 나치당에 가입해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에서 근무한 흑역사 덕분에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으며,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 제3 정당이었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단결하여 연정을 구성하는 바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2. 생애



2.1. 전반기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에빙겐에서 태어나 베를린으로 진학하여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하고 몇 주 뒤, 평생을 논란으로 따라다니게 될 선택을 한다. 바로 나치당에 입당한 것.
자신의 회고록에서 키징어는 이 선택에 대하여 나치의 탄압을 피하는 한편으로, 안에서 나치의 이데올로기, 특히나 반유대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해 입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이후 키징어는 징집을 피해 외무부의 대외 선전부에서 활동을 했고, 종전 뒤 다른 나치 부역자가 그랬듯이 재판을 받았지만 단순 가담자로 판단되어 곧 풀려났다.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따르지만, 적어도 그가 열혈 나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의 동료가 힘러에게 보낸 투서에서 키징어가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고 반유대주의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해까지 하고 있다는 내용이 발견되었기 때문.[4]
어쨌든 명확한 진실은 키징어가 나치당원이었다는 점 하나이고, 일각에서는 중재의 달인이었던 그의 모습을 바탕으로 "키징어는 나치와도 타협을 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아이러니라면, 이 나치 시기의 경력이 후일 그의 최고의 장점이라 평가받는 중재술을 갈고 닦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 당시 대외선전 담당을 놓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가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라 키징어는 늘 두 부서 사이의 싸움을 말려야했기 때문(...)

2.2. 초기 정치 활동


콘라트 아데나워가 단순 나치 동조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펼치면서, 키징어는 기민당에 입당하고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제헌 의회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키징어는 1951년에는 기민당의 상임위원회에 진입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그렇지만 아데나워는 키징어를 입각시킬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고[5] 이에 실망한 키징어는 연방 하원을 떠나서 고향인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지사로 1958년 취임한다. 그리고 1966년 총리로 취임할 때까지 키징어는 이 지위를 계속하여 유지한다.

2.3. 총리(1966년~1969년)


1966년 기민당은 흔들리고 있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증세를 내걸자, 이에 반발한 자민당 출신 장관들이 내각에서 탈퇴해버리면서 기민당과 자민당의 소연정이 붕괴해버렸던 것. 이로써 기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기민당에는 아직 콘라트 아데나워가 건재했다. 아데나워는 후일 총리가 될 헬무트 콜을 움직여 새로운 총리 후보를 물색하게 했고, 치열한 당내 암투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이 바로 키징어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키징어가 유약하다고 생각해서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총리로 밀었던 것은 본인이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90년대 사민당 출신 총리와는 이름만 같다)였고 그 외에 라이너 바르첼 원내총무가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표출했다. 키징어가 기민당 총재이자 총리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주지사 경력 덕분인데, 아데나워 말기부터 기민당 내에서 끊이질 않던 정치적 암투에 질려있던 당원들이 보기에는 '더러운' 중앙의 권력 다툼을 관망하면서 유유자적 주지사 생활을 보낸 키징어가 클린해보였던 것. 거기다가 주지사로 활동하면서 깡촌이었던 바덴뷔르템베르크를 빠르게 발전시킨 행정 능력은 덤.
그리고 이 때부터 키징어의 협상 능력이 빛을 발했다. 이 당시 독일 연방 하원의 의석수를 보자면 보수세력인 기민당이 250석, 진보세력인 사민당이 217석, 중도세력인 자민당이 50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캐스팅보터는 중도세력인 자민당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데 이 상황에서 키징어가 연정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자민당이 아니라 사민당이었다.''' 그리고 사민당의 반응도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로 40년 가까이 만년 야당으로 지내고 있던 사민당은 자신들의 계속되는 선거 패배 이유가 단순히 매카시즘뿐만이 아니라[6] 수권경험 부족에 따른 국민들의 외면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자신들의 국정운영 능력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후일 당시 자민당의 총재였던 에리히 멘데는 '''"코끼리끼리의 결혼을 합의해놓고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라고 분개했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
어쨌든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키징어의 총리 취임 직후 처음에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동거가 과연 성공적일지에 대한 많은 우려가 존재했지다. 당시 키징어 내각을 보면 나치 부역자인 총리 키징어에, 나치에 저항하다 망명을 해야했던 부총리 겸 외무장관 빌리 브란트, 극우에 가까웠던 보수주의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등 내각 구성원이 다양한 이념을 공유했다. 그러나 키징어는 성공적으로 내각의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정부를 이끌어나갔다.
그렇지만 키징어의 나치 부역 경력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양철북을 쓴 대문호 귄터 그라스와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 등 서독 사회 지식인들은 호되게 그를 비판했다.
그리고 1966년 11월, 마침내 문제의 그 사건이 터졌다. 베를린에서 기민당의 전당 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던 와중에 당시 30세였던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7]가 의장석에 앉아 있던 키징어에게 몰래 다가가서 나치라고 소리치면서 뺨을 후려쳐버린 것. 키징어에게는 약간의 찰과상과 염증만 있었을 뿐 큰 부상은 없었다. 키징어는 클라르스펠트에 대한 모든 사법적 조치를 취하했지만, 그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총리 폭행사건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나치에 부역한 기성세대들에게 지니고 있는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 바로 68 혁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임을 보여준 전조나 마찬가지였다.
68혁명 세대들에게는 나치에 부역한 키징어야말로 타도해야할 과거 유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적 대격변의 소용돌이에서 당연히 사민당과의 대연정은 곧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키징어는 1969년의 총선에서 다시 한 번 기민당을 원내 제1당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였다. 그리고 키징어의 재선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키징어가 사민당과 자민당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 사이, 원내 제 2당과 제 3당이었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손을 잡고 소연정을 구성했다.''' 자민당 입장에서는 1966년 기민련의 배신을 되로 받고 말로 갚아준 셈. 그리고 사민당은 1930년 헤르만 뮐러의 내각 이후 40년만에 진정한 여당이 되었다.[8] 키징어는 자민당의 배신에 울분을 토했지만 자기가 먼저 자민당을 배신했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더군다나 키징어는 비례대표제를 없애버리려는 시도를 하기까지 했었는데, 이는 비례대표 의석만으로 의석을 얻어왔던 자민당에게 있어서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선거제도 개편 시도의 충격이 꽤 컸었는지 키징어의 선거제도 개편안 파동은 이후 10년간 안정적으로 사민당이 자민당과 연정하게 되는 토대가 된다.

2.4. 말년


총리직을 빌리 브란트에게 넘겨준 키징어는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올것을 기다리며 1971년 7월까지 5년 더 기민당의 당수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68 혁명 이후 그는 과거의 정치인이 되어버렸으며 기민당 내에서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여당 자리를 빼앗긴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재집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이후 당수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9년 동안 기민당의 원로 정치인으로서 활동했으나 1980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리고 1988년 고향인 튀빙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3. 평가


2년 10개월이라는 그의 집권기간은 역대 독일 총리 중에서는 가장 짧은 편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와 후임 빌리 브란트 총리가 워낙 먼치킨 스러운 성과를 남겼기에 상대적으로 그의 위상과 업적은 초라해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를 잊혀진 총리(Der Vergessene Kanzler)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그렇지만 그와 그의 대연정 내각은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법안 통과를 이끌어내면서 에르하르트 시기 정체됐던 경제 성장률을 다시 회복시키고 실업률도 낮추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오늘날 인정받고 있다.

4. 어록


나는 파워풀하게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워를 버라이어티쇼에서처럼 국민들에게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지도자의 임무를 받은 사람이 다스리지 않으면 재앙이 생긴다.

혁명이 후손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도 갉아먹는다

68혁명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연정의 총리라면, 기꺼이 말하고 싶은 것이라도 참아야 한다.

책임을 지게 되면 돈이나 시간, 그리고 생명도 아끼어서는 안된다.


5. 동시대인들의 평가


나치 당원과 반나치 인사가 부총리로 일한다는 것은 독일의 현실과 화해의 필요성을 반영한다는 사실로 보기에 괜찮았다.

에곤 바르[9]

키징어를 단지 과도기의 총리로 본다면 이는 그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처해있던 상황은 독자적인 정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헬무트 슈미트

그로부터 많은 것, 특히 무한한 인내심과 아주 침착하게 협상을 하는 능력을 배웠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그는 분별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에서는 책략만이 아니라 의미 그리고 합리적인 근거도 중요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10]

그와 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인생 행로와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 견해가 약간 다를 뿐이다.

빌리 브란트

독일 언론 전체가 이 모호한 총리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

하인리히 뵐

이 약골이 총리가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네

콘라트 아데나워


[1] 미국의 유명한 외교관 헨리 키신저와 성이 같다. 다만 독일어 특성상 같은 성이더라도 표기법이 다른 경우가 있기에 키신저는 Kissinger를 써서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헨리 키신저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하기 전 썼던 이름은 '하인츠 키싱어'였다.[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용례의 표기 원칙에는 "독일어에서 모음 또는 l(알파벳 L) 앞의 ng/ŋ/에는 'ㄱ'을 첨가하여 표기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이 때문에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규정용례 역시 '키징거, 쿠르트 게오르크'이다. 이는 오랜 관용을 존중한 표기이지만, 실제 발음은 '[ˈkiːzɪŋɐ\](키징아)'에 가깝다.[3] 독일에서는 특유의 화법과 중재술로 'Häuptling Silberzunge(달변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이 투서가 발견된 덕분에 키징어는 극적으로 총리인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투서를 발견한 인물은 슈피겔의 편집장 아욱슈타인으로, 1962년에 국방부로부터 나토 관련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키징어의 적극적인 실드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은혜를 제대로 갚아준 셈.[5] 아데나워는 키징어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키징어에게 "자네는 너무 순진해.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6] 1959년에 이미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당의 이념으로써 포기했지만 그동안의 이미지가 그리 쉽게 사라지나...[7]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Serge Klarsfeld)와 함께 유명한 나치 전범 추적 전문가. 2015년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나치 전범 추적 공로를 인정받아 연방 공로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2012년 독일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요아힘 가우크에 맞서 좌파당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다.[8] 물론 대연정에 참여한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여당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수권정당이 적절하겠다.[9] 사민당 정치인으로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이었다.[10]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