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로스

 

1.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
1.1. 개요
1.2. 흑역사
1.3. 같이보기
2. 예루살렘의 성 키릴로스
3. 9세기의 성 키릴로스


1.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


[image]
'''강생의 박사(Doctor Incarnationis)'''
생몰연대: AD.380-444

1.1. 개요


그리스도교그리스도론삼위일체론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한국정교회 대교구한국 콥트 정교회에서는 '키릴로스', 가톨릭에서는 교회 라틴어 발음을 따른 '치릴로'로 표기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며, 선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테오필로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삼촌에 의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403년에는 테오필로스를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를 단죄한 느티나무골 주교회의(Σύνοδος ἐπί Δρῦν, Synodus ad Quercum)에 참석하였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로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로스가 사망하자 성 키릴로스는 사흘 후에 테오필로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즉 한국 나이로 33세에, 그리스도교의 5대 중심지 중 하나이자, 당시 신학에서 사실상 에이스 노릇을 하고 있던[1]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잘난 삼촌 때문에 높으신 분이 된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로 보이겠지만, 그의 진가는 총대주교 자리에 있으면서 드러난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네스토리오스인데,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그리스도교의 초 네임드 이단 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수장이다. 네스토리오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격'''과 인'''격'''이라는 '''두 개의 페르소나(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신격의 어머니가 아니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선 안되며,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 정도만이 허용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키릴로스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본성'''이 결합되어 하나의 페르소나(위격)을 이룬다고 보았다. 키릴로스의 이 주장은 그리스도론의 가장 큰 핵심 중 하나가 되었다. 키릴로스를 포함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단죄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2] 그는 188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다만 좀 안습한 면도 있는데, 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후계자들은 키릴로스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두 개의 본성'이 결합하여 '하나의 위격, 하나의 본성'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합성론이라고 한다.[3] 이 주장은 '하나의 위격, 두 개의 본성'이라는 결론이 난 칼케돈 공의회에 의해서 단죄되었다.[4]

1.2. 흑역사


신학자로서의 업적만을 보자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역대 최강의 에이스 라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5] 사회적으로서 보면...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히파티아가 그리스도인 폭도들에 의해서 살해될때, 사건에 관여되었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다만 그렇다고 키릴로스를 '이성적인 지식인을 살해한 종교 광신도의 지도자'란 식으로 폄하하기는 또 곤란한게 당시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 자세한 내용은 히파티아 문서 참고.

1.3. 같이보기



2. 예루살렘의 성 키릴로스


[image]
생몰연대: AD.315?-387년
성서학자이자 설교가. 그의 작품 중에서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된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하며 후대에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3. 9세기의 성 키릴로스


생몰년도: AD.827~869년 2월 14일
서기 9세기에 활동한 선교사이자 언어학자. 그리스 테살로니키 해군 제독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형인 메토디오스와 함께 대 모라비아 왕국의 슬라브족을 선교함과 동시에 글라골 문자를 만들었다. 이후 글라골 문자는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망명한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에 의해 개조, 변형되어 키릴 문자가 된다.

[1]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의 플라톤'이라 불리는 필론을 비롯해 그 이전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옮겨와 살던 곳으로 유대인 공동체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고, '70인역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히브리어 성경(구약)이 '''최초로 그리스어로 번역된 곳'''인데다 기독교 전래 이전부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학문의 중심지'''였다. 더군다나 로마 제국 시대에조차 이집트 속주는 다른 로마 제국 속주들과는 달리 '''황제 직할령'''이었으니 정치적으로도 자부심이 만만찮았다.[2] 성 키릴로스에게 찍혀 밀려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와 네스토리오스는 공교롭게도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나 키릴로스 사이의 대립은 넓게 보면 안티오키아파와 알렉산드리아파라는 초기 기독교의 두 신학 파벌 사이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알력도 있었다. 두 파벌은 예수를 대하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알렉산드리아 파가 '로고스로써의 예수'를 말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성경 구절을 은유적, 신비적으로 해석하고 '비유'에 중점을 두어 해석했다면, 후발주자격(애초에 안티오키아파가 알렉산드리아파의 성서 해석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생성, 발전했다)인 안티오키아파는 '역사적 예수'를 말하면서 예수의 인성을 보다 강조하고, 성경 구절의 문자적 의미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냥 은유만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자의 학문적 토대는 모두 그리스 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플라톤 철학에, 안티오키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더 가까웠다.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던 기독교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중세 서방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때의 일.[3] 단성론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4] 다만 그렇다고 키릴로스의 주장 그 자체가 합성론인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키릴로스가 좀 아리까리하게 적어두었는데, 정통파와 합성론자들은 서로 키릴로스의 글을 인용하며 서로를 반박했다. 다만 요즘에는 합성론(오리엔트 정교회)과 정통파(가톨릭정교회) 간에는 그냥 표현의 차이 정도만 있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점점 힘을 얻고 있어서 종파 간 대화가 활발히 진행되는 중이다.[5] 애초에 교회학자 타이틀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먼치킨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