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라틴어
Theoria Trinitatis
영어
Theory of Trinity
한국어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image]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오 복음서 제28장 18-20절 중에서. 십자가 수난에서 부활예수가 사도들에게 한 말.

문. 천주 몇이 계시뇨?
답.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문. 하나이신 천주 몇 위(位)를 포함하여 계시뇨?
답.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곧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이시니라.

문.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하시뇨?
답.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신은 성부'''와 성자'''[1]

에게서 발하시느니라.

문. 세 위 서로 높고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별이 있느뇨?
답.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 가지로 다만 한 천주시니라.

천주교요리문답집 제2장 「삼위일체」

ㄱ. 한 하느님은 세 위격(person)으로 존재하는데,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nature), 하나의 하느님 본질(essence), 하나의 하느님 실체(substance)이다.

ㄴ. 이 위격들은 서로 구분된다.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성자는 성부의 실체로부터, 오로지 성부로부터 출생한다. 성령은 서방교회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방교회에 의하면 성부로부터만 발출된다.

ㄷ.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있다.

ㄹ.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사위일체(Quaternitas)를 구성하지 않는다.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안에 존재하며,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다.

ㅁ. 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와 역사(役事)면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외부를 지향해서 오로지 하나의 역사원리(役事原理)일 뿐이다. 세 위격들의 역사의 동일성을 말하는 공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효능인(效能因, causa efficiens)이며, 이 공리로 말미암아 오로지 로고스(말씀)만이 인간이 되었다는 육화 교리와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교리가 부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이 된 위격은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 위격이며, 세 위격들은 인간과 각기 고유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가톨릭대사전 <삼위일체> 항목에서 일부 인용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흔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 이 셋이다."''' (제8권 제10장)

"우리는 아직 하늘 일을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지 말며, 불충분한 형상이지만 역시 형상인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내가 무엇을 사랑할 때에는, 그에 관련된 것이 셋이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대상)'과 '사랑' 이 셋이 있다......자기를 알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삼위일체의 형상이 있다." (제9권 제2, 3장)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름으로, 그러한 점에서 삼위일체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받는 대상'과 '사랑', 이 셋인 것이다......'지혜'와 '지혜자체에 대한 지혜의 지식'과 '지혜 자체에 대한 지혜의 사랑', 이 셋이 삼위일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서도 한 삼위일체를 발견한다." (제15권 제6장)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중에서..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저 복되신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으리라고 생각한다. 성부는 제1근원으로서 아무에게도

나지 않으시고,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이시거나, 혹은 직접적 실존으로 존재하는 신이시다. 성자는

하나님의 오성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한 신이시거나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시고 또 그 관념으로 존재

하는 신이시다. 성령은 활동으로 존재하는 신이시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안에서 흘러

나오고 발산되는 신적 본질이시다. 나는 모든 신적 본질은 진실로 그리고 뚜렷이 신적 관념과 신적 사랑 둘 모두

의 형태로 존재하며, 삼위 하나님 각각은 적절히 뚜렷하게 구분되는 위격이시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지닌 기쁨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모든 본질을 자기 자신 안에 매우 충

만하게 가지시기에, 제3위로서의 권한을 가지신다.

조나단 에드워즈

1. 개요
2. 이해와 묘사
3. 신학담론의 배경
3.1.1. 니케아 신경의 모체
3.2. 니케아 정통신학의 수호자 아타나시오
3.2.1. 생애
3.2.2. 그의 신학
3.2.2.1. 유일신관: 「이방인에 반대해서」
3.2.2.2. 구원론관: 「강생에 대해서」
3.2.3. 삼위일체 이론에 대한 그의 기여
4. 삼위일체론의 완성: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4.1. 성부와 성자의 관계
4.2. 성자와 성령의 관계
4.3. 성령과 성부의 관계
4.4. 분석과 종합
4.5. 카파도키아 학파에 의해서 형성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신앙고백
5. 동방 기독교의 그리스도론 논쟁과 칼케돈 공의회
6. 현대: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
7. 이단적 사상
7.1. 반삼위일체 교파
8. 논리학적 분석: 피할 수 없는 모순
9. 삼위일체와 야훼라는 이름에 대해서


1. 개요


기독교의 주요 교리. 성부, 성자(예수), 성령 3가지 위격(person, 페르소나)의 본질이 같다(ὁμοούσιος)는 교리이다. 성부도 하느님, 성자도 하느님, 성령도 하느님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의미. 길게 풀면 성부는 성자, 성령과 다른 존재이다. 성자는 성부, 성령과 다른 존재이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이다.
각 위격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 위격 세 분 모두 각각 온전한 하느님이시라고 설명된다. 성부에게서 성자가 발생(發生)하고,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發出)한다고 한다. 교리의 본질이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 이해는 불가능한 교리이다.

2. 이해와 묘사


아마 이 내용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실체와 효능인의 개념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고, 위격은 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본문에도 정통 삼위일체론과 다른 내용이 중간중간에 적혀있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하여 성자 종속론이나 양태론 등의 거짓된 탈출구를 만들어내서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알 수 없는 것(분명히 한 분이신데 셋이시다)을 알 수 없는 것 그대로 결론을 낸 것인데, 이런 삼위일체론이 오히려 지식에 대한 탐욕으로 변질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볼 수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리스도 신앙」

요약해서 삼위일체론은 알 수 없는 신의 본질을 다른 무언가로 포장해서 결론내지 않고, '''알 수 없음'''이라는 상태 그대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말해서 삼위일체론은 부정신학[2]의 산물인데 '''원래 삼위일체론은 신학분야 중에서도 신의 본질에 대하여 다루는 신론에 속하고, 신론은 정교회는 물론이고 서방교회에서도 주로 부정신학적으로 다룬다.''' 당장에 서방교회의 스콜라시대의 대가인 아퀴나스도 딴 부분은 긍정신학으로 다루다가 신론에서는 부정신학으로 다룬다.
정통 기독교에서 정통 교리로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3]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양태론이나 역동적 군주신론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4] 같은 아브라함계 신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인 이슬람, 유대교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 이슬람과 유대교에서는 이 교리 때문에 기독교를 다신교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하며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간인 예언자로서 존경하고 있고, 성령은 천사로 보고 있으므로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 다만 현재 개신교 계열 중 매우 진보적인 신학계에서는 무시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주교들과 교부들이 "성자와 성부는 동일한 실체다"(homoousion on Patri)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삼위일체론의 기본 개념이 정리되었다.[5]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 얼음, 수증기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은 똑같은 H2O라는 설명이 자주 쓰인다. 다만 이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만약 '겉모습'에 주목하여 버려서, 성부와 성자는 곧 같은 존재인데 하나의 본체가 서로 겉모습만 달리 나타났을 뿐이라고 이해한다면,[6] 그 생각은 성부수난설, 혹은 양태론이라고 불리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던 이단적 주장이다. [7][8]
또한 페르소나(위격)라는 용어의 이해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원래 이것은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에 사용한 용어이지만, 삼위일체론에서 활용된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고유하게 발전하여 기독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페르소나 단어를 복수형으로 사용할 때, 이 단어의 현대적 의미로 말미암아 거의 필연적으로 복수적인 정신 행위의 중심, 정신적 주체성과 자유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는 이러한 세 가지 중심은 있지 않다. 하느님 안에 단 하나의 본성이 있고 단 하나의 절대적 자기존재가 있으며 아버지의 자기표현은 단 하나 로고스(이는 말하는 이가 아니라 말해진 이다)가 있고,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에는 (두 가지 행위를 전제하는) '''상호''' 사랑이 없고, 아버지의 사랑하며 구별을 설정하는 자기수용이 있다.

라너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페르소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각 위격은 자기의식을 소유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본성을 매개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각 위격의 자기의식은 위격들 서로를 구분 짓지 않으며, 하느님 안에 세 가지 '주체성'은 없다. 만약 세 가지 주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삼신론의 위험에 떨어진다. 때문에 라너는 페르소나 개념을 보충하기 위해, 구별되는 '자립실체방식'(distinkte Subsistenzweise)을 보조 개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신학에서의 “인격”은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성격(character)”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에서는 ‘’’전인격[9]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삼위일체에서의 위격은 인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삼위일체의 위격은 세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느님의 상대적인 상호관계라는 말이 된다.
사실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삼위가 일체되는 것은 초월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라서 인간은 거기서 삼위가 일체가 되는지 어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삼위일체는 그냥 '''믿음'''이지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로 불리는 것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쉽지 않은 게, 예수가 곧 성부라고 해도 이단이고, 예수는 성부와 별개라고 해도 이단이다. 정확하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 본질은 같되 위격은 다르다'라는 의미다. 좀 더 복잡한 교부시대 표현을 빌리면 성부가 성자를 낳았고, 성부에게서 성령이 발현한다.[10] 그러나 세 위격은 모두 태초부터 존재하였으며 선후 관계는 없다. 이 논리가 골 때리는 것은 대충 이런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하느님은 한 분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아야 된다고 말하면 이해하기가 쉬운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분이 아니라고 하니까 논리가 꼬인다.
하지만 믿음의 영역을 떠나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쉽게 되지 않는 까닭에, 이러한 삼위일체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묻는 시도가 중세 철학계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이 곧 보편논쟁이 된다. 이 보편논쟁에서 가장 큰 두 축이 되었던 의견은, 삼위가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과, 이름만이 있을 뿐이라는 유명론이었고, 각각 성 안셀모와 윌리엄 오컴이 해당 사상을 대변했다.
삼위일체는 애초에 성경에 안 나오는 말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이른바 요한의 콤마로 삼위일체에 대해 성서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한의 콤마는 동방교회 쪽 그리스어 필사본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서방교회의 라틴어 필사본에만 나타났다. 이 구절은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것이 문헌비평학적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기독교가 발생한 곳은 다신교의 세상이었으며, 거기서는 많은 신들에 대한 믿음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한 종교 시장 안에서 기독교의 하느님과 다른 신들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게 맡겨진 과제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어떤 신인가, 그리고 그 하느님이 구약성서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물음과 씨름해야만 했다.
[image]
[image]
[image]
[image]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 이 주제의 이콘은 '구약의 성삼위일체'라고 부르며,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이 세 사람(또는 천사)을 대접한 창세기 18장 일화를 삼위일체의 예표로서 이해하고 그린 것이다.
3마리 까마귀의 도상
삼위일체는 유럽의 화가들에게 매우 독특한 회화적 도전을 선사했는데, 그 중에는 똑같은 생긴 인물을 세 명 그려놓고 성부, 성자, 성령이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아가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3개인''' 삼위일체를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무시무시한 그림들은 당대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신비를 표현하려다 보니깐 신학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문제점도 있다.
전통적으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일화에서, 초월자가 스스로를 복수로 지칭하는 것을 삼위일체에 대한 단서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창세기를 근거로 삼는 건 오늘날 신학에서 부정적인데, 천지창조 일화에서 초월자가 복수형으로 지칭된 것은, 많은 고대 언어가 많음과 위대함, 혹은 존경, 거대함 등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않고 복수형으로 쓰던 언어 습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에서 '우리'는 의미상으로는 '나'의 강조로 보는 것이 더 알맞다. [11] 그렇기에 성서비평학이 발달한 이후의 신학에서는, 창세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삼위일체 설명을 도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 애초에 교부 시대부터 삼위일체는 복음서에 기반을 두었고 창세기는 곁가지이긴 했지만.

3. 신학담론의 배경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우면, 하단 부분의 삼위일체론이 옳다고 바라보는 종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사상들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을 권한다.
로마 제국이 신학적 논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3세기까지는 확고한 논거와 생활의 성결이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논쟁에 관련된 당파들은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세속 당국에 호소하거나, 당국과의 연합을 통해 논쟁결과를 번복시키려고 하지 않았다.[12]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후 신학적 문제 해결에 국가의 권위를 동원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제국은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결속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를 바랐던 교회의 통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권력을 사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신학적 문제에 동의하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삼위일체 논쟁의 신학적 문제의 근원은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최초에 로마 제국에 메시지를 선포한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무식한 무신론자들로 취급 받았다. 이에 대하여 순교자, 증거자[13], 호교론자들은 그들 로마인들이 믿는 지존의 존재를 우리도 믿고 있으며, 자기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예언자들이나 성경적 저자들의 방법이 아니라 로마 철학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이론이었다. 당대의 스토아, 중기 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신의 개념을 불변하고 무감정적이며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 생각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러한 존재가 성경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4]
예수에 관련된 논란만 약간 살펴보자면 '예수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가지고 있는가?', '신성만 있는가? 인성만 있는가?', '예수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이어서 '육체가 실제로 죽은 것인가?', '예수 탄생 이전에 예수라는 신성이 있었는가?', '천지창조시에는?' 등등이 있다. 초기 교회에서는 수 세기에 걸쳐 처절한 종교 논쟁 및 파문과 새로운 교회의 설립 등이 있었고,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확립하고자 당대의 교부들이 머리 싸매고 논쟁했다. 결과적으로 호교론자들과 교부들은 하느님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불변하고 고정적인 지존의 존재라는 고전적 철학의 개념을 조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사용 되었다.
첫째, 성경 구절의 풍유적 해석이다. 위키니트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구약의 하느님의 모습에 어떠한 다른 뜻이 있을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15]
둘째, 철학적 개념과 성경의 증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 유스티누스, 성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에 의해 발전된 로고스 교리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지존의 존재가 불변이고 고정적이지만 동시에 세상 및 인간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존재, 즉 로고스(말씀 혹은 하느님의 이성)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관념은 불변의 존재와 변화하는 세계 사이에는 말씀 혹은 하느님의 로고스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쟁의 중심은 '하느님의 본질'에서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로 넘어가게 되고, 이를 연결 짓는 맥락에서 삼위일체 논쟁이라 할 수 있는 아리우스파 논쟁이 시작되었다.

3.1.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서기 3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니케아에 300여 명 정도의 주교가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 사람들이었으나 서방 교회의 대표들도 있었다. 이 중에는 불과 몇년 전만 해도 투옥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유배되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초대로 모인 이들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교회의 보편성을 증언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3.1.1. 니케아 신경의 모체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신적 본체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시며,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한 본체로써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셋째 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본체) 또는 우시아(ousia, 본질)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편교회는 저주한다.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에 의해 채택된 신경은 성자 혹은 말씀(로고스)이 피조물이거나 신성이 성부보다 떨어진다는 개념을 배격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전달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후 니케아 신경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되는데, 이 구절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별을 부인함으로써 “성부수난설”을 시사하는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바라며 서명했다. 이 회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이에 더하여 면직된 주교들을 그들의 도시에서 추방했다. 교리의 정통성 여부 문제에 관하여 세속 권력이 개입한 이 전례는 후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주교들의 소망과는 달리 니케아의 공의회가 아리우스 논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했고 그 뒤로 세속 권력과 정치 세력이 교회 문제에 꾸준히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2. 니케아 정통신학의 수호자 아타나시오


Quicumque vult salvus esse, ante omnia opus est, ut teneat catholicam fidem: Quam nisi quisque integram inviolatamque servaverit, absque dubio in aeternum peribit. Fides autem catholica haec est: ut unum Deum in Trinitate, et Trinitatem in unitate veneremur. Neque confundentes personas, neque substantiam separantes. Alia est enim persona Patris alia Filii, alia Spiritus Sancti: Sed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una est divinitas, aequalis gloria, coeterna maiestas. Qualis Pater, talis Filius, talis et Spiritus Sanctus. Increatus Pater, increatus Filius, increatus et Spiritus Sanctus. Immensus Pater, immensus Filius, immensus et Spiritus Sanctus. Aeternus Pater, aeternus Filius, aeternu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aeterni, sed unus aeternus. Sicut non tres increati, nec tres immensi, sed unus increatus, et unus immensus. Similiter omnipotens Pater, omnipotens Filius, omnipoten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omnipotentes, sed unus omnipotens. Ita Deus Pater, Deus Filius, Deu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dii, sed unus est Deus. Ita Dominus Pater, Dominus Filius, Dominus et Spiritus Sanctus. Et tamen non tres Domini, sed unus est Dominus. Quia, sicut singillatim unamquamque personam Deum ac Dominum confiteri christiana veritate compellimur: Ita tres Deos aut tres Dominos dicere catholica religione prohibemur. Pater a nullo est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Filius a Patre solo est: non factus, nec creatus, sed genitus. Spiritus Sanctus a Patre '''et Filio''': non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sed procedens. Unus ergo Pater, non tres Patres: unus Filius, non tres Filii: unus Spiritus Sanctus, non tres Spiritus Sancti. Et in hac Trinitate nihil prius aut posterius, nihil maius aut minus: Sed totae tres personae coaeternae sibi sunt et coaequales. Ita, ut per omnia, sicut iam supra dictum est, et unitas in Trinitate, et Trinitas in unitate veneranda sit. Qui vult ergo salvus esse, ita de Trinitate sentiat.

Sed necessarium est ad aeternam salutem, ut incarnationem quoque Domini nostri Iesu Christi fideliter credat. Est ergo fides recta ut credamus et confiteamur, quia Dominus noster Iesus Christus, Dei Filius, Deus pariter et homo est. Deus est ex substantia Patris ante saecula genitus: et homo est ex substantia matris in saeculo natus. Perfectus Deus, perfectus homo: ex anima rationali et humana carne subsistens. Aequalis Patri secundum divinitatem: minor Patre secundum humanitatem. Qui licet Deus sit et homo, non duo tamen, sed unus est Christus. Unus autem non conversione divinitatis in carnem, sed assumptione humanitatis in Deum. Unus omnino, non confusione substantiae, sed unitate personae. Nam sicut anima rationalis et caro unus est homo: ita Deus et homo unus est Christus. Qui passus est pro salute nostra: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ad in ca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 Ad cujus adventum omnes homines resurgere habent cum corporibus suis; Et reddituri sunt de factis propriis rationem. Et qui bona egerunt, ibunt in vitam aeternam: qui vero mala, in ignem aeternum. Haec est fides catholica, quam nisi quisque fideliter firmiterque crediderit, salvus esse non poterit.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 앞서서 보편 신앙을 가져야하며, 이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 사람은 의심 없이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보편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 일치성 안에 삼위를 흠숭합니다. 위격들 간에 혼합도, 주체의 분리도 없으며, 성부의 한 위격, 성자의 한 위격, 성령의 한 위격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신성에 있어서 한 분이시요,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위엄에 있어서 같이 영원하십니다. 성부께서 존재하시듯이 그렇게 성자께서도 존재하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존재하십니다. 창조되지 않으신 성부, 창조되지 않으신 성자, 창조되지 않으신 성령; 무한하신 성부, 무한하신 성자, 무한하신 성령; 영원하신 성부, 영원하신 성자, 영원하신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세 영원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원함이 있습니다. 성부께서 전능하시듯이,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십니다. 그렇다고 세 전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능이 있습니다. 성부께서도 하느님이시고, 성자께서도 하느님이시며, 성령께서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세 하느님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성부께서 주님이시듯이, 성자께서도 주님이시고, 성령께서도 주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세 주님께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주님께서 계십니다. 위마다 각각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심을 고백해야 하나, 세 분의 하느님께서 계신다거나 세 분의 주님께서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보편 신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결코 어느 누구로부터 유래하지 않으십니다. 창조되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십니다. 성자께서는 오직 성부로부터 만들어지시거나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에게서 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조성되시거나 창조되시거나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발출되셨습니다. 한 분 성부이시지 세 분의 성부가 아니십니다. 한 분 성자이시지 세 분의 성자가 아니십니다. 한 분 성령이시지 세 분의 성령이 아니십니다. 이 삼위 안에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크거나 작음이 없습니다. 삼위 모두 같은 영원성, 같은 동등성을 지니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세 위에 한 체이시고 한 체에 세 위심을 반드시 믿어 흠숭할 것이며,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삼위에 대하여 이와 같이 믿어야 합니다.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을 충실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심은 성부의 본체에서 영원으로부터 나심에서요, 사람이심은 모친의 본체에서 세상에 태어나심에서이다. 그는 참 하느님이시요, 영혼과 육신을 갖추신 참 사람이시다. 천주성으로는 성부와 같으시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시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시나 둘이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심은 천주성이 변하여 육신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인성을 취하여 천주성에 결합하심으로써이며, 참으로 한 분이심은 본체의 혼합으로써가 아니라 위가 하나이심으로써이다. 그 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을 당하시고 고성소에 내려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육신과 함께 부활하여 자기 행위에 대하여 셈 바치리라. 선을 행한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고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로 가리라. 이것이 거룩한 보편된 교회의 신앙 교리입니다. 누구라도 이것을 충실히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아타나시오 신경(Athanasian Creed)

아타나시오 신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서방 교회의 신경이다. 다만 정교회에서는 위 신경에서 이탤릭체로 표시된 "성자로부터(et Fillio)" 부분을 뺀 채로 전례서에는 있지만, 서방 교회에서처럼 중요한 신경으로는 취급 받지 않는다.

3.2.1. 생애


알렉산데르의 비서였던 아타나시오는 논쟁의 중심인물이자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립된 정통 신학의 수호자이며, 4세기 교회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 또는 교부 중 한 명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생애와 저서는 4세기의 신학 논쟁의 발전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뒤엉켜 있으므로 아타나시우스의 자서전을 말하지 않고는 그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청년 시절 아타나시오는 사막교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수도자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지켰는데, 이러한 엄격성 때문에 친구들의 존경을 받았고 일부 적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아타나시오는 치밀한 논리 전개나 정치적 술수 때문이 아니라, 수도적 신앙훈련, 민중 가운데 뿌리 박은 기반, 불 같은 성격, 심오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 때문에 아리우스파에 대항한 인물들 중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두로의 종교회의 소환부터 시작해서 콘스탄티누스의 유배, 로마로의 도망, 콘스탄티누스의 위협 등 적대자들의 공격으로 그는 인생에서 많은 시련을 겪는다. 물론 자신을 보호하고, 니케아 정통 노선을 지지하던 황제와 서방교회도 있었다. 이처럼 그가 계속해서 추방당하고 되돌아오곤 하는 것은 교리적 그리고 정치적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풍향계이기도 하다.

3.2.2. 그의 신학


아타나시오는 조직적이며 사색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독실한 신자이며 성직자였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체계가 없다거나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저작과 신학은 조직적 체계를 요구하는 데 근거했다기보다는 순간순간의 필요에 대한 대응으로 발전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사목적이고 호교론적이며, 주석적이고 심지어는 자서전적이기도 하는 특징이 있다.
아타나시오의 신학적 내용은 오리게네스와 아주 가까운 점이 있지만, 아타나시오의 관심사는 사색적이고 학문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방법론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출신 신학자들이 추종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이론적 문제들을 한쪽으로 제쳐 놓고 실천적인 주제들만 논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교리적 주제들이 갖는 신앙적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아타나시오에게 유일신관과 구원론이란 근본적으로 중요한 2가지 신학 원리가 있었다. 그의 초기 논문인 「이방인에 반대해서」라는 글을 보면 아타나시오 신학의 기둥이 된 유일신관이 무엇인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제2부에 해당되는 「강생에 대해서」에서는 그의 신학의 또 다른 기둥인 구원 교리를 설명해 준다.

3.2.2.1. 유일신관: 「이방인에 반대해서」

아리우스 논쟁이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사고와 인간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초기 논문인 「이방인에 반대해서」에서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 영혼과 자연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영혼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영혼은 불가시적이고 불멸적인 것으로 가시적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다. 참된 하느님은 영혼과 같이 불가시적이고 불멸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영혼은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하느님의 형상, 즉 하느님의 말씀을 반사시킬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영혼은 본래적 속성에 따라서 하느님을 볼 수 있으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환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거울을 흐리게 하는 죄를 닦지 않으면 거기에 비추는 말씀을 볼 수 없다.

이런 아타나시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유행했던 플라톤적 주제다.

하느님은 창조세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자신이 누구라고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하느님은 본래적으로 불가시적이고 이해할 수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우주를 펼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주를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셨다. 우주의 질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한 분이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자연에 깃든 질서와 이치는 하느님이 자연을 창조하셨으며 또한 하느님의 이성, 지혜 혹은 말씀을 통해서 다스리고 계심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로써, 자연의 질서 자체이며, 자연 속에 내재해 있는 비인격적 원리와는 다른 것이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살아 있는 로고스이고, 하느님 자신이신 말씀이시다.


3.2.2.2. 구원론관: 「강생에 대해서」

아타나시오에 따르면 항상 궁핍 속에 있는 인간의 구원은 창조와 연속성이 있는데, 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보면 재창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즉 자신의 말씀에 따라서 창조하였으며 인간들은 창조를 통해 선물로 불멸성을 받았다. 따라서 자신이 그 형상을 올바르게 투영하면 이 불멸성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짓고 그 형상을 저버렸기에, 그때 이후로 사망의 덫에 걸린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죄란 창조의 질서 안에 들어와서 인간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붕괴작용이며, 새로운 피조 작업을 통해서만 쫓아 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아타나시오는 오로지 하느님 한 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데,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 분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원리를 통해서 그가 아리우스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가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아리우스주의는 다신론에 접근해 있으며 둘째, 구원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온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리우스와 논쟁하기 이전부터 아타나시오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던 두 기둥과 아리우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리우스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3.2.3. 삼위일체 이론에 대한 그의 기여


아타나시오의 신격에 관한 이론에서 그는 하느님을 초월적인 존재로 보았으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피조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으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비록 하느님은 이 세상과 동떨어지게 위에 계시지만, 창조행위 그 자체 안에서 이미 피조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시며 지금도 피조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 끊임없이 접촉을 유지하고 계신 것이다. 하느님이 이 세상과 관계를 가지신다는 개념은 말씀이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중간자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뜻으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이해하는 하느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성에 따르면, 말씀 혹은 아들은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이시면서도 이 피조 세계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관계를 맺으신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적으로 존재한다.
아타나시오는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 받는다. 왜냐하면 아타나시오가 성자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가장 큰 적, 아리우스주의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주의와의 논쟁에 의해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만 크게 강조하고 성령에 관한 토론은 일단 뒷전으로 미뤄놓았다가, 나중에 성자의 신성은 인정하면서도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마케도니아 학파가 등장하면서부터 성령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성령도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아타나시오의 삼위일체 신학은 삼위일체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확정된 용어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모인 대회에서 아타나시오가 취한 행동을 보면 아타나시우스 자신도 그러한 용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용어를 끝내 전개시키지 못하고, 그 일을 카파도키아 교부들에게 넘겨주었다.
결론적으로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 신학 전통의 가장 큰 약점인 과도한 사변을 벗어나 있기는 해도 전형적인 알렉산드리아 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유적 방법 대신에 아타나시오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원리를 붙잡고서,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다른 모든 이론들을 판단하였다. 이 원리는 앞에서 설명한 유일신관과 구원론이다.

4. 삼위일체론의 완성: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고대 지명으로, 그 지역에 살았던 “대(大) 바실리오스” 라고 알려진 신학자 카이사레아의 성 대(大) 바실리오스와 그의 동생이며 신비적 관상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스, 그리고 이들의 친구인 시인이자 웅변가이며 헬라어권의 교회의 전통적 찬가를 작곡한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스가 대표적인 카파도키아의 신학자들로 알려져 있다.
카파도키아 학파는 성부와 성자, 성자와 성령, 성령과 성부의 관계를 분석함과 동시에 그 관계 속에서의 성령의 본질 확증으로 집중되는 관계 분석의 필연적 작업으로 수사학적인 연구를 하였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체임이 고백된 니케아 공의회 이후, 성령도 동일본질인가, 아니면 유사본질인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학파가 대표적으로 마케도니아 학파였다. 마케도니아 학파는 성령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을 에너지나 도덕적 감화력으로 이해하는 ‘성령 유사본질론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 바실리오스는 수사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위의 관계를 밝히고 성령의 위치를 확신하며, 전치사들이 두 위격끼리 각각 관계를 가짐으로써, 동등한 하느님으로서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동등한 영광을 받으심이 밝혀진다고 주장한다.

4.1.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를 가지고 바실리오스는 만물이 성부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성부는 창조의 원인임을, 성자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기에 성자는 창조의 대행자로 말한다. 또한 마케도니아 학파가 성부에게만 고정시킨 ‘그로부터’라는 어휘가 성자에게도 적용이 되며 ‘그를 통하여’가 성자에만 적용되는 어휘가 아니라 성부, 성령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바실리오스는 성서에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라는 표현과는 거꾸로 ‘성부를 통하여, 성자로부터’라는 표현도 있음을 말하며 ‘그를 통하여’도 성부께 적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16] 이는 성서 저자의 저술의 목적은 본성의 다양성이 아니라 혼동되지 않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바실리오스는 로마서 11:36절[17]을 해석하면서 성부의 뜻에 따라 만물이 성자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들의 존재의 원인이고 그를 통하여 만물이 유지되고 조성되기에 성부가 최고의 원인이며, 성자가 존재의 원인이라는 해석은 같은 내용의 두 표현일 뿐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동일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통하여’라는 전치사가 종속을 나타내거나 낮은 계급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며 성서에 나오는 ‘오른편에 앉으셨도다.’ 와 같은 표현은 모두 동등한 의미라고 해석한다.[18]

4.2. 성자와 성령의 관계


바실리오스는 계시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수단과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수단과 장소라는 구분 지음으로써 본성 자체를 구분을 짓는 것을 거부하고 위격의 차이를 말한다. 나아가 창조라는 계시 행위 가운데 세 분이 함께 일하시되 그 계시 양태의 차이를 설명한다.
마케도니아 학파는 ‘그 안에서’를 성령에게만 국한된 용어로 생각하여 장소라는 의미로 보는데 반하여 바실리오스는 성자에게도 사용되고 있음을 주장한다.[19]
나아가 ‘그를 통하여’ 또한 성령께 적용됨을 주장한다.[20]

4.3. 성령과 성부의 관계


마케도니아 학파는 ‘그로부터’를 성부에게, ‘그 안에서’를 성령에게 고정시켜 삼위를 설명하지만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전부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성부로부터 만물이 생성되기 때문에 그는 제1 원인이시며, 성령 안에서 신자의 성화 및 완전이 가능케 되어 인간이 신과 같이 되기 때문에 그는 창조의 완성자라고 해석한다. 이는 위격의 차이일 뿐 본성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는 해석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가 성부에게도 사용될 때가 많음을 주장하며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3장 9절[21]을 통하여 성부 안에는 계시가 숨겨져 있고 그것이 성령과 성자를 통하여 나타난다고 말한다. 반대로 성령께도 ‘그로부터’가 사용[22]됨을 주장한다.

4.4. 분석과 종합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세 표현(-로부터, -통하여, -안에서)이 성부, 성자, 성령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 하실 때, 하느님의 신성이 드러나고 하느님이 하느님 됨을 보여주며,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계시의 주체요, 같은 본질임이 밝혀진다. 다시 말해 세 분 모두는 동일본체이며 세 분 모두 동일한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셨고 동일한 구원의 뜻을 가지고 일하심을 증명하며, 본질과 능력의 다양성이 없고 하나임을 밝히며, 나아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신다. 성부가 창조와 역사 섭리의 근원이신 주체자라면, 성자는 창조와 역사 섭리의 대행자시요, 성령은 완성자라는 것이 카파도키아 학파의 결론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카파도키아 학파의 삼위일체론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정죄를 당한 마케도니아 학파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체라는 신앙고백의 성립
둘째, 성부, 성자, 성령은 동등위격으로 존재, 어떤 위치로의 종속적인 개념x
셋째, 샘의 근원이 있듯이 근원이 성부
넷째, 성부는 창조주, 성자는 구세주, 성령은 성화주로 기능이 분화
다섯째, 성자는 성부와 성자와 같은 참하느님이면서, 우리들과 같은 참인간 [23]


여섯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완덕으로 나아가게 한다


4.5. 카파도키아 학파에 의해서 형성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신앙고백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삼위의 동일본질론, 즉 니케아 신앙의 확립을 나타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 되어온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성은 꾸준히 문제되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성은 승리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점은 성령마저도 동일본질성을 소유함을 고백하는 제 3항목 성령론 부분이다.
기존의 니케아 공의회의 동일본질의 뜻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아타나시오의 ‘본체는 삼위의 일체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위격은 삼위의 객체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삼위의 개체성을 나타낼 길이 없게 되었고 사벨리우스적 단일신론적 경향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동일본체를 말할지라도 거기에는 세 위격, 혹은 품격이란 또 하나의 표현을 전제로 나감으로써 유사본질에서 염려하던 사벨리우스적 경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의 실재성, 인격성 혹은 개체성을 주장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는 이를 훨씬 분명하게 설명하여 니케아 신경에서 3항목으로 나뉘어 표현한 삼위의 개체성을 더욱 잘 발전시켜 표현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동방 기독교의 그리스도론 논쟁과 칼케돈 공의회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공의회들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이고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가 구속을 받게 된다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교회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 특히 시리아 등지에서는 여전히 단성론이 횡행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종교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런 결과로 인해 동방에서는 끊임없는 신학적 논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합의에는 도달했으나 이후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삼위일체의 도그마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 예수의 '위격(person)'에 대한 문제이다. 만일 예수가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하신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둘째, 그의 '활동',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 삼위일체 교리로는 이것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기에 결국 그리스도론의 논쟁이 생기게 되었다. 이 논쟁에 관하여 두 개의 서로 다른 사상의 흐름이 동방 교회 내에 있었다.
이하 내용은 그리스도론 문서 개설시 추가 후술함.

6. 현대: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


근대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에 편승하여 삼위일체론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라고 여겨 도외시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윤리를 따르고자 하는 신학운동들이 활발해졌다. 그러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 사조가 등장하면서 개신교단 내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갱신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24]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 융엘, 판넨베르크가 있다. 이전에 칸트의 도덕철학으로 말미암아 신학이 슈토르(G. Schr. Storr)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의존, 톨룩(A.G. Tholuck)에 의한 각성운동, 리츨의 예수 선포에 대한 윤리적 해석으로 분파가 나뉘어졌다면 헤겔의 절대정신, 무한자 개념의 철학과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 이론 등등 은 기독교의 교리가 다시금 철학에 의해 유지되고 보증될 수 있다는 개념으로 다가왔고, 그 이후로 개신교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이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리츨학파와 결별하고[25] 계시신학으로 돌아섰으며 그리스도론적 신론을 제시하기 위해 신학 전반을 삼위일체론에 토대를 두고 전개해나갔다. 여기서 그는 실존주의 철학이 삼위일체론을 단순히 신에 대한 부록이 이니라 신의 현실성(Reality) 전체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고 보게 된 것이다.[26]
즉 이전의 슐라이어마허에 의한 감정론의 길에서 개신교는 다시 계시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역사에 나타난 성자와 성부의 결합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신학이 체험중심과 죄에 대한 자책, 각성의 길에서 다시 예수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에만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자기계시의 길로 가는 발걸음이 되었고 삼위일체를 실체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학풍을 '''(구)정통주의'''와 '''스콜라주의'''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이후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루돌프 불트만[27], 키에르케고르부터 영향을 받은 폴 틸리히, 칼 바르트의 편협적인 계시이해를 반대하고 나선 역사신학자라 일컫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이 있다. 또한 이들의 삼위일체론 연구는 생태신학여성신학, 해방신학, WCC의 패러다임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21세기의 주요한 메이저 신학사조로 발돋움하게 된다. 물론 현대신학이기에 교파에 따라서 이들을 지지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가톨릭은 이와 별개로 독자노선을 가게 되었다.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든 칼 라너 수사, 교황무류성을 비판해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교사직(missio canonica)을 박탈당한 한스 큉, 예수를 역사적 관점과 신앙적 관점으로 나눠 정의하는 것을 경계한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등, 네오토미즘(Neo Tomism, 신 스콜라주의)의 학풍으로 현대 천주교 신학자들이 나타났다. 혹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신부[28]처럼 아예 독립적 노선을 간 신학자들도 있다. 이들의 노력의 결과물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삼위일체론은 학문적으로 실존주의를 차용하였기에 미국과 영국의 행동주의, 유물론, 진화론과는 아직까지 대치하고 있는 상태이다.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지(영적) 혹은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로 보는지(육체적)에 대한 시각차이로 인해 관념론과 유물론과의 대화 같은 끝없는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29]그렇지만 긍정적인 것은 막스 쉘러(M. Scheler, 1874-1928년)가 제창한, 놈 촘스키의 발생론적 문법이론이나 구조주의, 콘라트 로렌츠의 선험적 행동양식, 피아제의 유전인식론, 야콤 폰 윅스킬의 주위세계 개념, 헬무트 플레스너, 아놀드 겔렌의 상규이탈성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을 기본 전제로 하면서 철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일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규정한 인간론, 곧 "인간은 더이상 본능이나 주위세계에 예속되어 있지 않고, 주위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umweltfrei) 존재" 이론이 신학에서 추구하는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이해와 연결될 수 있다는 판넨베르크의 연구에 의해서, 과학과 신학이 여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결로 나아가게 된다.
신정통주의 신학 안에서 발흥한 에큐메니컬 운동은 후에 "하느님의 선교(the missio Dei)"이론을 받아들여 이제는 인간의 자발적인 선교가 아닌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한계임을 인정하였다.

7. 이단적 사상


예수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존재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과 '하느님 아버지'가 특별한 관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는데[30], 문제는 이런 논쟁이 그리스 철학 때문에 벌어진 거지 예수 본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예수는 그냥 아버지라고만 말했는데, 당연히 예수가 존재론적으로 아버지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복음서 내에서도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너희들도 나처럼 하면 아버지의 자녀들이 된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플라톤마냥 치밀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는 예수가 학자형이 아니라 예언자형 인물, 즉 엄밀한 주장과 논리에 의거하여 사람을 설득하지 않고 카리스마와 직관력으로 세상에 대해 경고하는 인물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언자형 인물은 좋게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예언자가 될 수 있지만, 나쁘게는 허황된 말로 사람을 혹세무민하게 될 수도 있다. 기독교도 유대교에서 나온 만큼 유일신을 주장하는데, 세례를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등 유대교로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을 해 왔다.
당연히 초대 기독교인들도 존재론적인 문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그리스 세계로 전파되면서 그리스 철학에 익숙한 인간들이 "그럼 예수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처럼 신의 아들인가?" "예수도 신이면 기독교는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 아닌가?" 하면서 의문을 제기하자 안습이 된 것. 자연히 기독교 내부에서 도대체 유일신 사상과 예수가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가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 이론이 나왔다.
  • 예수를 예언자로 정의한 경우: 예수 사후 극초창기 에비온파의 사상이다. 예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유대교와 사실상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파와도 손을 잡지 못하고 맥이 끊겼다. 이슬람이 이렇게 설명하며, 유대교 중 예수에게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 이렇게 이해하기도 한다. '양자론'이라 불리는 설에서는 예수는 원래 그냥 인간인데 처음으로 성령을 통하여 양자가 된 경우로 주장하기도 한다.
  • 예수를 성부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경우 (성부수난설, 양태론)
  • 예수를 신의 특별한 창조물로 생각한 경우: 대체로 아리우스파영지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미카엘 대천사가 예수로 나타났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2세기 초와 현대 여호와의 증인까지 있었다. 요한 복음서의 로고스 그리스도론도 얼핏 보면 이런 입장인 듯하지만, 요한 복음서는 "로고스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느님이다"라는 모순적인 말로 로고스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단으로 정죄된 사상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자면,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간략하게 흔히 착각하는 것 위주로 서술한다.
  • 양태론
삼위일체론과 가장 많이 헷갈려하는 이론.
”성부=성자=성령”을 주장한다. 그냥 한 하느님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흔히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하려고 하나의 H2O가 이기도 얼음이기도 수증기이기도 한다고 설명하거나 한 남자가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자녀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회사에서는 사장이 된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설명들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널리 쓰이지만 잘못 이해할 경우 성부=성자=성령으로 오해할 수 있다.[31]
  • 신명론
양태론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양태론 중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섞어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양태론 안에 있기에 특별히 이런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이를테면 성부 하느님의 이름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런것이 바로 신명론이다. 그러나 예수를 야훼라고 부르는 것은 신명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훼는 엄밀히 말해서 어떤 특정한 신의 이름, 이를테면 제우스나 오딘 같은 이름이라기 보다는 존재 방식의 표현이기 때문. 이 부분은 베네딕토 16세의 저서인 <나자렛 예수>의 다음 인용문을 참조해보자.

당시에는 많은 신이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다. 실제로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해 특별한 권위를 지닌 분으로 당신의 신분을 밝히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관념은 일차적으로 다신교를 믿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념이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는 모세의 하느님도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여느 신이 아니고 진짜 하느님이시다. 본래 참된 의미의 하느님이란 여럿일 수 없다.하느님은 본질상 한 분 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신들의 세계에 있는 신들 중 하나로 등장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이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응답은 모세의 물음에 거절하는 답이기도 하고 그 물음에 응하는 답이기도 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나는 있는 나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분은 단순히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신원을 몸소 밝혀주신 이름, 곧 '야훼(YHWH)'라는 이름을 소리 내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것은 그분의 이 이름을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성경을 새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신비에 차 있고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되었던 이 이름을 여느 이름처럼 적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분의 신비를 일반적인 종교사의 평범한 사례로 끌어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하느님께는 그분을 그려 보일 수 있는 어떤 그림도,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 국역본 1권 221~222p에서

  • 역동적 군주신론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인 것을 부인한다.
비록 성자가 하느님도 맞고, 인간도 맞다는 것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동일하다. 그러나, 예수는 본질적으로 원래 인간이었고 후에 하느님의 양자가 되어 신이 되었다고 바라본다. 그렇기에 성자와 성령이 동일본질이라고 보지 않고, 성자가 성부에 비해서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바라본다. 이런 점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삼위일체론과 비슷하다.
  • 형태론적 군주신론
성부수난설 또는 가현설이라고도 한다. 예수를 하느님의 현현으로 보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개체는 실존하지 않고, 성부가 현현하였다는 보는 것이다.

7.1. 반삼위일체 교파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교파도 있다. 보통 이 경우에는 이단은 물론이고 기독교로 취급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닌 단일한 인격체이며, 예수는 별개의 창조물이고 성령 역시 별개의 인격체가 아닌 하느님의 활동력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초기 기독교에 등장했던 아리우스파가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세르베투스나 소치니 등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다 단죄받기도 했다.
오늘날 현존하는 대표적인 반삼위일체 교파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19세기 이후 등장한 교파들이며 그들 스스로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 사도들의 교회를 회복한다고 주장하여 '회복주의'(Restorationism)로 분류한다.(단 모든 회복주의 교단이 비삼위일체파인 것은 아니므로 주의.)[32] 연원을 따지면 개신교에서 파생된 교파도 있으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바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와는 별개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모르몬교)[33]
  • 여호와의 증인[34]
  • 참예수교회
  • 유니테리언 - 단, 현대 유니테리언 교파는 이름과 달리 종교다원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 단일오순절교 - 정식으로 양태론 교리를 채택한 교단들 중 하나이다.
  • 그리스도아델피안
더 심한 경우는 삼위일체에 자기들의 교주를 재림예수나 그에 준하는 존재로 등극시킨 결과, 자연스럽게 삼위일체론을 위반한 개신교 파생 사이비 종교들도 있다. 해당 교주들은 기존 기독교 교리에 편승하여 1~2세대에 걸친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종교적 권위를 가진 뒤 혹세무민을 일삼기 일쑤였다.

8. 논리학적 분석: 피할 수 없는 모순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뿐이다. 이성이 작용할수 있으려면 먼저 개념이 정확해야 한다. 교인들 누구도 명확한 삼위 일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칭 예수의 사제라는 협잡꾼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35]

토머스 제퍼슨[36]

논리학공리 중에 모순율이라는 게 있다. A가 B이면서 동시에 not B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숫자 1홀수이면서 동시에 짝수가 될 수 없는 이유도 이 모순율 때문이다. 모순율이 지켜지지 않으면 문자 그대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모든 논리는 모순율을 반드시 따라야 하며, 이를 어긴 주장은 논리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삼위일체론은 모순율을 무시하는 주장이다("성부=성자"이면서 동시에 "성부≠성자")'''[37]. 일반인들이 위에 서술된 내용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 뜻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숫자 1이 홀수이면서 동시에 짝수라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바보라면 모르겠지만, 멀쩡한 사람이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여기서는 그 이유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기독교가 논리학의 공리를 무시함으로써 삼위일체론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방해된다면, 이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순율을 무시하지 않고 논리를 진행시켰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하나하나 밟아보는 것'''이다. 대체 무슨 결론이 도출되길래 논리적으로 말이 되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러한 교리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자는 얘기이다. 그래야만이 삼위일체론의 실체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논리를 진행하려면 바탕이 될 전제가 필요하다. 여기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이 참이라고 납득할만한 전제들이 있다. 첫째, 기독교에서는 오로지 야훼만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야훼 이외의 존재에 대한 숭배(우상숭배)는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기독교는 예수를 숭배하는 종교이다. 셋째,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간이다. 이 세 전제로부터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간인 예수를 숭배하는 것은 왜 우상숭배가 아닌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밖에 없다. 여기가 논리의 시작이다.
앞서서 모순율을 무시하지 않고 논리를 전개시켜 보기로 했다. 논리학에서 모순율이 중요한 이유는 모순율이 '맞다(B)'와 '아니다(not B)'의 두 가지 항의 대립을 통해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손쉽게 따져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모순율에 따라 예수는 인간이거나, 혹은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둘 다 맞을 수도 없고 둘 다 틀릴 수도 없다. 반드시 한 쪽만 맞아야 한다.

'''1. 예수는 인간이다'''
예수를 인간이라고 가정하는 순간 앞서서 본 첫 번째 전제에 의해 예수에 대한 숭배는 우상숭배가 되어 버린다. 예수가 인간이라는 말은 곧 예수가 야훼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걸 실제로 고른 아리우스파나 여타 반삼위일체파 기독교도 있긴 하지만, 예수를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여타 대부분의 기독교로서는 이 선택지를 참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면 고를 수 있는 건 아래의 선택지뿐이다.

※ 이 명제를 '예수는 야훼이다'와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로 나누지 못하는 이유 [ 보기 · 닫기 ]
'예수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예수는 야훼이다'와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로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가 참으로써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예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훼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다. 여기에서의 인간이란 '''생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라는 존재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즉,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참이 아니며, 따라서 '예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훼이다'라는 명제도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예수는 야훼이다'라는 명제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앞서서 '예수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야만 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A는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했을 때 'A는 사과이다'라는 명제를 같이 쓸 수가 있을까? 'A는 동물이며 동시에 사과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사과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훼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야훼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기독교가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야훼는 예수이고 예수는 인간이니, 곧 야훼는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단락에서는 모순율을 지키면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순율을 어긴 삼위일체론은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47]. 둘째, 기독교가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할 때의 '인간'이란 앞서서 말한 '''생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때의 인간은 기독교의 표현에 따르면 '''남녀 간의 교배가 아닌 기적으로 숫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 기원전 6~4년부터 기원후 30년까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십자가형을 당해 죽은 뒤에 부활하여 승천한 존재'''를 말한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뜻과는 전혀 다른 범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48].
'예수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예수는 야훼이다'와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로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가 참으로써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예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훼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다. 여기에서의 인간이란 '''생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라는 존재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즉,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참이 아니며, 따라서 '예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훼이다'라는 명제도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예수는 야훼이다'라는 명제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앞서서 '예수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야만 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A는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했을 때 'A는 사과이다'라는 명제를 같이 쓸 수가 있을까? 'A는 동물이며 동시에 사과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사과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훼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야훼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기독교가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야훼는 예수이고 예수는 인간이니, 곧 야훼는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단락에서는 모순율을 지키면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순율을 어긴 삼위일체론은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38]. 둘째, 기독교가 '야훼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할 때의 '인간'이란 앞서서 말한 '''생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때의 인간은 기독교의 표현에 따르면 '''남녀 간의 교배가 아닌 기적으로 숫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 기원전 6~4년부터 기원후 30년까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십자가형을 당해 죽은 뒤에 부활하여 승천한 존재'''를 말한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뜻과는 전혀 다른 범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39].}}}

'''2. 예수는 인간이 아니다'''
이 명제는 또 다시 모순율을 적용하여 아래의 두 가지 항으로 나눠볼 수 있다.

'''2.1.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
예수를 야훼가 아닌 별도의 신이라고 인정할 경우에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신앙와 같은 다신론이 된다. 상술했듯 기독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는 일신론적 신앙이므로 이는 허용될 수 없다. 예수가 별도의 신은 아니지만 야훼 아래의 천사와 같은 존재이거나, 야훼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 중세 초창기의 민중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처럼 야훼나 예수가 아닌 엉뚱한 천사 숭배가 판을 치는 결과가 나타날 위험이 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예수가 야훼가 아니라고 가정하는 그 순간 예수에 대한 숭배는 우상숭배가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2.2. 예수는 야훼이다'''
예수가 야훼라면 우상숭배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므로, 언뜻 보기에는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예수가 야훼라는 말의 뜻은 당연히 순수한 하나의 존재로서 같다는 뜻이다[40]

. 그 말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가 곧 야훼라는 뜻이니, 결론적으로 야훼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야훼의 유일성이 확고해지는 대신 야훼의 불멸성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예수는 야훼의 인간 형태에 불과하고,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그저 야훼의 형태가 변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등장한다(양태론).
양태론이 옳다면 결국 예수의 존재는 야훼라는 배우가 연기한 드라마 캐릭터 수준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인간 예수를 숭배하고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기독교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또한 양태론 대로라면 야훼가 예수가 아닌 다른 인간의 형태로도 재림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 내에서 예수에 대한 숭배를 철회하고 제 2, 제 3의 재림 야훼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나거나, 혹은 본인이 바로 그 재림 야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위험이 발생한다. 따라서 '예수는 인간이 아니고 야훼이다'라는 명제 역시 기독교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로써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살펴봤고, '''어떠한 경우에도 기독교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순율에 따라 '예수는 인간이다(1)', '예수는 인간이 아니고 야훼도 아니다(2.1)', '예수는 인간이 아니고 야훼이다(2.2)'의 세 가지 경우 중 반드시 하나만이 참일 수 밖에 없는데, 이 딜레마 상황에서 어느 한 쪽도 고를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41]. 기독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결론 지었을까? 기독교는 모순율을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예수가 인간이라는 명제(1)'와 '예수가 인간이 아니고 야훼라는 명제(2.2)'를 둘 다 참으로써 채택해버린 것이다.''' 이러면 예수에 대한 우상숭배가 문제가 될 때에는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야훼이기 때문에(2.2)''' 괜찮다고 대응을 할 수가 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게 야훼가 되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는 인간이기 때문에(1)''' 인간 예수로서 죽은 것이라고 대응을 할 수 있게 된다[42]. 여기에 성령의 개념을 결합하여 살을 붙인 게 삼위일체론의 실체라고 보면 된다.[43]

9. 삼위일체와 야훼라는 이름에 대해서


[image]

야훼란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그분이다!’는 의미의 환호성(yah!)이라는 견해 ② ‘있다’는 의미의 동사(hyh 혹은 hwh)에서 유래한다는 견해, 즉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들었던 이름을 백성에게 전할 때 간접화법으로 ‘그는 곧 그다’라고 했다는 견해, ③ 모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이라는 견해(소극적으로 유비적인 답변을 하신 예, 출애 33:19-23) ④ 주님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나는 곧 나였던 나일 것이다’(I shall be what I was)라고 번역하는 견해, ⑤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자존(自存)을 의미한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설명은 하느님의 이름이 출애 3:14에서 동사 ‘있다’(qal)의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간과하는 흠이 있다. 문법적으로 야훼는 이 동사의 원인을 나타내는 형식이어서 "그는 있도록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가톨릭 대사전, 야훼 항목 中

'야훼'라는 말이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에게만 해당된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적 논리로 볼 때 오류이다. 성부도 야훼고 성자도 야훼고 성령도 야훼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느님/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야훼인데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이므로 당연히 세 위격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야훼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44]
다음 구절들을 참조해보자.[4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God replied to Moses: I am who '''I am'''. Then he added: This is what you will tell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출애굽기 3장 14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복음 8장 23-30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요한복음 8장 58절

I AM: an expression that late Jewish tradition understood as Yahweh’s own self-designation (Is 43:10); see note on Jn 4:26. Jesus is here placed on a par with Yahweh.

요한 8, 24의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 주석

본문과 주석에서 볼 수 있듯 영어 I AM으로 번역되는 표현은 야훼의 자기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요한 복음서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도 이 표현을 스스로와 연결해서 말한다. '야훼'라는 표현이 성부에게만 해당한다고 성경에서 말한 적도 없기도 하거니와,[46] 이 표현을 대체하는 표현인 아도나이와 엘로힘(Elohim)도 특정 위격을 전제한 표현이 아니다. 즉 출애굽기 3장의 유명한 계시 역시도, '성부가 자신의 위격에만 해당하는 이름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야훼'라는 표현을 대체하는 말은 주님 혹은 하느님이며, 다음 명제는 모두 참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부는 야훼이다.

2. 성자는 야훼이다.

3. 성자는 야훼의 아들이다.


[1] 정교회 교리에서는 이 '와 성자'가 없다. 니케아 신경에서 이 부분을 두고 '필리오케 문제'라는 동서 교회 간의 다툼이 벌어졌고, 교회 분열을 더욱 가속화했다.[2] 하느님의 본질이 아닌 것을 부정하여 남은 것만을 인정하는 형태. 삼위일체론도 아리우스주의나 성부수난설 등의 이단설을 부정해 결론을 내린 형태이다.[3]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신(神)론에 있어서는 서로 동일하다. 사실 가톨릭이든, 정교회이든,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계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간에 초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파들은 모두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곧 한 하느님 실체의 세 페르소나는 공유한다. 이들의 차이는 그리스도론의 구체적인 해석에서 나왔다.[4] 둘 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이단적 사상이라고 본다.[5] 다만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성부의 동질성을 말하는 구절도, 구분을 말하는 구절도 모두 발견된다. 여기서 양 극단의 해석(아리우스파와 단일신론)을 쳐내고 나온 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합의이다.[6] 즉 예수 그리스도가 초월자의 화신(아바타)이라 생각한다면[7] 이 비유가 문제가 있는 이유를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H2O라는 '''분자 하나'''가 물, 얼음, 수중기 세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지 못한단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삼중점에서는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로 공존하지만, '''분자 하나'''는 삼중점에서도 고체이거나 액체이거나 기체 상태이다. 세 위격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겉모습을 바꿔가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성부가 성자나 성령으로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8] 간혹 양자역학의 입자 파동 이중성으로 설명하려고도 하는데, 입자와 파동도 한 순간에는 한 형태로만 존재한다.[9] 지성, 감성, 이성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10] 서방교회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현한다.[11] 이같이 복수형 표현으로 단수형을 높이는 표현은 현대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교황들도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언어들에서 T-V구분이라 하여 2인칭에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당신'이라는 경어로써 너(ты)의 복수형인 너희(вы)를 쓴다. 영어가 2인칭 단수와 복수가 같은 것도 2인칭 복수였던 you를 높임말로 쓰다가 예삿말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원래 단수였던 thou는 킹 제임스 성경 같은 옛 문체를 쓰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12] 그렇기에 성 아타나시우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논쟁하기 무서운 사람"의 기준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13] 순교자와 동일하게 고문당하고 박해 받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몸에 신앙고백을 지킨 증거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존경과 경의의 대상이었다. 후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파 논쟁 당시 배교자를 교회에서 받아들여선 안 되는 이유로 이들을 언급한다. 실컷 고문 받고도 살아남아 끝까지 신앙을 지켜왔는데 눈앞의 주교가 배교자였다면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14] 카타콤의 벽화들을 보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그릴 때 그리스-로마 신화의 헤르메스(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 아폴론(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술과 축제의 신)로 표상한 것도 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과 예수가 로마적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뜻한다.[15]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아예 구약을 배척하는 자들이 마르키온파(Marcion派)이다.[16]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창세 4:1 공동번역),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풀어줄 사람이 없소." 요셉은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이야기 해달라고 청하였다(창세 40:8 공동번역),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1고린 1:9 공동번역)[17]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로마 11:36 공동번역)[18] 야훼께서 내 주님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시편 110:1 공동번역)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신성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3 공동번역)[19]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1코린 1:30 공동번역), 나 바울로와 실바노와 티모테오는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살로니카 교회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깃들기를 빕니다.(1테살 1:1 공동번역),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4:13 공동번역).[20] 또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대가 맡은 훌륭한 보화를 잘 간직하시오.(2티모 1:14 공동번역),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1코린 12:8-10 공동번역).[21]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주게 하셨습니다. (에페 3:9 공동번역).[22]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 6:8 공동번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1요한 3:24 공동번역),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공동번역)[23] 50% 신+50% 인간이 아니라, 100% 신인 동시에 100% 인간[24] 내용의 갱신이 아니라 계시의 주체성에 대한 확신의 갱신이다.[25] 여기서 의미하는 결별은 성서비평과의 결별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을 의미한다.[26] 그러나 초기 바르트는 변증법을 차용한 것이지 실존주의 자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실존주의를 학문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 신학자는 루돌프 불트만이다. 다만 칼 바르트를 시발점으로 신정통주의 소속 신학자들은 현대철학과 대화하기 위해 그들의 철학도식들과 이론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후기 바르트 시점에서는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들도 옳은 표현이다.[27] 그는 하이데거와 같은 대학의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28]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가 탈퇴하였으므로 교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신학박사이기 전에 문학박사였으므로 교목과 신학 월간지에서 편집장을 맡았으며, '''신학적 미학'''이라는 독특한 관점으로 성서와 문학작품들을 비평했다. 말년에 공로를 인정받아 추기경 서임이 확정돼 있었으나 서임식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29] 이 이해가 해결되면 자연히 예수 이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30] 비단 존재론적 부분 뿐만 아니라, '''법'''에 대해서도 비유만 해주었지 구체적으로 법문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란 조건이 갖추어져야 완성되는 것이니 당연하다 쳐도... 사도 성 바울로(개신교의 바울, 가톨릭의 바오로. 여기서는 공동번역의 명칭을 따랐다.)의 서신들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게 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 주지만 마지막 서신에서까지 그 내용은 없다. 즉, 신약의 서신들도 구체적인 설명은 안 해준다. 그리고 하필 '''비밀'''이란 언급을 하기 때문에 온갖 논쟁이 나는 것은 물론, 온갖 사이비와 이단들이 양산되어왔다. 신약을 읽어보면 분명 레위기에 적힌 그 법을 대신하여 새롭게, 하지만 그 이전의 모든 것이 폐해지지 않는, 법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대관절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결국 없다. 이것은 복음서들의 차이와 함께 그리스도교계에 기나긴 난제로 남아있다. 이로 인해 양산된 엄청난 물량의 사이비 이단은 덤.[31] 잘못된 비유인 것은 아니다. 다만 비유는 어디까지나 쉽게 이해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므로, 엄밀히 이해하고 싶다면 페르소나와 실체 등의 개념과 연결해야 한다.[32] 한국에서 정식 개신교 교단으로 인정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만 해도 회복주의를 주장했지만 '''엄연히 삼위일체를 인정했다.'''[33] 삼위일체가 아닌 삼위삼체를 주장한다.[34]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이 최초로 창조한 영적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35] "Ridicule is the only weapon which can be used against unintelligible propositions. Ideas must be distinct before reason can act upon them; and no man ever had a distinct idea of the trinity. It is mere Abracadabra of the mountebanks calling themselves the priests of Jesus."[36] 1810년 7월 30일, 프랑수아 아드리안 반 데르 캠프에게 보내는 편지 중. 제퍼슨은 반삼위일체 기독교라 할 수 있는 이신론자다.[37] 간혹 이 '성부=성자'를 부정하며 '야훼=성부', '야훼=성자'라고 나누어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논리적으로 '성부=야훼'이고 '야훼=성자'이면 자동으로 '성부=성자'가 된다. 이게 '같다(=)'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논리학 용어로 '추이성'이라고 한다. 동치관계 참조.)[38]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논리학의 공리를 지키며 진행되는 모든 논리적 과정에서 삼위일체론과 같은 비논리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논리이기를 포기한다는 게 바로 그런 의미이다.[39] 이렇게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논리적 오류를 범주의 오류라고 한다.[40] 간혹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이 명제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순율이 공리로 존재하는 논리 체계에서 모순율을 무시하는 삼위일체론은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41] "아무 것도 고르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기독교 초창기에는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예수와 야훼 간의 모순적 관계는 영지주의아리우스파같이 지금의 기독교에서 이단이나 이교로 분류하는 수많은 주장들이 판치는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다.[42] '''물론 기독교가 실제로 이런 표현들을 사용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두 선택지 자체가 모순율에 의해 나뉘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순율을 무시하는 기독교에서는 저런 식의 선택지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예수는 인간이자 야훼이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간이자 야훼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을 할 뿐이다(당연히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서술은 칼케돈파 기독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에서 특히 강조된다.[43] 참고로 위의 논리 구조는 다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유대교이슬람은 앞선 세 가지 명제 중 '예수는 인간이다(1)'라는 명제 하나만을 참으로써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처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유대교와 이슬람은 예수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인간이라고 결론지어도 우상숭배 문제로부터 자유롭고, 모순율을 어겨가면서까지 삼위일체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 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가 삼위일체론이라는 모순된 교리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핵심적인 원인이,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간인 예수를 숭배하는 종교'이고 여기서 필연적으로 '인간 예수에 대한 우상숭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44] 다만 성부만 야훼고 예수를 야훼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만 구분짓는 게 틀린거지 성부를 야훼로 지칭하는 것 자체는 틀렸다고 보기에 어폐가 있다. 야훼를 다르게 지칭하는 표현이 '주(Dominus)' 혹은 '하느님/하나님'인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성부의 아들임을 표현할 때 흔히 '하느님/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느님은 편의상 성부를 지칭함이 당연하다.(하느님 앞에 성부를 생략했다고 보면 된다.) 성부 역시 하느님의 한 위격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성부라는 위격을 하느님이나 주님이라고 지칭하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애초에 야훼는 존재론적 표현이지 호칭을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 아니므로 호칭 문제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각 위격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을 다른 위격에게 사용한다든가 하지만 않으면 된다.[45] 인용한 국역 성경과 영어 성경은 각각 가톨릭 성경과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새 미국 성경 개정판, NABRE)이다. I AM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 역본들을 인용했다. 또한 NABRE에서 I AM을 대문자로 강조한 것도 그대로 인용했다.[46] 구약 시대에는 삼위일체론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신약에서는 '야훼'라는 표현을 직접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