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트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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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콥트 정교회는 기독교 중 오리엔트 정교회의 한 종파이다. 비칼케돈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로 이 교회에서는 고대 이집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확산 이전까지는 비칼케돈파 교회의 총본산이었으며[2] 이슬람의 오랜 종교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현대까지 교세를 이어와 현재에도 많은 신자들이 남아있다. 공식적으로는 이집트 인구의 10% 내외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건 그냥 신분증에 '콥트 정교회'라고 표기한 인구의 비중을 나타낼 뿐이다. 콥트교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보다 많은 최대 20~25%의 인구가 콥트교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한국일보에 실린 김나미 기자가 만난 이집트 대사관 콥트교인 직원 역시 이집트 인구의 30% 가량이 콥트인이라고 했다. 이런 통계치의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콥트교인 신자는 이슬람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집트 정부에서 정치적 이유로 줄여서 발표하는 것도 있고[3] 박해와 차별 문제 때문에 콥트 교인 스스로 무슬림인 척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집트 내 기독교인 중에서는 95%가 콥트 정교인이다.
아울러 수단 공화국에 60만, 리비아에 5만 명 남짓 콥트 정교회 신자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약 700만명 정도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상세
콥트 정교회는 풍습이 독특한데, 알렉산드리아 전례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콥트 전례를 사용한다. 전례력 또한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이 거의 그대로 이어진 독특한 콥트력을 사용하는데, 각 달의 이름이 신왕국 시대 이집트어와 거의 유사하다. 콥트 정교회는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서기 284년을 순교력 원년, 즉 교회력 원년으로 정한다. 콥트 정교회에서 지키는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고[4] , 성탄 40일 전부터 단식을 한다고 한다. 또 부활절이 오기 전 55일간 단식을 한다. 낮에 음식물을 먹지 않고 육식을 피하여 올리브유로 요리한 음식만 먹는다.[5] 또 콥트 정교회 신자들은 보통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억하는 의미, 그리고 일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손목 안쪽에 하늘색 십자가 문신을 새긴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콥트어는 고전 이집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콥트어는 고전 이집트어의 직계 후손이며 마지막 발전 단계이기 때문이다.[6] 그러나 문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와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 용어에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경문의 상당 부분이 중세 그리스어와 '''똑같다.''' 게다가 사용하는 콥트어의 용도가 전례 언어다 보니 순수 이집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아랍어의 대중화로 이미 18세기 이후 아랍어 사용이 대중화됐다.[7]
3. 이슬람에 의한 박해와 차별
사실, 이집트는 테오도시우스 2세 때부터 칼리프 우마르의 점령 이전까지 기독교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의 지배 이후, 이집트에서 주류 무슬림들에게 차별을 받아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카이로 부근 협곡 '성 시몬 동굴 성당' 부근에 '자발린'(쓰레기 마을)이다. 무슬림들이 버린 쓰레기를 처리하면서 사는 마을인데 3만 5천이라는 꽤 규모가 큰 마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콥트인들이 다 이렇게 대우 못 받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의 민족 의식이 고조되면서 종교를 초월한 '이집트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상당히 기여했고''' 메흐메드 알리 시절 이후 관료로 진출하는 기회가 넓어지면서, 상당수가 대도시 중산층으로 편입되었고,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 오라스콤 사장[8] 온시 사위리스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물론 현재도 절대적인 관료들의 숫자도 적고, 사회문화적 차별이 시정이 된 건 아니지만, 기독교를 못 잡아먹어 난리인 골수 이슬람 중동 국가에 비하면 여긴 기독교도들의 대접을 꽤나 잘해주는 동네였다. 지금도 콥트인 중산층들은 무슬림들에 비해 교육 수준도 높고 경제력도 상당하다.
하지만 최근, 더 정확히는 이집트에서 살라피즘 기반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급증하기 시작하던 1980년대부터 다시 박해가 급증하여, 현재까지 나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심해지고 있다. 기독교인이 무슬림만 쓰는 히잡을 안 썼다고 학교에서 들어오지 말라고 내쫓기는 처분을 받거나 여학생은 머리가 깎이고, 또 퇴학도 당한다고 한다. 성당 건물이 낡아서 신축한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이 성당을 공격하질 않나(!), '''이집트 의대 대입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콥트 정교회 신자인 소녀가 (아마도 무슬림의 압력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이유로 성적이 모조리 0점 처리되는 등# 일상생활에서 받는 차별도 상상 이상이다. 기독교인이라고 납치당해 살해당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언니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동생에게 참수하라고 시키며[9] 기독교인 할머니를 발가벗겨 거리에 끌고 다니며 집단폭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가해자들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집트 무슬림들은 만만한 기독교인을 분풀이삼아서 공격하고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기독교인 학살의 동력은 그들이 드리는 모스크 금요예배 때의 충동 때문이었다. 2007년 5월 11일 금요기도회 직후, 분노한 무슬림들이(무슬림 금요집회 후 자주 일어나는 분노 행위) 이집트 기자(Giza) 지구 밤하(Bamha) 마을에서 기독교인 점포와 가옥 27개를 불태웠다. 이집트에서 기독교인 박해, 살인 방화 사건은 무수한데, 그 각본들의 공통점은
① 기독교인들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② 금요기도회(비무슬림 학살 선동이 매번 이루어지는 곳)에서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인두세를 지불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보호받는 소수민족이 될 수 없다는 전단지가 돌려지면, 살상과 파괴를 저지르기 위해 모스크에서 몰려 나간다.
③ 기독교인 집단 학살에 대한 뉴스는 별로 다뤄지지 않으며
④ 무슬림들은 "콥트교인들에게 아무런 편견도 없다. 무장한 무슬림들은 비주류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고, 그들은 이슬람을 대변하지 않으며 정신이 불안한 몇몇 개인들이 일으킨 사건일 뿐"이라고 변명을 한다.
이집트 민주화 혁명 이후에도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과 퇴진, 무슬림의 순진함 영화 논란과, 또한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하고 군부 정권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무슬림 형제단이 이를 갈고 있다. 더 고난이 커질 듯. 생각해보면 이들이야말로 고대 이집트의 문화를 그나마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편인 사람들이 극심한 박해와 차별을 받고 있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단 콥트교인만이 고대 이집트의 후손이고, 무슬림 아랍 이집트인은 고대 이집트인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비록 콥트교인 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슬림 이집트인들의 문화에서도 고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10] 콥트교회 성당에 무슬림 폭도들이 쳐들어와 총을 쏘고 돌을 던지고 난동을 피우는 것은 예사고 콥트교회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무슬림 해커들에 의해 해킹되지를 않나, 성당에 몰래 들어와서 불을 질러대고, 콥트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각종 린치, 살인과 성경 모독행위 등도 매우 빈번하다고 한다.
이들이 역사적인 차별 대우 경험과 더불어 이슬람에 말 그대로 이를 박박 가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이집트 무슬림, 콥트 기독교인 집들 불태워이집트 소수 기독교인들, 무슬림 압박에 두려움
이집트 살라피스트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을 분풀이삼아서 공격하고 집단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2007년 5월 11일 금요기도회 이집트 기자(Giza) 지구 밤하(Bamha) 마을에서 기독교인 점포와 가옥 27개소를 불태웠다.
무슬림들이라고 마냥 콥트교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으며, 2011년 민주화혁명 시기에는 무슬림형제단과 무바라크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함께했다. 극단주의자가 위협이 감지될 때 성당 주변에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인간방패를 자처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들조차도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는 점. 어느 정도냐면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이집트 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콥트 교황을 접전하고 크리스마스 성찬예배에 참석할 때 테러 방지를 위해 대성당 주변에 '''장갑차'''를 동원했다. 엘 시시는 민주적이고 이슬람에 유화적이었던 쉐누다3세 교황이 선종하자 교체된 타와드로스 2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여당이었던 무슬림형제단 학살을 자행했다. 군사독재에 대한 이슬람과 콥트교의 연대를 훼방하려는 공작으로 볼 수 있다.
2015년 2월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서 이집트군이 자신들의 리비아 거점을 공습한 보복으로 콥트 정교회 교인 21명을 리비아에서 집단으로 납치한 뒤 참수했다고 한다. 이들이 참수 핑계로 내세운다는 것이 '''콥트 정교회에게 무슬림들이 박해받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라서 사람들은 ISIL의 억지논리와 막장성에 한층 더 혀를 내둘렀다. 참고로 처형당한 교인들은 모두 콥트 정교회가 시성했다. 엘 시시 대통령도 애도기간 7일을 정하고 반드시 IS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집트는 징병제 국가이지만, 콥트 정교회 신자는 군복무가 면제된다.[11] 하지만 실질적으로 무슬림 코스프레를 하는 콥트 정교인의 수가 적지 않다 보니 갈 사람은 간다고.
현대에는 외방 선교에 힘을 쓴다. 다수의 악재로[12] 인해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인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었고 근래 백년 동안 중동 지역에 이슬람 극단주의의 난동으로 교단의 존망마저 위협받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무슬림 선교가 쉽지 않음을 가장 잘 알기도 하고.[13] 미국의 경우, 50만 명이 넘는 콥트교인이 살고 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전역에 텍사스, 캘리포니아 및 동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콥트 정교회 성당이 세워졌다. 또한 친구나 직장 동료를 통해서나 이집트인 신자와 결혼 등 이유로 이집트계 이민자가 아닌 신자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한다.
2016년 8월 30일 이집트 당국이 콥트교회 건물의 신축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지만 이집트 국내 절대다수파인 무슬림들에게서도, 상대적 소수파인 콥트교도들에게서도 불만을 사고 있다.#
2016년 11월 10일 이집트는 세계기독교박해순위(World Watch List, WWL) 64점(작년 대비 3점 상승)을 기록하며 22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콥트교회에 데한 박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엘 시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콥트교회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고 대책을 논의하지만 이집트의 공권력이 하도 부패하다 보니 효과가 없다.
얼마나 부패했냐면 이집트 인권단체들의 발표에 따르면 이슬람 광신자들과 무장단체들이 콥트교도들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이집트 공무원과 경찰, 군인들은 보호해 줄 생각도 안하고 처벌도 제대로 안 하는게 다반사라고 한다.[14]
2016년 12월 11일에는 총대주교좌 성당이자 타와드로스 2세 총대주교가 상주하는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6명 사망, 57명이 부상하였다. 엘 시시 대통령은 피해자를 위해 3일 간 애도할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적 테러는 잦아들 조짐이 안 보인다. 2017년에는 성지주일을 맞는 날에 동시 다발 테러가 터져 45명이 사망했다. 엘 시시 대통령은 애도를 표하며 이후 3개월 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용의자들을 무더기로 체포한다. 한편 이후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집트를 방문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세례성사의 상호 인정을 위해 합의하는 등 중대한 성과가 있었다.[15] 그러나 같은 해 5월 26일 민야 주로 향하던 버스에 괴한들이 총기를 발포해 28명이 사망했다. IS 이집트 지부는 후에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이집트에서 점점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 행위와 따돌림이 증가하자 이스라엘의 아랍인 기독교인들도 동요하고 있다. 원래는 유대인들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서 무슬림들과 협력하던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콥트교 성당이 불타는 모습이 뉴스에 '''자꾸''' 나오니까 무슬림들과 협력해서 이스라엘 정부와 투쟁하는게 과연 맞는 일인지 회의감을 느낀다고 한다. 과거와는 다르게 이스라엘 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아랍인 기독교인들도 늘고 있다고
4. 한국에서의 콥트 정교회
한국에 선교사제를 공식 파견하고 교회 공동체를 구성한 최초의 오리엔트 정교회이다. 한국에 콥트 정교회 공동체가 조직된 것은 2010년경인데, 직접적인 설립 이유는 울산과 부산을 비롯해 콥트교를 믿는 이집트인 노동자들이 조선소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조금씩 늘어났고 마침내 한 콥트교 신자의 노력으로 서울에 공소[16] 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신부님은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 소속으로, 보통 한국을 방문할 때 한달 정도 체류한다. 한국뿐 아니라 대만과 필리핀, 베트남, 홍콩, 스리랑카, 네팔 등 아시아 국가를 담당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를 순회하며 각국에 머물고 있는 콥트교회 신자들을 만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한다.
공소 명칭은 '성모 마리아 성당'이며 위치는 홍대입구역 5번 출구 앞 주택가에 있다. 출구를 나와 옛 용산선 부지를 가로질러 처음 나오는 4층짜리 건물[17] 에 입주, 그곳의 3층 가정집을 개조한 거의 경당 수준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 이게 콥트교구나!' 하는 생각이 팍 든다. 좁은 주택건물이지만 성찬예배에 필요한 제대부터 각종 이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제법 그럴듯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성소로 들어가는 아치와 휘장 등은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해 규격을 지켜 설치했다. 공간이 좁아서 신자들은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아서 성찬예배를 드린다. 참고로 신부님은 영어를 잘하는 편이기 때문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한국인 신자도 몇 명 있는데, 콥트 정교회에 관심을 가져 신자가 되거나 이집트인과 결혼하면서 신자가 된 경우이다.
5. 여담
재밌는 사실은 2012년 새로이 착좌한 콥트 교회의 총대주교 이름이 '타와드로스 2세', 즉 그리스식으로 명명하면 '테오도로스 2세'인데, 현재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이름 역시 '테오도로스 2세'이다. 각기 역사적 이유로 갈라져 동일하게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두 교회 수장이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미 착좌해 있던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도 타와드로스 2세에게 보내는 축전에 '이름이 같은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잘해보자'는 식으로 축전을 보내기까지 했다.
[1] 아랍권과 가까운 위치라서 동양적인 느낌이 강하다.[2] 동로마 제국의 아시아-아프리카 속주는 칼케돈 신경을 거부하고 로마 교회와 갈라섰다. 단성론파 교회라고도 하지만, 본인들은 이를 멸칭으로 여겨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의 본성이 신성과 인성을 겸비했다는 합성론을 믿지, 신성만 밀어 붙이지는 않는다.[3] 대도시권인 알렉산드리아나 카이로에 집중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 상이집트(즉 나일강 상류)에도 의외로 많은 비율을 차지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공권력이 매우 약해 인구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외부에서 잘 모르고, 더더욱 안습인 것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한 박해도 심하다고 한다.[4]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정교회 국가들이 그러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5] 낮에 먹는 것을 기피한다는 점에서 이슬람의 라마단과 유사하다. 물론 딱딱한 것은 아니라, 마찬가지로 예외사항이 존재한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까지 금식기간과 조항을 지키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 경우는 본인의 양심에 맡긴다.[6] 사실 교회력 월별 명칭을 고대 시절과 똑같은 것을 사용하는 등 콥트 정교회에는 고대 이집트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7] 그나마 다행인 건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는 고대 파라오 시대의 언어나 콥트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다.[8] 류경호텔을 인수하고, 북한에 휴대전화 통신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9] 경찰은 피해자 가족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10일 내로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 지역 무슬림들과의 갈등을 피하려면 이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10] 이집트의 이슬람 문화에도 파라오 시대 문화가 끼친 영향이 알게 모르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모스크의 미나렛이 오벨리스크에서 영향을 받았다든가 결혼이나 장례 풍습에서 고대의 문화적 요소가 상당수 남아있다든가 정상적인 콥트교도들 사이에서도 '우리만이 파라오의 후손이다!' 같은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제재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사실 콥트교도들 역시 파라오 시대 이집트인들의 피만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실질적으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의식하는 이유가 더 크다. 이들은 아예 고대 이집트 고유 문화라고 하면 이를 갈고 피라미드조차 박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답이 없는 부류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가뜩이나 힘없는 콥트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하는 식으로 운운했다가 '''진짜로 극단주의자들한테 죽을 수도 있다.'''[11] 옛날에는 콥트 정교회인도 군 복무가 가능했다. 쉐누다 3세 교황은 공화국 수립 이전인 1940년대 후반에 군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12] 기독교인의 상대적인 저출산율, 무슬림들의 직, 간접적 차별 등. 샤리아로 인해 콥트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은 가능하지만, 반대는 불법이다. 빠질 구멍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럽게 힘들다. 게다가 근대 이후로는 전세계로 향한 이민으로 인해 심각한 인구 유출이 일어나고 있다.[13] 터키와 튀니지를 제외한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는 배교를 처벌하는 조항이 아예 법조화되어 있다. 게다가 법을 뚫고도 이슬람이 완전하다고 믿는 대다수 무슬림들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렵기도 하고, 지구상 어느 문화권보다 비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을 가혹하게 집단괴롭힘을 저지르고 박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삼중고를 뚫고 이슬람에서 개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지만, 대부분 개종한 사실을 숨기거나 이슬람권 국가가 아닌 나라로 떠나서 산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콥트 정교회인들 중에서 이런 부류 사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오리엔트 정교회는 무슬림이 그나마 다가가기 쉬운 기독교 종파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괜히 이집트 인구의 30%가 콥트 정교회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다른 나라에서 무슬림 이집트인이 고향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나가다가 신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출신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모스크에서 같은 이집트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콥트교인과는 종교만 빼면 문화가 완벽하게 동일하니까.[14] 이집트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친족 관계가 더 중시되는 사회이다. 잘못을 해도 여럿이 모여서 우기고 발뺌하면 끝이다. 경찰과 군대에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경찰 앞에서 피해를 호소해봤자, '''뇌물 없이는''' 경찰이 얼마나 성의있게 나올지는 미지수이다.[15] 이전에는 오리엔트 정교회가 정교회의 세례성사만 유효한 성사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16]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예배용 시설[17] 주소는 마포구 양화로18안길 40(동교동 17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