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모라비아 왕국

 




'''대 모라비아'''
'''Velká Mora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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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토플루크 1세 때의 영토
존속기간
800년대 초 ~ 907년
위치
중동부 유럽
수도
불명[1]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공작(족장)
주요 군주
스바토플루크 1세(870~894)
언어
서 슬라브어 계통의 언어(모라비아어로 비정)
종교
슬라브 종교정교회, 가톨릭
주요사건
907년경 헝가리에 멸망
성립 이전
사모 왕국, 슬라브 제 부족 국가
멸망 이후
보헤미아 공국, 헝가리 대공국
1. 개요
2. 역사
3. 왕사

언어별 명칭
고대 교회 슬라브어
Moravьska oblastь / Morava
라틴어
Regnum Marahensium
/ Terra Marauorum
/ Maraha / Marawa
중세 그리스어
Μεγάλη Μοραβία
''(Megálī Moravía)''
체코어
Velká Morava
슬로바키아어
Veľká Morava
헝가리어
Nagymorávia
영어
Great Mor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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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 체코의 모라비아,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지역 일대를 지배했던 왕국. 서슬라브 인들을 사실상 최초로 규합한 왕국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중동부 유럽을 서유럽 가톨릭 체계에 편입시킨 왕국이기도 하다. 역사책에서 '모라비아'라고 나오면 이 왕국이라 보면 된다.
영토는 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북쪽, 아바리아의 서쪽, 프랑크 왕국의 동쪽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니트라 지역이다.

2. 역사


9세기 이전에는 흔한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으나, '''모이미르 1세''' 이후 강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프랑크 왕국의 세력 팽창에 맞물려 국경선이 맞닿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크의 위협 속에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해나가며 보헤미아, 슐레지아, 니트라 일대를 장악해 슬라브 족 최초의 거대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스스로 공작을 칭했다.
그러나 대 모라비아는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에 비해 약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당시 대 모라비아의 대공이었던 '''라스티슬라프'''는 동로마 제국과 접촉해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에서는 모라비아에 선교사로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를 보내주었다. 키릴 형제는 슬라브어로 기독교를 전도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안된 문자가 바로 글라골 문자였다.
하지만 라스티슬라프가 동프랑크의 지지를 등에 업은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살해당한 후 동로마에서 온 선교사들(키릴 형제의 제자들)은 탄압당했다. 결국 선교사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지로 흩어졌는데, 이 중 불가리아로 간 선교사들이 당시 불가리아의 군주였던 보리스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슬라브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위에서 언급된 글라골 문자를 개조 및 변형하여 키릴 문자를 만든다.
독일왕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군을 이끌고 대 모라비아 왕국을 침공했고, 이에 보헤미아 인들과 동맹을 맺은 스바토플루크 1세의 군대와 충돌하였다. 이 전쟁에서 스바토플루크 1세는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로만과 판노니아 변경백 빌헬름 2세 및 엔겔샤크 1세에게 크게 패배하며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이후 교황 요한 8세의 중재로, 대 모라비아가 동프랑크에게 매년 일정한 연공을 바치며 평화를 맺게 된다. 이를 포르히하임의 평화라고 한다. 이로서 프랑크 왕국의 위협이 덜 해진 틈을 타 스바토플루크 1세는 대규모 확장정책을 펼친다. 폴란드의 비스와 일대를 시작으로 소폴란드와 슐레지아 일대를 정복했으며, 남으로는 현재 헝가리의 니트라 일대를 점령하며 힘을 키웠다.
독일왕 루트비히 2세 사후 비만왕 카를 3세가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이후, 빌헬미너 전쟁이 발발했다. 판노니아는 대 모라비아와의 접경지대로 빌헬름 1세에 의해 개척되었고, 이후 그는 변경백 작위를 하사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빌헬미너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판노니아 변경백령은 아들인 빌헬름 2세와 엔겔샤크 1세에게 상속되었고, 이 둘은 죽을 때까지 판노니아 변경백으로 대 모라비아 전선의 수비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사후 동프랑크 왕국에서 아리보라는 새로운 변경백을 임명하게 되었고, 이에 엔겔샤크 1세의 아들인 엔겔샤크 2세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리보는 지역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데다가 카린티아 공작 아르눌프[2]까지 끌어들인 엔겔샤크 2세에게 크게 밀렸고, 결국 카를 3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결정적으로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판노니아 일대로 진격했고, 판노니아 변경백 시절 자신과 마찰을 벌였던 엔겔샤크 2세의 둘째 아들(이름은 불명)을 잡아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성과를 얻는다. 게다가 판노니아 및 빈 일대에 마자르인들 또한 함께 쳐들어오게 되는데,[3] 결국 이 결과, 판노니아 동부 일대가 궤멸적으로 파괴되었다. 결국 카를 3세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점유지 일부를 넘겨주고, 그를 봉신으로 받아들이면서 화친을 꾀했다. 결국 이 결과로 동프랑크 일대의 카롤루스 왕조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되었고, 대 모라비아가 전성기에 있음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는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대 모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후 아르눌프 또한 아리보와 평화협정을 맺고 대 모라비아와 전쟁을 벌이지만, 아르눌프가 대 모라비아를 공격하던 중에 스바토플루크 1세가 불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 전쟁도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의 치세 이후 대 모라비아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들 '''모이미르 2세'''가 왕위를 이어받은 뒤, 예속된 부족들이 대 모라비아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 보헤미아 공작은 아예 아르눌프의 수하로 들어가버릴 정도로 전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또한, 스바토플루크 1세의 둘째 아들인 '''스바토플루크 2세''' 또한 형인 모이미르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이 내전 끝에 찾아온 바이에른의 공격으로 인해 대 모라비아는 크게 패배하게 되었고,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은 대 모라비아는 이어서 찾아온 마자르의 대규모 침입에 의해 어떻게 멸망했다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현재 대 모라비아의 몰락을 907년 전후로 보고 있으며, 이후 기록에서 사라져버린다. 어느 정도냐면 907년에 벌어진 동 프랑크와 마자르가 브라티슬라바에서 벌인 전투의 기록에서 모이미르 2세나 그의 후계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을 정도.

3. 왕사


이름
재위
왕조
비고
모이미르 1세
820? ~ 846
모이미르

라스티슬라프
846 ~ 870
모이미르

스바토플루크 1세
870 ~ 894
모이미르
[4]
슬라보미르
871
모이미르
[5]
모이미르 2세
894 ~ 901?
모이미르
[6]
[1] 체코의 미쿨치체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2] 훗날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 동 프랑크의 왕이 된다. 유아왕 루트비히 4세의 아버지.[3] 이를 기록한 잘츠부르크 행장에서는 스바토플루크 1세나 아르눌프가 용병으로 고용해서 쳐들어왔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4] 이전에는 공작을 칭했지만 스바토플루크 1세 때 부터 칭왕을 하게 된다.[5] 스바토플루크 1세가 포로로 잡혔을 때, 스바토플루크 1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모라비아 인들이 스바토플루크 1세의 전사를 가정하고 추대한 인물로 스바토플루크 1세의 복귀 이후 쫓겨난다.[6] 901년 이후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며, 후임자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모이미르 2세 혹은 그의 후계자가 헝가리와의 전쟁 끝에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