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왕릉
脫解王陵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 국왕 탈해 이사금 석탈해의 능이다. 사적 제174호.
2. 상세
탈해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경주 시가지 북동쪽의 동천동,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다. 높이 4.4m, 지름 15.7m의 상당히 큰 봉분으로 된 원형봉토분이다.
바로 옆에는 조선 시대에 탈해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 숭신전이 있는데, 석탈해는 석씨(昔) 왕가의 시조로서 조선시대에 여러 신라 왕들 중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대우와 관리를 받은 것이다. 이 숭신전을 오릉에 있는 박씨의 사당 숭덕전과 대릉원 남쪽의 김씨의 사당 숭혜전과 함께 경주 3전이라고 한다.#
석탈해의 유해는 삼국사기에서는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 탈해왕조에 의하면 본래 소천구(䟽川丘)라는 곳에 장사지냈는데 신라 중기, 탈해의 계시를 받은 문무왕이 탈해왕릉을 열어서 유골을 수습해, 유골을 담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고 제사지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현재 존재하는 탈해왕릉이 진짜 석탈해의 왕릉이라고 비정한 것은 신라 때부터 쭉 내려온 게 아니라 신라 이후 수백년이 지난 조선시대에 문중이 비정한 것으로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었다.[1] 분명히 석탈해는 신라 초기의 왕인데 탈해왕릉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여서 여기가 진짜로 탈해왕릉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수준..[2] 이지만 조선시대 비정 이래 수백년간 제사를 해온 석씨 문중과도 얽혀있는 등 어른의 사정으로 지금도 탈해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양식상의 모순에 대해 신라 후기에 오래된 무덤이 북천의 범람으로 훼손된 것을[3] 수리하면서 그 때 신라 후기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1] 조선 후기 정부에서 예우 차원으로 옛 신라 왕실 가문들에게 제향을 올릴 왕들의 능묘가 있으면 조상님들 모시는데 보태 쓰라고 토지를 하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경주 지역에 "~왕릉"이라고 불리는 고분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중들도 나름대로 삼국사기 등 남아있는 옛 기록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무열왕릉 등 일부 정보가 확실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산 동쪽이다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그 쪽에 가서 보이는 왕릉 같은 큰 무덤이 있으면 때려맞추는 정도였다. 그나마 왕릉의 위치가 어느 산 동쪽 북쪽 이 정도라도 쓰여진 건 법흥왕 이후 왕들이지 그 이전 초기 왕들은 그 정도 힌트도 없다.[2] 고분의 양식을 봐선 신라 후기 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3] 마찬가지로 동천동에 있는 헌덕왕릉도 북천의 범람으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