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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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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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경주역사유적지구[1]
영어
Gyeongju Historic Areas
프랑스어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2], (iii)[3]
지정번호
976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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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陵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7-1에 있는 신라왕릉 5기. 사적 제172호.
입장료는 성인 1천 원.

2. 상세


신라 초대 국왕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 2대 국왕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 다섯 명의 능이라고 전한다. 네 왕들의 공통점은 모두 박씨라는 것. 가운데 하나를 두고 나머지 네 무덤이 한 쪽 면에 자리하는 식으로 되어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이 다섯 왕릉이 전부 박혁거세의 능이라는 좀 다른 설화적 기록이 있는데, 박혁거세가 하늘로 승천한 후 시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지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모으려고 하니 큰 이 방해하므로 결국 다섯 부위를 따로 따로 봉분을 만들어 장사지내어 오릉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를 비롯해 설화적 기록이 많다보니 현실적으로 일어난 기록이라기보단 시신을 모으는 것을 방해한 뱀이 어떤 세력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사릉이라는 이명이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巳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무덤은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측되는데, 신라 건국 초기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니라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이라고 조사되었으므로, 오릉이 신라 초기의 왕릉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4] 돌무지덧널무덤, 즉 적석목곽묘로 추정되는 이유는 대형봉토분을 갖는 적석목곽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목곽이 썩게되면 붕괴되면서 봉분의 정상부가 살짝 내려앉으면서 편평해지게 되는 현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봉분 자체적인 크고 작은 붕괴나 유실은 꼭 목곽이 썩는 것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추측에서 그칠 뿐이다.
물론 박씨 가문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 여길 발굴조사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무덤을 파헤쳐 열어본다는 것는 것은 세계적으로 터부이지만 특히 유교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이 어떤 정당한 이유이든간에, 가령 학술적인 이유라도 후손들이 결사반대할 일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릉급 신라 고분들은 누가 묻혔는지 명확하지 않았던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지, 특정 왕릉으로 비정된 곳을 발굴한 사례는 거의 없다.[5] 대한민국박씨는 본관을 막론하고 모두가 박혁거세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 왕릉들에 비해[6], 시조가 묻힌 것으로 전해지는 성지와 같은 이곳도 매우 중요시한다.
아무튼 무덤 양식이 고고학과 일치하지 않는 이런 모순을 해석하기 위해 눌지 마립간대의 "수즙역대원릉(修葺歷代園陵)"[7]의 기록으로 인해서 원래 있던 무덤을 눌지 마립간 당시 신라에 유행하던 적석목곽묘 스타일로 개축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있다.
오릉 경내에 알영부인계룡에 의해 탄생한 전설상의 장소인 알영정 우물과, 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 숭덕전, 조선시대에 세운 왕릉비가 있으며, 능원 서남쪽 소나무숲에는 숭덕전 남쪽에 있던 담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재를 옮겨 놓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박혁거세 탄생설화의 배경인 나정이 있으며, 나정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신라 신궁 역시 박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왕들은 즉위하면 1년 안에 신궁에 크게 제사를 지내는 관례가 있었다.
이 오릉과 후대의 모든 박씨 왕의 왕릉은 거의 천 년 뒤에 즉위한 신덕왕 등이 묻힌 배동 삼릉, 경애왕릉 등을 포함해 전부 경주 시가지 서남쪽, 남산 서쪽에 줄지어 있어서 이 지역이 서라벌 내에서도 박씨 세력과 특히 밀착된 지역이 아닐까 추측된다.
왕릉 외에 지금 남은 건물들은 조선시대 초반인 1429년 혹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은 것들이다. 또한 매년 춘분에 신라 역대 박씨왕을 기리는 숭덕전 춘분대제가 열리는데, 박씨는 본관에 상관없이 모두 박혁거세 계열에 근간을 두고 있으므로 범박씨가 모두 참여한다. 실제 고령 박씨박근혜 前 대통령도 대통령 당선 전에는 여기에 매년 참석했을 정도.
오릉 주위로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었는데, 별로 넓지도 않은데도 능역에 고라니가 산다.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이근직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2012년.[5] 그 외에 신덕왕릉처럼 도굴 피해를 입은 뒤 수습하는 과정에서 내부 구조가 드러나는 경우는 있었다.[6] 이곳 외에 후손들이 중요시하는 신라왕릉으로는 상당수 김씨의 시조격인 경순왕가 묻힌 경순왕릉이 있다.[7] 역대 왕들의 무덤을 수리하고 보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