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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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0호'''
'''경주 무열왕릉'''
慶州 武烈王陵
Royal tomb of King Mu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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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
'''분류'''
유적건조물/무덤
'''면적'''
14\,169㎡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신라
'''위치'''


1. 개요
2. 상세
3.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3.1. 바깥고리
3.2. 국보 제25호
5.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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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에 있는 신라의 제29대 태종 무열왕왕릉이다. 서악동 고분군의 하나이다. 사적 제20호.

2. 상세


밑 둘레 112 m, 높이 약 8.5 m로 경주 고분들 중 비교적 큰 편이지만 서악동 고분군을 통틀어 보면 무열왕릉 뒤편에 훨씬 더 큰 고분군이 있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그 고분군에 관해서는 아래 문단 참조.
신라의 왕릉들 중 아무런 이설 없이 확실하게 특정 왕의 능이라고 제대로 밝혀진 몇 안 되는 능이다. 신라왕릉의 묘제를 연구했던 이근직 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2011년 작고)는 아예 '''경주의 왕릉 가운데 그 비정이 들어맞는 것은 7기밖에 없다'''고 집어 말했는데, 그 중에 무열왕릉도 있다.[1] 무열왕릉 바로 앞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쓰인 능비가 있기 때문에 능의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인근에 둘째 아들 김인문과 후손 김양의 무덤이 있으며 이는 무열왕릉 담벼락 바깥쪽이라 입장권을 사지 않아도 관람할 수 있다. 무열왕릉 뒤편(서쪽)에는 서악동 고분군이 나란히 위치한다.

3.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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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25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4-1번지 / (도로명)경주시 대경로 4859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시설'''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무열왕릉비의 몸통은 없어졌고 을 새긴 비의 머리와 거북 모양 받침만 남았다. 비의 몸통은 '''파편'''만 일부 남았는데 그나마도 내용 판독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안습.
비석의 몸통이 없어졌지만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의 내용을 봐선 일연고려시대 당시 남은 비문의 내용을 읽고 작성한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시대까지는 약간 훼손되긴 했지만 하지만 비문 내용이 써있었을 비석의 몸통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사진 자료에는 이미 몸통이 없어진 상태였으니, 아마도 조선 중~후기에 깨져 파편화된걸로 추정하고 있다. 퇴계 이황때부터 이미 비석은 훼손된 걸로 추정되는데, 퇴계선생이 역사유적인 태종무열왕릉비를 선비들이 고작 벼루를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로 그 지역의 유생들을 꾸짖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석은 고품질의 석재면서 충분히 가공이 되어있기에 벼루로 쓰기 제격이었기 때문. #
비록 비석은 없어졌으나 다행히도 거북모양 비석 받침의 보존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거북은 머리를 높게 치들었고, 네 발은 짧지만 쭉 뻗어 있는 모양새인데 전체적으로 느낌이 힘차다. 거북의 머리는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눈, 코, 입, 귀가 선명하며, 목과 몸통이 만나는 부분에는 목주름 4줄까지 묘사했다. 거북의 등에는 육각형 등무늬 여러 겹을 새겼고, 등의 테두리에는 구름 모양 무늬를 둘렀다. 거북 등에 비석을 끼우는데 이 부분도 연꽃 무늬로 장식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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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몸통이 없어졌지만 다행히도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螭首) 전면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자가 남았기에 무열왕의 능비이고, 바로 뒤 능이 태종무열왕릉임이 확인되었다. 이수의 양쪽에 새긴 글은 둘째아들 김인문의 글씨라고 전한다.
무열왕릉비는 비록 몸통은 없어졌지만 6마리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이수나 받침대인 귀부는 정교한 조각으로서 잘 보존된 편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에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3.1. 바깥고리



3.2. 국보 제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4. 서악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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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 뒤편에 나란히 있는 대형 고분군.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나란히 있으며 크기도 무열왕릉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김용춘, 진지왕, 진흥왕 등 전대 무열왕의 직계 조상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열왕 이후로는 불교식 장례가 도입돼 장례가 간소화되면서 봉분이 작아지는 편이고, 더 낮은 곳에 아들 김인문묘가 위치하므로 높은 곳은 무열왕의 조상임이 자연스럽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묘제가 변했음과 왕릉의 입지가 평지에서 산지의 말단부 구릉으로 이동했음을 무열왕릉 입장권을 사야 관람할 수 있다. 진흥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도 직선거리 500여 미터 남짓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5. 교통


무열왕릉을 통과하는 경주시버스 노선은 총 4개 노선이다.
60번 - 70분
61번 - 70분
300-1번 - 30~70분
330번 - 120분
신경주역 → 무열왕릉 : 60번, 61번
경주터미널 → 무열왕릉 : 60번, 61번, 300-1번, 330번
경주역(시내) → 무열왕릉 : 60번, 61번, 300-1번, 330번
[1] 나머지는 선덕여왕릉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이다. 이들은 묘제나 기록상의 위치정황상 거의 확실하거나 무열왕릉의 왕릉비처럼 근거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