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image]
<colbgcolor=#11457E>'''본명'''
Tomáš Garrigue Masaryk
'''국적'''
체코슬로바키아
'''출생'''
1850년 3월 7일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1]
'''사망'''
1937년 9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라니[2]
'''재임 기간'''
1918년 11월 14일 ~ 1935년 12월 14일 (대통령)
'''학력'''
빈 대학교 (졸업)
'''배우자'''
샬롯 마사리크(Charlotte Garrigue Masaryk)
1. 개요
2. 일생
3. 평가
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

2. 일생


1850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오늘날 체코에 속하는)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의 접경 지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 어머니는 독일화된 모라비아인이었다. 이후 모라비아 중심부로 이사했다. 그의 이러한 배경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모두를 고향으로 인식하게 했고 훗날 그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통합을 지지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슬로바키아어의 방언을 모국어로 구사했으나 엄마에게 독일어체코어를 배웠고, 고전을 읽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했다. 또한 영어, 러시아어, 불어, 이탈리아어도 배워 문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89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9살 체코인 소녀를 죽인 혐의로 사형에 처하게 생긴 한 유대인을 변호한다. 당시 체코에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기에 피고가 소녀를 죽였다는 이유가 턱없이 허무맹랑함에도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모두가 그의 사형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사리크는 이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홀로 유대인 편에 선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혐의를 못 벗었고 형벌은 겨우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춰지는 데에 그쳤지만, 이 일로 마사리크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외교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마사리크는 체코인들에게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슬로바키아와 통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사리크는 독일군과 싸우는데 투입하겠다는 명목으로 러시아, 프랑스와 협상하여 당시 러시아에 투항하여 잡혀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병사들을 모아 1917년에 체코군단이라는 별도의 부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918년 미국으로 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호소했다. 당시 언론들은 그의 뉴욕 입성을 대서특필했으며 약 150,000명에 달하는 체코슬로바키아계 이민자들이 그를 환영하는 인파를 이뤘다.
1918년 10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카를 1세도 이를 수락했다. 이후 귀국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고 1918년 11월 14일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후 무려 17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다가 1935년 12월 14일에 물러나고 2년 뒤인 1937년에 사망했다.

3. 평가


오랜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마사리크에 의해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는 후에 나치에게 점령당하고 나치가 망하고 난 후엔 나라 자체는 되찾았으나 공산화되고 말았다. 공산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는 1990년까지 지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체코/역사 참조). 이 공산정권 시절 동안 마사리크는 폄하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서방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난 후 재조명 받기 시작하여 지금은 체코를 건국하고 체코 민족의 방향을 제시한 국부로 존경받고 있다.

4. 관련 문서


[1] 현재는 체코 지역[2] 현재는 체코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