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세

 



'''Karl I'''
'''이름'''
카를 프란츠 요제프 루트비히 후베르트 게오르크 오토 마리아
(Karl Franz Joseph Ludwig Hubert Georg Otto Maria)
'''출생'''
1887년 8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퍼센베우그 고트도르프 퍼센베우그 성
'''사망'''
1922년 4월 1일 (34세)
포르투갈 제1공화국 마데이라 제도
'''재위'''
오스트리아 제국황제,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왕
1916년 11월 21일 ~ 1918년 11월 16일[1]
'''배우자'''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 (1911년 결혼)
'''자녀'''
오토, 아델하이트, 로베르트, 펠릭스, 카를 루트비히, 루돌프, 샤를로테, 엘리자베트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오토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
'''형제'''
막시밀리안 오이겐
1. 개요
2. 제위 계승
3. 재위기간
4. 퇴위
5. 사망
6. 가족
7. 평가
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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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arl I. Franz Joseph Ludwig Hubert Georg Otto Maria von Habsburg-Lothringen (독일어)
IV. Károly 또는 Habsburg-Lotaringiai Károly Ferenc József Lajos Hubert György Mária (헝가리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가톨릭의 복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를 1세, 헝가리 왕국의 카로이 4세, 보헤미아 왕국의 카렐 3세,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이탈리아)왕국, 달마티아-일리리아 왕국의 카를 1세, 슬로베니아 왕국의 카를 4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카를로 1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카를 1세, 고리치아-그라디스카의 후백작 카를 1세, 모라비아의 변경백, 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의 공작 카를 5세, 부코비나, 잘츠부르크, 크라카우의 공작과 대공작 카를 1세, 크라인의 공작 카를 4세.

2. 제위 계승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 번째 남동생의 둘째 아들의 아들'''...로, 본래는 제위와 별로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불운이 기막히게도 겹치면서 그에게 황제의 자리가 돌아갔다.
먼저,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첫 번째 남동생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가 혁명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리고 1889년 1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1858~1889)가 권총 자살해, 자동적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 번째 남동생이자 카를 1세의 할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1833~1896)이 황제의 후계자가 되었다.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위장병으로 사망하자 대공의 장남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태자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그가 귀천상혼을 한 탓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이들은 계승권을 상실했고, 카를의 아버지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동생인 오토 대공(1865~1906)이 차순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 오토 대공이 41세로 요절하고, 1914년 6월 백부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테러로 암살당하면서 카를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태손으로 내정되었다. 이때 카를의 나이 27세였다.

3. 재위기간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6년 11월, 68년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한 종조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사망했다(86세). 제위에 오른 카를 1세는 오헝제국을 세계대전이라는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선 전시의 군대에서 만연해진 구타를 금지했고, 장교들의 결투도 금지했다.[2] 또 독가스 사용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을 억제하고, 동시에 소수민족들에게 동등한 주권을 부여해 제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와 독일 군부의 반대로 뜻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수파도 그의 개혁에 반발하여 제지를 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간다.
정치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카를 1세는 궁정 생활이라도 개선시키려고 노력했다. 배급을 받는 신민들과 고통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그는 흰 빵을 먹기를 거부하고[3],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전쟁터를 방문한 뒤에는 조기 종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하고 협상국을 상대로 '상호 비난이 없는 평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 대해 협상국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무엇보다 독일 제국이 훼방을 놓았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당대 유럽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600년 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 등 수많은 작위를 역임하며 이미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고, 이것이 제국을 통합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런 사람이 뒷배로 평화협상을 시도한다는 것이 전 유럽인들에게 실망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당시 나라꼴의 특성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돌아온다고 할지언정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카를 황제가 이렇게 무시당한 것에 대해서는 본래는 계승될 리가 없던 먼 방계 황족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비극적인 가정사 때문에 제위를 이어받은지라 정통성이 부족했던 것도 큰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퇴위


전세가 완전히 기울고, 1918년 11월 13일에 헝가리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민중들은 밤낮으로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요구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의회와 내각도 카를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카를 1세는 1918년 11월 16일 즉위 2주년을 닷새 남겨두고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였다. 같은 날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으며, 1919년 오스트리아 의회는 합스부르크가의 남계 구성원이 왕족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되지 않는 한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퇴위 후 스위스에서 거주했는데, 헝가리에서 루마니아 왕국의 군대와 호르티 미클로시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는 일이 발생하자 자신이 헝가리에 가면 충신인 호르티 미클로시가 당연히 왕좌로 모실 것이라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호르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실권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될 뿐인데다, 사실상 전범 취급 받던 카를 1세를 받아들이면 대외적으로도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 호르티는 카를 1세에게 얌전히 스위스에서 거주할 것을 권고했지만, 카를 1세의 측근들과 헝가리의 근왕파들은 카를 1세가 헝가리에 입국하면 진정한 왕을 위해 헝가리 국민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부추겼다. 이에 카를 1세는 1921년 헝가리에 입국하여 2차례에 걸쳐 왕위를 얻어내려 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추방되었으며, 헝가리 의회는 카를을 정식으로 폐위하였다.[4]

5. 사망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922년 4월 1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한편, 카를 1세가 깊은 신앙심과 제1차 세계 대전을 조기 종결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영웅적 덕행으로 인정받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4년 10월 3일에 그를 '복자'로 시복했다. 축일은 10월 21일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집전한 이 시복식에는 당시 생존해 있었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도 참석해 아버지의 시복을 기념했다. #
만약 시성까지 된다면 성 이슈트반의 왕관의 처음과 마지막 주인이 시성된 사례로 남게 된다.

6.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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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지타(1892~1989)와 결혼해 5남 3녀를 두었다. 지타는 프랑스 왕 샤를 10세의 고손녀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단절과 동맹의 역전 이후 오랫동안 끊어졌던 합스부르크-부르봉 결혼동맹이 마지막 순간 부활했던 것이다. 또 분열되던 신성 로마 제국을 규합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의 후손이기도 하다. 지타는 1차 대전 후 합스부르크 황실이 퇴위한 후에도 오스트리아의 황후로 살겠다며 스페인 왕실의 지원 등을 거부한 채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남편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검은색 상복을 입고 지냈다.
공화국으로 바뀐 오스트리아 정부의 규제로 1970년대까지 귀국조차 못하다가 생의 막바지인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규제가 풀려 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1989년 4월, 97번째 생일을 한달 남겨두고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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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1912 ~ '''2011''')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다. 카를 1세가 사망한 뒤에 오토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으로서 대공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물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귀족제를 완전히 폐지하였르므로 이것은 그들 가족들 내에서 붙여지는 사적인 작위에 불과하다. 2006년 이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토의 아들인 카를이다.
그의 차남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동생인 루돌프 대공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자신의 아버지,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추정 상속자임을 나타내던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위를 물려받았는데[5] 이후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은 루돌프 대공의 장남, 로렌츠 대공이 대공위를 물려받으면서 당주가 되었고 그가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의 누나인 아스트리드 공주와 결혼하였고 장인이던 알베르 2세에게 프린스 작위를 받으면서 로렌츠 대공과 그의 후손들은 현재 벨기에의 방계 왕족으로 벨기에에 거주 중이다.
생몰년에서 보다시피, 34세에 요절한 본인과 대조적으로 아내와 아들은 모두 90세를 넘기며 장수했다.

7. 평가


성실하고 머리가 좋은 인물로, 능력과 자질에서는 합스부르크가 역사상 마리아 테레지아 이래 가장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된다. 본인의 후원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영향을 받아 모든 제국 내 민족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오스트리아를 민주적인 연방국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 중에도 슬라보니아-크로아티아-달마티아 왕국까지 끌어들여 오스트리아-헝가리-슬라브 삼중제국을 만들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시대를 잘 타고났더라면 비극으로 얼룩진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를 청산하고 제국을 중흥시킨 명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즉위 당시 제국의 해체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기에, 군주 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말년에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려 한 것과 복위 시도가 실패한 후 그를 지지하던 헝가리 근왕파들을 내팽개친 일은 오점으로 남아 있다.[6]

8. 대중매체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동맹국이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유지되고 카를 1세 역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도자로 등장한다.[7] 1937년 7차 대타협을 준비 중이며 대타협을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따라 여러 속국을 거느린 현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고 군대로 소수민족들을 억누르는 독재자가 될 수도 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만들 수도 있다.

[1] 헝가리 왕위는 11월 13일까지 재위[2] 결투 금지는 이미 프란츠 요제프 시대에 규정되어 있었는데, 잘 지켜지지 않았다.[3]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서양에서 흰 빵은 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질 정도로 고급 식품이었다.[4] 한 가지 웃기는 사실은 호르티는 헝가리를 공화국으로 선포하거나 자신이 왕이 되지도 않은 채 화살십자당나치 독일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이전인 1944년까지 '''헝가리 왕국 섭정'''으로서 '''왕국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1918년 이후 24여년간 '''바다 없는 나라'''에서 '''해군 없는 제독'''이 '''국왕 없는 섭정'''이 되어 다스리는 기묘한 체제가 계속되었다. [5] 본래 1771년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서 분가한 방계 가문이었으나 이후 단절되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신의 추정상속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위와 해당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프란츠 대공에게 물려주면서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자에게 주어지는 작위가 되었다.[6] 하지만 당시 망국의 군주로 타국에 망명하던 카를이 실질적으로 헝가리 왕당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유럽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며 망명생활을 했고 호르티로 인해 헝가리에서 쫒겨난 이상 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과 힘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망 원인도 폐렴에 걸렸는데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7] 원래는 아들인 오토가 지도자로 등장했지만 패치로 수정되었다. 제국이 유지된 만큼 요절할 일이 없어서 50대까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