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역사
체코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국가의 기원은 고대 말기 동유럽에서 중앙유럽으로 이주해 온 슬라브족의 한 분파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 체코인들은 서기 5세기~6세기경에 체코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에는 켈트족들이나 게르만족들이 살았다. 슬라브족들이 체코 지역에 정착한 이후로 부족국가를 이루며 살다가, 아바르족이 체코 지역에까지 찝적거리기까지 하다가 서기 624년경에 최초의 나라다운 나라인 사모 왕국이 건국되었다. 사모는 프랑크 제국의 상인이었지만 아바르족의 침공에 대항해온 슬라브 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 영토도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대는 물론이고 독일과 폴란드 일부지역, 슬로베니아에 이르기까지 나름 광활한 국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모왕국은 어디까지나 사모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지탱해온 국가였기 때문에 사모가 죽은 지 오래치 않아 곧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사모왕국과 그 후예국가에 대한 기록이 위낙 소락하기 때문에[1] 이 당시의 정세를 알기 어려우나 이후로 소국들이 난립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다시 국가다운 국가가 나올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서기 9세기 무렵에 대 모라비아 왕국이 등장하며 체코 동부 일대와 폴란드 남부,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지배했으며. 전설적인 농부 프쉐미슬을 시조로 하는 프쉐미슬 왕조가 성립하여 9~14세기 체코를 지배했으며 바츨라프 1세 (921~929) 무렵에 완전히 기독교화되었다. 한편, 체코 서부 보헤미아에서도 보헤미아 왕국이 세워졌으며, 그 국력이 강성해서 갓 성립한 신성로마제국과 수없이 투닥거렸다.
체코의 역사는 곧 보헤미아의 역사이므로 보헤미아 왕국 항목과 함께 비교하여 보는 것이 좋다.
신성로마제국의 견제로 오타카르 1세 (1192~1230)에 이르러서야 왕국으로 승인 받았으며 이 무렵 체코왕은 신성로마제국 내에 가장 강력한 제후로 황제위를 두고 합스부르크의 루돌프와 다투었다. 그 결과 제국 내에 강력한 황제의 등장을 꺼린 독일 제후와 연합한 루돌프에게 패배, 오타카르 2세는 (1253~1278) 전사하였고 그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에게 넘어갔다.[2]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독일인들이 오늘날의 체코 땅에 정착했다.
14세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를 배출한 룩셈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 왕가의 혈통을 받은 헝가리가 지배권을 행사했다. 카를 4세 이후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16세기 희대의 영토 승계가 이루어지는데, 1526년 헝가리 왕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러요시 2세의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가만히 앉아서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 등을 확보한 것. 이 득템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은 단번에 크게 늘어났다. 이때부터 체코는 1918년 독립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합스부르크 치하에서 체코는 경제력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착취에만 여념이 없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반감이 컸다. 여기에 민족감정과 프로테스탄트 문제까지 겹쳐서 터진 것이 유명한 30년 전쟁의 도화선인 보헤미아 전쟁이다. 보헤미아의 봉기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독일이 초토화된 것과는 별개로, 이 전쟁에서 보헤미아는 패배하여 합스부르크의 더욱 강압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30년 전쟁 발발로 보헤미아인과 모라비아인 인구는 전쟁 전에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30년 전쟁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점은 감소한 보헤미아인 인구를 대체하던 독일인 이주와 독일화, 경제 침체를 이유를 들어 이 시기를 암흑시대로 간주한다. 나중에 1781년 요제프 2세에 의해 개신교를 관용하겠다는 선언이 나오긴 했으나[3] 반종교개혁 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도 체코에서 개신교 숫자는 가톨릭을 넘지 못한다. 물론 현재는 공산주의 시절 영향인지 무신론이 훨씬 많기는 하다.
그 후에도 체코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여타 지역보다 우월한 상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합스부르크에 가장 중요한 세금 획득지 구실을 톡톡히 했다.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에 중요했다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와 벨기에, 독일 서남부[4] 의 영토를 뜯기면서도 체코와 헝가리 등 가장 중요한 알짜배기들은 건사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아마 오스트리아 치하에 들어간 지 너무 오래 돼서 나폴레옹도 함부로 분해하기 어려웠던 모양.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체코에서도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는 데, 1815년 결성된 독일 연방 안에 체코 전역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 문제에서도 문제지역으로 거론되었다. '대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 체코까지 포함한 독일국가를 세우면 독일민족이 아닌 체코인까지 영토에 포함시킨다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한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지상과제'가 중부유럽에서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5]
아무튼 독일이 통일되면 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세한 독일인에게 영원히 종속될 것을 우려해 체코인 독립운동의 대부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초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지배구조를 존속시키고 체코인이 여기에 협력해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 대우받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제시했는데, 이는 1918년까지 약 70여년 간 체코인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우세한 이론이 되었다. 이는 1848년의 독립운동이 좌절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에 협력하는 것이 살아날 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또 오스트리아가 억지로 해체되면 오스트리아를 흡수한 독일과 다른 슬라브족을 삼키려 드는 러시아 사이에 낀 체코인이 좋은 꼴 보기 어렵다는 통찰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망은 '''오스트리아 제국 해체 이후 체코가 당한 수난을 생각하면 엄청난 통찰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팔라츠키의 제안은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무시되고, 오히려 1867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의 '파트너'가 됨으로써 체코인은 더 강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1881년 체코 지역 내의 행정기관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업무처리가 허락되고,[6] 1907년 보통선거권이 인정되는 등 부분적인 타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코인도 제국 내에서의 '파트너'로의 승격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7] 특히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USGA(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개념의 '''오스트리아-헝가리-슬라브 삼중제국'''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다면 진짜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심지어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었고, 동맹국의 패전으로 1918년 11월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당시 6만에 이르는 체코독립군중 러시아에 주둔하던 일부가 체코가 독립한 것을 듣고 귀국하려 하지만 당시 볼셰비키에 막혀 육로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를 통해 체코로 가기로 하고 이 과정에서 더이상 필요 없어진 이들의 무기들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주고 왔다.''' 체코는 이미 3.1운동의 소식을 알고 있었고 동병상련을 느낀 건지 당시 우수했던 체코 무기를 한국독립군에 줬고 이를 가지고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를 수행했다.
체코슬로바키아 항목 참조.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와 연계하여 의회주의를 발달시켜 점차 민족주의 파시즘으로 돌입한 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 연방국,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폴란드 제2공화국 등 주변국들과 차이를 보였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도 존속기간 내에 자국 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물론 나치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이 시절 프라하는 "동유럽의 파리" 소리를 들었다.[8]
1930년대가 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불황의 여파 속에서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게 영토할양 요구를 받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체코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수데텐란트에 다수의 독일인이 거주하니 이를 넘기라는 압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믿을 수 있는 건 영국, 프랑스 등의 우방국 뿐이었지만, 전쟁을 막기에 급급했던 영프에게 체코는 철저히 관심 밖이었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 독일은 유럽열강에게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공인받았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체코 전역을 합병, 슬로바키아를 괴뢰국화해버렸다(그 유명한 뮌헨 협정이다. 체코에서는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른다). 사족으로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은 에밀 하하이다.[9]
곧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코는 공업력의 착취를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서 가장 최후의 전투도 체코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체코는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통제에 들어갔다. 전쟁 막판에 타결된 얄타 회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이 거주하는 자국 동쪽 끄트머리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소련에 할양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략적 위치가 가진 중요성 때문에 연합국은 폴란드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유선거로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소련에 요구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처음에는 듣는 척하다가 결국 공산당의 쿠데타를 조종해 1948년 2월 공산정부를 수립시켰다. 이 사건은 그리스와 터키에서 진행된 공산당의 빨치산 게릴라, 국공내전의 격화와 더불어 초기 냉전을 형성한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된다.
1948년 공산당의 지배하로 들어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에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특히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엄격한 통제와 폭압을 견디다 못한 체코인들은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스탈린 스타일 공산주의에서의 해방을 요구했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보낸 군대에 의해 무차별 진압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의 좌파들은 소련에 대한 '환상'을 모두 버리게 된다.
프라하의 봄이 처절하게 진압당한 것과 벨벳 혁명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회복,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10] 체코는 공산주의 국가 시절을 유달리 억압적이었던 시절로 기억하는 편이다. 실제로 유튜브 등을 통해 1970~80년대 음악이나 영화, 방송등을 검색해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억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종교활동도 공산화 이전보다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당시에도 대부분의 가톨릭, 개신교 교단들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미사와 예배 참석도 허용되었다.[11] 그리고 '카르비나'사의 킬스위치라는 게임이 공산정권과 연관되었다는 괴담 역시 거짓으로 판명난 상태이다. 공산정권 시절 체코슬로바키아는 슈퍼마켓이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돈 주고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서독에 비교해서 떨어진다 해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동구권에서 동독 과 함께 경제력이 최상위였던 나라다.[12]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 주권론)에 의해 다시 통제당한 체코슬로바키아는 결국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실질 지배하에 있다가, 고르바초프의 노선 전환으로 소련이 개혁에 착수하자 비로소 '해방'되었다.
198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장경제 체제를 공식 도입하고, 1989년에는 공산당 1당 독재가 종식되고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양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기로 결의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공산정권을 몰아낸 이후[13] 1993년 1월 1일부터 체코는 어느 한 나라에 귀속된 역사가 아닌, 진정한 체코인만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199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2004년에는 다른 중부유럽, 발트 3국, 발칸 반도 국가들과 함께 유럽연합(EU)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여타 동유럽보다 높은 경제력 때문에 유럽 난민 사태에서 막대한 수의 이라크, 시리아 난민들을 떠맡아야 할 판이 되었다. 당연히 체코는 아일랜드, 스위스, 슬로바키아, 기타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결사 반대한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제국주의 시절에 중동에 저지른 짓(종교, 민족 분열, 일방적인 식민지 국경선 획정 등)이 있으니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체코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중동에서 깽판을 치긴 커녕 오스트리아나 독일 등 강대국들한테 시달리던 입장이라 자국이 난민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에 상당히 억울해한다.
바츨라프 광장에 모인 약 25만 명의 시위자들이 200만 유로(약 26억 원)의 EU 보조금을 불법적으로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안드레이 바비스 총리와 신임 법무장관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최대 규모다.#
1. 개요
국가의 기원은 고대 말기 동유럽에서 중앙유럽으로 이주해 온 슬라브족의 한 분파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 체코인들은 서기 5세기~6세기경에 체코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에는 켈트족들이나 게르만족들이 살았다. 슬라브족들이 체코 지역에 정착한 이후로 부족국가를 이루며 살다가, 아바르족이 체코 지역에까지 찝적거리기까지 하다가 서기 624년경에 최초의 나라다운 나라인 사모 왕국이 건국되었다. 사모는 프랑크 제국의 상인이었지만 아바르족의 침공에 대항해온 슬라브 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 영토도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대는 물론이고 독일과 폴란드 일부지역, 슬로베니아에 이르기까지 나름 광활한 국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모왕국은 어디까지나 사모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지탱해온 국가였기 때문에 사모가 죽은 지 오래치 않아 곧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사모왕국과 그 후예국가에 대한 기록이 위낙 소락하기 때문에[1] 이 당시의 정세를 알기 어려우나 이후로 소국들이 난립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다시 국가다운 국가가 나올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서기 9세기 무렵에 대 모라비아 왕국이 등장하며 체코 동부 일대와 폴란드 남부,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지배했으며. 전설적인 농부 프쉐미슬을 시조로 하는 프쉐미슬 왕조가 성립하여 9~14세기 체코를 지배했으며 바츨라프 1세 (921~929) 무렵에 완전히 기독교화되었다. 한편, 체코 서부 보헤미아에서도 보헤미아 왕국이 세워졌으며, 그 국력이 강성해서 갓 성립한 신성로마제국과 수없이 투닥거렸다.
체코의 역사는 곧 보헤미아의 역사이므로 보헤미아 왕국 항목과 함께 비교하여 보는 것이 좋다.
2. 중세
신성로마제국의 견제로 오타카르 1세 (1192~1230)에 이르러서야 왕국으로 승인 받았으며 이 무렵 체코왕은 신성로마제국 내에 가장 강력한 제후로 황제위를 두고 합스부르크의 루돌프와 다투었다. 그 결과 제국 내에 강력한 황제의 등장을 꺼린 독일 제후와 연합한 루돌프에게 패배, 오타카르 2세는 (1253~1278) 전사하였고 그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에게 넘어갔다.[2]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독일인들이 오늘날의 체코 땅에 정착했다.
14세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를 배출한 룩셈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 왕가의 혈통을 받은 헝가리가 지배권을 행사했다. 카를 4세 이후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3. 합스부르크 치하
16세기 희대의 영토 승계가 이루어지는데, 1526년 헝가리 왕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러요시 2세의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가만히 앉아서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 등을 확보한 것. 이 득템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은 단번에 크게 늘어났다. 이때부터 체코는 1918년 독립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합스부르크 치하에서 체코는 경제력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착취에만 여념이 없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반감이 컸다. 여기에 민족감정과 프로테스탄트 문제까지 겹쳐서 터진 것이 유명한 30년 전쟁의 도화선인 보헤미아 전쟁이다. 보헤미아의 봉기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독일이 초토화된 것과는 별개로, 이 전쟁에서 보헤미아는 패배하여 합스부르크의 더욱 강압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30년 전쟁 발발로 보헤미아인과 모라비아인 인구는 전쟁 전에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30년 전쟁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점은 감소한 보헤미아인 인구를 대체하던 독일인 이주와 독일화, 경제 침체를 이유를 들어 이 시기를 암흑시대로 간주한다. 나중에 1781년 요제프 2세에 의해 개신교를 관용하겠다는 선언이 나오긴 했으나[3] 반종교개혁 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도 체코에서 개신교 숫자는 가톨릭을 넘지 못한다. 물론 현재는 공산주의 시절 영향인지 무신론이 훨씬 많기는 하다.
그 후에도 체코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여타 지역보다 우월한 상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합스부르크에 가장 중요한 세금 획득지 구실을 톡톡히 했다.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에 중요했다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와 벨기에, 독일 서남부[4] 의 영토를 뜯기면서도 체코와 헝가리 등 가장 중요한 알짜배기들은 건사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아마 오스트리아 치하에 들어간 지 너무 오래 돼서 나폴레옹도 함부로 분해하기 어려웠던 모양.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체코에서도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는 데, 1815년 결성된 독일 연방 안에 체코 전역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 문제에서도 문제지역으로 거론되었다. '대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 체코까지 포함한 독일국가를 세우면 독일민족이 아닌 체코인까지 영토에 포함시킨다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한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지상과제'가 중부유럽에서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5]
아무튼 독일이 통일되면 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세한 독일인에게 영원히 종속될 것을 우려해 체코인 독립운동의 대부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초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지배구조를 존속시키고 체코인이 여기에 협력해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 대우받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제시했는데, 이는 1918년까지 약 70여년 간 체코인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우세한 이론이 되었다. 이는 1848년의 독립운동이 좌절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에 협력하는 것이 살아날 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또 오스트리아가 억지로 해체되면 오스트리아를 흡수한 독일과 다른 슬라브족을 삼키려 드는 러시아 사이에 낀 체코인이 좋은 꼴 보기 어렵다는 통찰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망은 '''오스트리아 제국 해체 이후 체코가 당한 수난을 생각하면 엄청난 통찰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팔라츠키의 제안은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무시되고, 오히려 1867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의 '파트너'가 됨으로써 체코인은 더 강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1881년 체코 지역 내의 행정기관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업무처리가 허락되고,[6] 1907년 보통선거권이 인정되는 등 부분적인 타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코인도 제국 내에서의 '파트너'로의 승격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7] 특히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USGA(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개념의 '''오스트리아-헝가리-슬라브 삼중제국'''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다면 진짜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심지어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었고, 동맹국의 패전으로 1918년 11월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당시 6만에 이르는 체코독립군중 러시아에 주둔하던 일부가 체코가 독립한 것을 듣고 귀국하려 하지만 당시 볼셰비키에 막혀 육로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를 통해 체코로 가기로 하고 이 과정에서 더이상 필요 없어진 이들의 무기들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주고 왔다.''' 체코는 이미 3.1운동의 소식을 알고 있었고 동병상련을 느낀 건지 당시 우수했던 체코 무기를 한국독립군에 줬고 이를 가지고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를 수행했다.
4. 체코슬로바키아 (1918~1992)
체코슬로바키아 항목 참조.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와 연계하여 의회주의를 발달시켜 점차 민족주의 파시즘으로 돌입한 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 연방국,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폴란드 제2공화국 등 주변국들과 차이를 보였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도 존속기간 내에 자국 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물론 나치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이 시절 프라하는 "동유럽의 파리" 소리를 들었다.[8]
1930년대가 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불황의 여파 속에서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게 영토할양 요구를 받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체코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수데텐란트에 다수의 독일인이 거주하니 이를 넘기라는 압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믿을 수 있는 건 영국, 프랑스 등의 우방국 뿐이었지만, 전쟁을 막기에 급급했던 영프에게 체코는 철저히 관심 밖이었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 독일은 유럽열강에게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공인받았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체코 전역을 합병, 슬로바키아를 괴뢰국화해버렸다(그 유명한 뮌헨 협정이다. 체코에서는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른다). 사족으로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은 에밀 하하이다.[9]
곧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코는 공업력의 착취를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서 가장 최후의 전투도 체코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체코는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통제에 들어갔다. 전쟁 막판에 타결된 얄타 회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이 거주하는 자국 동쪽 끄트머리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소련에 할양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략적 위치가 가진 중요성 때문에 연합국은 폴란드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유선거로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소련에 요구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처음에는 듣는 척하다가 결국 공산당의 쿠데타를 조종해 1948년 2월 공산정부를 수립시켰다. 이 사건은 그리스와 터키에서 진행된 공산당의 빨치산 게릴라, 국공내전의 격화와 더불어 초기 냉전을 형성한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된다.
1948년 공산당의 지배하로 들어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에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특히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엄격한 통제와 폭압을 견디다 못한 체코인들은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스탈린 스타일 공산주의에서의 해방을 요구했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보낸 군대에 의해 무차별 진압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의 좌파들은 소련에 대한 '환상'을 모두 버리게 된다.
프라하의 봄이 처절하게 진압당한 것과 벨벳 혁명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회복,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10] 체코는 공산주의 국가 시절을 유달리 억압적이었던 시절로 기억하는 편이다. 실제로 유튜브 등을 통해 1970~80년대 음악이나 영화, 방송등을 검색해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억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종교활동도 공산화 이전보다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당시에도 대부분의 가톨릭, 개신교 교단들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미사와 예배 참석도 허용되었다.[11] 그리고 '카르비나'사의 킬스위치라는 게임이 공산정권과 연관되었다는 괴담 역시 거짓으로 판명난 상태이다. 공산정권 시절 체코슬로바키아는 슈퍼마켓이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돈 주고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서독에 비교해서 떨어진다 해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동구권에서 동독 과 함께 경제력이 최상위였던 나라다.[12]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 주권론)에 의해 다시 통제당한 체코슬로바키아는 결국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실질 지배하에 있다가, 고르바초프의 노선 전환으로 소련이 개혁에 착수하자 비로소 '해방'되었다.
198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장경제 체제를 공식 도입하고, 1989년에는 공산당 1당 독재가 종식되고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양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기로 결의하였다.
5. 체코 공화국 시기(1993~)
해당 항목 참조.
공산정권을 몰아낸 이후[13] 1993년 1월 1일부터 체코는 어느 한 나라에 귀속된 역사가 아닌, 진정한 체코인만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199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2004년에는 다른 중부유럽, 발트 3국, 발칸 반도 국가들과 함께 유럽연합(EU)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여타 동유럽보다 높은 경제력 때문에 유럽 난민 사태에서 막대한 수의 이라크, 시리아 난민들을 떠맡아야 할 판이 되었다. 당연히 체코는 아일랜드, 스위스, 슬로바키아, 기타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결사 반대한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제국주의 시절에 중동에 저지른 짓(종교, 민족 분열, 일방적인 식민지 국경선 획정 등)이 있으니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체코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중동에서 깽판을 치긴 커녕 오스트리아나 독일 등 강대국들한테 시달리던 입장이라 자국이 난민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에 상당히 억울해한다.
바츨라프 광장에 모인 약 25만 명의 시위자들이 200만 유로(약 26억 원)의 EU 보조금을 불법적으로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안드레이 바비스 총리와 신임 법무장관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최대 규모다.#
[1] 애초에 사모왕국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으며 사모왕국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가운데서 신빙성이 적은 것도 포함되어있다.[2] 참고로 오타카르 2세는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단테의 신곡에 황금과 철의 왕으로 등장한다.[3] 이 당시에 지어진 일명 '관용교회(toleranční kostel)'라는 것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다(체코어 위키)[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를 비롯한 이 주의 상당수 지역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또한 현대 독일의 바이에른 주의 서쪽 지역인 슈바벤(Schwaben) 지역의 일부 영토도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특히 프라이부르크나 그 주변지역은 400년 이상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5] 결국 독일 통일문제는 알다시피 1866~71년 사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소독일주의'통일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렇게 통일된 '작은 독일'조차 민족적 순수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프로이센 영토인 동프로이센 지방에는 폴란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1864년 프로이센에 병합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도 덴마크인들이 살았고, 1871년 합병한 알자스-로렌에는 프랑스인들이 살았으므로 순수한 독일인의 제국이라는 이상은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 이는 보통 독일통일이라는 거창한 '이벤트'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잘 조명되지 않는 문제다. 사족으로 독일 동부 일부지역에는 현재에도 소르브인(Sorbs)이라는 슬라브계 소수민족이 약 6~7만 명 정도 살고 있다.[6] 물론 쉽지는 않았다. 식당 메뉴판에 독일어를 적느냐 체코어를 적느냐 등 사소한 문제부터 의사당에서 독일계 의원들과 체코계 의원들이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말썽이 많았다.[7] 이건 단순히 오스트리아 정부가 관대해서라기보다는 체코인들이 그만한 힘을 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보헤미아 내의 주요 도시들은 모두 철도망으로 연결되었고 체코인들은 대부분 문맹상태를 벗어난 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산업화된 보헤미아 지방의 체코인들을 더이상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8] 사실 이 무렵의 체코슬로바키아는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국이기도 했다.[9] 엄밀히 말하면 뮌헨 협정 체결 당시 대통령은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이다. 뮌헨 협정 이후 베네시가 퇴임하자 그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은 게 바로 이 에밀 하하(Emil Hácha) 대통령이며, 그는 독일이 체코를 합병한 뒤에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명목상 대통령으로 남았다. 재임기간 동안 독일의 강압적인 통치에 항의를 표시하기도 했으며(비록 별 효과는 없었지만...), 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를 이끌던 전임자 베네시 대통령과 이따금 비밀리에 협력하기도 했다고 한다.[10] 참고로 빈부격차가 크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체코 같은 경우는 지니계수가 0.28 정도에 불과해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국가들이 대부분 빈부격차로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체코는 정말 과거를 좋게 봐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11] 체코 개신교단(ČCE)에서 쓰는 예전의식서(Agenda)의 현 형태는 공산체제 후반기인 1983년에 만들어진 것을 개정한 것이다.[12]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NP는 1972달러였고, 동독의 1인당 GNP는 1801달러였다.한편 서독은 2206달러였고, 미국과 소련은 각각 4304(...),1735달러였다. 한편 냉전이 끝날 무렵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NP는 7,878달러로 대한민국의 4,600달러보다 훨씬 높았다. 참고로 소련의 1인당 GNP가 9,211달러, 동독이 9,679달러였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환율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고 시장의 환율과는 괴리되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13] 다만 그런것 치고는 공산당의 세력은 의외로 강한 편이다.(...) 각종 선거에서 득표율 10%는 기본으로 찍으며 하원에서 30석은 기본적으로 확보하고 있기 대문에 사회민주당과 시민민주당만 못하지만 그래도 양당의 세력이 과반을 확보하는 수준은 아닌지라 기본적으로 제3정당으로써의 입지는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상원은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몇석 정도나 확보하는 것이 고작인 수준 .https://en.wikipedia.org/wiki/Communist_Party_of_Bohemia_and_Morav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