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유유

 

'''< 201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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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존 오키프,
마이브리트 모세르,
에드바르 모세르[1]


윌리엄 C. 캠벨,
오무라 사토시[2]
'''투유유'''

2016 - 요스미 요시노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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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대표표기
2. 경력
3. 주요 업적
3.1. 항말라리아제 개발


1. 개요


1930년생. 중국 국적의 식물화학자[4].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로 2015년에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수상당시 나이는 85세[5]. 중국 여성 중 과학분야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다.
많은 언론에서 투유유가 중국 국적자 중 최초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중국이 중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옳다). 이 점을 지적하는 보도 역시 다수 있었다.[6] 중국 국적으로는 사실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양전닝과 리정다오가 최초다. 양전닝과 리정다오의 수상 이후에도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계 학자들이 여러명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중국이 아닌 외국 국적을 가진 화교들이었다. 한편 투유유 이전의 중국계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물리학상 또는 화학상 수상자들이었으므로, 투유유에게 붙은 "과학분야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중국 여성"이라는 수식어나,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중국인"이라는 수식어는 옳다. 또한 수상 당시 기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으로 유일한 노벨 과학상 수상자라고 해도 옳다(양전닝은 수상 당시 중화민국 국적이며, 이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가 2017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적 취득).

1.1. 대표표기


대표표기와 관련하여 논쟁이 있었다. 투유유와 직접 관계 없는 한국에서 투유유의 대표표기 논쟁이 벌어진 까닭은,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사용 허용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와중에, 한의학계에서 투유유의 노벨상 수상은 중의학에 대한 중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며, 한의학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을 요구(현대의료기기 사용 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의학계는 반박을 했는데, 구체적인 양측 의견은 본문 내용을 참조. 서구 언론에선, 'Chinese Scientist, Pharmacologist, Pharmacist, Chinese Traditional Medicine Herbalist, Chinese Medical Scientist' 등 여러 표기가 혼란스럽게 쓰이고 있다.
무엇을 대표표기로 할 것인지는 투유유 자신의 입장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인데, 투유유는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의 연구에 대해 'In my work as a phytochemist'라고 소개한 바 있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phytochemist(식물화학자)로 기술하였다.
대표표기를 어떻게 할 것이냐와 관련되어 나온 사실 및 의견은 다음과 같다.
  • 정규 학위과정에서 약학으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 투유유가 약물에 대한 연구를 한 장소는 중의학연구원이다.
  • 약(물)에 대한 연구를 했다.
  • 투유유는 중의학 교육기관의 2.5년 기간 교육과정을 수료한 적이 있다. 서의학습중의반은 출근하지 않고 오로지 학습에 전념하는 과정으로 중의이론과 임상을 공부하는 과정이다. 투유유 여사는 3기 서의학습중의반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투유유는 네이처 논문에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중의학교육기관에서의 교육수료 이력을 빠뜨리지 않고 써놓은 바 있다.
  • 투유유가 각종 약물 연구를 하면서 사용한 연구방법론은 현대의 화학약학에 기반한 것이다. 만약 투유유에게 화학 및 약학 지식이 없었다면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 항말라리아제 개발은 중국 고대 의학서적에서 영감을 얻었다. 서적에 쓰인 대로 온도를 조절해보기 전에는 실험은 실패했다. 투유유 팀 외에도 항말라리아제 개발에 종사한 인원이 500여명에 이르는 점, 1967년부터 5년에 걸쳐 4만가지의 방법을 실험한 점, 그러면서도 그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 중국에서는 의사와 중의사의 구분이 없다.
  • 투유유가 개발한 항말라리아제는 임상시험까지 거친 의약품이다.
  • 투유유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하여 노벨위원회는 "전통 중의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항말라리아 의약품 개발연구에 대한 상"이라고 하였다.
  • 과학분야에서 최고권위를 가지고 있는 과학전문저널 Science지에 '약학자'로 소개되어 있다.
  • 투유유는 언론 인터뷰에서 "중의학 연구과학이 국제 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의약은 매우 풍부하지만 바로 주워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노벨위원회에 보낸 수상소감을 통해서는 '칭하오쑤'에 대해 "전통 중의약이 세계 인민에 준 선물, 칭하오쑤의 발견은 중의약이 단체로 발굴한 성공적 모범 사례, 이번 수상은 중국의 과학사업과 중의약이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큰 명예가 될 것"이라고 했다.
투유유 여사가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개똥쑥은 한약재 중에서 청호라고 한다. 이 청호의 주치 중 하나가 "학질"로 말라리아와 유사한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말라리아를 학질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학질"의 치료약들을 고대 중의학 원서에서 찾아낸다. "학질"의 중의학적 변증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실제 말라리아와 가장 유사한 형태의 "학질"을 치료하는 약물을 찾고자 했고 이에 선택된 약물이 청호다.
그런데 청호에서 성분 추출이 잘 되지 않아서, 고전의서인 주후비급방에 소개된 방법(청호를 끓이지 않고 침출함)에 착안하여 저온 추출을 하였다.
중의대, 한의대에서 나오는 논문의 대부분이 위와 같은 약리 연구와 임상효과에 대한 통계분석이고 훈고학적인 문헌 연구의 비중은 낮다. 투유유는 고문헌에 제시된 청호의 '절학' 효능을 현대 약리학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중의학자가 중약의 효능을 어떤 방법론으로 연구하든지 중의학으로 부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중의학(및 한의학) 역시 연계학문과 더불어 발전하기 때문이다. 통계적 방법으로 철학 연구를 하면 더 이상 철학이 아닌가? 기호학적 접근을 통해서 사료 연구를 하면 더 이상 사학이 아닌가? 투유유의 연구는 중의학 연구, 또는 중의학, 화학, 약학의 학제간 연구인 것이다.
즉, 고대 중의학의 경험과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현대 의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과를 낸 것이므로, 노벨 위원회에서 "전통의학이 아닌 의약품 개발연구에 대한 상"이라고 한 것도, 투유유 여사가 "중의학이 준 선물"이라고 한 것도 모두 맞는 이야기다.

2.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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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베이징의학원에서 찍은 사진. [7]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베이징의학원 약학과[8]를 졸업했다. 이후 중의연구원 중약연구소에 배정되어 약물 연구를 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2.5년 동안 직장생활을 중단하고 교육과정에 참가했다.

From 1959 to 1962, I was released from work to participate in a training course in Chinese medicine that was especially designed for professionals with backgrounds in Western medicine. The 2.5-year training guided me to the wonderful treasure to be found in Chinese medicine and toward understanding the beauty in the philosophical thinking that underlies a holistic view of human beings and the universe.

네이처 (2011)

투유유는 원사(院士) 학위[9], 박사 학위[10], 외국 유학 경험이 없어 ‘3무(無) 과학자’로 불린다.

3. 주요 업적


투유유의 가장 큰 업적은 그녀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말라리아 치료약 개발이다.

3.1. 항말라리아제 개발


마오쩌둥은 1967년 5월 23일 베이징에서 인민해방군총후근부와 국가과학위원회 연석으로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 전국 협력 회의’를 개최하고 치료제 개발 등을 지시했다. 회의 날짜에서 이름을 붙여 '523 임무'라고 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원인은 베트남 전쟁 도중 발생한 엄청난 말라리아 사상자 때문이다. 호치민은 베이징까지 마오쩌둥을 찾아와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부탁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에는 중국 내에서도 말라리아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1971년 중국의 말라리아 감염자는 약 40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문화대혁명(1966년 ~1976년)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초과학 연구가 중단 상태였다. 하지만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는 '군사 임무'로 간주되어 인력을 상당수 동원할 수 있었다.[11] 그 결과 군사의학과학원이 처음 개발한 ‘1호약’은 그 효과가 1회 복용에 7일 가량 감염을 막아주었고, 이어 개발한 2호 약물과 3호 약물은 1개월 가량 효과를 나타내었다. 중국은 약효가 제한적이지만 현지 상황이 급박한 관계로, 개발된 치료약 100여 톤 가량을 베트남 전쟁 중 월맹(북베트남) 측에 공급했다.
투유유는 1969년부터 523 임무에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보조 연구원이었고, 곧 소조 조장이 되어 4명의 연구원을 이끄는 중간관리직이 되었다. 투유유는 1972년 3월 8일 난징(南京)에서 열린 ’523 임무‘ 연구 보고회인 ’전국 항말라리아 약물연구회‘에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당시 보고 제목은 ’마오쩌둥 사상 지도가 발굴해 낸 항말라리아 중약 공작‘이었다. 당시 2000종이 넘는 천연식물을 조사했고, 이중 최종적으로 200종에 달하는 천연약물을 추출해 이를 실험쥐에 적용하는 백신 검사를 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190여차례의 실패 끝에 1971년 10월 개똥쑥[12]에서 추출한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이 말라리아 억제율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1번째 실험에서 성공을 했기 때문에 '91호 약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개똥쑥은 전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개똥쑥으로 실험을 해보긴 했지만, 말라리아 억제 효과에 있어 후추가 84%를 보인데 반해 개똥쑥은 68%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똥쑥을 여러 차례 실험하다가 AD 340년경에 쓰여진 중국 고대 의학서적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 개똥쑥의 사용방법에 대해[13] 쓰여 있는 것을 보고 1971년 말경 고온이 아닌 저온에서 추출해야 효능이 극대화한다는 쪽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르테미시닌 성분은 항 말라리아 기능을 가지며 개똥쑥 잎에서만 추출할 수 있고, 고온이 아닌 저온에서 추출해야 효능이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중에는 임상시험에도 성공했다.[14]
그러나 연구성과를 즉각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연구결과는 1977년 학술집에 실렸지만, 익명으로 실렸다. 비밀 군사 임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아르테미시닌에 관한 연구가 발표된 것은 1981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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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유유는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이후의 인터뷰에서 “이 영예는 나 개인에게 속할 뿐 아니라 중국 과학계 전체에 속한다”고 말했다. 2015년 12월 10일 시상식에서 정식으로 시상이 이루어졌다.

[1] 뇌의 공간 인지 시스템을 구성하는 세포의 발견[2] 회충 감염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 발견[3] 자가포식(Autophagy)의 메커니즘 연구[4] 식물화학자로 대표표기하게 된 배경은 아래 문단을 참조[5] 학계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투유유의 업적이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유유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자, 빨리 투유유에게 노벨상이 수여되어야 한다고 노벨상위원회에 재촉(?)하던 학자들도 꽤 있었다. 심지어 국내 모 학자는 수년 전 칼럼에서 투유유의 장수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 왜냐하면 노벨상은 생존자에게만 수여되기 때문이다.[6] 2000년대 이후로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만 되면 "이런 나라도 올해에 탔는데 한국만 아직까지도 없다!"는 식의 기사들이 쏟아지게 되었는데 이런 경향의 연장선으로 벌어진 일이라 봐야 할 듯.[7] 왼쪽 남자는 루지셴 교수로, 영국 런던 대학교 시스템 약학 박사를 받고 중국으로 돌아와 약학을 가르쳤다.[8]북경대 약학대학에 해당함[9] 원사란 1991년 만들어진 중국의 학위 제도인데, 투유유는 해당 심사에서 여러번 탈락했다. 이 때문인지 투유유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직후, 중국에서는 원사 학위의 가치에 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0] 능력 부족이나 인정을 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1979년까지 중국에는 대학원 과정이라는 게 없었다[11] 구체적으로 해당 프로젝트에는 약 500여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4만 종의 약초에 대해 실험했다고 한다.[12] 중국명: 칭하오(靑蒿)[13] ’개똥쑥 한 웅큼을 2승(升·L)의 물에 담근 후, 비틀어 짜서 낸 즙을 마시라(青蒿一握。以水二升漬,絞取汁。盡服之)‘[14] 투유유와 그녀의 동료들은 자신들을 직접 임상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