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비스 해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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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트래비스 리 해프너
(Travis Lee Hafner)
생년월일
1977년 6월 3일
국적
미국
출신지
노스 다코타
포지션
1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6년 아마추어 드래프트 31라운드 923순위 (TEX)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 (200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03~2012)
뉴욕 양키스 (2013)
1. 개요
2. 데뷔 전
3. 마이너 시절
4. MLB 시절
4.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4.2. 뉴욕 양키스
5. 기타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전 야구선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0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 최고의 왼손 거포 중 한 명.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하위 픽 성공신화로 꼽히는 인간승리의 주인공.

2. 데뷔 전


해프너는 스카우터들에게 딱히 주목받던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학년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트라이아웃에 참여하여 적은 오퍼만을 받았다. 스카우터에게 커뮤니티 칼리지[1] 입학을 권유받은 해프너는 그곳에서 맹활약을 했지만, 안타깝지만 NCAA 디비전 1(대학 야구 1부리그) 소속도 아니고 듣보잡 커뮤니티 칼리지 따위에서 잘해봐야 스카우터들에게는 딱히 별 의미는 없었다. 그래도 해프너를 포함해 빅 리거 3명이 배출되는 학교의 최전성기였던 덕에 주니어 칼리지 리그를 말 그대로 정복한다.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아마추어 드래프트 31라운드에 지명을 받는다. 지명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듯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수 있다고는 전혀 기대받지 못했으며, 계약금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3. 마이너 시절


루키 리그에서 55경기에서 OPS 0.813를 기록한 해프너는 1999 시즌 싱글 A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에서 28홈런 111타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해프너를 지목한 곳이 텍사스 레인저스라는 것은 그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다. 우선 빅리그 1루 주전 자리에는 리그 최고의 강타자 중 한 명인 라파엘 팔메이로가 있었고, 1998년 1라운드에서 뽑힌 1루수 유망주 카를로스 페냐와도 경쟁해야 했다.
이러한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2000 시즌 A+에서 OPS 0.933을 기록하였지만 스카우터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민첩성, 유연성 등 모든 면에서 해프너는 빅리그에서 1루수조차 볼 수 없는 둔해 빠진 운동신경으로 평가받았고, 공격력도 파워만 있을 뿐 모든 것이 함량 미달로 평가받았다. 최대 AAA리거, 잘 쳐봐야 MLB 주전 선수 부상당했을 때 마이너에서 급하게 땜빵 세울 벤치 멤버 정도가 한계였다. 설상가상으로 텍사스는 팔메이로의 후계자로 2001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마크 테셰이라를 뽑았다. 테셰이라는 NCAA 디비전 1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고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는 딕 하우저 트로피를 받는 등 대학 야구 무대를 그야말로 평정했으며, 스캇 보라스를 등에 업고 950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으며 최상위 라운드에 뽑힌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커뮤니티 칼리지 출신의 31라운드 선수 따위와는 아예 출신 성분부터 달랐다. 다시 말해 이제 텍사스 레인저스에 해프너의 자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프너는 2001 시즌 AA에서 더욱 발전한 성적인 OPS 1.027를 기록하는 괴력을 뽐내며 퓨처스 올스타에도 선정되었다.
2002 시즌 AAA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서 OPS 1.022를 기록하던 해프너는 2002년 8월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었지만 대타 위주로 고작 22경기만 출전하였고 곧바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된다.

4. MLB 시절



4.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다행히 리빌딩 시즌이었던 인디언스에서 해프너는 마음껏 기회를 받을 수 있었고, 비록 경험 없는 좌타자의 약점인 좌상바 기질을 보이고 수비력도 그리 좋지 않아 시즌 중반부터는 지명타자로 출장하였지만, 14홈런 40타점 .254.327.485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준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해프너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여전히 좌상바를 고치지 못해 좌투 선발 출전 시 빠지기도 하고 수비는 답이 없어서 풀 타임 지명타자로 출장했지만.. 28홈런 109타점 .311 .410 .583을 기록했는데 그깟 게 뭔 대수랴. 심지어 조정 OPS는 아메리칸리그 1위였다.[2]
2005년 1년 클럽 옵션을 포함한 3년 700만 달러 연장 계약을 체결한 해프너는 비록 마크 벌리의 공을 안면에 맞고 15일 DL에 오르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137경기에서 32홈런 108타점 .305 .408 .595을 기록하고 MVP 5위에 오르며 리그 최고 레벨의 강타자가 되었음을 알린다. 미 야구기자 협회(BBWAA) 선정 '인디언스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2006년은 해프너 최고의 전성기였다. 좌상바를 완전히 극복해내고 42홈런 117타점.308.439.659 '''조정 OPS 182'''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타격 성적을 기록한다. 특히 만루에서 아주 강했는데, 한 시즌 만루홈런 6개로 돈 매팅리와 공동 1위에 등극하였다.
2007년에는 타율이 0.266으로 떨어지며 다소 부진했지만 100타점을 기록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해프너에게 4년 5700만 달러 연장 계약을 선물한다.
하지만 2008년에는 부상으로 57경기 출전에 그쳤고 성적도 바닥을 뚫었다.
그 후로 4년간 372경기 출전에 그치며 스몰마켓인 인디언스에 막중한 부담을 주는 악성 계약으로 전락한다. 나올 때는 OPS 0.800을 넘기며 나름 활약하지만 거의 절반 가까이 결장하니.. 한 시즌도 20홈런을 넘기지 못하고 전성기에 극복했던 좌상바 증세까지 다시 도지며 플래툰 적용을 받게 된다. 바로 이 시기가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추신수와 아이들' 시기로, 팀에게 있어서는 암흑기였다. 이때 국내 팬들에게 해풍기(...)라고 까이기도 했다. 냉정히 말해서 이 시기는 그냥 먹튀. 그래도 인디언스 소속으로 통산 200호 홈런을 넘기며 나름 훈훈하게 헤어졌다.
4년 계약이 끝나자 FA로 풀렸고, 주축 선수들의 부상 땜빵을 위해 노장들을 수집하던 뉴욕 양키스와 1년 200만 달러 계약을 맺는다.

4.2. 뉴욕 양키스


놀랍게도 4월 1달동안 6홈런 17타점 .318.438.667을 기록하며 먹튀였던 버논 웰스와 함께 부활에 성공.. 한 줄 알았으나 5월부터 바로 성적이 수직하락하며 잉여가 되었다. 최종 성적은 13홈런 .202.301.378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한다.
2017년부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수특별보좌 역을 맡고 있다.

5. 기타


  • 2019년 명예의 전당 자격을 얻었지만 한 표도 못 받고 광탈했다.
  • 추신수가 주전으로 자리잡기 전, 그래디 사이즈모어와 해프너를 롤 모델로 삼았었다. 당시 루키이던 추신수에게 타격 이론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1] Cowley County Community College. 참고로 트레버 로젠탈도 여기 출신. 로젠탈도 학교 때문에 매우 낮은 라운드인 21라운드에 뽑혔다.[2] 실제 OPS는 랜스 버크먼 매니 라미레즈 다음 3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