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논 웰스
[clearfix]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외야수.
2. 선수 생활
2.1. 토론토 블루제이스
[image]
199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5번으로 지명받아 프로 무대에 입성하는데, 미식축구에서도 와이드 리시버로 명성이 높던 그를 잡기 위해 토론토는 무지 애를 썼고, 결국 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웰스는 마이너에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한 끝에 1999년 처음 메이저리그에 올라왔고, 2002년부터 본격적인 웰스의 풀타임리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토론토가 애지중지한 유망주답게 웰스는 초반에는 능력 발휘를 아주 제대로 했다. 중견수로 나와 좋은 수비를 자랑하며 23홈런 100타점을 치더니, 풀타임 두 번째 해인 2003년에 제대로 사고를 쳤다. 3할 타율에 215안타 33홈런 117타점을 기록했고, 2루타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49개. 여기에 준수한 수비 능력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토론토의 새로운 희망으로 등극한 것. 그리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내리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수비 능력도 인정받았고, 타격 실력도 20홈런 이상은 기본으로 치는 장타력을 보이며 팀의 새로운 희망으로 완전히 입지를 굳혔다.
2006년 오프 시즌에 배리 지토, 게리 매튜스 주니어 등의 대박 계약이 터지자, 토론토 입장에서는 나중에 가서 골드글러브+30홈런 중견수 잡으려면 돈이 더 깨지겠다는 생각에, 토론토 단장 J.P. 리치아디는 아예 웰스를 빨리 장기 계약으로 잡아서, 초 거액의 계약을 안겨주며 그를 붙잡으려 했고, 결국 계약은 성립되었다. 7년간 1억 2천 6백만 달러의 계약이 성립된 것. '''그리고 재앙은 시작되었다.'''
거짓말처럼 웰스의 장타력이 줄어든 것이다! 20홈런 이상은 기본으로 쳐주던 실력은 온데간데 없고, 겨우 20홈런 칠까말까한 성적으로 전락했다. 여기에 그 좋던 수비 능력도 슬슬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그 거액의 장기 계약은 오히려 짐이 돼 버린다. 한 300만 달러 받는 선수가 15홈런 정도 치고 괜찮은 발과 적당한 컨택이었다면 모를까, OPS가 7할대 초반인 타자인 웰스의 연봉은 평균 2000만 달러에 육박했다. 게다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구단들도 지출을 줄이면서 토론토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결국 이 계약의 실패는 토론토 리빌딩의 악재로 자리잡았다. 급기야 로이 할러데이 트레이드 당시 "웰스를 데려가면 할라데이는 덤으로 넘기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결국 이 계약의 실패 등이 겹치면서 토론토 단장 리치아디는 짤렸다. 그리고 토론토의 과제는 무조건 웰스의 처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거액의 연봉 때문에 도저히 트레이드 대상이 나올 거 같지 않으니, 토론토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웰스를 계속 기용했는데...
2.2. LA 에인절스
[image]
'''기적이 일어났다'''
2010년에 웰스가 홈런 31개를 치면서 부활한 모습을 보이자, LA 에인절스가 나서서 웰스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대가는 마이크 나폴리[1] 와 후안 리베라. 더 놀라운 것은 연봉 보조를 첫 해 500만 달러로 끝냈다는 점.[2]
이로써 토론토는 순식간에 팀 연봉을 2000만 불 이상 절감했다. 이 트레이드를 성사시킨 알렉스 앤소폴로스 토론토 단장은 신(神)으로 추앙받았고, 반대로 LA 에인절스의 토니 리긴스 단장은 에인절스 팬에게 욕을 얻어먹게 되었다. 메이저리그 팬과 전문가의 반응은 앤소폴리스가 리긴스의 어떤 약점을 잡지 않은 이상 성립할 수 없는 트레이드였다. 실제로는 구단주인 아티 모레노가 웰스를 영입 못 하면 24시간 내에 해고할 것이라고 리긴스 단장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건 당시에 마이크 소시아 감독도 지지한 트레이드이다.[3] 여기에 나폴리는 소시아 감독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보낸 거지 리긴스가 보내고 싶어서 보낸 것도 아니다. 웰스가 가장 못 치는 곳이 에인절스의 홈구장이었고, 수비 능력도 떨어진 마당에 이 트레이드를 왜 했는지는 정말 알 수 없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리긴스는 31홈런, 타율 0.273을 기록한 2010년의 웰스를 보고 계약규모에 걸맞는 대형 외야수로 리바운딩할 가능성을 걸고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시기 에인절스 역시 외야 빅뱃을 구하려고 열라 똥줄타게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가능성이 있었던 칼 크로포드, 제이슨 워스 둘 다 헛방치면서 웰스로 타겟을 선회한 것. 그런데 웰스의 잔여 연봉이 8400만 불이다. 이 돈이면 더 아꼈다가 알버트 푸홀스를 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의 예상 그대로 웰스는 2011년 제대로 망했다. 결국 시즌을 타율, 0.218, 출루율 0.248, 장타율 0.412를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홈런은 25개를 쳤지만 비율스탯이 엉망이었다. 웰스는 LA 에인절스의 2011시즌 실패의 원흉으로 지목받았고, 결국 이 트레이드를 주도한 리긴스 단장은 해고당했다.
2011년 8월엔 드디어 친정으로 원정을 왔다. 그간 먹튀짓 하면서 이러니저러니 불만이 많았지만 어쨌든 토론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웰스였기에 블루제이스 팬들은 웰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며 웰스를 맞아줬는데, 브랜든 모로의 첫 피치를 홈런으로 날려버리며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렸다. 로이 할러데이에 버금가던 기립박수와 환호가 순식간에 야유로 바뀌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참고로 2012년 그의 연봉은 무려 $21M로, 이게 어느정도냐면 코비 브라이언트보다 1,600,000달러 정도 많고, 이 당시 세계축구선수 중 가장 몸값이 비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무려 1.5배에 해당되는 돈이다. 상금을 제외한 순수 연봉만으로 먹고사는 세계 스포츠스타들 중에서는 1위 알렉스 로드리게스에 이어 2위다.
2012시즌에도 작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막장 성적을 찍고 있다가 손가락 인대 파열로 최소 8~10주 결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7월 말, 복귀하자 마자 2경기를 뛰었는데, 팀은 2연패를 기록했고 이게 모두 완봉패였다.
8월 1일 기준으로 2012시즌 웰스 출전 시 에인절스는 14승 24패이고, 웰스 없을 때 전적은 42승 23패이다.
8월을 한 주 지난 시점에서는 복귀 후 1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웰스 복귀 이후 팀은 3승 6패를 기록하며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무서운 기세로 레인저스를 따라잡으려던 에인절스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는 것에 모자라 에이스에게 2위 자리와 더불어 와일드카드 자리까지 내주게 생겼고 결국 에인절스는 지구 3위로 마감했다. 이러한 상황에 에인절스 팬들은 당연한 멘붕에, 현지 커뮤니티에선 "리긴스한테 손배 청구할수 없냐"', "어차피 못 써먹는 거 불펜투수로 돌리자" 드립도 등장했다.
2012시즌 웰스의 최종 성적은 11홈런 29타점, 타율 0.230/출루율 0.279/장타율 0.403이다.
거기다 피터 보저스와 마이크 트라웃이 외야수 한 자리씩 차지한 데 이어 조시 해밀턴이 에인절스로 오면서 21M를 받으면서 웰스는 4th Outfielder 역할이나 하는 그야말로 잉여 중의 상잉여에 등극했다. 한편 웰스는 계약종료 시점인 2014년까지 뛰고 은퇴할 것이라는 의향을 내비쳤다. 은퇴 이후엔 토리 헌터와 마이너리그팀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2.3. 뉴욕 양키스
결국 에인절스 프런트는 트레이드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2013년 3월 24일경 큰 연봉보조가 이뤄진다는 전제하에 '''줍'''키스가 떡밥을 물었고, 웰스도 트레이드 거부권을 풀었다. 그리고 연봉보조 규모는 2년 $42M중 $28.1M으로 확정. 전반적으로 에인절스가 굉장히 선방했다는 평이다. 양키스는 스즈키 이치로의 2년치 연봉과 비슷한 금액으로 웰스를 쓰게 되었다. 에인절스 팬들은 3000만 불도 안되는 금액으로 선방했다니 디포토가 웬 일이냐며 모두 제리 디포토의 협상 능력을 찬양하였다.[4]
2013년 4월에는 웰스와 방출생 일당 트래비스 해프너와 케빈 유킬리스, 라일 오버베이는 1 전후의 OPS를 때리며 사상 초유의 주워온 클린업 트리오, '줍키스틱 4'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또한 타격 외에도 신묘한 법력으로 양키스의 승리에 공헌하기도 했다.
하지만 4월이 지나가고 5월이 되면서 내려갈 놈은 내려간다 법칙으로 웰스의 성적이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었다. 5월 8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서 4타수 3안타 1홈런 2타점 2득점이라는 맹활약과 홈런을 계속 생산해내면서 5월 15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시즌 10호 홈런을 뽑아내기도 했지만, 이후로는 무안타 행진을 이어가며 침묵해서 3할 타율대에서 귀신같이 2할 초반대로 급전직하했다.
그래도 웰스나 트래비스 해프너는 초반에라도 반짝 활약을 해줬기에 덜 까였다. 진짜로 까인 먹튀는 케빈 유킬리스. 나온 경기도 얼마 없고 그나마 출장한 경기에서도 별로였다.
한편, 웰스는 양키스 이적 후 12번을 달고 있었는데 2013년 7월 알폰소 소리아노가 양키스로 복귀하면서 등번호를 내주고 22번으로 변경하였으나, 시즌 후 자코비 엘스버리가 양키스로 이적해 22번을 원하면서 등번호를 또다시 뺏기는 신세가 되었다.
시즌 종료 후 2014년 40인 로스터 자리가 꽉 찬 탓에 자리를 만드려는 양키스의 의도 때문에 지명할당되었다. 그래도 웰스는 트위터로 자신에게 기회를 준 양키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2.4. 이후
2013시즌 이후 MLB 기록도 없고 마이너 기록도 전무해서 사실상 은퇴했다. 2019년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첫 입후보 자격을 얻었지만 한 표도 못받고 바로 탈락했다.
3. 연도별 성적
4. 기타
토론토에 있을 때도 지역에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쳤고, 자기도 자신이 심히 오버페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옆동네 NBA에 지 주제도 모르고, 팀에 온갖 해악을 끼쳐대며 또라이짓을 서슴치 않는 '''라샤드 루이스'''에 비하면 이 양반은 그래도 모범적인 먹튀라 하겠다.
에인절스 시절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전직 선수 길 메시처럼 잔여연봉 반 정도를 포기하고 시즌 종료 후 은퇴라도 해주면 정말 에인절 스타디움 앞에 동상이라도 세워야 될 판이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였다.[5]
해외야구 갤러리에서는 '청정타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절대 약을 빨지 않았을 거라는 찬사의 별명인데, 같은 팀에 입단한 14s 검거 전문 경찰청장 약졸스와 대비된다. 참고로 둘 다 공식적으로는 청정타자 맞다. 하지만 해야갤에서는 알버트 푸홀스는 약졸스로 불린다.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미국 국가대표로 출전했었다. 한국과의 경기에서 1번타자 우익수로 출전하여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5. 관련 문서
[1] 나폴리는 며칠 뒤 천사네의 라이벌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었고, 2011시즌 나폴리는 에인절스 상대로 학살극을 벌였다.[2] 웰스의 7년 계약 세부 내용을 보면 처음 1~3년은 약 $30M 수준으로 나름 염가라고 할 수 있지만 4년차부터 연봉이 무섭게 폭등하는 형태로 나머지 4년은 무려 $86M나 된다. 즉, 블루제이스가 3년동안 염가에 쓰고 독박은 에인절스가 쓴다.[3] 사실 소시아는 일반적으로 고용된 바지사장 수준인 미국의 야구 감독들과 달리, 팀 운영에 알게 모르게 GM 이상의 영향력을 대놓고 많이 행사한다. 프랜차이즈 첫 우승 및 2000년대 고승률의 주역인 덕에 구단주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4] 물론 디포토는 저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에인절스에서는 망했다.[5] 그렇다고 메시가 상먹튀였다는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