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2세(바이에른)

 


[image]
[image]
20대 시절
30대 시절[1]
1. 개요
2. 생애
2.1. 즉위
2.2. 치세
2.3. 강제 퇴위
2.4. 의문의 사망
3. 여담
3.1. 건축덕후
3.2. 여담
4. 매체에서


1. 개요


Ludwig II(1845 ~ 1886).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별명은 바이에른의 광인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막시밀리안 2세의 장남.

2. 생애



2.1. 즉위


1864년 3월 10일, 막시밀리안 2세가 사망하자 19세의 젊은 나이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되었다. 미남,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답게 잘생긴 외모와 190cm가 넘는 장신으로 국민들과 여성 귀족들 사이에 대단히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꽃미남 왕자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허나 루트비히 2세 본인은 여성 귀족들의 과도한 관심을 매우 부담스러워하였으며, 남자 연인이 더 많았다고 한다.

2.2. 치세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지 2년 후인 1866년 결국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바이에른 왕국은 우호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했으나 전쟁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루트비히 2세의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에서 프로이센 다음으로 강성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 제국의 한 지방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루트비히 2세로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할만하다.
정치보다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15세에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의 열렬한 애호가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그의 첫 명령은 '바그너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에 푹 빠진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일명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는 등 국가적 규모의 팬질을 단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예술에 관심이 컸던데다가 즉위 후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 속에서 정치를 외면하고 더욱 예술과 건축에 빠져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2.3. 강제 퇴위


장신에 미남인데다가 농부들에게도 격의없이 말을 건넬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으나 신하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정치에 무관심한데다 특히 바그너에 대한 총애가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바그너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공화주의를 열렬하게 추구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바그너는 이미 1848년 혁명 당시 드레스덴 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독일에서 추방된 인물이었다. 바이에른 귀족들과 정치가들이 바그너를 반대했던 것은 비단 바그너의 사치[2]가 지나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가 왕정의 존립에 위협을 가하는 극렬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그너를 청년왕 루트비히 2세는 곁에 끼고 둘 정도로 총애했고, 바그너가 국왕의 생각과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명했다. 바그너를 추방하라는 바이에른의 귀족들과 정치인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보오전쟁 패배 이후 루트비히 2세는 패전으로 인해 자책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바그너를 퇴출시키라는 귀족들의 성화에 굴복하여 바그너에게 바이에른 밖으로 나가라고 명했다.
하지만 바그너를 추방한 이후 성 만들기에 빠져서 재정이 거의 파탄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국왕의 과도한 바그너 사랑과 건축 오타쿠다운 계속되는 축성 계획을 참다못한 신하들이 제발 그만두라고 간언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고 아예 궁전을 떠나 산속의 성에 은둔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성에 감금당하다 강제 퇴위 당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루트비히의 동생 오토는 정신분열증으로 아예 병원에 유폐되기도 했다. 일단 국가운영 예산이 아니라 루트비히 본인의 사유재산으로 지은 성들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유럽의 왕실에서 빌리려고 했다. 당연히 내각에서 불만이 커졌다. 특히 내각에 왕족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왕실의 돈을 과도하게 쓰는 루트비히를 좋게 볼리가 없었고 그것이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 집안내력인지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도 재위 초기에는 명군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샀으나 말년에 국제 꽃뱀 '롤라 몬테즈'에게 홀려 거액을 갖다바치다가 신하들과 국민들의 반발로 퇴위했던 전력이 있다.
강제퇴위 사유는 미쳐서 정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정말로 미쳤었던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루트비히에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굿덴 박사는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서 정신병이라 진단했고, 루트비히 본인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3]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퇴위된 뒤엔 루트비히의 동생인 오토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오토 역시 정신병 증세가 있어서 루트비히와 오토의 숙부인 루이트폴트 공(루이트폴트 카를 요제프 빌헬름 루트비히)이 섭정을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루이트폴트는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사망한 뒤엔 그의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섭정 자리를 계승했다가 1913년 오토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국왕으로 즉위했다.

2.4. 의문의 사망


퇴위 후 3일 뒤인 41세에 주치의인 굿덴 박사와 함께 산책하다가 실종되었는데 성 근처에 있던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굿덴 박사의 시신과 함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대두되었다. 왜냐하면 사인은 익사였는데 시신이 발견된 슈타른베르거 호수는 무릎밖에 차지 않는 얕은 호수였고 평소 루트비히 2세는 수영을 무척 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굿덴 박사의 사인은 익사가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타살이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말년에 자신에게 돈 좀 아끼라고 잔소리해대는 내각과 갈등이 심해서 내각을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내각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소식을 듣자 반발한 내각에서 선수를 쳤다. 내각이 준비한 루트비히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보고서가 당시 프로이센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의 손에도 들어갔는데, 그는 그 보고서를 보고는 오히려 같잖은 소리라며, 내각이 왕을 희생시킬 셈이냐고 평가했다. 게다가 그 보고서에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을 사유들이 쓰여 있었다. 가령 정무를 보지 않는다든가, 사생활에 돈을 많이 쓴다던가, 추운 날에 밖에서 점심을 먹으며 더운 날에 외투를 입었다던가, 식탁에서 예절태도가 별로였다든가, 하인들에게 불친절하게 굴었다던가... 물론 다소 지적될만한 점이 있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격리시키는 수준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삼촌인 루이트폴트 왕자[4]조차도 "내 조카들이[5]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퇴위는 너무 심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3. 여담



3.1. 건축덕후


루트비히 2세가 생전에 건설한 건축물은 총 3개다. "에게? 겨우 세개 뿐이야?"라고 할수 있는데, 하나하나가 엄청난 규모의 궁전들이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거기다 그것들을 거의 동시에 건설해댔으니... 건설 자금은 국가 예산이 아닌 왕실의 사비로 충당했다.[6] 그러다보니 왕실 재정은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다.
  • 린더호프 궁전(Schloss Linderhof)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트리아농 궁전을 본따 만든 궁궐로 1870년에 건설을 시작해 1886년에 완공되었다.
  • 노이에스 헤렌킴제 궁전(Neues Schloss Herrenchiemsee) : 1874년 가을에 왕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이때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의 꿈을 발견했다"며[7] 돌아와서 짓기 시작(...)한 건축물로 1878년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1886년 재정난으로 인해 건설을 중단할수 밖에 없었고, 왕의 사망과 함께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헤렌킴제라는 이름은 킴제호수의 헤렌(남자)섬이란 의미로 본래 킴제호수에는 수도원이 세워져 남자들만 출입할수있는 남자섬과 수녀원이 세워져 여자들만 출입할수 있는 여자섬이 있었는데 여자 출입금지인 남자섬의 전통에 매료된 루트비히가 이 섬을 사들여서 헤렌킴제 궁전을 건설한것이라 한다. 루트비히는 남자섬에 여성이 오지못하도록 더욱 철저하게 통제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누나가 오겠다는것도 단호하게 거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루트비히의 성적취향등을 고려한다면 정말 여자가 없는 섬을 원했던 걸지도. 여담이지만 남자섬의 오랜 여성출입금지 전통은 아돌프 히틀러가 깨버렸고 이후엔 그냥 남녀모두 들어갈수 있게되었다고 한다.
그의 건축 덕후 기질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는데,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자기가 선물한 집짓기 장난감으로 손자가 만든 집을 보고 '상당히 훌륭한 취향이 드러나 있다'고 평할 정도였다. 왕이 된 후에는 건축가를 고용하되 자기가 구상한 아이디어를 보태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현실에 옮겨 놓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런 괴짜적인 센스는 몇 가지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승마장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말을 타고선 그 거리를 환산하여 오늘은 어느 지방까지 갔다 왔다는 둥 상상 유랑일기를 쓰기도 했고[8], 낮과 밤을 바꾼 침실이 있어서 밤에는 불을 밝게 켜놓고 낮에는 커튼을 꽁꽁 닫고 잠들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2차대전 중에 미군이 이탈리아 몬테카지노의 오래된 수도원을 독일측 공수부대가 점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폭격으로 날려버린 적이 있었는데[9], 똑같은 꼴을 당할까봐 두려웠던지 독일군에서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비롯한 고성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정식 서한을 미군에 보낸 적도 있다.
여튼 덕질만 안 했어도 인생이 좀 피지 않았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가 거금을 때려부어가며 지은 3개의 궁전들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당시에 진 빚을 몇 번이나 갚고도 남을 정도로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경우 17년 동안 공사되었지만 아직도 미완성 상태로, 정작 루트비히가 이 성에서 머무른 기간은 3개월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3.2. 여담


[image]
  •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엄청난 장신에 꽃미남이다. 하지만 말년에는 지나친 식탐과[10] 운동부족으로[11] 인해 심한 비만이 되었다고 한다.[12] 더불어 게이였다고 한다. 바그너를 워낙 숭배했던 터라 바그너와 연인관계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그냥 후원자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그너를 슈타른베르크에서 마차로 10분 거리인 별장에서 살게 하고 하루에 두 세번 마차를 보내서 궁정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모자라 호엔슈방가우 성에 초대받을 때마다 바그너도 왕의 침실에 쪽지를 남기곤 했다. 내용인 즉슨 "저는 천사같은 당신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쪽지를 남기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요즘은 루트비히의 성적지향 이전에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이해자를 찾으려고 했다는 평가가 대세다. 20살도 안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친구도 없었다고 하니 우울증은 예상된 결과였다. 그리고 본인도 어떻게든 이해자를 찾기 위해 청소년기부터 좋아한 예술가인 바그너를 초청해서 후원해주고, 또래의 친구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국왕의 친구가 되줄 사람이 흔하지도 않으니 실패한 모양이다.
  • 미혼 으로 생을 마감했다. 친척 중 한 명인 바이에른 공작 막스의 딸 조피[13]와 약혼을 했지만, 도무지 결혼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파혼했다. 이 약혼은 조피의 언니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주선으로 이뤄졌는데, 비교적 친한 사이였던 둘은 파혼 후 소원해졌으나 루트비히의 장례식 때 엘리자베트가 손수 자스민 꽃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4. 매체에서


역사물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에할 요소가 충분하지만 말년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지 다들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다. 안습.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인 루키노 비스콘티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예술을 사랑했고 자유주의자였으며 양성애자였던 비스콘티가 느낀 개인적인 혼란을 루트비히에게 투사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영화 자체는 비스콘티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이 볼 거리.

[1] 이 시절만 해도 어느 정도 살이 찐 상태로 10대 ~ 20대 시절은 꽃미남 왕자의 대명사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꽃미남 왕자의 클리셰의 효시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2]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진 막대한 빚을 모두 갚아주고 화려한 저택까지 만들어 주어 거주하게 했다.[3] 강제로 퇴위당할 당시 되려 쓴웃음 지으면서 느긋하게 "짐이 미쳤다고? 그래, 그 다음은 날 죽이겠군. 그리고 누굴 또 왕위에 올려두고 마음에 안들면 미쳤다고 또 퇴위시킬 건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4] 루트비히 2세와 오토 치세에 섭정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5] 루트비히 2세와 동생인 오토.[6] 왕실 재정이 이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바이에른 왕국을 회유하기 위해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하다가 멸망한 하노버 공국(하노버 가문이 영국 왕실이었다.)의 금고를 털어서 몽땅 바이에른 왕국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국 예산을 끌어다 쓰지 않고 사비만 썼는데도 건축이 가능했던 것.[7] 루트비히는 루이 14세의 중증 빠돌이었다. 심지어 루이 14세의 유명한 초상화를 따라서 옷을 입고 그린 초상화도 전해질 정도다.[8] 궁 밖으로 멀리 나가질 못하게 하니까 일부러 미친 척 했다는 설도 있다.[9] 오히려 독일군은 좋은 엄폐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폭격에 참여한 몇몇 미군은 가톨릭인이라서 괴로워했고 이 수도원에 있던 많은 유물이 잿더미가 되어서 미국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다. 전혀 전략적 효과도 없었으니....[10] 특히 단 음식을 지나치게 좋아하다보니 치아질환이 심각해 항상 치통에 시달렸고 나중에는 치아가 빠지기까지 했다.[11] 낮에는 주로 잠을 자고 밤에는 산책했는데 문제는 걷거나 말을 타지 않고 마차를 타고 다녔다.[12] 실제로도 말년의 초상화와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찌고 비만이 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13] 루트비히와는 5촌 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