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근로자

 

1. 개요
2. 상세
3.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해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1960년~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통해 독일(당시 서독)에 파견한 노동자로 직종은 광부간호사였다.

2. 상세


파견시기와 파견인원은 출처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대략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파견된 인원을 합쳐 2만 명가량이다. 휴머니스트 출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1963년부터 77년까지 파견된 광부는 8,395여 명, 1965년부터 76년까지 파견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만 371명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외국 차관을 끌어오기 위하여 파견했으며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1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을 달았다는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파독 근로자에 대한 통설인데,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고 있다.''' 먼저 독일에서 차관을 받기위해 노동자들이 독일로 떠난 게 아니다. 간호사가 서독에 간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 있어왔지만, 정부가 파견에 직접 관여한 건 1967년부터이다. 게다가 서독에서 차관을 줄 때 협의 내용 안에서는 광부/간호사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또한 적금의 일부분을 일정금액 송금해야 한다고 적혀있는데, 이것 또한 맞지 않다. 실제 조사에 의하면 송금을 전혀 안 하는 경우도 많이 존재 했다.이 내용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면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를 참고하면 된다. 물론 파독 노동자들이 간 것이 정부 주도이든 아니든 간에 경제발전에 어느정도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독일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60년대 한국에 경제개발원조를 하던 서독정부가 경제개발원조에 '한독 근로자 채용협정'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광부를 유치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서독인들이 3D직종인 탄광에 대한 취업을 기피하자 서독광산업계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렸고 서독광산업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라는 로비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서독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개발원조에 겸사겸사 광부인력 수입을 끼워넣으며 독일에 한국인 광부가 파견됐다는 것이다.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작업 중에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정해본 교수는 "1967년 당시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온 송금액을 한국 상품수출액의 35.9%, 무역외수입의 30.6%를 차지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한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8년 8월 5일 '파독 광부/간호사의 한국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조사결과의 결정요지 2번에 의하면 1965~1967년 3년 동안 총수출액 대비 서독근로자 송금액은 1.6%~1.9%에 그친다. 정해본 교수가 조선일보 기사에서 인터뷰로 밝힌 35.9%라는 수치에 대한 또 다른 자료가 필요할 듯하다. 물론 1.6~1.9%도 적은 수치가 아니긴 하나, 연인원 약 1~2만 명에 불과했던 서독 노동자들의 송금액이 한 국가 총 수출액의 1/3 이상을 차지했다는 건 직관적으로도 믿기 힘든 수치다.[1] 또한 아래에도 나오듯이 상당수가 독일 및 타 국가로 이민을 택했기 때문에 실제 송금액이 그보다 더 적을 가능성도 높다.
그 당시 파독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본 간호(대변 치우고 식사수발 등)가 주요 업무였다고 하며 무시와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파독 가서 당장 IV 꽂고 각종 처치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 아니었다. 광부 역시도 지하 1000m가 넘는 석탄광산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더구나 이렇게 중노동을 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광부가 아니라 고졸, 현재의 대졸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고[2] 심지어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들도 상당히 많았다.[3] 왜 이렇게 고학력자들이 많았냐면 정부에서 정한 자격요건부터 중졸이상으로 제한했고,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소위 빽있는 사람들이 유리했다. 당연히 빽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학력을 가질 확률도 높았다. 이렇게 온 인텔리 출신 광부들은 일은 서툴렀을지 몰라도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오히려 광부 출신들보다 독일 생활에 잘 적응했고, 광부 일이 끝난 뒤 타 직업으로 전직하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악바리 같은 집념을 보여주면서 독일에 남게 된 한국 간호사도 있다. 또한 이들의 노고로 지금도 한국 간호사, 한국 간호조무사 자격이 있으면 독일에서 해외취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4]
계약기간 이후에는 대다수 간호사들이 계약을 연장하고 독일에서 살게 되었다. 광부들 가운데 60%가량도 독일에 남아(이들의 1/3은 뒷날 미국으로 이민), 유럽 한인 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1960년대는 합법적인 이민이 시작된 때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독일 및 타 국가로 이민하는 인구가 늘던 시기였다.
한편 독일 사회의 파독 근로자들 대접은 모범적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어느 나라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시궁창이기 쉬운데, 독일에서 근로한 한국인 광부나 간호사들은 해외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이나 은근한 차별 외엔 큰 핍박을 받지 않았다.[5] 지금 한국이 동남아 외노자들을 짐승 부리듯 대하는 태도를 보면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고 실컷 욕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파독 광부들은 광부 일을 할 때 들었던 '글뤽 아우프(glück auf)'[6] 라는 말을 자신들의 모토로 쓰고 있으며, 이 인사말에서 이름을 따온 '글뤽아우프 복지회' 라는 단체도 있다.
파독 근로자 중 노후는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독일인 배우자와 함께 귀국한 분도 많은데, 이 분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남해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40여채가 넘으며 이 중 절반은 민박업을 겸하고 있다. 남해 군청이 땅을 분양할때 반드시 파독 근로자이거나 그들의 가족일 것[7], 독일식으로 집을 지을것, 민박업 외에는 불가 등 엄격하게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동네가 무척 깔끔한 편이다. 독일주택 외에도 독일식 광장도 있고 독일 관련 행사도 열려서 독일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3. 매체에서의 등장


  • 만화 검정고무신의 주인공 이기영, 이기철 형제의 삼촌이 파독 광부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TV를 사서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 영화 국제시장에서 보면 주인공 부부가 각각 파독 광부와 간호사이며,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주인공 오말순의 남편 반상일이 파독 광부로 일하러 출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8] 안타깝게도 광부일하다 사망해 과부가 되어 홀로 아들 반현철을 키우는 힘겨운 삶을 보내게 된다.
[1] 저 정도면 아르메니아처럼 타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어마어마해야한다.[2] 60년대의 중학교 진학률이 40~50%였다.[3] 이런 지원자들은 선발 심사 전형에서 떨어질까 싶어 일부러 손에 연탄 가루를 묻히는 등 험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떼를 쓴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했다.[4] 단, 영미권과 다르게 독일에서는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낮은 편이기 때문에(업무도 한국의 간호사보다는 간호조무사 또는 간병인에 가깝다) 급여 또한 높지 않다는 것에 주의하자. 애초에 독일에서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더라면 독일인들이 간호사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독일어에 서툰 외국인을 간호사로 쓰려고 불러들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불과 몇년전까지만해도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EU 내에서 교육제도 통합이 논의되면서 대학의 간호학과를 졸업해야 간호사가 될 수 있는 다른 유럽국가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최근 들어 간호사 자격을 취득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은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간호사가 되려면 대학은 졸업해야 하고 심지어 대학원 출신까지 있는 영미권 간호사와는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독일에서도 의사와 약사는 대졸 이상이다.[5] 사실 터키 이주 노동자가 훨씬 더 많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범죄나 부정에 연류 되는 일도 적었기 때문에(당시 국가주의, 전체주의, 집단주의적 사상이 훨씬 강할때라 자기들의 잘못이 곧 한국 전체의 잘못으로 평가받는다는 우려를 했었기때문에 이들로써는 처신을 잘해야했다. 휴일 외출할때도 타 국가 노동자들은 평소 입던대로 후줄근한 차림으로 외출을 나갔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나갈정도였으니.) 현지인들에게 크게 배척 받을 까닭도 없었다.[6] 독일 광부들의 전통적인 인사말로, 광산에서 일할 때 사고가 생기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치길 바라는 뜻의 인사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살아서 만납시다' 로 번역되었다.[7] 실제로 한국인 간호사와 독일인 남편, 이들의 자녀도 거주가능대상자였다.[8] 심지어 당시 오말순은 임신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