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스 드막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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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파트리스 드막마옹, 마장타 공작'''
(Patrice de MacMahon, duc de Magenta)
'''생몰년'''
1808년 6월 13일 ~ 1893년 10월 17일(85세)
'''재임기간'''
1873년 5월 24일 ~ 1879년 1월 30일

1. 개요


파트리스 드막마옹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다.

2. 생애



2.1. 유년기와 군 경력


아일랜드 생 시르 사관학교에서 공부했고, 1827년에 입대한다. 1830년, 7월 왕정 때 시작한 알제리 정복 전쟁에 참여한다. 1870년, 보불전쟁 시절에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가 중상을 입고 프로이센군의 포로로 잡혔다. 1871년 나폴레옹 3세의 패망 후 제3공화국이 수립되고 파리 코뮌이 봉기를 시작하자, 당시 대통령이던 루이 아돌프 티에르는 막마옹에게 진압을 맡긴다.

2.2. 군주제 복구 실패


1873년 오를레앙주의자[1] 아돌프 티에르와 강경 왕당파의 충돌이 거세지면서 티에르는 2년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에 당시 의회를 장악한 강경 왕당파들의 후원을 등에 업은 막마옹은 대통령으로 임명된다.[2] 이들은 막마옹을 군주제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단계 정도로 여겼다. 막마옹은 부르봉 왕조 추정 상속인인 샹보르 백작을 입헌군주제 하에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허나 이런 의견조차도 당시 프랑스 정계에선 합의로 이어지지 못했는데, 당시 프랑스 왕당파는 크게는 두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샹보르 백작을 선두로 한 샤를 10세의 부르봉 후손들을 지지하는 정통파와 파리 백작 필리프를 밀던 입헌군주주의자들인 오를레앙파들이 그것.[3] 이들은 합의를 보기 위해 샹보르 백작을 왕으로 세운 뒤 오를레앙파인 파리 백작 필리프를 그의 양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샹보르 백작은 "부르봉 왕가의 백기를 부활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왕위에 안 오르겠다"고 선언하며 루이필리프와 입헌군주제의 표상인 삼색기를 거부했고[4] 이는 전제군주정에 반감을 가지던 프랑스인들의 민심을 잃게 하는 행위가 되었다.
게다가 드막마옹은 1875년 알베르 드브로리를 앞세워 "도덕의 복구(Ordre Moral)"라고 명명한 가톨릭교에게 교육권을 포함한 권리를 양도하는 등의 보수주의적 정책을 펼치는데[5] 더 나아가선 당시 풍자 등을 하던 신문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는 등 일견 수구적인 모습까지도 보인다. 그렇게 왕당파 자체에 대한 여론이 자꾸 나빠지자 왕당파 의원들은 공화파들을 상대로 시간을 끌기 위해 막마옹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늘린다.
하지만 결국 1877년 국회(Chambre des députés)의원 선거에서 공화파들은 승리했고, 브롤리를 포함한 실망한 왕당파들은 다수 사퇴한다. 그리고 1879년 1월 상원(Sénat)마저 강베타가 이끄는 공화파들이 거머쥐자, 막마옹은 사임하고, 공화파 쥘 그레비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이후부터 사실상 왕당파는 프랑스 정계에서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1] 루이필리프를 지지하는 입헌군주주의자들을 일컫던 말로 온건 왕당파격이었다. 다만 티에르가 대통령이 된 후 항구적 공화국 선포 등 한 행적을 보면 사실상 공화주의자처럼 행동하긴 했다.[2] 당시 프랑스는 사실상 의원내각제로 대통령의 권한이 쎄진 않았다.[3] 쪼개보자면 정통주의자들 내에서도 온건정통주의와 강경정통주의(소위 경기병대“Chevau-légers”) 등의 분파로 의견이 갈렸다. 게다가 이후 보나파르트주의자까지 합세하면서 개판오분전.(...)[4] 샹보르 백작은 오를레앙 왕가를 죽기보다 싫어했고, 그래서 아예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를 양자로 삼을 생각이었다.[5] 프랑스 혁명 이래로 좌파들은 반교권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