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5세

 


'''역대 프랑스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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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0세
(루이 19세)

'''(앙리 5세)'''

루이필리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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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중년기
'''이름'''
앙리 5세 (Henri V)
'''생몰년도'''
1820년 9월 29일 ~ 1883년 8월 24일(62세)
'''재위기간'''
1830년 8월 2일 ~ 1830년 8월 9일(7일)[1]
1. 개요
2. 생애
3. 여담

Henri d'Artois, Comte de Chamboard
샹보르 백작 앙리

1. 개요


앙리 5세는 명목상 프랑스의 국왕으로 추대된 부르봉 왕조의 후손이다.

2. 생애


1820년 9월 29일 샤를 10세의 차남 샤를 페르디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샤를 페르디낭은 앙리 샤를이 태어나기 이전인 1820년 2월 14일에 죽었으므로 유복자이다. 자식을 갖지 못한 마리 테레즈는 그를 귀여워했다. 샤를 10세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앙리 샤를의 아버지 샤를 페르디낭이 형(루이 19세)이 있었으므로 앙리 샤를은 샤를 10세에게는 그다지 관심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도 앙리 샤를은 그럭저럭 가족들의 관심을 받고 자랐으나 1830년, 안 그래도 이전에 일어난 대형 사건과 그 결과에 대한 여파가 컸는데, 할아버지 샤를 10세의 실정(失政)으로 민심이 나빠진 프랑스에서는 샤를 10세의 폐위를 요구하는 7월 혁명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샤를 10세가 퇴위한 직후 큰아버지 루이 19세가 '''서류상으로만''' 20분 간 즉위했고, 앙리 샤를이 '''앙리 5세'''가 되어 7일간 명목상의 국왕이 되었다.
부르봉 왕조가 멸망하고 오를레앙 왕조의 루이필리프가 통치하면서 앙리 샤를은 샹보르 백작 이외의 모든 작위를 잃고 가족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한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그녀는 앙리를 친아들처럼 대해줬다. 그래서 앙리 역시 전제군주제의 옹호자가 되었고, 둘 다 공화정 프랑스에서 머무르는 것을 싫어해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야 했다.
이후 1848년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필리프가 퇴위할 당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무시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샤를루이나폴레옹은 1852년 헌법을 바꿔 나폴레옹 3세로 즉위, 프랑스 제2제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 3세는 퇴위하였고,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한 뒤에 실시한 1871년 총선에서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고, 아돌프 티에르파리 코뮌 강제진압으로 왕당파와 공화파 모두에게서 비토당하는 처지가 되면서 앙리 5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거기다 티에르의 후임 대통령은 왕당파 파트리스 드막마옹. 이 기회를 잘만 활용했으면 입헌군주제로나마 왕정 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앙리는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샹보르 백작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를 선호하는 인물이었으나 "특권이니, 절대주의니, 앵톨레랑스니 떠들어대는 무지하고 어수룩한 자들"을 운운하며 앙시앵 레짐이나 절대왕정과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입헌군주제와 공화정의 삼색기 대신 부르봉 왕정의 백기를 부활시켜 국기로 지정할 것' 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절대로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으로 '''프랑스의 왕정 복고 시도는 완전히 끝나고''' 왕당파도 몰락한다.[2] 그리고 이후 앙리는 뭇 프랑스인들은 물론 타 유럽 왕실로부터도 '시대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천치'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돌프 티에르는 "샹보르 백작 각하(앙리 5세)가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자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앙리 5세의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마지막 왕정 복고 시도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비꼰 것.
사실 앙리가 사실상 자기 손으로 복고의 희망을 꺾어버린 배경에는 부르봉 본가와 오를레앙계의 오랜 악연 뿐만이 아니라 백작 본인의 불우한 개인사에서 비롯된 악감정도 짙게 깔려 있다.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정이 들어서면서 해외로 망명하게 된 샹보르 백작은 오를레앙 왕정의 외교적인 압박으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전전했으며, 장성한 후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하려고 하자 오를레앙 왕정이 혼사를 먼저 가로채 공주를 루이필리프의 5남 오말 공작 앙리와 약혼시켰고, 같은 해에 샹보르 백작은 승마 사고를 당하여 이제는 고자가 되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후 모데나 공작의 장녀였으며 자신의 6촌이기도 했던 마리아 테레자와 결혼했으나, 마리아 테레자는 불임이었던 까닭에 후사를 볼 수는 없었고, 개인적인 생활 여건은 안정을 찾았지만, 오를레앙파에 대한 증오심은 마음 깊숙히 남았다.
그런데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한 직후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는 부르봉 가문의 수장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왕으로 세우고,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인 파리 백작 필리프를 그 양아들로 하여 다음 왕으로 세운다고 합의한 상황이었다. 제2 제정보다도 7월 왕정을 더 증오한 나머지 급기야는 이사벨 2세와의 통교 과정에서 차라리 나폴레옹 4세를 양아들로 삼겠다는 뜻까지 내비쳤던 샹보르 백작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부르봉 본가와 오를레앙계의 대동단결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아무래도 딱지를 놓기가 곤란하였고, 그래서 일부러 핑계로 댄 것이 부르봉 백기의 부활이다. 과연 앙리가 이 문제를 내세운 것은 효과가 있었으니, 비록 그 본인이 천치 취급을 받게 되었지만 부르봉 본가와 오를레앙파가 합쳐지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오를레앙계의 복위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앙리 5세는 평생 프랑스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고, 홀대받으며 유럽 각지를 떠돌다 1883년 8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이젠슈타트에서 객사했다. 앙리 5세의 아내는 자녀를 얻지 못해 부르봉 왕조 본가의 지위는 스페인알폰소 13세에게 넘어갔다.

3. 여담


그 자신은 자녀가 없었지만 그의 누나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는 파르마-피아첸차 공작 카를로 3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그 손녀인 지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카를 1세의 황후가 되면서 이 집안은 잠시나마 부활하기는 한다. 또 지타 황후의 남동생인 펠릭스는 룩셈부르크 샤를로트 여대공의 부군이 되었고, 지타와 펠릭스의 조카인 안 드 부르봉파르므는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미하이 1세와 혼인했다.
현재 부르봉 왕조의 계보는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1974년 4월 25일 ~ )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루이 20세'''로 불리고 있다.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은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왕자의 손자이고, 스페인의 現 국왕 펠리페 6세의 6촌 동생이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외외증손자로 더 유명하다.[3]

[1]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재위 기간은 아니고 명목상의 재위 기간이다.[2] 물론 이 협상이 실패하고 한방에 몰락한 건 아니고 서서히 의석 수가 줄어들면서 몰락해 갔다.[3] 그의 외할머니가 프랑코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