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총격사건

 




영어 : Soviet Defector Incident
러시아어 : Инцидент с побегом Яковлевич Матузка
1. 개요
2. 경과
3. 이후


1. 개요


1984년 11월 2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소련관광 가이드인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1]의 갑작스러운 망명으로 인해 양 측 경비병력 간에 발생한 총격전.
당시에는 “마쓰작 판문점 망명사건”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판문점에서 벌어진 교전 사건 중 피해 규모로만 봐서는 최대의 사건이다.

2. 경과


당시 현장에 있었다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증언.
1984년 11월 23일 11시 30분 경 당시 소련관광 가이드 바실리 마투조크가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면을 찍던 중 갑자기 건물과 건물사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유엔군과 한국 육군 경비병력들은 그를 대피시키게 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북한 육군 병력이 그의 월남을 저지하고자 권총을 발사하며 경고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곧바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150m까지 침범, 자유의 집 앞 연못(현재는 정원)까지 내려왔다. 이 때 군사분계선을 침범한 북한 병력은 총 17명이었으며 연못을 중심으로 30여분간의 총격전이 이루어졌다.
북한군의 총격에도 불구하고 마투조크는 무사하였으나 이 총격전으로 인해 한국 육군은 카투사 장명기 일병(상병 추서)이 전사했고, 미 육군은 1명 부상당했으며, 북한 육군은 확실하지 않으나 2명 사망, 2명 부상 설과 3명 전사, 5명 부상 설이 있다. 이 때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의 주범인 박철 북한 육군 중위가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 2018년 7월 8일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영분에서 사건 당시 근무중이던 JSA 1호 하사의 증언을 통해 박철 대위(전사 이후 특진한 것이므로)가 사살된 사실이 알려졌다. 하사 왈, 박철이 통일 이후에 찾아오라고 자기 집주소까지 알려줄 정도의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군 병력들은 피해가 커지자 총격전을 중단한 뒤 부상, 사망자를 수습해 돌아가겠다고 교전 중단을 청했고 유엔군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유엔군의 감시 속에서 북한군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해 돌아갔다. 이 모습이 유엔군의 카메라에 촬영되어 증거로 남기도 했다. 군 간부들이 이 사건을 언급할 때 한국군이 북한군을 무장해제하고 얼차려를 시킨 뒤 북측으로 돌려보냈고, 장명기 일병이 전사한 줄 몰랐는데 알았으면 북한군을 멀쩡히 돌려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어이 없는 뻥카 무용담을 간부들이 치는 경우가 있는데 헛소리다. 현장에서 교전을 벌인 병력은 유엔군과 한국군 판문점 경비병력이었고, 정말 얼차려를 주고 돌려보냈다면 아군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도 파악 못 하고 아군 시신 수습도 안 한 채 북한군 얼차려 주는 데만 정신 팔렸다는 누워서 침 뱉는 소리밖에 안 된다.

3. 이후


UN의 양해 아래 북한 측에서는 군사분계선을 다시 넘어와 사망자와 중상자들을 모두 후송해 돌아갔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마투조크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를 보호하던 미 육군 장교는 그가 무사히 망명했다는 사실에 싱글벙글 기뻐하자 '당신 때문에 군인들이 죽고 다쳤다.'라고 말했다. 그는 11월 30일 이탈리아 로마로 떠났고 로마의 UN 난민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정치적 망명 자격을 얻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마투조크는 현재까지 생존 중이며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 원래 있던 연못은 상술하였지만 사건 이후 아예 메워져 지금은 정원이 되었다고 한다. 완전히 시야를 개방하여 다시는 북한군이 남측 분계선을 넘어오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UN군 사령부 경비대대에서는 당시 교전 중 순직한 장명기 상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당시 전투현장에 비석을 세우고 캠프 보니파스 내의 그가 거주했던 막사를 “장 막사”(Jang Barracks)로 명명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지휘권이 2008년 한국군으로 이양된 지금에도 한국군 중대막사 건물로 쓰이고 있다.
북한 측에서는 내부 선전을 위해 이 사건을 왜곡하여 보도한다. 마투조크가 '납치'당했다고 했으며 '''그의 성별도 여자로 변경되었는데''' 이를 통해 미국이 저항 능력도 없는 젊은 처녀를 강제로 납치해간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교전에서는 자신들이 발렸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이후로 써먹지는 않는 듯하다.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 중 사상자 규모로만 보면 최대임에도 남한에서는 거의 잊힌 사건이다. 일단 딱히 이건 북한 측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제3국인 소련 국민이 망명을 시도해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총격전이기에 북한/대남 도발에 포함되지 않으며 사건의 주체도 남북한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다. 그리고 전쟁 위기까지 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달리 이후의 정치적 여파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전투 결과로도 북한군이 발렸기 때문에 교육도 언급도 잘 되지 않는 것이다.
2017년 11월 13일 이 사건과 비슷하게 북한 군인이 판문점을 통해 귀순하다가 북한 경비병의 집중사격을 받아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진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2019년 10월 20일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판문점 편에서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망명 직후 마투조크의 기자회견 장면과 고 장명기 상병의 생전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나왔다.
[1] Vasiliy Yakovlevich Matuzok(키릴: Василий Яковлевич Матузок). 1962년 8월 14일생. 참조 국립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교를 나온 상당한 엘리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