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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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의 사진.[1]
'''언어별 명칭'''
'''한국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8.18 도끼 만행[2]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3]
'''영어'''
Axe Murder Incident (도끼 살인 사건)
Tree Cutting Incident (벌목 사건)
Poplar Tree Incident (미루나무 사건)
1. 개요
2. 사건 경위
2.1. 발단
2.1.1. 문제의 미루나무
2.1.2. 북한의 주장
2.2. 사건 이후의 전개
2.2.1. 본격적인 준전시태세
2.2.2. 폴 버니언 작전
2.2.3. 한국의 대응
2.2.4. 북한의 대응
2.3. 결과
3. 여담


1. 개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북한의 무력 도발이 충돌한 끝에 남북한의 준전시 상태, 즉 전쟁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던 사건이다. 북한이 남한에게 저지른 도발이야 많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주한 UN 장교를 살해한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도 감히 북한을 두둔하지 않았다.[4]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김신조 사건에서도 올라가지 않았던 데프콘이 3단계로 격상되어 전시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었다.

2. 사건 경위



2.1. 발단



2.1.1. 문제의 미루나무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OP 5)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의 미루나무가 5초소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주한UN군[5] 경비대 작업반은 3초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군 노무자 4명과 UN군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이때 북한군이 이의제기를 하면서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가지치기만 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10시 30분 노무자 3명, 육군 장교 3명, 경비병 7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북한 육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서 다시 항의를 했다. 이에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때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수긍하여 가지치기를 하는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는 등 가지치기 작업은 매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갑자기 북한 육군의 박철 중위[6]가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나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철 중위는 느닷없이 경비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미 육군 보병대위에게 큰일 나기 싫으면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는 작업을 속행하도록 지시했고, 11시 30분에는 북한군 경비병의 숫자가 30명으로 크게 증강되었다. 박철 중위는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2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재차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북한 육군 경비병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는 즉각 "죽여!" 라고 소리 지르며 보니파스 대위를 걷어차며 구타했다.
다른 북한군들은 주먹과 곤봉을 이용해 UN군 장병들을 상대로 마구잡이식 폭행을 가했으며, 이성을 잃은 북한군 병사가 버려진 '''도끼로 보니파스 대위의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7] 여러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보니파스 대위뿐만 아니라 소대장 마크 배럿(Mark T. Barret) 미 육군 보병중위도 현장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8] 북한군 자신도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던지 제대로 식겁한 채 36계 줄행랑으로 뺑소니 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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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보니파스 소령(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추서 계급), 마크 배럿 대위(Mark Thomas Barret 1951년 6월 9일생, 추서 계급)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고위 간부[9]의 증언록에 의하면, 당시 북한 국가주석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고,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

2.1.2. 북한의 주장


'''미군''' 장교를 참혹하게 살해한 충격적인 개만도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국제역사학적으로 싸이코패틱한 만행을 최대한 노골적으로 벌이고도 '''북한 측'''의 반응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심지어 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도끼를 던졌으며, 북한 측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되던졌다'''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다. 또한 사과는 커녕, 경비장교 회의를 열자며 사건을 대충 경비장교 회의 선에서 덮으려 들었다. 나중에는 한국과 미국측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어그로를 끌기까지 했다.

2.2. 사건 이후의 전개



2.2.1. 본격적인 준전시태세


말 그대로 국제적 대도발 사태였다. 이유가 있더라도 사병을 잃은 것도 분노할 미국이니 장교 2명을 어이없는 이유로 참혹하게 잃은 미군은 분노했다. 당시 UN군 사령관 미 육군대장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사건 보고를 받자마자 여객기도 아니고 수송기도 아닌 전투기 후방석에 탑승해 급히 복귀했다. 복귀한 스틸웰 대장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10]를 발동시키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건을 보고받은 미국 정부도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 정계에는 당파를 불문하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깎여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남에 따라 이전까지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자존심이 바닥을 기던 상황이었다. 또한 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가뜩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약하게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포드 대통령은 즉각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시간으로 8월 18일 오후 3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주재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합참의장미 해군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여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했고 사진에서 북한군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였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CIA에서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소리쳤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등 미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렇지만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만으로는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었고 특히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우려도 있어 스틸웰 장군은 우선 사건의 원인이 된 미루나무를 자르고, 이에 북한측이 추가 도발을 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대안이 승인되고 데프콘 등급이 상향되었다. 회의를 마친 키신저 장관은 중국을 통해 북한 측에 조용히 있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란 경고를 보냈다.
8월 19일에 들어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여전히 경비장교 회의를 운운하며 사건을 덮으려 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UN군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UN군사령관의 메시지를 통해 군사 정전 위원회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강경한 최후통보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억지주장을 계속하며 되려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스틸웰 장군은 그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고 마침내 데프콘 3이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체제)를 발동해서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2.2.2. 폴 버니언 작전




2.2.3. 한국의 대응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대[11]를 조직한다. 1공수특전여단의 지역대장#s-2.3이었던 김종헌 소령이 이 결사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이 결사대가 해당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하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보복작전이 수행됐다.
보통 같으면 소련이나 중국 측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만약 북한이 사라지고 한국 주도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미군이 북한 지역에 주둔할 것은 뻔한 일인데, 소련과 중국에게는 전혀 좋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12]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도 미국의 입장처럼 전면전은 아니지만 연백평야와 개성 등 휴전선 부근 일부를 타격하거나 탈환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으며, 이런 일을 벌인 이상 아무리 소련과 중국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북한 편을 들어주려고 해도 북한이 저지른 일이 유례가 없는 자살 시위에 가까운 도발이라 중국과 소련도 외면했다.[13]
더욱이 당시는 소련과 중국이 모두 미국과의 데탕트를 추구하던 시기였다. 김일성은 수차례 브레즈네프와 마오쩌둥에게 2차 한국전쟁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으나 소련은 극도의 불쾌감을 표출하면서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까지 거절해버리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공을 국시로 한 유신정권이 기초적으로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도 관계 개선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므로 소련은 북한보다 남한이 더 나았다고.[14] 다만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베이징에 불러 막대한 원조를 약속하면서 사고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나 북한 측이 사고를 치며 중국의 위신을 제대로 추락시켰기에,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특히 중국 측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며칠이 지나도록 북한에 대한 상투적인 지지성명조차 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포에 질렸다.

2.2.4. 북한의 대응


북한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미국이 강하게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즉, 문자 그대로 쫄았다.'''[15][16] 미국 측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심지어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초소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온갖 난장판을 만들고 있을 때도 대응은커녕 초소를 비우고 도망쳤다. 김정일 주도설을 제기했던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미군 장교를 죽일 정도로 막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17] 에서 미군 장교를 둘이나 살해했다는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자 김정일을 포함한 수뇌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한 김일성이 노발대발하면서 이런 짓을 왜 했느냐고 질책했다. 이에 김정일은 "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했다."는 뻔뻔한 거짓 보고를 올렸다. 당 비서들은 차마 김정일이 시켰다는 말은 못 하고 인민무력부 놈들이 미쳐서 그랬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극대노하여 인민무력부장 최현을 불러서 쌍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고, 김정일의 죄를 뒤집어 쓴 최현은 역시나 열받아서 작전국장을 불러서 조지고 책벌했다고 한다. 상기된 대로 미국의 보복작전이 준비되자, 김일성은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명하라. 푸에블로 호 사건 때도 미국이 사과를 했지 않았는가?"라는 면피성 지시를 내렸다. 다만 북한은 이 사건을 좀 더 정치적으로 써먹고는 싶었는지 몇 시간 뒤에 스리랑카에서 진행 중이었던 비동맹회의에서 "이 사건은 미국놈들 탓이다."라며 한미연합군을 질타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결국 승인되었다.
이후 사건의 주동자가 누군지 확실하게 밝혀지자마자 정세는 확실히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상술했듯이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실리자마자 주동자는 북한,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북한은 긴급하게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 성명을 표했다. 처음 미국은 "유감 성명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부했다가 하루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18]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쳐들어올까 봐 쫄아서 1년 동안이나 준전시체제를 유지했고, 미군은 일단 폴 버니언 작전 병력들을 철수시켰지만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대결이 일어났다.
이 당시 북한에게는 같은 공산권인 소련과 중국이라는 동맹이 있기는 했으나 당연하게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이 벌인 정신나간 행위에 전쟁을 벌여줄 의사 따위는 없었다. 하물며 소련과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 바로 제3차 세계 대전 개전이다. 핵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최소 수천만 명은 희생당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서로 극심하게 대립하기는 했지만, 전면전만큼은 피하기 위해 긴장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했다.[19] 한국전쟁 때도 소련의 지원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미국은 모른 체했고,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이웃 캄보디아나 라오스까지 작전을 넓히고 자기 앞마당 남미에서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델타포스까지 동원해서 몰아내도 소련은 침묵했다. 그런데 전시 긴장상태인 위험한 장소에서 고작 나무 한 그루 때문에 미군, 아니 UN군 장교를 죽이고 전쟁위기를 불러온 북한의 이 정신나간 짓거리는 소련과 중국을 욕보인 행위였다. 실제로 소련과 중국은 니네가 일 터뜨린거니 사과하고 치우라고 냉정하게 반응했다.
더구나 북한은 소련과 중국이 기꺼이 도와줄 만큼의 괜찮은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이 대립하는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로 실리를 챙겼으며, 한국전쟁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연명했음에도 전후 복구 기간 동안 자국내 소련파와 중국파를 마구 숙청해댔다. 북한이 진작에 박살나지 않은 이유는 소련과 중국이 서로 반목하다 보니 그저 내버려 둔 것뿐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에 미 육군 장교를 2명이나 죽인 것 때문에 괜히 나섰다가 UN 체제를 파탄내고 핵전쟁으로 비화될 세계 대전 위험을 감수한다? 알량하기 그지없는 북한의 자존심과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에 미국을 상대로 세계멸망이 될 수도 있는 세계대전을 감내할 나라는 없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이 북한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면 몰라도 미군이 동원한 전력은 충분히 북한을 갈아버릴 수는 있어도 고작 1만 2천 명의 지상군 증파[20]만으로는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북한의 주요시설을 공중 폭격으로 손보고 휴전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온다고 한들 그 정도면 소련과 중국도 묵인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주제모르고 날뛰던 북한을 미국이 자기들 대신 손봐 주고 이후 중재하면서 자기들 위신도 세우고 북한에게 빚도 좀 지우고 북한이 좀 더 순종적으로 변하면 그리 손해도 아니었다.[21]
북한은 일이 잘못됐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총동원령을 내려 대학생들을 군에 동원했으며 노농적위대, 교도대 등의 예비군들도 모조리 동원했다. 심지어 김평일은 이 사건 직후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전 학생들의 군 입대를 독려했고,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인민군 육군에 입대함으로써 군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제대한 장교들도 60세 미만은 전부 다 군으로 복귀했고, 생산 시설들을 후방에 옮길 준비가 착수되었다. 또한 평양황해도, 강원도의 최전방지대 주민들의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노약자와 성분 불량계층을 함경도로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해당 지역은 완전히 난리통이었다고 한다.[22] 8~11월까지 석 달 동안은 모든 군인들이 군장을 싸놓고 잠을 잤다고 하며,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나와 전투위치로 배치되었고 대학생들도 건장한 사람들은 죄다 인민군에 끌려가서 사실상 휴학 상태에 들어갔다. 너무도 급한 소개 작업 때문에 식량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게다가 책임자 장성택이 어찌나 심하게 일을 몰아붙였는지, 김일성이 자문으로 삼던 김일성종합대학 통계경제학 교수월북자, 즉 남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소개되었는데, 김일성이 당시 국가계획위원장 최재우에게 그 교수를 불러오라고 했다가 교수가 소개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격노하기도 했다. 그래서 항일 빨치산 가족을 비롯한 7만 명을 도로 불러오는 개뻘짓을 해야 했고 책임자 장성택은 일을 과격하게 했다고 추궁당했다. 장성택 밑에서 실무를 맡았던 국가정치보위부 4국의 보위부원들은 직위해제 당했고 국가보위부장 김병하도 강한 문책을 당했다. 김일성은 "해독분자의 소행이다. 당과 국가로부터 인민들을 분리시키려는 자이다. 소개를 시키려면 잘 설복해서 해야지,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날로 짐 싸게 해서 데려가면 되는가?"라고 당 간부들을 전부 다 불러모아놓고 비판을 퍼부었다고 한다. 김정일도 "군중 사업에서 10년 후퇴했다", "사람과의 사업에서 10년 손해봤다."고 했는데 이 일이 두고두고 남아 입안자였던 김정일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23]

2.3. 결과


북한이 혼자 사고치고 난리를 치든 미국은 나무가 벌목되는 동안 북한이 총알 한발이라도 도발을 가하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기에[24] 북한이 침묵하자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작전을 종결짓고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사건 이전과 같은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경계 밖에 있던 양측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미루나무 둥치 둘레 만큼의 둥근 시멘트 위에 도끼 만행사건에 희생된 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판문점 관람 코스에 버스를 타고 추모비 앞을 지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스 안에서 이 추모비를 볼 수있다.

3. 여담


  • 이 사건 1년 전에 이 사건의 전조라고 할수 있는 헨더슨 소령 사건이 일어났었다.
  • 이 사건을 이후로 당시만 해도 양측 군인들 간에 개인적인 안부를 물을 정도였던 판문점은 지금처럼 완전히 갈라진 경색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 당시 북한군이 판문점에 들어가려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통행이 불가능해진 북한군은 사건 발생 1주일동안 북한측 판문각 뒤로 우회하는 도로와 다리를 개설해야했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판문점 미루나무 작전>이라는 영화이다. 두 편 다 이낙훈태현실이 주연을 맡았다.
  • 외국인들에게는 관광명소가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담당하는 미 육군 부대 주둔지 이름은 원래 '캠프 키티호크'였으나 이 사건 중에 살해당한 아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서 '캠프 보니파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 사건의 원흉인 박철 중위는 처벌은커녕 사건 이후에도 판문점에서 행패를 부렸다. 다만 8년 후 판문점에서 소련 관광객이 남측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비병력 간의 총격전 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인 증거는 없으나 당시 미군에게 사살된 북한군 중에 박철 중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는데, 마찬가지로 확인되지는 않은 이야기지만 책임자는 숙청돼서 정치범수용소에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2018년 7월 8일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영분에서 사건 당시 근무 중이던 하사의 증언을 통해 박철 대위가 사살된 사실이 알려졌다.
  • 북한은 이후로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감히 무력도발을 하지 못했다. 방송이나 성명서는 미 제국주의자를 맹비난하지만 진짜로 건드리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미국을 건드렸다가 진짜로 지도에서 나라가 지워질 뻔한 경험은 북한이 자기 주제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 본토가 진짜로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환영 성명이나 미국을 향한 비난 성명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면서 불똥이 튈까봐 눈치를 살폈고,[25][26]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때도 테러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드러냈다.
  • 대외적으로는 그랬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이 사건이 인민군의 영웅적 행위로 칭송되며 관련자들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북한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사건이 북한 내에서 어떻게 선전되고 있는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 존 에버라드의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을 보면 북한에서 이 사건에 사용한 도끼를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 지금도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사건 현장의 사진이 남았다는 것은 미국측에서 자신들을 계획적으로 도발, 음모를 꾸미기 위해 미리 기자들을 대기시킨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물의를 빚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야후 코리아가 있던 시절 모 재미교포 블로거가 그런 시리즈물까지 올려가며 허황된 소리를 했던 사건.
  • 한국의 19대 대통령인 문재인이 특전사 1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특전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이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참여하였다. 다만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상병 계급으로 현장에서 직접 공격을 한 투입조[27]는 아니었고 외곽에서 대기하던 대기조 소속이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일반 병사였고 유신헌법에 반대하여 시위하다 강제 징집을 당해 입대하게 되어 작전조에는 원천적으로 참가가 불가능한 상태였다.[28] 이는 문재인대통령 본인이 밝힌 내용이다.

[1] 왼쪽 위 흰 헬멧을 쓴 사람이 도끼로 심하게 당한 배럿 중위, 트럭 앞에 쓰러져 발만 보이는 사람이 보니파스 대위.[2] 한국 측이 과거에 사용하던 명칭.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3] 북한 측의 명칭이라고 하는데 코나스넷 등 한국 내 극소수의 자료를 제외하고 확인되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도 엄연히 이 명칭이 함께 쓰인다.[4]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이나 소련 모두 UN 상임이사국이기 때문에 절대로 북한을 지지할 수 없었다. 특히 이 사건이 벌어진 직후의 중국은 아예 평양을 미국에 열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을 정도.[5] 한미연합군사령부는 2년 뒤인 1978년에 창설되어 주한UN군사령관이 연합사령관을 겸임하게 된다.[6] 평소 행실이 워낙 개차반이라 하다못해 한국군에서는 '미친 개', 미군에서는 'BULLDOG'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7] 그 당시 북한은 UN을 미국의 하수인이라면서 국제 기구로서 인정하지 않았다.[8] 당시 판문점 감시단에 있던 분이 월간조선의 기사에서 회고한 바에 의하면, 북한군이 가지고 있던 미국에 대한 적개심 때문인지 북한군이 미군의 시체를 도끼로 수도 없이 찍어서 피해자의 시신이 거의 토막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름에 만행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9] (1922~1998) 1980년대에 3국을 통해 탈북했으며, 북한 정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용규, 신경완, 신평길 등의 가명과 필명을 썼다.[10] 훈련(연습) 용어로는 '라운드 하우스'라고 불리며, 영내에 있는 모든 물자를 방치품/적재품/파기품으로 분류하고 "당장이라도 막사 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 을 말한다.[11] 5개 팀, 1개 지역대 규모이다.[12] 21세기 들어서 중국과 북한 사이가 악화되고 중국이 북한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되도록 유지시키려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중국에게는 남북통일이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배후에 있는 미국의 존재가 문제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저우언라이는 한국군이 38도선 이후로 북진하는 것은 묵인하겠으나, 미군이 같이 북진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시진핑 역시 이런 의미의 말을 한 바 있다.[13] 자유진영쪽도 마찬가지다. 6.25 터진 후 7함대 왔다고 대만으로 국부천대장제스는 신난다며 좋아했지만, 미국은 착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장제스가 남한에 적극 지원하겠다고 미국에 호소했으나 전쟁 확대하기 꺼렸던 트루먼은 애치슨 라인 물건너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였고, 휴전협정 후 아이젠하워는 중화민국에게 제발 선제공격 하지말고 상임이사국으로 그대로 인정해 줄테니 사고치지 말라고 방어용으로만 지원해 주었다. 제 아무리 반공주의라도 3차 세계대전 보기 싫었을 테니. 또한 6.25전쟁 중 마오쩌둥은 중화민국이 남한에 적극 지원하고 참전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14] 그래도 중화민국과의 관계 때문에 중공과는 개선하지는 않았다. 6.25전쟁 때 중공이 개입하여 통일이 무산된 것도 있고.[15] 미국은 자국민이 해외에서 살해되는 것에 상당히 강경하게 반응하는 국가다. 거기다 살해된 자국민이 마약사범, 산업스파이, 테러리스트면 몰라도 일반 시민도 아니고 해외 파병 군인에 엘리트 출신 장교니까 더더욱. 자국민이 해외에서 어이없게 살해되었음에도 이를 그냥 넘어간다면, 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자 타국이 미국을 얕잡아보게 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16] 이 사건이 살해된게 미국인이어서 유감성명서로 봐준거지, 유대인이었으면 사과고 나발이고 모사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지도부를 죽여버리는 터라 김일성 체제는 벌써 붕괴됐을 것이다.[17]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때를 보여주되 총기는 일체 사용하지 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정일은 사살이 아닌 단순히 미군을 도발, 어느 정도 구타하여 자신의 권력 장악과 체제 선전에 씌운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일어났었던 헨더슨 소령 사건이 대표적이다. 또한 푸에드리코호 사건처럼 미국이 국제정세상 힘들때 대충 북한을 인정해주면서 타협할려고 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음으로, 김정일도 이 기회에 후계자를 확고히 하고 당 내부에서는 지지도를 얻으며 크게는 체제 선전을 통해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18] 이는 아직까지 소련이 건재한 상황에서 정말로 끝까지 나간다면 다시 한 번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내다버린 자식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보기에는 엄연히 공산국가를 자처하는 이상 소련은 공산국가의 수장으로서 북한을 지원할 것이 뻔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아직까지 반전 여론이 강한 상황이었다.[19] 물론 이러한 외적 요인도 있지만 미국, 소련, 중국 3국에서 전쟁을 피하려 했던 내막은 각기 달랐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패배로 끝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반전여론이 거셌기에 전쟁 운운했다가는 그야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소련의 경우에는 이미 소련의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김일성 때문에 북한에 대해 반쯤 손을 놓은 상태였으며, 이 시기 동유럽에서 한창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는 동유럽의 군부 정권들을 지원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문화대혁명 끝무렵이긴 했으나 이미 나라는 개판이 되어 있었고,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부수는 홍위병들의 병크로 인해 전쟁은 커녕 당장 내부 정리에도 급급한 상황이었기에 북한을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다.[20] 아무리 최첨단으로 전쟁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알보병이 남아있는 이유다. 전쟁이 끝난 후 전후 처리나 점령지 관리는 모두 육군, 그것도 보병들이 하는 일이며, 후에 이라크 전쟁에서 저걸 잘못했다가 만들어진 괴물이 바로 이놈들이다.[21] 저때건 지금이건 러시아와 특히 '''중국'''이 북한을 존속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안전지대 확보'''가 가장 크다. 아무리 북한이 걸리적거리고 놓고싶어도 당장 턱밑에 조선 인민군을 따위로 만들어버릴 대한민국 국군과 '''주한미군'''이 주둔하는건 중국 입장에서 절대 달갑지 않다. 때문에 중국이 어떻게든 북한을 존속시키고, 하다못해 분할론을 가져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22] 소개 작업은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정치보위부가 주도했으며, 평양에 주민소개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어 장성택이 모든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에 걸쳐서 20만 명의 주민들이 이주되었고 황해도, 강원도에서 8천 세대의 성분 불량자와 노약자들이 '솎아졌다.' 작업은 은밀하고도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는데,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을 전달하며 정해진 시간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다음에 옆집도 모르게 온 식구를 실어 날라버렸다고 한다.[23] 이 문단의 전반적인 내용은 중앙books 김정일에 실린 신경완의 증언을 재인용했다.[24] 계획에 의하면 연백평야를 점령할 생각이였다고 한다. 북한 전체가 아닌 이유는 당연히 같은 공산권인 소련과 중국 때문.[25] 9.11 테러 일어나기 전 김정일은 비동맹회의 의미가 없어지자 미국과 일본 등 자유진영 상대로 저팔계 외교를 시행하였고 적들에게 바지를 벗어주는 행동을 일체 하지 말것을 지시하였다.[26] 이는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전 세계가 벌벌 떨 동안에 세상물정 모르고 미국보고 천벌을 받았다고 깝죽거리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즉각 테러의 배후로 몰려 교수대 위에서 비참히 죽어야 했다. 즉 북한이 여기서 어그로를 끌었다면 즉각 테러지원국, 또는 평화의 적으로 몰려 진작에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27] 투입조는 부사관 이상으로만 구성되었다고 한다.[28] 다만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일반 병 신분이어서 대기조에 그쳤던 것인지, 아니면 유신헌법에 반대하다가 강제로 징집당한 신분이어서 그랬는지 가운데 어느 점이 더 크게 작용했는지는 차후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 일단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탓에 윗선에 찍혀서 투입조에 참가를 못했다'는 후자의 주장이 당시 '일반적인 운동권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모범적인 군 생활을 했다'는 상부 및 주변의 평가로 인해 신뢰성이 떨어지는 현재로서는 전자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