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Franciscan Order, Ordo Fratrum Minorum[1] , Ordine francescano[2]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가톨릭교회의 수도회다. 프란치스코회의 회원과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무리를 “프란치스칸(Franciscan)”이라고 부른다. 작음과 청빈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생전에 나환자들을 돌보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도 많이 한다.
'프란치스칸'(Franciscan)이라 불리는 수도공동체는 크게 3갈래로 나뉜다. 먼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맨 처음에 직접 조직한 작은형제회는 1회,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와 함께 세운 글라라 수녀회는 2회, 프란치스코가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 수도 3회와 율수 3회, 재속프란시스코회를 통틀어 3회로 지칭된다.
프란치스칸 1회인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물러난 이후 회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열정파니 이완파니 온건파니 하는 3개 분파로 나뉘어 투닥투닥 싸웠다. 사실 마구 싸웠다기보단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도회를 꾸려나가며 '내가 진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의지다!'를 서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2인자라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대전기를 편찬했는데, 그의 부모가 큰 병을 앓고 있는 아기였던 그를 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자 그가 기도를 해주었고, 이 기도로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그에게 성인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Buona Ventura)!"란 말을 했다고 한다. 부모는 그 길로 본래 조반니였던 아이의 이름을 보나벤투라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여하간 이 보나벤투라는 수장을 잃고 갈라졌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다시 하나로 뭉친 제2의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이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는 스콜라 철학자이기도 하다.[3]
하지만 추기경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나벤투라가 선종한 후, 작은형제회는 다시금 수많은 갈등 끝에 각각 엄수파와 꼰벤뚜알파로 나뉘었는데, 꼰벤뚜알은 엄수파가 주장한 철저한 청빈과 은거 생활보다는 설교와 신학 연구, 사회 내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해내는데 더욱 주력했다. 교황은 꼰벤뚜알을 더 밀어주었기 때문에 당분간 꼰벤뚜알이 주축이 된 프란치스코회는 다시 개혁되어 회칙엄수파가 갈라져나와 엄격한 생활로 돌아갔다. 이 분파는 작은형제회로 다시 뭉쳤지만 오래지 않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특유의 가난함을 내세운 카푸친회라는 분파가 또 갈라져나와 프란치스칸 내 세력을 키웠다.
그렇게 프란치스칸 1회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카푸친[4] 작은형제회'''로 완전히 나뉘었다. 현재 이 3개 분파는 서로 갈등한다기보다 상부상조하며 수도회의 큰 틀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한다.
고깔 모양의 후드가 달린 검정색, 고동색(카푸치노 커피색)입니다. 검정색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고동색은 “작은형제회”와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복장이다. 세 수도회 모두 허리에는 흰색 허리끈을 두른다.
언뜻 색깔만 다르지 복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수도복에서 머리와 어깨를 덮는 후드(이탈리아어 cappuccio, cappuccin) 부분이 분리되어 있다. 우선 통옷인 수도복을 입고, 그 위에 따로 후드를 쓴다.
반면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후드 부분이 분리되지 않고 통옷에 붙어 있다. 그리고 후드의 고깔 부분도 나머지 두 수도회보다 더 크다. 이탈리아어로 후드를 의미하는 “카푸친”이 더 두드러진다는 데서 수도회의 이름이 나온 셈이다. 그리고 수도복의 색이 에스프레소 커피에 우유 거품을 올린 색이랑 비슷하다고 해서 그 커피 이름이 카푸치노(카푸친을 귀엽게 부르는 말, 존을 조니라고 부르는 것처럼)가 된 것이다.
그래서 복장만 놓고 본다면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은 활동 성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후드가 더 크다는 걸 감안하면 좀 더 은둔자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의 이름도 바로 위에서 말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서 따온 것이다. 2013년 콘클라베에서 자신의 선출을 앞두고 "가난한 이를 기억하라"는 어느 동료 추기경의 말을 듣고서 바로 떠오른 이름이었다.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프랑스어: Ordre des Frères mineur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약칭 '''O.F.M.'''
작은형제회는 탁발수도회다. 탁발(托鉢)은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담은 바리때에 목숨을 맡긴다는 뜻으로 ‘얻어먹는다’는 의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수도원으로 삼아 살면서 탁발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던 형제들이 머무르던 곳을 ‘수도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처’나 ‘집’, ‘장소’로 불렀을 만큼 탁발 정신을 철저하게 살았다.
작은형제회(O.F.M.)의 영성은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복음적 삶에 있다. 작음의 정신을 기초로 회원들 서로 간의 형제애를 중시했고, 수도회라는 말 대신 형제회의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수도사들의 공동성을 표현했다. 이어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 2회인 클라라회를, 1221년에는 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세워 많은 형제자매가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프란치스코회의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작은형제회 캐나다 성 요셉 관구 선교사 출신의 도요한, 배쥐스탱 두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듬해 12월 대전 목동에 수도원을 설립, 국내 첫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1940∼50년대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일시 현존이 끊겼다. 1955년에 수도원을 복구했고, 1963년 프란치스코 법인이 설립됐으며, 1969년 한국 순교복자 준관구로 승격된 데 이어 1987년 관구로 승격됐다.
현재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회원 수는 종신서원자 137명과 유기서원자 16명 등 153명이다.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
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conventuali
프랑스어: Frères mineurs conventuel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Conventual
약칭 '''O.F.M.Conv.'''
‘꼰벤뚜알’(conventualis)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공동의, 수도원의’ 라는 뜻이다. 수도회 설립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교회 밖 문헌상 최초 표현은 1241년 1월 9일 자 공증 문서에 ‘domus conventuales’(꼰벤뚜알의 집)라는 말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거주지를 지칭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교회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1250년 4월 5일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칙서를 통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사목하는 교회를 꼰벤뚜알 성당과 꼰벤뚜알이 아닌 성당으로 구분하고, 꼰벤뚜알 성당에서 미사 봉헌, 성체를 모심, 종을 칠 권리 등 특전을 허락할 때 처음 사용됐다.
이 명칭은 점차 보편화되어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의 회칙 「Ite vos」에 의해 엄수주의파(Osservanti)와 구별되면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고유 명칭이 됐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58년에 이뤄졌다.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국이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로마로 강제 귀환했던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 프란치스코 팔다니(Francisco Faldani) 수사가 일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공부를 마치고 로마에 온 한국인 허철 신부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이 두 사제는 한국 선교를 논의했고 같은 해 10월 6일 관구 차원에서 두 사람 파견을 결정, 팔다니 수사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범일동본당 사목으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수도회는 1959년 당시 대구대목구장 서정길 주교의 요청으로 대구 범어동본당 사목을 맡았고 계속해서 1960년에는 부산 대연동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유치원과 수도원, 성당을 완공했다. 또 미감아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보육원도 시작했다. 부산 오륙도 나환우 마을의 공소 사목도 벌였으며 1964년 9월에는 대구 화선 소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소 육성의 새로운 발걸음을 마련했다.
현재의 서울 한남동 수도원은 1966년 세워졌다. 처음 외국에서 오는 수도회 회원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거주하는 숙소 및 수도원 연락소로 신축됐으나 신학생 숙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피정의 집으로 바뀌었다. 한남동 수도원 내 외국인 유치원 및 국제본당은 외국인 신자들의 만남 장소가 되고 있다.
서울 한남동 국제본당, 인천 갈산동본당, 대구 월배본당, 부산 대연본당과 기장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펼치고 있는 수도회는 서울 외국인 유치원, 한남동 피정의 집, 부산 은하 유치원 등을 통해 교육 활동도 벌이고 있다.
사회복지 활동으로는 통진 프란치스코집, 인천 요셉의 집, 부산 성 프란치스꼬의 집, 평화장터 운영을 들 수 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창설한 국제 마리아 신심 단체 성모 기사회 한국 본부를 두고 월간 「성모기사」를 발행하는 것도 수도회의 큰 몫이다. 아울러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영적 보조도 맡고 있다.
이런 노력 속에 1975년 준관구, 2001년 관구로 승격됐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를 주보로 모신 한국 관구는 2020년 2월 현재 총 71명의 수도 가족을 두고 있다. 종신서원 수사는 65명이고 이중 사제는 48명이다. 국내 8개 수도원, 미국 1개 수도원 등 총 9개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Capuccinorum
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프랑스어: Frères mineurs capucin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
약칭 '''O.F.M. Cap.'''
라틴어 원문 그대로라면 '카푸친 더욱 작은(Minoritas) 형제들의 수도회'로 번역돼야 할 이 수도회는 기도와 형제애, 복음화, 가난, 더욱 작음의 영성으로 프란치스코가 살아간 삶을 닮으려 하는 '형제적 공동체(Fraternitas)'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는 수도사제와 평수사 구분 없이 서로 '형제'로 호칭하고 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성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인준 받은 회칙(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려는 이상에서 비롯됐다.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범과 이미 알려진 의도, 특히 성인의 유언에서 표현된 대로 회칙을 해석해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번째 동료들을 엄격하게 닮고자 하는 개혁운동으로 시작된 것.
카푸친 영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형제애와 관상, 복음화, 가난 및 더욱 작음, 정의평화 및 창조보전 증진을 핵심적 가치로 삼고 있다.
카푸친 개혁의 시초를 장식한 인물은 당시 작은 형제회의 두 가지 중 하나였던 준수회(Observantes) 이탈리아 마르케 관구 바시오의 마태오로, 1525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회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해도 된다는 구두 허락을 받는다.이어 클레멘스 7세는 1528년 칙서를 통해 카푸친 개혁을 '은둔 생활의 작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교회법적으로 인준했고, 이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이라고 생각한 길고 뾰족한 모자(Cappucio)가 달린 수도복을 선택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은 후드 같은 모자, 카푸치오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탈리아어로 카푸치노(Cappuccino)는 '작은 카푸치오'라는 뜻이다.
1535년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 총대리가 된 아스티의 베르나르디노는 수도회를 안팎으로 정비, 이후 카푸친들은 그를 진정한 카푸친 작은 형제회 설립자로 여기게 됐다.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는 프란치스코회 세 가지 중 하나로 인가했다.
국내에는 1986년 7월 아일랜드 성 프란치스코와 성 파트리치오 관구 소속 수도자 4명이 입국, 서울대교구에 진출함으로써 시작됐다. 한국 카푸친은 모두 16명이며, 이 가운데 6명은 선교사로 종신서약을 한 사제와 평형제가 각각 3명이다. 한국인 종신서약자는 총 7명으로, 사제는 3명이고 평형제는 4명이다. 나머지 3명은 수련자다.
서울 지역 형제회 경당을 개방, 고해성사를 상설화하고 성체조배 경당으로 발전시켰으며, 수련소가 있는 가평 지역 형제회에선 소규모 피정을 지도한다.
다음은 한국 가톨릭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홈페이지.
심지어 개신교 수도회까지도 존재한다.
1. 개요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가톨릭교회의 수도회다. 프란치스코회의 회원과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무리를 “프란치스칸(Franciscan)”이라고 부른다. 작음과 청빈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생전에 나환자들을 돌보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도 많이 한다.
2. 특징
'프란치스칸'(Franciscan)이라 불리는 수도공동체는 크게 3갈래로 나뉜다. 먼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맨 처음에 직접 조직한 작은형제회는 1회,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와 함께 세운 글라라 수녀회는 2회, 프란치스코가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 수도 3회와 율수 3회, 재속프란시스코회를 통틀어 3회로 지칭된다.
프란치스칸 1회인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물러난 이후 회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열정파니 이완파니 온건파니 하는 3개 분파로 나뉘어 투닥투닥 싸웠다. 사실 마구 싸웠다기보단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도회를 꾸려나가며 '내가 진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의지다!'를 서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2인자라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대전기를 편찬했는데, 그의 부모가 큰 병을 앓고 있는 아기였던 그를 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자 그가 기도를 해주었고, 이 기도로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그에게 성인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Buona Ventura)!"란 말을 했다고 한다. 부모는 그 길로 본래 조반니였던 아이의 이름을 보나벤투라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여하간 이 보나벤투라는 수장을 잃고 갈라졌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다시 하나로 뭉친 제2의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이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는 스콜라 철학자이기도 하다.[3]
하지만 추기경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나벤투라가 선종한 후, 작은형제회는 다시금 수많은 갈등 끝에 각각 엄수파와 꼰벤뚜알파로 나뉘었는데, 꼰벤뚜알은 엄수파가 주장한 철저한 청빈과 은거 생활보다는 설교와 신학 연구, 사회 내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해내는데 더욱 주력했다. 교황은 꼰벤뚜알을 더 밀어주었기 때문에 당분간 꼰벤뚜알이 주축이 된 프란치스코회는 다시 개혁되어 회칙엄수파가 갈라져나와 엄격한 생활로 돌아갔다. 이 분파는 작은형제회로 다시 뭉쳤지만 오래지 않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특유의 가난함을 내세운 카푸친회라는 분파가 또 갈라져나와 프란치스칸 내 세력을 키웠다.
그렇게 프란치스칸 1회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카푸친[4] 작은형제회'''로 완전히 나뉘었다. 현재 이 3개 분파는 서로 갈등한다기보다 상부상조하며 수도회의 큰 틀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한다.
고깔 모양의 후드가 달린 검정색, 고동색(카푸치노 커피색)입니다. 검정색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고동색은 “작은형제회”와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복장이다. 세 수도회 모두 허리에는 흰색 허리끈을 두른다.
언뜻 색깔만 다르지 복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수도복에서 머리와 어깨를 덮는 후드(이탈리아어 cappuccio, cappuccin) 부분이 분리되어 있다. 우선 통옷인 수도복을 입고, 그 위에 따로 후드를 쓴다.
반면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후드 부분이 분리되지 않고 통옷에 붙어 있다. 그리고 후드의 고깔 부분도 나머지 두 수도회보다 더 크다. 이탈리아어로 후드를 의미하는 “카푸친”이 더 두드러진다는 데서 수도회의 이름이 나온 셈이다. 그리고 수도복의 색이 에스프레소 커피에 우유 거품을 올린 색이랑 비슷하다고 해서 그 커피 이름이 카푸치노(카푸친을 귀엽게 부르는 말, 존을 조니라고 부르는 것처럼)가 된 것이다.
그래서 복장만 놓고 본다면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은 활동 성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후드가 더 크다는 걸 감안하면 좀 더 은둔자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의 이름도 바로 위에서 말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서 따온 것이다. 2013년 콘클라베에서 자신의 선출을 앞두고 "가난한 이를 기억하라"는 어느 동료 추기경의 말을 듣고서 바로 떠오른 이름이었다.
2.1. 작은형제회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프랑스어: Ordre des Frères mineur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약칭 '''O.F.M.'''
작은형제회는 탁발수도회다. 탁발(托鉢)은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담은 바리때에 목숨을 맡긴다는 뜻으로 ‘얻어먹는다’는 의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수도원으로 삼아 살면서 탁발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던 형제들이 머무르던 곳을 ‘수도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처’나 ‘집’, ‘장소’로 불렀을 만큼 탁발 정신을 철저하게 살았다.
작은형제회(O.F.M.)의 영성은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복음적 삶에 있다. 작음의 정신을 기초로 회원들 서로 간의 형제애를 중시했고, 수도회라는 말 대신 형제회의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수도사들의 공동성을 표현했다. 이어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 2회인 클라라회를, 1221년에는 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세워 많은 형제자매가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프란치스코회의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작은형제회 캐나다 성 요셉 관구 선교사 출신의 도요한, 배쥐스탱 두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듬해 12월 대전 목동에 수도원을 설립, 국내 첫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1940∼50년대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일시 현존이 끊겼다. 1955년에 수도원을 복구했고, 1963년 프란치스코 법인이 설립됐으며, 1969년 한국 순교복자 준관구로 승격된 데 이어 1987년 관구로 승격됐다.
현재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회원 수는 종신서원자 137명과 유기서원자 16명 등 153명이다.
2.2.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
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conventuali
프랑스어: Frères mineurs conventuel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Conventual
약칭 '''O.F.M.Conv.'''
‘꼰벤뚜알’(conventualis)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공동의, 수도원의’ 라는 뜻이다. 수도회 설립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교회 밖 문헌상 최초 표현은 1241년 1월 9일 자 공증 문서에 ‘domus conventuales’(꼰벤뚜알의 집)라는 말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거주지를 지칭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교회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1250년 4월 5일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칙서를 통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사목하는 교회를 꼰벤뚜알 성당과 꼰벤뚜알이 아닌 성당으로 구분하고, 꼰벤뚜알 성당에서 미사 봉헌, 성체를 모심, 종을 칠 권리 등 특전을 허락할 때 처음 사용됐다.
이 명칭은 점차 보편화되어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의 회칙 「Ite vos」에 의해 엄수주의파(Osservanti)와 구별되면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고유 명칭이 됐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58년에 이뤄졌다.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국이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로마로 강제 귀환했던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 프란치스코 팔다니(Francisco Faldani) 수사가 일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공부를 마치고 로마에 온 한국인 허철 신부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이 두 사제는 한국 선교를 논의했고 같은 해 10월 6일 관구 차원에서 두 사람 파견을 결정, 팔다니 수사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범일동본당 사목으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수도회는 1959년 당시 대구대목구장 서정길 주교의 요청으로 대구 범어동본당 사목을 맡았고 계속해서 1960년에는 부산 대연동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유치원과 수도원, 성당을 완공했다. 또 미감아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보육원도 시작했다. 부산 오륙도 나환우 마을의 공소 사목도 벌였으며 1964년 9월에는 대구 화선 소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소 육성의 새로운 발걸음을 마련했다.
현재의 서울 한남동 수도원은 1966년 세워졌다. 처음 외국에서 오는 수도회 회원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거주하는 숙소 및 수도원 연락소로 신축됐으나 신학생 숙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피정의 집으로 바뀌었다. 한남동 수도원 내 외국인 유치원 및 국제본당은 외국인 신자들의 만남 장소가 되고 있다.
서울 한남동 국제본당, 인천 갈산동본당, 대구 월배본당, 부산 대연본당과 기장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펼치고 있는 수도회는 서울 외국인 유치원, 한남동 피정의 집, 부산 은하 유치원 등을 통해 교육 활동도 벌이고 있다.
사회복지 활동으로는 통진 프란치스코집, 인천 요셉의 집, 부산 성 프란치스꼬의 집, 평화장터 운영을 들 수 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창설한 국제 마리아 신심 단체 성모 기사회 한국 본부를 두고 월간 「성모기사」를 발행하는 것도 수도회의 큰 몫이다. 아울러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영적 보조도 맡고 있다.
이런 노력 속에 1975년 준관구, 2001년 관구로 승격됐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를 주보로 모신 한국 관구는 2020년 2월 현재 총 71명의 수도 가족을 두고 있다. 종신서원 수사는 65명이고 이중 사제는 48명이다. 국내 8개 수도원, 미국 1개 수도원 등 총 9개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
2.3. 카푸친 작은형제회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Capuccinorum
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프랑스어: Frères mineurs capucin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
약칭 '''O.F.M. Cap.'''
라틴어 원문 그대로라면 '카푸친 더욱 작은(Minoritas) 형제들의 수도회'로 번역돼야 할 이 수도회는 기도와 형제애, 복음화, 가난, 더욱 작음의 영성으로 프란치스코가 살아간 삶을 닮으려 하는 '형제적 공동체(Fraternitas)'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는 수도사제와 평수사 구분 없이 서로 '형제'로 호칭하고 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성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인준 받은 회칙(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려는 이상에서 비롯됐다.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범과 이미 알려진 의도, 특히 성인의 유언에서 표현된 대로 회칙을 해석해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번째 동료들을 엄격하게 닮고자 하는 개혁운동으로 시작된 것.
카푸친 영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형제애와 관상, 복음화, 가난 및 더욱 작음, 정의평화 및 창조보전 증진을 핵심적 가치로 삼고 있다.
카푸친 개혁의 시초를 장식한 인물은 당시 작은 형제회의 두 가지 중 하나였던 준수회(Observantes) 이탈리아 마르케 관구 바시오의 마태오로, 1525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회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해도 된다는 구두 허락을 받는다.이어 클레멘스 7세는 1528년 칙서를 통해 카푸친 개혁을 '은둔 생활의 작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교회법적으로 인준했고, 이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이라고 생각한 길고 뾰족한 모자(Cappucio)가 달린 수도복을 선택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은 후드 같은 모자, 카푸치오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탈리아어로 카푸치노(Cappuccino)는 '작은 카푸치오'라는 뜻이다.
1535년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 총대리가 된 아스티의 베르나르디노는 수도회를 안팎으로 정비, 이후 카푸친들은 그를 진정한 카푸친 작은 형제회 설립자로 여기게 됐다.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는 프란치스코회 세 가지 중 하나로 인가했다.
국내에는 1986년 7월 아일랜드 성 프란치스코와 성 파트리치오 관구 소속 수도자 4명이 입국, 서울대교구에 진출함으로써 시작됐다. 한국 카푸친은 모두 16명이며, 이 가운데 6명은 선교사로 종신서약을 한 사제와 평형제가 각각 3명이다. 한국인 종신서약자는 총 7명으로, 사제는 3명이고 평형제는 4명이다. 나머지 3명은 수련자다.
서울 지역 형제회 경당을 개방, 고해성사를 상설화하고 성체조배 경당으로 발전시켰으며, 수련소가 있는 가평 지역 형제회에선 소규모 피정을 지도한다.
3. 한국 프란치스코회
다음은 한국 가톨릭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홈페이지.
심지어 개신교 수도회까지도 존재한다.
- 성공회 성 프란시스 수도회(남자)
- 기독교 동광원 수도회 - 이 공동체의 경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창립자 이현필은 프란치스코 성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