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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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어: Sanctus Bonaventura
영어: Saint Bonaventure
1221년 경 이탈리아 바뇨레지오∼1274년 7월 15일 프랑스 리옹.
이탈리아의 추기경, 가톨릭 신학자 및 교회학자,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총장, 스콜라 철학 철학자 및 사상가.
가톨릭의 성인이며 축일은 7월 15일. 바뇨레지오 출신이라 보나벤투라 다 바뇨레지오라고도 하며 별칭은 '''세라핌 박사'''. 한국 가톨릭에서는 정식으로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3갈래 길> 등의 저서를 포함하여 성서 주석, 500여 편의 설교를 남긴, 초대 교부들 뺨치게 권위 있는 교회박사다. 얼만큼이냐면 당대 이슬람 신자들에게도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상징물은 성체, 성합[1] , 빨간색의 추기경 모자. 성화에서는 열이면 아홉 수도복에 빨간 망토 같은 것을 걸치거나 추기경 모자를 쓰고 있거나 옆에 추기경 모자가 있다. 신학자 및 신학생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더불어 단순한 기독교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위치도 탁월한 곳에 있는 사람인데, 스콜라 철학에선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2] 라고 일컬어진다. 신학적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재건한 제2의 창시자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사상적으로는 막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부터 도전을 받던 시대에 기존 플라톤적 사상이나 교부들의 신학을 적절히 융통성 있게 지켰다는 의미가 있겠다.
'''운이 좋다'''(good fortune)는 뜻을 지닌 이 이름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지어주다시피하여 붙여졌다. 경위는 아래 생애 항목에서 자세히 서술된다. 보통 남자 이름이나 세례명으로 쓰이며 성(姓)으로도 쓰인다.
2. 생애
2.1. 유년시절
본명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바뇨레지오(Bagnoregio)에서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3] 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 대해서 딱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중요한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아기 보나벤투라가 큰 병을 앓았을 때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해줄 것을 청하자, 프란치스코가 기꺼이 이 사경을 헤매던 아기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란치스코는 '''"이것 참 좋은 소식이로구나!(O, Buona Ventura!)"'''라고 감탄했고, 그를 기념하여 아기의 이름도 조반니에서 보나벤투라로 바꾸었다. 보나벤투라는 이 이름을, 17살이 되던 1238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며 수도명으로 그대로 썼다… 고 하는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강론에 따르면 그가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243년부터라고 한다.
2.2. 파리 유학과 교수 생활
1234년, 보나벤투라는 영국에서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알렉산더 핼렌시스(Alexander of Hales, 1185~1245)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깊은 영감을 받았고, 또한 총애받는 제자가 되었다. 얼만큼이였나면 알렉산더가 이 때의 보나벤투라를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렇게 파리대학에서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마친 그는 알렉산더를 따라 파리에 있는 작은형제회에 입회한다. 1250년부너 1252년까지 기념비적인 저서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금언에 관한 주석>을 저술하는 동안 1248년부터는 자신이 수학했던 파리대학에 교수로 부임, 1257년까지 교편을 잡았으며 같은 해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수도자 최초로 파리대학 신학박사 칭호를 받고 '''작은형제회 총장이 된다.'''
교수가 된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강의 활동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재속 수도자[4] 가 아닌 탁발 수도자를 교수로 인정하지 못하는 동료 교수들이 자꾸 태클을 걸었던 것이다. 특히나 기욤 드 생따무르(Guillaume de St. Amour)라는 재속 교수가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인신공격 수준으로 맹비난했다. 친구 토마스 아퀴나스나 프란치스코회 동료인 요크의 토마스와 힘을 합친 보나벤투라는 <마지막 시대의 환난>,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그의 입장을 조목조목 '''상냥하게''' 따져가며 반박하였고, 1256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기욤을 단죄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렇게 겨우 강의할 기회를 얻은 보나벤투라이지만,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작은형제회 총장으로 피선되어 곧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이 때 그의 나이 37세.
2.3.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총장으로서
거기에서도 해결해야 할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본래 프란치스코회는 엄격한 청빈관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사후 30년이 훌쩍 지나 마땅한 중심이 없어진 공동체는 분열되기 마련이라 신령파와 이완파로 나뉘어 찢어진 상태였다. 신령파는 청빈을 지나치게 고집하였고, 이완파는 이제 좀 융통성 있는 수도생활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보나벤투라의 선임은 복자 조반니 다 파르마(Giovanni da Parma, 1209~1289)였는데, 일찍이 프란치스코회 수사 중 1명인 조아키노 다 피오레(Gioacchino da Fiore, 1135~1202)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완전한 청빈관을 따라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았다'든지 '성부와 성자의 시대는 실패했고 성령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일종의 종말론적인 주장을 펴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었던 데다, 조반니 본인도 그 주장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파가 수도회 전체에 미칠 것을 우려하여 보나벤투라에게 후임을 맡긴 뒤 80세로 죽을 때까지 은수생활에 접어들었다(…). 이 조아키노는 개신교 쪽에선 제법 신선한 혁명을 일으켰다 평가하고 있으나… 어쨌든 교황은 그를 파문시킨 이후 예수와 12사도가 청빈한 생활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5]
총장이 된 보나벤투라는 먼저 교통정리를 실시했다. 각지에 설립된 수도원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수도회 내부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각 분파의 분쟁자를 화해시키려 편지를 써 돌린 그는, 그 안에서 동료들이 사도적 직무를 다 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수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가난함을 강조하는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자신이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성 프란치스코가 묵상 도중 성흔을 받았던 라베르나 산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을 썼다. 1260년에 나르본느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첫 회헌을 선포한 그는, 수도회의 일치에 기여하기 위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공식적으로 엮으라는 의뢰를 받아 작업에 착수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는 1263년에 완성되어 피사 총회에 제출되었고, 1266년에 열린 파리 총회에서는 이 대전기(Legenda Maior)[6] 만 남기고 다른 프란치스코 전기를 모두 파기하기로 하기까지 한다. 이 덕분에 하나된 프란치스코의 의지 아래 수도회는 다시 뭉칠 수 있었으며, 중재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2의 창립자'''로 존경받게 된다.
2.4. 알바노의 추기경에서 선종까지
보나벤투라는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로부터 영국 요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1273년까지 파리대학에 출강하여 강의와 설교를 하였으며, 프랑스의 왕 루도비코 9세 일가 앞에서도 설교할 정도로 저명있는 신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활발했던 활동은 자신의 업적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닌, 교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외부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바쁜 세월을 보내던 1273년 봄, 여느 때처럼 파리대학에서 천지창조에 대해 강의를 하던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지지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이탈리아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임명'''하니 이번에는 사양치 말고 로마로 튀어오라는 서한이 도착한다.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순명을 어길 수 없는 그는 로마를 향한 여정을 떠났고, 무제로라는 곳의 작은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때마침 추기경 임명 칙서를 전하러 교황 사절이 도착했다. 그 때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부엌에서 친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으나, 이 모습을 표현한 성화가 존재할 정도로 그의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는 자기가 설거지를 다 끝낼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
1273년 5월 알바노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받은 보나벤투라는 대신 작은형제회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된 도미니코회의 피에르 드 타랑테즈와 페드로 훌리아는 각각 인노첸시오 5세와 요한 21세 교황이 되었는데…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7] 에 추기경 자격으로 참석한 보나벤투라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축일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자리에서 교황과 가톨릭, 정교회 사제들 앞에서 강론을 한 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회기 중이던 7월 15일 새벽에 선종하였으며, 교황과 모든 사제들이 그의 죽음을 크게 애석해했다. 대체로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게 정설이지만, 일각에선 보나벤투라가 추기경이 되자마자 선종한 것을 심상치 않게 여겨 독살당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카더라.
보나벤투라의 성해(聖骸)는 리옹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되었고,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더불어 1588년 3월 14일에는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던 1562년, 개신교 중 칼뱅파인 위그노 교도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광장에서 관 채로 싸그리 불태워버린(…) 사건이 벌어지는데, 누군가가 그 와중에 그의 두개골만은 어찌어찌 빼돌려 잘 보관하고 있다가 프랑스 혁명 때 그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 망했어요. 그렇게 그를 기념할 만한 물질적인 것이라곤 그저 그가 남긴 숱한 저서들밖에는 없게 되었다.
3. 여러가지 일화
성 보나벤투라에 대한 일화는 대부분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들은 대학 동기였고, 같은 수도자였으며, 교류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친한 친구였을 거라 추측하는 쪽이 많다. 다만 성화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없기도 하고 사상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었으니, 절친까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교황의 명을 받아 각각 시를 지어와 누구의 시가 더 의도에 합당한지 대조하기 위해 서로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다.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고, 보나벤투라는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라고 칭찬하며 즉석으로 '''자신이 지은 시를 찢어버렸다.''' 결국 시는 고를 것도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으로 뽑혔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하나는 보나벤투라가 한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전기>를 집필할 때의 일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투라를 만나러 왔다가 마침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집필 삼매경에 빠져있는 보나벤투라를 보게 되는데, "아이쿠 방해하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는 이야기.
기타 짧은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이라고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와, 한 할머니가 보나벤투라를 만나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선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이라고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보나벤투라는 단테 알레기에리의 신곡 천국편 12곡에 등장하여, 단테에게 안내자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단테 본인이 토마스 아퀴나스나 보나벤투라의 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도 있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11곡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찬양하는 대신 자신이 속한 도미니코회는 대차게 깠고, 보나벤투라는 다음 12곡에서 성 도미니코의 업적을 말한다.
4. 보나벤투라와 스콜라 철학
보나벤투라의 성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미적인 신비가'''. 머리보다 가슴이 더 중요한 사상가이다.
지금이야 니체와 프로이트의 철학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뜬구름 잡기식의 이야기겠지만, 13세기는 철학이 신학과 기민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신학이 없는 철학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철학계의 큰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1255년 3월 파리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종교에 융합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와 충돌점이 아주 많았고, 잘못하면 종교적 사상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열광하여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먼 자연주의적 사상을 채택한 사람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든 그리스도교에 흡수시키려 노력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데, 후자에 속하는 인물 중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바로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보나벤투라 및 로저 베이컨이나 도미니코회 회원인 대 알베르토[9] 및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아베로에스(Averrhoës)라는 에스파냐 출신 이슬람 철학자의 소개가 중요한데, 이슬람식 이름으로 이븐 루슈드(Ibn Rushd)라고 하는 그는 자신이 크게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그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한 업적으로 유럽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까지 나타나게 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플라톤으로 메우려 했던 이븐 시나까지도 까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감쌌다. 이렇게 지나치리만치 진취적이었던 아베로에스는 이슬람 사회에서 대차게 까였는데, 역으로 유럽에서는 여태까지 영향을 끼치던 이븐 시나를 밀치고 일명 '라틴아베로에스주의'를 구축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 그 사상이 니체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조심스러운 중립적 성향이었던 보나벤투라는 처음부터 아베로에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리 비판적인 성향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파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아베로에스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낀 이후로는 태도가 바뀌었다. 大 알베르토는 물론이요 그에게서 배운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의 사상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접목 방식으로 새로운 철학을 구축했던 것과 달리, 보나벤투라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인 로저 베이컨의 지나치리만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주장을 비판해야만 했다. 가만 들어보니,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 그의 주장은 신학도 결국 과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수도자로서는 잘못된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나벤투라가 1267년 아베로에스파의 주장을 보수적 성향의 파리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에게 고발함에 따라, 1270년에는 파리 교구가 아베로에스파가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13개 명제를 단죄, 로저 베이컨도 이단으로 규정되어 수도회에서 쫓겨났다.(…) 이것만으로 아베로에스파의 활동이 멈추지 않아 보다못한 교황청이 1277년 1월 탕피에에게 자료를 가져오라 하지만, 성질 급한 탕피에는 자기가 직접 219개의 명제를 만들어 그 내용을 몽땅 단죄해 버린다. 이 사건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긍정적으로 생각한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게도 위기로 다가왔다. 다만 그 때는 보나벤투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고 다 죽은 후였기 때문에…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철학을 신학의 우위에 두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죄당하지 않았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간단히 말하면 보나벤투라에게 쫓겨난 로저 베이컨은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고, 大 알베르토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대세였던 그 사상을 그리스도교와 잘 버무려 어떻게든 유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중도적 입장, 보나벤투라는 새로 밀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신경 쓰기보다 본래의 플라톤적 관념에 더 충실한 입장이었다.
4.1.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 지능이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음까지 감동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
영적인 보나벤투라와 지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각은, 최상위의 윤리의식이자 양심의 불꽃이라 불리는 '신데레시스(synderesis)'에 대한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보나벤투라는 "이성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빛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으며, 진리란 명상과 기도로 영혼을 끊임없이 단련하여 하느님과 직접 일치할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성이 아예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1차적인 단계이자 도구라는 이야기이며, 간단히 말해 머리로 지식을 습득한 뒤에도 가슴으로 통찰까지 하여야만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일단 하느님을 본 경험을 이끌어내는 '''이성'''의 단계와 그를 통해 하느님을 본받은 영혼을 느끼는 '''감각'''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하느님과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종의 황홀감, 즉 '''관조(觀照)'''의 단계에 이르는 3가지 과정이 중요하다는 관점. 아우구스티노 같은 초대 교부들의 의지를 그대로 받든 것이며, 그야말로 수도자답고 사제다운 발상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진리의 인식은 그와 반대로 작용한다. 기도나 명상으로 영혼의 단련을 통해 하느님을 보지만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으로 '응시하는' 것을 통해 머리를 굴려 그 뜻을 이해하라는 이야기다.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굴려 이해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창하는 것은 실천적 지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리스도교를 그 나름대로 융합한 결과이다.
이 의견의 차이는 그들이 속한 수도회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보나벤투라가 속한 프란치스코회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절반은 폐쇄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속한 도미니코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고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교육시키고 전파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보나벤투라가 '''세라핌 박사'''라 불리는 이유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성흔을 받은 라베르나 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여섯 날개 세라핌의 환영을 보았던 것도 있고, 그런 그가 저서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그 세라핌의 여섯 날개[10] 로 나누어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 성체성사 때 신자들에게 분배할 성체를 담은 상자.[2] 이렇게 말은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그리스도교와 일치할 수 있을 때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그게 아닌 부분에선 가차 없다.[3] 보나벤투라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다.[4] 수도자라 하였지만 이들은 엄연히 말해 세속에 속한 평신도이다. 알렉산더 헬렌시스도 재속 수도자로 보인다.[5] 예수와 12사도는 여타 제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금전적인 지원도 받고 있었던 데다, 12사도 중 몇 명은 집이 그냥 부자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치를 했단 소리는 아니지만, 딱히 청빈함을 내세워 설교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6] 베네딕토 16세에 의하면, 라틴어인 '레젠다'(Legenga)는 상상의 산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읽어야 하는" 권위 있는 본문을 의미한다.[7] 개최한 주된 이유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동로마 황제 미카일 8세와 많은 정교회 주교들이 참석했으나, 이는 동로마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후 약 100년여 동안 동서 교회 일치 시도는 중단된다.[8]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예수의 오른편 십자가에 못박혔던 죄수. 이름은 디스마라고 하며, 가톨릭에서는 성인(聖人)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3월 25일. 반면 예수의 왼편 십자가에 못박혔던, 끝까지 뉘우치지 않은 강도의 이름은 제스따스라고 한다. 물론 제스따스에게는 공경 그런 거 없다.[9] 축일 11월 15일.[10] 실제 챕터 수는 7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