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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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노엘 바뵈프(François-Noël Babeuf)
1760년 11월 23일 ~ 1797년 5월 27일

'''그라쿠스(Gracchus) 바뵈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라는 인간의 스프링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구부러지기 때문이다.''' 인민은 억압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 사회의 존재 이유가 최대 다수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런 반란은 옳은 일이다. 인민이 아직 허리가 꺾이도록 구부러져 있다면, 통치가 뭐라고 말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혁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만약 혁명이 완수된 것이라면 지금의 통치자들이 죄를 저지른 셈이다."

바뵈프의 최후 변론 中

1. 개요
2. 생애
3. 사상
4. 평가


1. 개요


'''최초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1][2]
프랑스 혁명기에 활동했던 혁명가,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 당대의 무수한 혁명가 중에서도 초급진파에 속하던 사람으로 앙시앵 레짐과 기득권층, 자본가, 부르주아 등에 저항하여 '''평등'''을 강조하며 반체제 운동을 펼쳤다.

2. 생애


바뵈프는 1760년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노동 현장을 전전하다가 15살부터 측량과 토목 분야에서 일을 했다. 여기서 그는 토지대장과 지대 징수를 도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접하며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터진 후에는 정치에 참여하여 지방 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하며 혁명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혁명 정부에서 펼치는 정책들이 '평등'이라는 이념과는 동떨어진 것을 느끼고 이를 비판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를 비관적으로 보았고[3], 1794년에는 <호민관>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킨 테르미도르파를 비판하다 1795년 2월 체포되기도 하였다.
석방된 이후 바뵈프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과격파 인사들과 함께 '평등'을 강조하며 '팡테옹 클럽'[4]을 형성하고 <민중의 호민관>(Tribun du peuple)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바뵈프와 팡테옹 클럽은 총재 정부를 비판하며 폭력혁명을 통한 체제의 전복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의 쟁취를 주장했다. 이들은 '반란위원회'를 구성해서 무장 봉기를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밀고로 인해 실패했으며, 총재 정부는 팡테옹 클럽을 폐쇄하고 바뵈프 등 다수의 평등주의자들을 체포했다.[5][6] 바뵈프는 1797년 2월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바뵈프는 법정을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방편으로 이용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그 정당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고 1797년 5월 27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3. 사상


그것은 특권층과 민중,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전쟁이다. '''민주주의란 넉넉이 소유한 자들이 넉넉지 못한 자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의무이다.'''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관리 제도를 세워 사유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재능을 자기 직업에서 발휘하게 하고, 거기서 나온 생산물을 공동으로 보관하게 하고, 분배를 공동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1795년 11월, 《인민 논단》,「프랑스 혁명이란 무엇인가」 中

평등! 자연의 최초의 소망! 인간의 최초의 욕구, 모든 정당한 조직을 함께 묶어주는 제일의 결속! 우리는 진정한 평등을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쟁취할 것이다. 평등과 우리 사이에 서 있어서 우리와 충돌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우리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담긴 평등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 평등을 우리들 한복판에서 우리의 지붕 아래서 당장 원한다. 우리는 평등을 위한 모든 것에 동의하며 평등만을 가질 수 있다면 그밖에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프랑스 인민이여, 완벽한 행복에 눈과 가슴을 열어라. 우리를 따라 평등한 사람들의 공화국을 인정하고 선포하라!

1796년 4월, 「평등주의자들의 선언(Manifesto of the Equals)」[7]


4. 평가


"좌파의 태두는 바뵈프가 아닌가 싶어요. 굉장히 정직한 분이에요. 바뵈프의 마지막 변론문을 읽으면 가슴이 찡해서 눈물이 흐를 정도입니다. '''그거 읽고 나서 좌파가 됐다가 아침밥 먹고 나서 다시 우파가 될 정도예요.'''"

보수논객 전원책의 평가 #

[1] 그가 이런 말을 듣는 이유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나오기 이전에 그와 비슷한 정치적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사상이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에게 이어지고, 그것이 나중에 레닌을 만나 그 일부가 레닌주의에 들어간다.[2] 참고로 바뵈프가 가졌던 사상을 '바뵈프주의(Babouvisme)'라 부르기도 한다.[3]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바뵈프는 로베스피에르파를 비관적으로 본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4] 여기에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에도 여전히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는 자코뱅 잔당, 급진적 상퀼로트, 평등주의자 등 여러 좌익들이 모여 있었다.[5] 이 사건을 '평등주의자의 음모(Conspiration des égaux)' 혹은 '민중의 사회 사건(Societé des égaux)'이라고 한다.[6] 참고로 바뵈프를 진압한 군인들을 이끈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7] 이 글은 바뵈프가 작성한 것은 아니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시인 실뱅 마레샬(Sylvain Maréchal)이 쓴 것이다. (다만 마레샬은 바뵈프보다 더 폭력적인 성향이었다.) 바뵈프는 그가 쓴 이 문건을 인정하고 이를 자신의 반체제 운동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썼다. 그렇기에 이 글은 바뵈프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데는 무리가 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