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

 


[image]
'''Friedrich III'''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생몰년도'''
1415년 9월 21일 ~ 1493년 8월 19일 (77세)
'''출생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사망지'''
오스트리아 린츠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452년 3월 19일 ~ 1493년 8월 19일
'''독일 국왕''' (로마왕)
1440년 2월 2일 ~ 1493년 8월 19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 생애
2. 문화적 영향
3. 가족
3.1. 부인: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르 공주
4. 평가
4.1. 생존왕
5. 여담


1. 생애


오스트리아 에른스트 공작의 아들로, 1424년 부친이 죽자 합스부르크 가(家)의 영지인 이너오스트리아 지방을 상속받았다.
1439년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고 서열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재위기간 내내 끊이지 않은 친척들과의 갈등과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 등으로 시달렸다.
이탈리아교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프리드리히는 1452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롬바르디아의 왕관을 받았고, 다시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교황에 의해서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된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한 때는 보헤미아헝가리독일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실하기도 하였으며 정부 개혁을 추진할 수 없는 무능력, 친족들과 독일귀족들의 반란이 겹치면서 독일에서의 정사에서 물러나는 등 상당한 시련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나 1463년에 분할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영지가 아들이 막시밀리안의 이름 하에 재통합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지반을 만들었고, 1477년에 막시밀리안과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서 풍요로운 저지대 지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명군 마차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에게 1485년 빈을 빼앗기는 등 오스트리아 대부분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으나 마차시 사후인 1490년~1491년의 전쟁에서 막시밀리안이 헝가리를 격파함으로 오스트리아를 재탈환하였다.
부인이 사망한 이후로 26년을 더 살긴 하는데 재혼을 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서 다리를 절단하다가 사망하는데, 무덤에 묻힐 때 절단된 다리를 함께 넣어줬다.

2. 문화적 영향


중세 말의 다른 통치자들처럼 연금술과 마술, 천문학에 몰두했으며 여러 인문주의자들을 교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서적과 귀금속들을 수집하였다. 또한 성지순례를 한(1437) 몇 안되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3. 가족



3.1. 부인: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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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르
36살의 프리드리히는 18살의 포르투갈의 공주인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하여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1세와 이후 바이에른의 공작부인이 되는 쿠니쿤데를 낳게 된다.[1] 결혼 당시 프리드리히는 특사를 파견해서 미래의 신부가 될 엘레오느르의 모습을 미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기를 원하는데 당시 프리드리히가 받아본 엘레오노르의 초상화는 예쁘고 귀여워서 만족스러워 했고 엘레오노르의 오빠인 아폰수5세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게 된다. 이때의 엘레오노르는 프리드리히와 프랑스의 후계자 중에 남편감을 선택 할 수 있었는데 프리드리히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황후"의 타이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였는데 이후로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프리드리히는 아내가 데려온 시종을 모두 돌려보내 아내를 향수병에 시달리게 하고 아내의 지참금을 자기가 홀라당 써버린다. 거기다 아이 몇몇이 어려서 사망하자 부인에게 "포르투갈 음식을 먹여서 그래! "라고 했다고 한다.
부인은 물론 자녀들과의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고, 자녀의 양육은 아내인 엘레오노르가 모두 담당하게 된다. 특히나 아내는 살아남은 아들인 막시밀리안에게 집착적으로 애정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당시의 모든 남자들이 비슷했을거 같긴 하지만 특히 프리드리히는 더더욱 무뚝뚝 했던것 같다.

4. 평가



4.1. 생존왕


평화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훌륭한 통치로 국토를 평정해서가 아니라 "한 게 없어서" 평화왕이었다. 죽은 뒤 '신성로마제국의 게으름뱅이'라는 경멸이 담긴 별칭이 붙여졌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나쁜 평판을 받은 황제였다. 그러나 무능력한 프리드리히 3세에게도 한 가지 재주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오래 사는 것'이었다. 그가 끈덕지게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은 적을 죽였다."
먼저 사촌인 알브레히트 2세가 즉위 1년만에 급서하면서 그에게 황제의 자리가 굴러들어 왔다.
그의 조카이자 피후견자였던 알브레히트 2세의 유복자 라디슬라스는 1457년 겨우 17세로 요절했다.
프리드리히 황제의 동생 알브레히트가 형에게 영지 분할 상속을 요구했는데 황제가 거절하자 형을 빈에 감금했다. 프리드리히는 일가를 이끌고 겨우 도망갔는데 1463년 동생 알브레히트가 사망, 프리드리히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통치권을 얻었다. 그 자신은 무능한 군주였지만 합스부르크의 모토인 결혼과 자식 낳기 하나만큼은 잘 했기에 최종적인 승자가 된 셈.
후대에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기초를 앃아두었기에 평가가 더 좋다.

5. 여담


  • A.E.I.O.U. 라고 하는 문장을 즐겨 사용했고 여기에 마술적 힘이 있다고 여겨 그 뜻을 누설하지 않았다. 소실된 것으로 여겨지다가 1666년 발견된 그의 노트에는 독일어로 'Alles Erdreich ist Österreich untertan'(지상의 모든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복종한다), '라틴어로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오스트리아가 전 지구를 다스린다)라 적혀 있다. 하지만 같은 노트의 또 한 페이지에는 라틴어로 ‘En, amor electis, iniustis ordinor ultor; Sic Fridericus ego mea iura rego’(보아라,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불의(不義)한 자들에게 두려움받는다. 고로 나, 프리드리히는 정의롭게 통치한다)라 적혀 있다. 어떠한 한 풀이가 옳다기보다는 'A.E.I.O.U.'란 문자열 자체와 그에 깃든 마술적 힘을 사랑했고 이에 여러 뜻을 자유롭게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가 전 세계를 다스리란 믿음은 비록 그의 당대에는 비웃음을 당했겠지만 결국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그 외에도 신성로마제국의 공식 칭호로 최종 정착된 '독일 국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프리드리히 3세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1485년 발표한 평화칙령에서 사용했다. 이는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황제에 의해 1512년 정식으로 채택된다.

[1] 총 3남 2녀를 낳았는데, 3명은 어려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