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Haus Habsburg'''
'''House of Habsburg'''
[image][1]
[image]
[image]
1. 개요
2. 역사
2.1. 시골 백작에서 제국의 황제로
2.3. 최전성기
2.5. 중흥기
2.6. 군주제 폐지 및 제위 박탈
3. 스페인 압스부르고
4. 특기할 사항
4.1.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
4.2. 가풍
4.3. 근황
4.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라틴어)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독일어) Kriege führen mögen andere, du, glückliches Österreich, heirate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2]

A.E.I.O.U.[3]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황제위를 세습하면서 근대 유럽의 유일한 황실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유럽에서 황제, 제국을 칭하려면 로마의 후예여야 하는데 그건 신성로마와 동방로마뿐이었고, 동로마는 멸망했기 때문이다. 전성기 영국도 잉글랜드 왕이자 무굴제국 황제니 대영제국 겸 폐하라 했지 잉글랜드 제국이 된 적은 없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귀족제가 전면 폐지되면서 황실의 특권이 완전히 소멸했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인과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망의 가문이다.

2. 역사



2.1. 시골 백작에서 제국의 황제로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 언저리에 웅거하며 시골 귀족 노릇을 하던 듣보잡 가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대귀족 가문 에티호넨의 방계 가문이었다. 본래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은(에티호넨) 아들 로첼린이 있었다. 다시 로첼린의 장남, 1020년경 가문의 시조 라트보트(Radbot)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합스부르크에 기반을 잡고 성[4]을 쌓고 백작 노릇을 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이름이 조금 있는 몇몇 유력 가문들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라드보트의 작위명은 클레트가우(Klettgau) 백작이다. 후에 그의 손자인 오토는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다.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대공위시대(1254년 ~ 1273년) 덕분이었다.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겨버린 것이다.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공위 시대가 이어지며 독일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선제후들은 자기가 직접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타협책으로 일부러 한미한 가문당주를 바지사장삼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루돌프 1세[5]였는데, 당시 합스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세력이 큰 가문은 아니어서 황제 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돌프 1세는 호엔슈타우펜 황가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배경이 있었다. 황제 선거가 난항을 겪자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생각치도 않았던 루돌프 1세는 자신에게도 일말의 기회가 생기자 기민하게 독일 주요 가문들과 재빨리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1273년, 루돌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고 대공위 시대가 종식되었다.
생각지도 않게 아르가우 주의 일개 백작에서 독일왕이자 황제로 승급한 루돌프 1세는 야심가이자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자였다. 황제 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했던 루돌프 1세에게 포착된 것이 바로 옆동네 오스트리아 공국이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 시대(1243년 ~ 1278년)의 혼란기에 있었다. 공위시대를 틈타 당시 동부 유럽을 휩쓸던 보헤미아 왕국의 오토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를 차지(1251년 ~ 1278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 루돌프 1세는 황제의 지위를 이용해 라이벌 오토카르 2세를 찍어눌렀고 이어 전쟁에서 승리하여 1278년 마침내 오스트리아 공국과 그 형제국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했다.
한편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을 경영하느라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독립 투쟁)을 일으켰다. 결국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이제 합스부르크의 중심은 오스트리아가 되었다.[6] 그나마 중세에는 스위스 서부의 아르가우나 합스부르크 성 영지, 상속받은 다른 영지들은 루돌프 1세의 사촌들에게 분봉되는데, 여기는 본가하고는 또 다른 길을 걷다가 1400년대 후반쯤에 단절된다.

2.2. 권토중래


대공위시대 직후 루돌프 1세 때 잠깐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차지했지만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가 암살당하고 제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이 차지한 이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유력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특한 전략인 '''결혼 동맹'''을 통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다른 유럽 각국도 결혼 동맹을 세력 강화의 기본 전략으로 활용했지만 합스부르크는 특히 그것을 잘 활용한 편에 속한다.
특히 1335년 케른텐 공국크라인 공국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떨어짐으로써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했다. 1335년 이후 막시밀리안 1세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략 이 상황을 유지했다.
143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 겸 헝가리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가 모든 왕위를 계승하여[7] 1438년 황제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의 전성시대가 개막했다. 알브레히트 2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제위를 유지한다.[8]

2.3. 최전성기


16세기 카를 5세(제위: 1519년 ~ 1556년)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은 선황 막시밀리안 1세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로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 있어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다. '''저지대'''를 보유하게 된 '''부르고뉴 공국''', 이제 막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연합 '''스페인 왕국''', 그리고 동유럽에서 '''헝가리 왕국''', '''슐레지아'''를 포함한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혼인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이런 혼인 동맹 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났는데 '''이들 가문이 모두 대가 끊기면서[9]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가 그대로 인수하게 된 것이었다.'''
15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특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대공이었던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마리를 남긴 채 로렌에서 전사하고, 대 끊긴 부르고뉴에 프랑스가 손을 뻗자 부친의 급사로 인해 여공작이 된 마리가 이에 대항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과 결혼해버렸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그토록 군침을 흘리며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특히 플랑드르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넣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녀 안느와의 정략 결혼을 추진해 다시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에 빅엿을 먹일 시도를 하는 등[10] 서쪽 국경의 판도를 계속 넓혀나갔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무엇보다도 결혼 동맹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장남 필리프를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와 결혼시켰고, 딸인 마가레테는 왕세자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스페인과의 결혼 동맹을 결성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프와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 5세가 물려받게 된다.
또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야기에우워 왕가도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여 결혼 동맹을 성사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48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었을 때,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헝가리라는 두 왕국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하였으나 당시 두 나라의 지방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약 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상실했다.[11] 이후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가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결혼동맹의 대가 막시밀리안 1세는 이 야기에우워 왕가와 페르디난트를 결혼시켰다. 그런데 또다시 천운이 따라준 덕에 야기에우워 왕가가 갑작스레 단절되었고,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세습 지위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특히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는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는다.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스페인은 막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고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가지게 되었다.
이 카를 5세 치하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와 맞붙어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를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다. 오스트리아-스페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 프랑스30년 전쟁으로 화려한 부활을 선언할 때까지 100년 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러우하게 된다. 영국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면서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던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두 개의 변수는 바로 종교개혁오스만 제국이었다.
특히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짓밟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 패착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국내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지만 결국은 '''외국 군대'''인 스페인군을 개입시킴으로써 독일어권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은 물론, 암묵의 룰을 깼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는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짙은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가 30년 전쟁, 그 후 신성로마제국의 콩가루화다.
하지만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영방을 산산조각내며 분열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전성기를 맞은 쉴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다. 내전과 1529년의 1차 빈 포위로 말미암아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다. 가히 호사다마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였지만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 그리고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카를 5세는 겨우 제국을 지켜내어 후계로 넘겨주는 데 성공한다. 다만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 영방 체제를 지속하게 되었다.

2.4. 합스부르크 제국의 출범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왕조)로 분열된다. 카를 5세가 광대한 영지 중 오스트리아 대공위 등 중부유럽 영토의 작위를 포함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나머지 전부(스페인+네덜란드 저지대+아메리카 대륙+필리핀)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각각 나누어 양위했기 때문. 물론 카를 5세는 모든 영토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당시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신성 로마 제국 황위는 동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막은 카를 5세 문서 참조.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1세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부유한 네덜란드와 식민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을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했던 결혼 덕분에[12]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라는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다.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거듭나게 된다.
한편 저지대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귀속되었으나 펠리페 2세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완전히 독립하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나중에 18세기에 벨기에 지역을 약 1세기간 차지하기도 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종교 문제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갈수록 종교 문제에 완고하게 대처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은 30년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은 인구가 2/3로 급감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치명상을 입었고,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는 북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지위는 사실상 명목상의 작위로 전락하였다.

2.5. 중흥기


합스부르크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로 침공해와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후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곧장 추격하여 동헝가리를 탈환한 것에 이어 동유럽을 잠식해 들어갔다(대튀르크 전쟁, 1683년-1698년). 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발칸 반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여기서 도와준 폴란드를 분할해 냠냠하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압스부르고 왕조)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서로 왕위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년~1714년)이 일어났다.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합스부르크는 숙적 프랑스를 꺾었다.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의 왕위를 따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영원히 합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한때 스페인령이었던 밀라노나폴리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플랑드르(벨기에)를 획득했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 국면에 접어든다.
대 튀르크 전쟁의 후속전으로 치뤄진 제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716년 ~ 1718년)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북부 등을 획득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17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되었만 얘기치 못한 것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상기된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합스부르크의 중흥을 이끈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카를 6세는 살리카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다. 그러나 주변 세력들은 살리카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 때문에 카를 6세는 주변국들에게 영토를 떼어주는 많은 양보를 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트링겐(로렌)의 공작 프란츠 슈테판(프랑수아 에티엔,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이었기 때문에 특히 프랑스 루이 15세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카를 6세는 1736년 로트링겐(로렌) 공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주었다. 또 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빈 조약(1738년)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상당 부분을 양보했고 그 결과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를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내주었다.
카를 6세가 이렇게 여러 조치를 취해 두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계승을 반대하며 달려들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한다. 그 결과 바이에른 선제후인 비텔스바흐 가문카를 7세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 7세가 오래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이후 왕조는 정식으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라 칭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불렀다. (로트링겐-로렌을 프랑스에게 줘버렸으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라고 부를 때마다 로트링겐 없는 로트링겐 가문이라는 조롱 + 로트링겐을 되찾자! 하는 호전적 발언이 되어버린다)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결과 알짜배기 땅이던 슐레지엔을 신흥세력 프로이센에게 빼았기고 말았다.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이라는 초강수까지 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7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동안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영지를 평정하고 북쪽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분할, 획득하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합스부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혁명 프랑스군의 놀라운 전투력과 때마침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탈탈 털리고 벨기에이탈리아마저 뺏겨버린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다시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손잡고 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 치명타를 입고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와해당하고 만다. 위기에 처한 프란츠 2세는 그동안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다.
이어지는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까지 깨지면서 유일한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를 뺏기고 황제의 을 강제로 나폴레옹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굴욕을 맛보던 시기, 나폴레옹이 극적으로 러시아 원정을 거쳐 몰락하면서 상황은 또 반전된다.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인 합스부르크는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였다. 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으며,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되었고, 아울러 그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오스만이 슬슬 망조가 보이니 필요 없어진 합스부르크를 손절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은 한동안 건재하게 버텼으나 1867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강의 나라였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위신은 무너졌으며, 통일 독일에서 강제로 배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패배의 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였고, 이에 합스부르크는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들과 타협하여 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했다.

2.6. 군주제 폐지 및 제위 박탈


통일 독일 제국이 수립된 후,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남쪽 발칸 반도로의 확장에 주력했다. 오스만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발칸 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는 가운데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세력을 확장할 기회로 보았다. 우선 보오전쟁으로 일시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던 독일과 우호관계를 다진 뒤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남방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역시 남쪽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달려들면서 발칸 반도의 판세는 더욱 복합하게 돌아갔다. 결국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황태자가 암살당하면서 이전에 쌓이고 쌓인 수많은 갈등이 폭발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길었던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중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헝가리 왕국을 복원하며 헝가리 왕위는 남아있긴 했지만 호르티 제독은 명목상 왕국으로만 복원시켰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는 등 섭정 지위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고 이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일세를 풍미한 이름 높은 가문으로 대접받으며, 근대 유럽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웅변하는 산 증인이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한지 90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아직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등의 작위를 주장하고 있다.[13]'''

3. 스페인 압스부르고


카를로스 1세(카를 5세)가 스페인 왕 자리를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면서 스페인 왕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는 다른 인물이 되었지만 같은 가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압스부르고 왕조 참조.

4. 특기할 사항



4.1.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


[image]
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왕조)의 경우 수십 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에 무너졌고, 다른 왕조들과 같이 혁명이나 외부의 침입 등으로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위의 그림과 같은 근친혼으로 인한 악성 인자의 누적 탓인지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이 등장했으며, 결국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만에 단절되었다.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이라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했다. 게다가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으며, 생김새도 흉측했다.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14]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혼인 전략은 위에 써 놓은 유명 시구 봐도 알 수 있다. "행복한 합스부르크여, 그대는 결혼하라!" 이 말대로 그들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이런 혼인 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핏줄이 오만 곳으로 퍼졌는데, 이렇게 온 유럽에 합스부르크 피가 흐르는 귀족이 없는 데가 없는 경지에 이르고 나서는 '''오히려 이것이 근친혼으로 인한 왕실의 멸망을 부추기는 결과가 됐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콩가루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유전병 가진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가중되게 된 것이다. 현대에도 합스부르크의 피가 섞인 왕가에서는 주걱턱인 사람이 많다.[15] 주걱턱의 별칭이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lip)'''인 게 괜한 말이 아닐 정도로 주걱턱이 가문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16]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마르가리타 테레사 스페인 공주[17]의 연작 초상화를 봐도 성장하면 할수록 도드라지는 주걱턱 때문에 항상 고개를 살짝 돌려서 최대한 주걱턱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안 그래도 주걱턱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근친혼을 반복하면서, 후손들에게서 더욱 심한 주걱턱과 유전병이 발생한 것이었다. 카를로스 2세까지 가면 근친혼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한편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시작되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는 근친혼이 스페인보다는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18] 이러한 일이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19]
중고등학교나 교양서에서 배우는 세계사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중이 낮은 것도 혼인으로 번성했던 가문의 역사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교양이나 교육 목적은 민주 시민의 양성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세적 질서를 극한으로 활용했던 오스트리아보다는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근대적 세계를 수립한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 비중을 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존하는 독재국가들의 세계사 과목에서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에 큰 비중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4.2. 가풍


중세 이래 현대까지 수백년 동안 지속된 가문이기 때문에 가풍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 실리적이고 리버럴한 면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다소 보수적이었지만, 정치와 문화에서는 실리적이고 리버럴한 면모가 두드러진다. 특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갈라진 후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는 실리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는 가문의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된 페르디난트 1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로 적통이 이어진 카를 5세 형제의 성향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수적인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20] 이를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체적으로 동시대의 다른 가문에 비해 현실적,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오스트리아계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프랑스 부르봉 가문에 비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사실 스페인은 국가 자체가 레콘키스타로 탄생했기 때문에, 종교가 갖는 영향력이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에게 수도 빈이 포위된 게 2번이고, 스페인은 통째로 이슬람에게 탈환한 다음에도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맞부딪쳤으니 종교색을 안 띄는게 불가능한 지형이기도 했다.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는 막시밀리안 1세 때의 결혼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 각지에 걸친 다민족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합병된 다민족 영토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대신 해당지역의 문화, 언어를 상당히 존중해 주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런 민족적 관용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몰락하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지속되는데, 합스부르크는 1848년 혁명 이후에도 무작정 혁명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지 않고 대타협으로 해결하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사라예보 사건 때문에 빛을 못 보았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재편성 계획'도 합스부르크식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합스부르크의 민족적 관용 정신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었는데, 이러한 민족적, 문화적 관용 덕분에 다민족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이 꽤 오랜 동안 별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오늘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비독일계 민족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대체로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긍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환영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형식상 지배자라는 타이틀만 가져갔을 뿐 그들의 고유 문화와 제도에 거의 터치하지 않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 그리고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이었다.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동헝가리가 얼마나 비참하고 잔혹한 통치를 받았는가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동유럽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항상 두려워 했고, 합스부르크를 그들을 지켜줄 구원자로 여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독일계가 아니라고 해도 본토 오스트리아인에 비해 딱히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런 민족적, 문화적 관용은 오스트리아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에서조차도 나타나는데, 일례로 카탈루냐에 대해서 합스부르크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줬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단절되고 프랑스계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자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보르본 왕조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다. 이말은 역으로 그전 합스부르크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물론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관용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만큼 전면적인 것은 아니어서 네덜란드의 독립 운동을 야기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의 온건한 성향은 봉건주의가 마지막까지 건재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프랑스 등 다른 봉건국가들이 차례차례 내부의 개혁-혁명 압력에 붕괴되거나 굴복할 때, 합스부르크는 건재했다는 것 자체가 피지배계층의 지지-동의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자본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산업혁명 등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이를 무너뜨리려면 세계대전의 패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스페인도 사실 종교개혁, 교파화 (confessionalization)시대 유럽 열강 정치판의 중심에 있어서 종교적인 면에서 워낙 독선적이었던것이지, 종교 뺀 세속 정치문화면에선 상당히 관용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본토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임 카톨릭 부부왕의 문화, 교육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인문주의에 기반한 대학 설립을 통한 관리, 공무원, 법률 전문계층 양성을 통해 드넒은 스페인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고, 당장 안방인 카스티야의 1520년 코무네로스 봉기부터 강제 개종당한 그라나다 왕국의 무어인 봉기, 17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의 쌍방울 반란 등을 겪으면서도 역시 종교문제가 걸려 대학살과 무어인 추방으로 끝난 무어인 문제만 빼곤 대부분 패배한 반란 세력을 주동자 몇몇만 처형하고, 압류된 재산이나 작위도 한세대 뒤에 복권시켜주는 등 관대한 처분을 통해 국내 안정을 이루었다. 신대륙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참극도 사실 톨레도, 세비야, 마드리드에 소재한 본토 왕실과 정부는 1512년 부르고스 칙령에서 바야돌리드 논쟁과 1542년 원주민 신법안을 통해 엄연한 스페인 왕실의 신하로서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하고, 콩키스타도르엔코미엔다 지주들에게서 나름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벌어진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은 대부분 현지 콩키스타도르, 엔꼬멘데로(encomiendero, 말그대로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지주)들의 사적 탐욕 등에 의해 벌어졌고, 원주민들이 어마어마한 숫자로 죽어나긴 했으나 이건 구대륙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문제가 훨씬 더 컸고, 원주민들을 절멸이 아니라 개종, 노동력 징발의 대상으로 보았던 스페인 당국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통한 구호 활동을 통해 토착민 숫자를 보전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 체계 수립 노력도 16세기 후반쯤 되면 제대로 된 성과를 발휘, 현지 부왕령에서 직접 다스리는 식민 거점 도시들을 제외한 농촌과 밀림의 원주민들은 공물과 노동 징발 대신 현지 자치를 인정 받는 원주민 영방 (república de indios) 체제가 자리잡았다.
현실 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통치자들은 매우 현실적, 실리적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는데,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앞서 수용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실리적인 면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부각된다. 초장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푸거 가문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위의 세습을 굳히는 등 가문을 확장하는데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경제사학계에서도 금융의 선진화를 앞당긴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른 가문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막시밀리안 1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결혼 정책을 통해 손쉽게 가문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물론 합스부르크의 이런 결혼 정책도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수십년 동안 타가문과 유대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고지식했던 통치자에 속했던 카를 5세화승총 부대를 도입하여 유럽 전쟁사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에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가 나타나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며 신기술과 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이후 오스트리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취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굉장히 리버럴한 분위기의 나라였다. 빈 체제로 인해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는 프란츠 2세는 비록 정치체제와 종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과학과 예술을 적극 후원했고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합스부르크의 문화 덕분에 19세기 빈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비해 화려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예술 풍토를 특징으로 했다.
반면 보수적인 면도도 있었는데,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종교개혁기의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카를 5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속권의 문제에서 교황과 멱살은 잡았을지언정 교권에서는 교황과의 관계가 좋았으며, 사코 디 로마로 유명한 카를 5세 역시도 교권에서는 교황에게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21]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아버지와 성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당대 유럽 왕실들과 비교할 때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상대적으로) 성생활도 깔끔하고 사생활 스캔들도 적은 편이였다.[22] 다만 이러한 신념형 보수주의 정책은 그만큼이나 호불호도 많이 갈려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의 보호자'로 칭송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악의 축 취급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23] 다만 이런 신념형 보수주의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 전체에서 볼 때 그렇게 두드러진 특징은 아니며 고지식했던 카를 5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빈 체제를 들면서 정치 체제에 대한 보수성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세습 지배 가문 중에 정치체제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았던 가문은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는 동시대의 타 가문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리버럴한 편이었다.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사가 중세 질서에서 벗어나 민주적 국가를 수립하는 길을 걸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봉건 영주 간의 혈연 관계와 작위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 자체가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통성은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민족적 경험이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 군주가 갖고 있는 작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카를 1세가 구상 중이던 독일-헝가리-슬라브 삼중제국의 비전이 현실화됐다면 민족국가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나라가 탄생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됐을 지는 알 수 없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종교적으로 보수적이되 제도와 기술에서는 실리적인 통치로 요약할 수 있다.
참고로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17세기 후반 유럽이 종교개혁의 '교파화' 시대가 끝났다는 예시로, 합스부르크를 거론했다.

17세기 후반에 국내외 정치에서 헌신적인 신앙의 역할이 줄어들고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일례로 당대의 정치적 거물인 프랑스루이 14세(제위 1656~175)가 팽창주의 야망을 드러내자 지난날 신념 정치의 기수였던 가톨릭권 오스트리아는 그에 맞서 연합한 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


4.3. 근황


(상술했다시피) 프랑스의 발루아/부르봉 가문과는 몇 세기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21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차지하고 있는 왕위가 없는 데에 비해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가지고 있다. 정작 텃밭인 프랑스[24]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철저하게 축출당했기에 20세기까지 제위를 유지한 합스부르크보다 사정이 딱히 낫다고 보긴 힘들지만 말이다.
201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관련의 뉴스가 나왔다. 현재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현직 통치자 가족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최후의 황태자)의 조카 울리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1989년 3월 14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후 지타가 96세의 일기로, 2011년 7월 4일에는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9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공화국 시민'으로 자처하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오토 대공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상의 의식에 대해선 후술. 초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신을 안장하는 카푸친 교회수도자들이다. 카를 1세의 자녀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배우자 자격으로 황실 봉안당에 안장될 수 있는 인물은 아직 있다.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는 오토 대공과 레기나 폰 작센마이닝겐의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며, 프란체스카 폰 티센보르네미서[25]와의 사이에서 총 1남 2녀(총 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인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현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제1계승자이다. 참고로 이사람은 포뮬러 3 드라이버이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누나인 엘레오노르 여대공은 2010년에 포뮬러 1에서 뛴 제롬 담브로시오와 약혼한 상태인데 유럽의 탑엔드 레이싱이 얼마나 귀족 스포츠에 가까운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4.4. 기타


만화 봉신연의극중극인 '국립 앙뉘 학원'의 주인공도 뜬금없지만 합스부르크 출신이다.
미국 드라마 30 ROCK에도 한 에피소드에 이 가문의 후손이 등장한다. 잭 도너기의 소개로 리즈 레몬과 제나 마로니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이라는 공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는데, 제나 마로니는 동화속 왕자님을 상상하며 그를 유혹하여 팔자를 고칠 생각이 부풀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휠체어에 앉아 있고 그 외에도 몸 여기저기 성한데가 없고 정신지체까지 있는 심각한 수준의 장애인이었다(합스부르크가의 유전병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26]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제나 마로니는 공작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공작은 사망해버리고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집사가 공작이 사망하여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제나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백작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이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신성 그리핀 제국의 전신인 신성 팰컨 제국이 건국된 후부터 황가와 6개의 대공가가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어 사촌 이상의 근친혼 관계가 되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모티브가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패러독스사의 게임들에도 등장한다.
  • 크루세이더 킹즈 2: 1066년 시나리오 기준으로 알프스 아래 작은 영토 하나만 점유하고 있는 애처로운 합스부르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문이라 매니아층이 있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오스트리아 대공위, 중기 시나리오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 5세가 등장한다. 하지만 99%의 유저는 초반부 시나리오를 선택하며, 오스트리아는 강국이긴 하지만 매우매우매우 복잡한 외교능력을 필요로 하기에, 초보자에게는 어렵다.
  • 빅토리아 2: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지만, 철저한 국가 중심 게임이므로 비중은 별로 높지 않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 Death or Dishonor DLC가 있고 헝가리로 플레이할 때 합스부르크 복귀 루트로 진행하면 오토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고 오헝제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Waiking the Tiger DLC를 가지고 있으면 나치 독일로 시작한 플레이어가 제정복고시킨 다음일 때[27] '제국의 정서를 통한 화해'를 통해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오헝제국을 재수립시킬 수 있다. 이로써 아예 미래 우주 시대라 배경인 Stellaris를 제외하고 모든 패러독스 역사 게임에 합스부르크가 등장했다. 그리고 스텔라리스에서도 커스텀 국가를 만들 때 인간형 이름의 3,4번째 목록을 고르고 랜덤으로 이름을 돌리면 지도자의 성으로 합스부르크가 나올 때가 있다.
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로트링겐 공작가일 시절의 조상에 동로마 제국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있어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핏줄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이어지고 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 테오도로 팔레올로고[28]가 이탈리아 북부의 몬페라토를 다스리던 알레라미치 가문 출신의 어머니 이레네[29]로부터 몬페라토 변경백 작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후손이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에 시집을 갔고, 곤차가의 후손이 로트링겐 공작 가문에 시집을 가서 이어진 후손인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함으로서 비록 직계는 아니긴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에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가문의 장례식은 카푸친 교회에서 장례 의식을 하는데 특유의 장례의식이 있다. 첫 번째로 장례 행렬의 선두가 장례식장의 문을 두드리고 고인이 가지고 있던 작명들을 말하지만 교회 관계자는 "우린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2번째로 문을 두드리고 고인이 가지고 있던 직업들을 말하지만 역시 똑같은 말을 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고는 "[고인의 이름], 죄 많은 자입니다."라고 말 해야만 문을 열어준다.링크[30]

5. 관련 문서



[1] 신성 로마 제국 문장(Coat of Arms)의 '''검은''' 쌍두 독수리와 '''황금색''' 깃발에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후 국기로도 사용되었다. 러시아 제국처럼 국기와 어기가 같다.[2] 표어는 아니고 유명 시구다.[3] 합스부르크의 모토이자 프리드리히 3세의 서명.[4] 합스부르크 성(Schloss Habsburg). 가문명의 유래.[5] 황제가 되기 전에는 합스부르크 백작으로서 루돌프 4세[6] 이후 스위스와 합스부르크는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영합하며 처음의 종속구도에서 차츰 지분을 양보해주는 식으로 변모해갔으나 스위스의 독립 달성은 수세기 후 30년전쟁이 끝나고서야 성취되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또한 합스부르크 속령화와 독립 과정에 있어 스위스와 싱크로가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차이점이라면 400년 정도 시간차가 난다는 정도이다.[7] 유럽을 호령하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지 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합스부르크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일은 제법 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에 가면 왕가가 자주 단절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그럴 경우 딸에게도 어느 정도 상속권이 인정되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동양의 경우엔 아무리 딸의 상속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자를 왕위에 올리거나 방계 왕족을 찾아 선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에 올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8] 엄밀하게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잠시 황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슈테판이 즉위하게 된다.[9] 정확히는 부계 한정. 이들 가문 모두 모계로 계승하여 가문을 흡수한 것이다.[10] 이때 합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영국, 스페인 등까지도 안느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 안느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동서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안느와 강제로 결혼하였다.[11] 그나마도 2대 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겸한 계통이 유복자왕 라디슬라우스의 사망으로 단절되면서 두 나라의 유력 귀족이 왕위에 올랐다가, 다른 귀족과의 갈등 끝에 라디슬라우스의 누나 엘리자베스와의 혼맥을 이유로 왕위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야기에우워 왕가에 갖다 바친다.[12] 이 결혼의 당사자는 카를 5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1세는 고민 끝에 결국 이 결혼의 당사자로 둘째 손주를 지목했다.[13] 이처럼 군주제의 폐지나 불합리한 승계과정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주장하거나, '''만약 그 왕조가 이어져 왔다면 지금은 누가 왕일까''' 설정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그 대상자를 왕위요구자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지금은 명예상의 문제지 요즘 세상에 실제로 군주로서의 실권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14]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산 선대 국왕들과는 다르게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었다.[15] 대표적으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 스페인계보다 근친혼이 비교적 적었던 오스트리아계고 게다가 오스트리아계는 이 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근친혼이 없어졌는데도 주걱턱이었다. 심지어 이 분의 손녀는 굉장한 미모를 뽐내지만 그녀 역시 주걱턱의 늪에서 빠져나올 순 없었다.[16] 그 프랑스의 유명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아름다운 미모였지만 가문의 저주는 피할 수 없어 치아교정을 하고 주걱턱을 부채로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17] 스페인 왕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엄마는 아빠의 조카(!)뻘 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 공주, 하지만 그녀 역시 사촌(고모가 페르디난트 3세에게 시집갔다.) 겸 육촌(아버지 펠리페 4세와 레오폴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는 고종 사촌)이자 외삼촌뻘인 레오폴트 1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자신의 외가(!))에게 시집갔고 불과 22세의 나이에 출산 도중 요절했으며 그녀의 자식들은 대부분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는다. 살아남은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엠마누엘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선제후와 사이는 매우 좋지 않고 심지어 폭행까지 했다고. 여담이지만 이 선제후는 자업자득인지 1704년 블레넘 전투에서 대패한다.[18] 여전히 근친혼이 성행하긴 마찬가지였으나 독일 영토에 워낙 국가가 많은 탓에 결혼 후보들의 출신이 상대적으로 다양해 근친혼의 폐해가 심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경우는 결혼 상대가 대부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19] 하지만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턱이 주걱턱이었다고 하니, 근친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주걱턱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로트링겐 가문 출신의 프란츠 1세로 비교적 근친혼의 비중이 낮았었는데도 말이다.[20]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경우는 이것은 특히 종교전쟁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어릴 적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페르디난트 2세의 개인적인 성향과 황제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21] 사코 디 로마만 하더라도 카를 5세는 세속군주로서 교황을 찍어누르는 정도를 원했지, 사코 디 로마급의 막장을 원한건 아니였다.[22] 반면 부르봉 왕조로마노프 왕조는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했다. 사실 부르봉의 프랑스 통치는 프로테스탄트앙리 4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기에, 합스부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기도 안찼을 것이다. 또한 이때 교황들은 마누라를 한 다스씩 챙기던 시대였다!.[23] 당장 인터넷에서 네덜란드 독립사 관련 글을 아무거나 읽어보면 십중팔구는 합스부르크가 악의 축으로 나온다. [24] 카페 왕조의 방계로 시작되었고, 16세기에 나바르 여왕 잔느와의 결혼으로 나바르 왕위를 획득했다.[25] 남작 가문 출신이라 옛날 같으면 빼박 귀천상혼이었고, 오토 대공의 차남은 구 올덴부르크 대공국 가문 딸과 결혼해서 후계자 교체도 가능했지만 오토 대공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줬다. 사실 구왕실들이 작위가 낮거나 없는 부르주아 가문과 혼사를 맺어 재정적 안정을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프란체스카의 친정은 티센크루프로 잘 알려진 재벌가문이다. 참고로 근대 들어 부르주아 가문들이 남작 같은 하급귀족 작위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오토 대공은 까다로웠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귀천상혼에 대한 규율을 완화시켜, 1918년 군주제 붕괴 이후 귀족 여성과의 결혼으로 귀천상혼이 된 후손들에 대한 계승권도 소급해서 인정시켰다. 현재는 수장의 승인과 가톨릭 혼인성사만 올리면 평민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된다고 한다.#[26] 그런데 정작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주걱턱은 재현하지 않았다.[27] 모든 전쟁을 끝낼 대전쟁을 일으킨 그 유명한 빌헬름 2세 혹은 적합한 호엔촐레른 후보 중 하나인 빌헬름 3세가 복위한다.[28] 1291~1338, 그리스어로는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29] 그리스어로는 이리니[30] 불교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선문답이 있다.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옛 친구인 고명한 스님을 보러 에 찾아가, 시중드는 동자에게 "이러이러한 관직의 아무개가 스님을 뵙고자 한다고 전해라"고 하자 그 말을 전해들은 스님은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대답할 뿐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그 대답에 관리가 이번엔 자기소개에서 관직을 빼고 "그냥 아무개가 찾아왔다고 다시 한번 전해다오"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스님이 "오, 나도 그 친구가 한번 보고 싶었지"라며 반겨준다는 내용. 양쪽 모두 아무리 세상에서 명예와 지위가 드높은 자라고 한들 겸손해야 하는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