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시 1세

 



헝가리어: Hunyadi Mátyás (후녀디 마챠시)
체코어: Matyáš Korvín (마티아시 코르빈)
라틴어: Matthias Corvinus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생몰: 1443년 ~ 1490년
재위: 헝가리 국왕(1458년 ~ 1490년)
1. 개요
2. 업적
2.1. 영토확장
2.1.1. 헝가리의 국왕(1458)
2.1.2. 보헤미아의 국왕(1469)
2.1.3.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작(1487)
2.2. 전제군주로서의 마차시 1세
2.3. 문화적 업적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 1458년부터 1490년까지 재위.
헝가리의 왕통이 단절되자,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였던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헝가리 왕이 된 인물이다.[1] 그는 나폴리 왕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최초로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군주가 되었으며, '검은 군대(Black Army)[2]'라고 불리는 상비 용병대를 창설하는 한편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3]을 보강하는 등,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2. 업적



2.1. 영토확장



2.1.1. 헝가리의 국왕(1458)


이 시기 왈라키아 공국을 지배하고 있던 블라드 3세메흐메트 2세의 침공을 받아 분전끝에 패한 후 동맹이었던 헝가리로 피신하여 마차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마차시 1세는 블라드 3세가 메흐메트 2세와 밀약을 추진중에 있다고 판단, 오히려 포로로 잡아[4] 감옥에 가두었다. 이는 당시 마차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어서, 양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블라드 3세는[5] 마티아슈의 친척 일로나와 결혼하는 등의 노력을 한 끝에 헝가리 왕국, 몰다비아의 지원과 왈라키아 공국의 귀족들 가운데 일부의 협력을 얻어 당시의 왈라키아 공작 '바사랍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2.1.2. 보헤미아의 국왕(1469)


1479년, 올로모우츠에서 체결된 보헤미아헝가리 왕국 양국 간의 평화 조약에 따라 실레시아, 모라바, 루사티아를 획득하였다.

2.1.3.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작(1487)



2.2. 전제군주로서의 마차시 1세


하지만 마차시 1세는 이전의 헝가리 왕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한 가지 추진했는데, 문화 부흥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더니 마침내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하고 왕권은 그리 강하지 못했는데, 유독 마차시 1세는 왕권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더니 전제군주가 되고,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저 왕이 언제 죽나'라고 벼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기에 마차시 1세가 적자 없이 서자 한 명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마차시 1세는 서자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귀족들은 그 말을 무시해버렸고, 얼마 전까지 전쟁 중이던 보헤미아의 왕 블라디슬라프를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뜬금없이 웬 보헤미아 왕이? 싶지만,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의 전 왕 라슬로의 생질이며 이웃나라 폴란드의 왕자이기도 했다.[6] 하지만 귀족들이 울라슬로를 추대한 이유는 '현명하고 강인하니 우리 나라를 중흥시킬 것 같다'라는 이유가 아니라, '띨띨하고 모자라니 '예스맨'으로 부려먹기 딱 좋겠다'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헝가리가 이 지경이 된 것을 '지배층(귀족들)의 탐욕'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상술하였듯이 마차시 1세는 왕권이 약한 것이 전통인 헝가리의 왕으로서 왕권 강화 정책을 열심히 추진했기 때문. 귀족적 관점에서 마차시 같이 강력한 국왕이 '''봉건적 계약관계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권력을 휘두르면 당연히 군주로서 바쳐야 할 충성을 철폐하고 다른 적절한 군주를 찾을 권한이 있었다'''. 당장 마그나 카르타 같은 서유럽권에서는 흔히 민주주의의 기원이니 뭐니 기념하기 바쁜 서방의 비슷한 사례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중세적 관점에서 군주와 봉신 사이의 계약의 문제이고, 이런 봉건 중세적 귀족의 권리라는 게 바로 그 마그나 카르타가 보여주듯 이론적으로 토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종교야 그나마 중요하다고 쳐도, 적어도 동유럽권에서 16세기 초반이면 이미 오스만 제국 치하 세르비아, 루마니아계 공국들이 남겼던 사례를 통해, 황제로서 코스탄티니예술탄에게 충성은 맹세해도, 자기 영지 안에서는 나머지 유럽의 귀족들에 비해 전혀 꿀릴 것 없는 권력을 유지했던 사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요컨대 당시 관점에서 헝가리 귀족들은 오히려 '마차시 1세'같은 인물을 폭군으로 여길 근거가 충분히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군주를 모셔오는 등 현대적 관점에서의 매국질을 했어도 당시에는 딱히 그렇게 도덕적으로 크게 지탄받을 행위가 아니었으며, 헝가리 왕국이 무너지게 된 원인을 비판할 때 이런 자국의 정치적 전통을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귀족들을 무력으로 찍어누른 마차시 1세의 무리한 정책도 함께 지적해야 한다.
다만 마차시 1세가 귀족을 무력으로 누른 것도 당시 서유럽에 비해 헝가리나 폴란드는 너무 왕권이 미약한 상태였고, 당시 이들 국가의 최대 적인 오스만이 전제군주국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제군주국안 오스만이 동원하는 병력과 봉건 영주들의 연합체인 헝가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차이가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단결이나 통치의 효율면에서도 큰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당장 헝가리가 멸망하게 되는 모하치 전투조차도 헝가리의 영주들은 국왕의 명령에도 군대를 보내지 않았고 결국 헝가리군은 전투에서 패배해 나라 자체가 멸망하고 만다. 즉 마차시 1세의 왕권 강화책은 당시 시대의 요구였던 것아고, 마차시 1세 사후 이런 왕권 강화정책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결국 헝가리가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똑같은 봉건 영주 연합체국가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그대로 되풀이하게 된다.

2.3. 문화적 업적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 포조니(Pozsony, 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대학교를 설립. 또한 코르비누스 문고(Bibliotheca Corviniana)로 불리는 수많은 서적들을 수집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문명 6에서는 두 번째 확장팩 몰려드는 폭풍에서 헝가리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 이는 헝가리 역사상, 이전의 왕들과 전혀 혈연관계가 없으면서도 즉위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2]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그들을 고용한 교황이 죽자 팔에 검은 띠를 두른 것에서 부대명이 유래했다. 오스만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겨우 4천 명.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명은 몽땅 중기병이었다.[3] 오늘날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남부에 속했으며 가장 크고 중요한 요새였다.[4] 정확히 몇년 동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추측으로는 피신한 1462년부터 가시공이 일로나와 결혼하는 1466년까지 5년 정도.[5]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블라드 3세의 유폐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용서를 받아서 감옥을 빠져나와서 헝가리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였다. 왈라키아 공국으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부다페스트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6] 브와디스와프라는 폴란드어 이름을 헝가리어로 발음하면 울라슬로고, 체코어로는 블라디슬라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