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부흐로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부흐로는 1927-28시즌부터 고향 뮐하임안데어루르를 연고로 하는 VfB 슈펠도르프 1군에서 뛰었다. 부흐로가 데뷔할 당시 슈펠도르프는 2부 리그 소속이었는데 가울리가[3] 창립 당시인 1933년 무렵에는 가울리가에 참가할 정도로 팀이 성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부흐로가 국가대표로서의 커리어를 마무리하던 1938년, 그는 헤르타 BSC로 이적하였고 체육학 학사 학위도 취득했다. 1시즌을 베를린에서 보낸 이후 부흐로는 슈바츠바이스 에센으로 다시 이적했고 여기서 커리어를 마무리할 때까지 생활하게 된다.
슈바츠바이스 에센에서의 데뷔전은 지역 라이벌인 로트바이스 에센과의 맞대결이었고, 데뷔 시즌에는 8경기 연속 무실점도 기록하는 등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부터는 출전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45년까지 팀에 남아있었다.
1.1.2. 국가대표
부흐로는 10대부터 기량을 인정받아서 서부 독일 팀의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북부 독일 팀의 프리츠 슈체판, 쿠초라 등의 활약에 밀려서 1대4로 패배하였다.
1930년에 독일 대표팀의 골문을 지키던 하인리히 슈툴파우트가 대표팀에서 은퇴한 후 골키퍼 자리는 빌리발트 크레스와 한스 야코프의 경쟁 체제가 되었다. 그리고 1932년부터 부흐로도 이 경쟁에 끼어들었다. 1932년 12월에 부흐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고, 월드컵 지역예선 룩셈부르크전에 출전했다.
1934년 월드컵의 명단에도 포함되었지만 부흐로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 외에는 동년 12월의 폴란드와의 시합과 1935년 5월 8일의 아일랜드전[4] , 나흘 후 스페인전 출전이 주된 대표팀에서의 경력이었다.
1936년에도 대표팀 출전은 계속되었지만 포르투갈과의 시합에서 부상을 입어 한동안 강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부흐로의 복귀전은 베를린 올림픽이었고 첫 경기 룩셈부르크전에서는 9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부흐로는 결장했고, 팀은 노르웨이에 패했다.
부흐로의 마지막 A매치는 1936년 9월의 폴란드전이었고 독일은 1대1로 폴란드와 비겼다. 다음 월드컵에도 한스 야코프, 오스트리아 출신의 루돌프 라프틀과 골키퍼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부흐로의 출전은 없었다.
1.2. 이후
1949년 부흐로는 아이슬란드 대표팀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독일 출신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첫 외국팀의 감독이 되었다.
부흐로는 선수 은퇴 이후 행정쪽 업무에 종사했는데 2차 대전 때 입은 부상으로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선수 시절의 마지막을 보낸 슈바츠바이스 에센의 감독으로도 활동했었고, 그 이후엔자신의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장, 축구를 가르치는 교사, 클럽의 회장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1957년 이후에는 주로 축구 클럽의 회계를 담당했고, 친정팀 VfB 슈펠도르프의 명예 회장과 1980년엔 유럽 축구 감독 연합 부회장 겸 회계 담당으로도 위촉되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좋은 위치선정과 뛰어난 반사신경을 가진 활동적인 골키퍼. 쇼맨십보다는 안정적인 경기를 펼쳤다. 30년대 독일 대표팀에서 골키퍼 라이벌리를 만들었던, 거칠고 강한 플레이를 선호했던 야코프에 비해 크레스와 부흐로는 볼에 대해 유별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3. 수상
3.1. 클럽
- 베치르크스클라스 니더라인[5] 우승 2회: 1934, 1935
3.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리그. 여기에서 일정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 참가자격이 주어졌다.[4] 이 시합에서는 주장으로 출전했다.[5] 가울리가 이전에는 지역리그. 가울리가 출범 이후에는 가울리가 니더라인의 하부리그로 편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