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슈체판
1. 개요
30년대 샬케의 전성기를 이끈 레전드.
2. 생애
2.1. 어린 시절
슈체판의 부모는 원래 동프로이센의 나이덴부르크에서 살다 광산일을 위해 겔젠키르헨에 정착했다. 슈체판에겐 5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또래 아이들과 축구를 즐기며 성장했다.
슈체판은 정규 교육 과정을 중퇴하고 견습생으로 배관공 일을 배웠는데 회사도 잘 나가고 나름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다 에른스트 쿠초라의 권유로 지역 축구팀 살케 04에 입단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슈체판과 쿠초라의 합류로 샬케는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강팀으로 성장했다. 1934년 독일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샬케는 1. FC 뉘른베르크에게 1대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승부를 뒤집는데는 2분이면 충분했다. 후반 43분 슈체판은 코너킥을 헤딩으로 연결해 동점골을 만들어냈고 45분에는 쿠초라의 왼발 슈팅으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샬케의 첫 우승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샬케는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11연패를 포함하여 1942년까지 9년간 6회의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으며 1937년에는 독일 축구 챔피언십과 DFB 포칼까지 우승하여 독일 축구 역사상 최초의 더블#s-7을 기록하였다. 당시 샬케는 단연 시대를 대표하는 독일 내 최강팀이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금발의 슈체판은 소나무같이 팀에 헌신했으며 등과 무릎에 고질적인 부상이 있음에도 샬케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감독에 취임한 이후인 1950년 11월 12일, 슈체판은 오랜 동료 쿠초라와 같이 축구화를 벗었다.
2.2.2. 국가대표
슈체판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1929년 10월 20일의 대 핀란드전이었다. 독일은 4대0의 낙승을 거두었고, 슈체판은 이 경기에서 데뷔골도 기록하였다. 하지만 슈체판은 이후 5년여간은 대표팀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다가 월드컵을 기점으로 대표팀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슈체판을 축으로 한 독일 대표팀은 처음 출전한 월드컵에서 3위를 기록하였다.
1937년 5월 16일. 독일은 덴마크를 상대로 브레슬라우 엘프[2] 라는 역사에 남을 시합을 펼쳤다. 덴마크를 8대0으로 유린하면서 덴마크 축구 역사상 최다점수차 패배를 안긴 것. 슈체판은 여기서 1골을 넣었다.
이듬해의 프랑스 월드컵에도 슈체판은 주장으로 출전하였는데 당시 독일 대표팀은 안슐루스로 유럽에서 잘 나가던 분더팀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대거 독일로 흡수하였다. 이런 독일은 당시 월드컵 우승 후보 1순위로 꼽혔지만 오히려 조직력에서 문제를 드러내며 한 수 아래로 여겨진 스위스에 재경기 끝에 충격패를 당하였다.
슈체판은 1939년 불가리아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10년간 34경기의 출장 기록을 남겼고, 그 중 30경기에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2.3. 감독 생활
슈체판은 선수 생활을 마치고 바로 친정팀 샬케의 감독을 맡아 5년간 팀을 이끌었다. 전후에 주춤하던 샬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우승 커리어를 추가하진 못했고 1954년 로트바이스 에센으로 팀을 옮겼다. 그 외에도 TSV 말휠스라는 클럽에서도 감독직을 맡았다고 한다.
2.4. 이후
슈체판은 1964~1965년, 1966~1967년에 샬케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야인의 삶을 살았다. 1972년까지는 직물 사업체를 경영하기도 했고 1974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샬케 북쪽의 로젠휘겔 공동 묘지에 있다.
2.5. 나치와의 연관
슈체판은 1937년 1월, 쿠초라와 보르네만 등과 함께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1934, 1936, 1938년에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참여한 경력이 있고, 1938년에는 유태인들을 아리아인화하는 단체를 맡기도 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슈체판은 전후에 연합국에 의해 Mitläufer(단순 가담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슈체판은 기술이 뛰어나고 다재다능한 선수여서 센터 하프와 인사이드 포워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스피드에서 강점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축구 지능과 위치 선정으로 이를 만회했으며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났다. 드리블과 정확한 패스로 대표되는 공격 전개도 슈체판의 장점. 그래서 붙은 별명 중 하나가 '세계 대전 이전의 베켄바워'일 정도였다.
에른스트 쿠초라와 더불어 소속팀 살케 04의 전성기를 이끈 주인공이자 클럽에서 인정할만한 둘 뿐인 원 클럽 플레이어이며 또 다른 후배 공격수 클라우스 피셔와 함께 샬케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4. 뒷이야기
- 에른스트 쿠초라와 슈체판은 겹사돈관계이다. 서로의 여자형제들 중 하나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5. 수상
5.1. 클럽[3]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6회: 1934, 1935, 1937, 1939, 1940, 1942
- DFB 포칼 우승 1회: 1937
- 서부 독일 리그 우승 4회: 1929, 1930, 1932, 1933
-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우승 11회: 1933-34, 1934-35,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 1940-41, 1941-42, 1942-43, 1943-44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3회: 1933, 1938, 1941
- DFB 포칼 준우승 4회: 1935, 1936, 1941, 1942
5.2. 국가대표
5.3. 개인
- 독일 축구 챔피언십 득점왕 1회: 1942
5.4. 감독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54-55(로트바이스 에센)
[1] 슈체판은 FC 샬케 04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2] 브레슬라우는 현재 폴란드의 도시 이름이고 엘프는 숫자 11을 뜻한다. 중립경기장은 아니고 당시 브레슬라우는 독일 영토였고 제2차 세계 대전때 잃은 영토를 모두 포기해서 지금은 브로츠와프라는 폴란드 도시로 남아있다.[3] 슈체판은 FC 샬케 04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