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제닝스

 

[image]
[image]
'''이름'''
피터 찰스 아치볼드 이버트 제닝스
(Peter Charles Ewart Archibald Jennings)
'''국적'''
캐나다(출생)
미국(2003년에 취득)
'''직업'''
기자, 앵커, 언론인
'''출생'''
1938년 07월 29일 캐나다, 온타리오, 토론토
'''사망'''
2005년 08월 07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티
'''소속'''
ABC(미국 방송) (1965년 입사, 2005년 퇴사)
'''학력'''
리스가 사립고등학교 중퇴
'''부모'''
부: 찰스 제닝스
모: 엘리자베스 오스본
'''배우자'''
첫번째 부인: 발러리 갓소 (이혼)
두번째 부인: 아누슈카 말루프 (이혼)
세번째 부인: 케이티 마톤 (이혼, 1979~1993)
네번째 부인: 케이스 프리드 (1997~2005, 사망시까지)
'''자녀'''
녀 : 엘리자베스 제닝스 (1979년생)
자: 크리스토퍼 제닝스 (1982년생)
1. 개요
2. 상세
2.1. 초년기와 최연소 앵커
2.2. 해외특파원
2.3. 워싱턴 그리고 아침 보도 프로그램으로 복귀
2.4. 해외특파원 복귀
2.5. 해외특파원 및 기자로서의 평가
2.6. 앵커직 복귀
2.7. 앵커직 당시 주요 활약
3. 마지막 방송과 사망
4. 기타


1. 개요


미국텔레비전 앵커, 기자, 아나운서.
피터 찰스 아치볼드 이버트 제닝스(Peter Charles Archibald Ewart Jennings, CM, 1938년 7월 29일 ~ 2005년 8월 7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뉴스 앵커이다. 1965년 2월 1일부터 1967년 10월까지 그리고 1983년 8월 9일부터 2005년 4월 1일에 폐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앵커직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ABC(미국 방송)의 "ABC 월드 뉴스 투나잇"(World News Tonight)의 단독 진행을 맡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였으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저널리스트 중 하나였다.
발음과 억양이 정확하고 깔끔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 상세



2.1. 초년기와 최연소 앵커


제닝스의 아버지는 캐나다CBC의아나운서 였는데, 이때문에 제닝스는 어렸을때 부터 방송계를 동경했다고 한다. 제닝스는 아홉살에 캐나다의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하며 방송과 언론계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성인이 된 1965년, 제닝스는 ABC 뉴스 본사의 저녁 뉴스의 앵커이자 당시 미국 전체 3대 방송국 중 역대 최연소 앵커를 맡게 되었다. 앵커를 맡게된 이유는 다소 충격적인데 당시 젊은 오락채널이미지로 10대시청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abc이미지에 맞게, 앵커도 젊은 사람이 맡아야된다는 논리에서 였다. 그러나 사실 당시 앵커를 할만큼 임팩트있는 사람이 없는것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숙한 진행과 타 방송국의 전설적인 CBS의 월터 크롱카이트, NBC의 쳇 헌틀리와 데이빗 브링클리 앵커들에게 '크게 밀려' 앵커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자신이 먼저 내려올 의사를 밝혔고, 이를 경연진과 프로듀서들이 수용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재시작하자는 마음으로 1968년에 해외 특파원으로 자진하여 중동에서 자신의 보도 능력을 발휘한다.

2.2. 해외특파원


기자 및 앵커로서의 실패 후 제닝스는 기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중동 특파원을 지원했었으며 그로 인해 발령난 곳이 레바논의 베이루트였다.
허나 특파원 생활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닝스는 말이 레바논 특파원이지 사실상 중동 지역 전체를 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이때 슬슬 떠오로는 이스라엘과 아랍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을 취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몇몇 특집 보도 후 베이루트 지국장으로 승진하였다.[1]
이후 '1972 뮌헨 올림픽'에 파견되었었는데 때마침 팔레스타인의 반 이스라엘 테러 그룹인 '검은 9월단' 가 이스라엘 선수단을 살해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 소식을 단독특종으로 보도했었다. 이 사건 취재는 본인은 첫 특종이기도 했으며 제닝스는 이를 탄력으로 자신의 취재 능력을 키워 나갔다.
이보도로 ABC는 방송시작이래 처음으로 뉴스시청률1위를 달성했다 물론 몇주후에는 되돌아 왔지만...
다음은 당시 나갔었던 보도의 일부분이다.


2.3. 워싱턴 그리고 아침 보도 프로그램으로 복귀


1974년도 말에 제닝스는 워싱턴으로 기자로 발령났었고 이후 얼마 뒤인 1975년 1월 6일에 '굿모닝 아메리카(GMA)'의 전신인 'AM America' 앵커로 발탁되었었다.
이때 제닝스의 활약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NBC의 아침 보도 프로그램인 'Today Show'에게 크게 밀리면서 프로그램은 10게월만에 폐지되었고 제닝스는 다시 한번 앵커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가 실패한 두 번째 앵커직이었다. 당시 피터는 특파원으로 오래 활동한탓에 워싱턴 스튜디오가 지겹고 숨이 막혔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2.4. 해외특파원 복귀


앵커 복귀작 실패 후 그는 한 달만에 다시 중동으로 향하였고 이번엔 중동지국장직을 겸했다.
두 번째 특파원 임기때는 이란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프랑스 망명,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 사태, 포클랜드 전쟁과 같은 소식들을 단독특종 혹은 특별취재하기도 하였다.
이때 또한 제닝스는 1978년이 ABC 월드 뉴스 투나잇의 해외 특파원 앵커직을 겸했으며 이는 그가 1983년에 미국 복귀 및 단독 앵커로 임명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5. 해외특파원 및 기자로서의 평가


해외 특파원 경험은 사실 제닝스 본인뿐만 아니라 ABC 메인 뉴스에서 국제뉴스 보도부분 향상에 기여가 되었으며 동시에 각지의 문화와 역사 등을 같이 설명해주어 견문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었다. 덕분에 이러한 공로덕분에 ABC 뉴스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정말 독보적인 시청률을 자랑할 수 있었으며 이에 제닝스가 미리 개척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2.6. 앵커직 복귀


앞서 기술했다 시피 그는 1978년에 "ABC 월드 뉴스 투나잇"의 세 명의 진행자 중 한 명인 특파원 앵커로 임명된다.(나머지 두명은 프랭크 레이놀즈, 맥스 로빈슨 이다.그리고 여성앵커중 레전드 급으로 평가받는 바바라 월터스[2] 가 이 프로그램의 특별기획보도를 책임졌었다.)[3] 무려 11년만에 앵커데스크로 복귀한 것인데 이때서부터 앵커 자리에 잘 적응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앵커를 맡기전 프로듀서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눌자리를 가졌었는데, 이때 해외에 대해서는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내정치에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1983년에 레이놀즈의 암투병과 로빈슨의 은퇴로 단독 진행자로 임명 되었으며, 제닝스는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0년대 초반을 호령한 "Big 3" 뉴스 앵커(NBC -톰 브로코(Tom Brokaw), CBS(미국 방송) - 댄 래더(Dan Rather))중 한 명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며 미국의 국민앵커 중 하나로 각인이 되었다.
원래 피터제닝스는 레이놀즈가 암투병하자, 임시앵커를 제안받았다가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레이놀즈가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이후로는 고정앵커직을 제안받았는데, 이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레이놀즈가 사망전 암투병사실을 숨긴채[4] 피터를 만나 직접 설득하고나서야 피터는 앵커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뉴욕에 왔는데, 레이놀즈가 사망했다고 한다.
적어도 80년대이후 미국에서 거주한 사람이라면, 저녁 6시 30분이면, 웅장한 시그널과 함께 거대한 뉴욕뉴스룸 앞 조그만한 데스크에 앉아서 뉴스를 진행하는 피터제닝스를 당연히 기억할것이다.
그리고 Big 3의 시대는 제닝스가 2005년 4월에 폐암으로 앵커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2.7. 앵커직 당시 주요 활약


그는 화려한 이력처럼 유명한 보도 및 인터뷰가 몇몇개 있었는데 목록은 다음과 같다.
걸프전이 시작한 날 시작한 방송보도인데, 이때 첫 48시간 중 20시간을 제닝스가 앵커 데스크에서 보도하였다.

사건 발생 후 많은 방송국 및 언론사들이 그랬지만 그 중에서도 제닝스는 '17시간 연속'으로[5] 앵커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사건초기, 아침특보에서는 빌딩이 무너지는 상황을 보면서 조용히 오마이갓이라고 말하며 몇초가량 침묵하기도 했다. 그리고 빌딩이 다 붕괴된후에도 침묵하며 애도하는듯한 모습을보이기도 했다.
다음은 그날 보도의 일부이다.

2004년 11월 18일에 빌 클린턴과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제닝스가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도덕성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41위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자 클린턴이 격분하며 제닝스와 거의 말다툼까지 갈뻔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다소 크게 주목된 이유는 사실 제닝스가 '르윈스키 사건'에 대해 돌려 물어본 것이어서 그렇다.
다음은 문제의 인터뷰 부분이다.


3. 마지막 방송과 사망



2005년에 들어 종종 방송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는데, 2005년 4월의 베네딕토 16세 선출 과정 중에 폐암으로 인해 앵커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녹화방송을 통해 전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항암치료를 시작했으나 그 해 8월 7일 아침 11시 30분에 결국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이 ABC뉴스를 통해 전해진 이후 그의 이전 본사의 1시간 짜리 추모 방송은 물론 그의 라이벌이었던 톰 브로코와 댄 래더, 그리고 그들이 몸 담았던 경쟁사인 NBC 투데이 쇼와 CBS(미국 방송)에서 추모 방송 코너를 마련했었다.
  • ABC 추모 보도 (2005년)(2시간!! 짜리 방송)

  • 피터 제닝스 사망 10주기 추모 보도 (2015년)

다음은 NBC와 CBS의 추모 방송 코너이다.
  • NBC 추모 보도(톰 브로코 출연)


사망 후 그는에드워드 머로 월터 크롱카이트, 댄 래더, 밥 쉬퍼 (이하 CBS(미국 방송)), 쳇 헌틀리, 데이빗 브링클리, 톰 브로코, 브라이언 윌리엄스 (이하 NBC), 바버라 월터스, 다이엔 소여 (이하 ABC(미국 방송)) 등과 함께 미국 앵커의 역사를 쓴 인물으로 여겨진다.

4. 기타


  • 제닝스는 2003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 4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경력이 있다. 잦은 이혼의 사유는 성격 차이 및 특파원 당시 오지 생활을 못견뎠기 때문이다.

[1] 요즘은 중동지국이 없어지고, 순회특파원이 중동과 기타지역을 취재하지만(심한경우 한 특파원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절이고, 국제뉴스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엄청났던 시절이라 거의 전 세계에 특파원을 파견했었다. 8,90년대에는 아시아가 신흥경제국으로 급부상하면서 베이징,서울,도쿄에 특파원이 다 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특파원이 아시아지역을 거의다 담당하고 있는중이다. 또 국제뉴스에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 중동관련소식을 제외하면 국제소식을 좀 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2] 여성앵커의 원조이다. NBC출신이며 인터뷰의 여왕으로 유명하다. 70년대당시 뉴스제국 건설을 추진하던ABC의 영입대상1호였으며, 이후 20/20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활약해 마이클 잭슨 인터뷰등 레전드급 인터뷰를 진행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의 어린시절 롤모델로도 알려져있으며, 더 뷰라는 토크쇼로도 유명하다.이후에는 기자와 앵커에서는 은퇴했지만, 경영및 프로그램제작 업무는 계속 하는중이다.[3] 이 중 프랭크 레이놀즈와 맥스 로빈슨은 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마지막까지 ABC뉴스에 있던 사람은 바바라월터스와 피터제닝스이다. 피터제닝스도 후에 사망하면서 이중 현재 생존자는 바바라월터스.[4] 이때는 단순한 건강악화라고만 밝힌 상태였다.[5] 사고 당일 오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특보진행후 이후 새벽뉴스진행자가진행한뒤 아침 굿모닝아메리카 방송후 다시 특보진행을하면서 며칠간 이 일정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