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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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항공기 하이재킹과 자폭 테러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이 공격받았으며 3천 명에 근접한 사망자와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Never Forget'''
'''절대로 잊지 말라'''[8]
이 사건은 피해 당사국인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9] 미국의 여론을 극도로 자극하여 해당 사태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대한 무제한의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고,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은 90%에 육박하게 되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1개월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했고 탈레반 정권이 완전히 축출되었으며,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선포,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의 개전과 후세인 정권 붕괴, 그리고 최종적으로 2006년 사담 후세인의 처형으로 이어졌다.
뉴욕시 소방관 343명[10] , 뉴욕시 경찰관 23명, 항만경찰[11] 37명, 사설 EMT(응급구조사) 8명, 화재순찰관 1명까지 모두 합해 무려 412명(+경찰견 1마리)이 테러로 순직했다. 여기에 건물이 붕괴하며 뿜어져 나온 석면과 같은 유독성 분진에 의한 암 발생자는 5,771명, 사건과 관련해서 건강이 나빠진 사람은 무려 7만 5천여 명이나 된다.
2. 전개
2.1. 항공기 납치
2.1.1. 항공기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AA11 · UA175 · AA77 · UA93''' 4편의 비행기가 납치되었고, UA93편을 제외한 3편의 비행기는 테러의 목표 지점에 충돌하였다. UA93편은 승객들의 저항에 의해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도중에 추락하였다.
- 오전 8시 13분경 모하메드 아타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아메리칸 항공 11편, AA11편이 납치되었다. 이후 AA11편은 뉴욕으로 향하여 오전 8시 46분경 제1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다.
- 오전 8시 43분경 마르완 알 셰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UA175편이 납치되었다. 이후 UA175편은 뉴욕으로 향하여 오전 9시 3분경 제2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다.
- 오전 8시 51분경 하니 하뇨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편이 납치되었다. 이후 AA77편은 워싱턴으로 이동하여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충돌한다.
- 오전 9시 28분경 지아드 자라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UA93편이 납치되었다. 이후 UA93편은 워싱턴 D.C. 방향으로 이동하였으나, 승객들의 저항으로 인해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한다. 원 목표는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
2.1.2.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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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표물에 충돌
- 실패하여 추락
당시 미국의 큰 공항들은 CAPPS I[18] 이라는, 공항에 들어온 모든 개개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는데 논문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논문에 의하면[19] 19명의 테러리스트들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렸고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걸린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19명 중 10명이었는데 이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려들었고 나머지 4명은 가방 속 내용물과 같은 이유로 인해 2차 수색을 받았다 한다. 문제는 수색을 했음에도 이들이 실질적으로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 게다가 해당 테러리스트들은 9/11 테러를 벌이기 전, 사전 답사로 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CAPPS I에 걸리는 행동들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공항을 사전답사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로인해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실용성에 대해 의문들이 쏟아져나왔으며 미국이 곧 CAPPS II를 개발하는 이유가 된다.
한편, 알 자지라 방송국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2004년 생전 비디오를 녹화한 것을 공개했다. 이 비디오가 대테러 전문가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아울러 그대들의 인도자와 협력자는 없을지라도 알라께서는 우리의 인도자요 협력자가 되시니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가 있을지라. ||}}}
비디오 내용(접기/펼치기)
2.1.3. 관제소
9월 11일, 보스턴의 관제소에서는 이륙한 지 15분이 지난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과 교신을 시도하지만, 11편은 10분이 넘도록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제사는 잠시 후 "우리는 비행기들을 납치했다. 가만히 있으면 무사할 것이다. 공항으로 회항하고 있다."는 교신을 듣는다. 당시 녹취록. 그런데 사실 이 말은 테러리스트들이 승객들에게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무전기 조작 실수로 관제사가 듣게 된 것이다. 이는 연방 항공국과 공군에게 보고되었지만, 납치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인 데다 당시까지는 미국 내에서 공중납치가 대형사고로 연결되는 일이 없었기에 큰 위협이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AA11편의 사무장이었던 베티 옹이 기내 전화로 비행기의 납치와 그 과정에서 승객이 칼에 찔렸다는 것을 알렸다. 잠시 후 AA11편은 뉴욕 상공에서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동시에 베티 옹의 전화도 끊겼다. 녹취록 스크립트, 녹취록 듣기
2.2. 첫 번째 충돌: 제1 세계무역센터
세계무역센터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순간의 영상. 이 영상은 마침 뉴욕시의 신참 소방관[24][25] 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프랑스 출신 영화 제작자 쥘 노데(Jules Naudet)[26] 가 찍은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되고 알려진 영상중에 북쪽 타워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이 제대로 담긴[27] '''세계에서 유일한 영상'''이다.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리면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쥘 노데가 카메라 앵글을 돌리다가 우연히 비행기에 충돌 당하는 순간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찍었던 것이다. 엄청난 불길과 엄청난 폭발음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Holy Shit!" 같은 반응을 보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알 수 있다.(영상 번역 25초 부터)
나레이션[20]
: 오전 8시 46분이었습니다.조지프 파이퍼(Joseph Pfeifer) 서장[21]
: 맨해튼 가에서는 듣기 힘든 비행기 소리가 들렸죠. 그것도 아주 크게요.(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
(몇 초 후, 비행기가 충돌함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 이런 망할! (다른 사람: 뭐야 씨발?!)
한 소방관[22]
: 직감했죠.(이후: '''소방관으로서 최악의 날이 될 거라는 것을요...''')[23]
1번 타워에 충돌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으로, 그 중 대장인 모하메드 아타등 5명의 하이재커를 제외한 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비행 중이었다. 초유의 사태에 연방 항공국은 긴장했고, 미국 공군은 사라져 버린 AA11편을 찾기 위해 전투기를 내보냈지만 전투기가 출격했을 때에는 이미 충돌한 지 한참 지난 후인 데다 첫 충돌 비행기가 AA11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 근처에서 사라진 AA11을 찾는 헛수고를 벌였다.
러시아워 타임인 아침 8시 46분 뉴욕, 갑자기 1대의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했다. 사람들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이 안 되어 혼란스러워했는데, 단지 조종사의 조종 실수로 충돌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당장 언론들은 이 "'''사고'''"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람들에게 비상대피 명령을 내렸으나, 충돌이 일어난 곳은 북쪽 타워라는 것 때문에, 남쪽 타워의 피난을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남쪽 타워에 있던 사람들은 밖에 불이 났나 보고 있었고, 남쪽 타워의 방송실에서는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는데, 훗날 바다 건너 일어난 세월호 참사의 그것이 생각나는 방송이지만, 엄청난 실수였던 세월호와 달리 그 상황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시는 첫 번째 충돌이 '''의도된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는 것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항공사고로 추정되고 있었고, 남쪽 타워에 또 비행기가 날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후 건물이 무너진다는 상황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또, 사람들이 당황하며 밖으로 급하게 나가다간 위에서 떨어지는 잔해에 압사 등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고, 무사히 나갔다 해도 옆 북쪽 타워의 파편 등에 의해 다칠 확률도 높았다.
2.3. 2번째 충돌: 제2 세계무역센터
승객 51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비행 중이던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의 교신이 끊어지고, 불규칙하게 비행하고 있는 것이 뉴욕 관제소에서 포착되었다. 비행기는 항로를 벗어나 뉴욕 상공으로 들어왔고,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북쪽 타워가 불타는 모습이 언론사들을 통해 전세계에 거의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중인 9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있는 상태에서''' 2번째 비행기 테러가 일어났다. 각 언론사들이 북쪽 타워가 불타고 있는 모습을 중계하던 중, 또 다른 비행기가 남쪽 타워에 충돌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는 굉장히 치밀하게 짜인 테러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북쪽 타워의 충돌 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한 번 더 충돌하여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2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정말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테러이다.
1번째 충돌이 발생한 상태에서 바로 옆 빌딩에 2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으니 사람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Fox News TV 중계 앵커의 말. "This seems to be on purpose(이건 아무래도 의도적인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할정도로 무언가 평범한 사고가 아닌 고의적인 사고, 즉 '''테러'''라고 사람들은 하나 둘 눈치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28]
당시 방송 자료와 뉴욕에 있었던 사람들이 찍은 영상을 보면, 두 항공기의 충돌과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까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담겨있다. 당시 뉴스 생중계를 보면, 사고 그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무역센터 인근 고등학교에서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든가, 주변 건물이나 차에서 폭탄이 폭발했다거나[29] , 워싱턴 몰에 불이 난다거나 하는 등 온갖 루머로 인해 방송사부터 뉴욕시 경찰, 구조대원까지 모두가 대혼란에 빠진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CNN에서는 세계무역센터 바로 아래에서 터진 폭탄이 북쪽 타워가 무너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도해 이후 음모론의 중요한 떡밥으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남쪽 타워 중저층에 있던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등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는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 했다가 대피를 해도 괜찮다는 등 오락가락한 정보를 내었기 때문이다.[30]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열기와 유독 가스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고층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했다. 그렇게 사망한 사람의 수는 200명이 넘으며, 대개 신원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추락사망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얼마 후 건물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광경은 비행기 충돌 후 계속 돌아가던 뉴스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미국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아래 영상은 충격적인 장면을 담고 있으니 주의하자. 9.11 테러 당시 추락하는 사람들[31] 이 찍힌 영상이다. 불가항력이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을 건물 밑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소방대원의 억울하고도 애처로운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불타는 잔해물들이 아래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었다.''' 내부에서 유독 가스로 질식사하거나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이다.
같은 시각 플로리다 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며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앤드루 키드 비서실장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는데,[32]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에도 아이들에게 계속 책을 읽어주다가 약 7분이 지난 후에야 교실을 떠났다. 이후 조사위원회로부터 "왜 7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냐"는 지적을 받자, 부시는"학생들과 이후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간을 약간 지체했다."라고 해명했다. 사건 당시 백악관 측에서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즉시 교실을 떠났다"고 과장해서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
[33]
북쪽 타워의 충돌 이전에 발생한 심상찮은 징후에 긴장하던 연방 항공국은 사안의 심각성에 크게 경악해 본격적으로 미 공군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담당 인력이 매우 부족한 마당에 휴가까지 간 인원들도 있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미국 공군도 여러 제보와 항공국이 제공한 정보 등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나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진 데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정보들이 아닌 헛소문들이 많아서 사태 파악이 늦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상정 외의 상황이어서 공군도 처음 겪는 일이었고, 하필 테러 몇 시간 전에 있던 훈련까지 겹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투기를 다시 띄우는 것도 상당히 지체되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미 공군과 연방 항공국을 비롯한 수많은 관제 요원들은 불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미국 상공에 있는 수만 대의 비행기들 중 납치된 항공기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2.4. 3번째 충돌: 펜타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신이 안 되는 비행기들도 있었으며 항공국은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을 금지함과 동시에 고층 건물이나 대도시 인근을 지나는 비행기들을 감시해야 했다. 미국 공군은 만일을 대비해 전투기의 추가 출격을 준비하였고, 여객기 격추 명령을 허가받으려 했으나 절차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로 인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동부 지역이 사실상 비행기 테러 공격에 무방비인 상황이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곧바로 백악관과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워싱턴 D.C.와 뉴욕 일대의 모든 주요 시설과 공공기관 건물에 대피 명령을 내렸고 추가적인 납치 비행기 수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메리칸 항공 77편의 교신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미국 국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펜타곤도 오전 9시 37분 46초[34] 서쪽 편에 항공기 테러 공격을 받고 만다. 안 그래도 정신이 나가있던 미국 정부의 지휘 체계는 이로 인해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져 수습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 전까지 단순 사고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 때부터 미국에 대한 테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번째 충돌과 2번째 충돌로 인해 혼란한 와중에 핵심 건물인 펜타곤에까지 여객기가 충돌하니 누가 뭐라고 해도 고의적인 테러인 것을 모두들 확신했다.
펜타곤 충돌 재현 영상.[35]
펜타곤 서쪽 편[36]
5층: 피해 없음. 전원 생존.
4층: 피해 없음. 전원 생존.
3층: 항공기 파편 피격. 2명 사망.
2층: 항공기 본체 피격. 31명 사망.
1층: 항공기 본체 피격. 92명 사망.
앞선 두 테러 때는 범인들이 최대한 건물에 피해를 주기 위해 항공기의 기수를 25 ~ 40도 정도 꺾은 반면에, 저층 건물인 펜타곤에서는 기수를 꺾지 않았다.
결국 미국 연방항공청 국장으로 항공국에서 가장 권한이 높았던 벤 슬라이니[37] 가 자신의 권한으로[38] 미국의 모든 영공의 폐쇄를 지시하여 국내선 항공기는 무조건 착륙, 국제선 비행기는 회항해야만 했다.
2.5. 세계무역센터 붕괴
세 번의 충돌 이후, 충돌의 여파로 인해 오전 9시 59분경 제2 세계무역센터(붕괴 이전)가 완전히 붕괴하였고 뒤이어 10시 28분경 제1 세계무역센터(붕괴 이전) 역시 붕괴하였다.
2.6. UA 93편의 추락
UA93편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되어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저항으로 오전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하였다. 이 비행기의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나, 정황상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을 목표로 한 것임은 분명했다.[39]
93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40]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UA93편의 승객들은 미국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존경받았고,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이 제작되었다.
2.7. 테러 직후
당시 미국의 언론들이 뽑은 헤드라인은 "'''AMERICA UNDER ATTACK'''". 일부는 '제 2의 진주만'이라고 칭했다. 미 본토 전역의 경찰과 공공기관, 주방위군에 비상이 걸렸으며, 대부분의 학교가 일제히 임시휴교를 선언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사건 직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전체 영공이 봉쇄'''되었다. 이는 '''SCATANA(Security Control of Air Traffic and Air Navigation Aids)'''라는 통제 조치로, 미 본토가 적국에게 침공받거나 공습당하는 등의 응급상황을 대비하여 미 영공상의 모든 비행기를 강제로 착륙시키고 Navaid 비콘도 전부 꺼버리는 조치이다. 이는 1960년대에 처음 제정되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사례는 9.11 테러 당시가 유일하다. 이 조치가 발동됨으로서 영공에 떠 있던 약 4,200대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비행기들에게 강제 착륙 지시가 내려졌으며[42] , 모든 비행기의 이륙이 금지되었고 미국으로 접근 중이던 모든 민항기들도 회항시켰다. 뉴욕항은 봉쇄되었고, 모든 화물선들이 정박하거나 회항한 후 미합중국 해군 항모전단이 입항했다.
미국의 독립 이래로 미국 영토가 전쟁터가 되었던 일은 1812년 미영전쟁, 1861년 벌어진 남북전쟁, 1913년부터 1917년 사이 멕시코 혁명 중에 판초 비야가 이끈 멕시코 혁명군이 뉴멕시코주에 침공한 것, 그리고 진주만 공습 이후 5번째라는 점에서 큰 충격을 줬다.[43]
또한 미 본토 침공은 1913년 이래로 88년 만의 사건이었고, 미국의 경제적 수도인 뉴욕에, 또 뉴욕을 상징하던 마천루에 민항기를 때려 박는다는 전무후무한 테러 전략으로 인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2.7.1. 정부 마비
이 충격은 또 다른 부분으로 미국을 강타했다. 테러와 거의 동시에, 테러 충격으로 미국 지도부가 일시적으로 마비 수준에 처했던 것이다. 국무부에도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 테러가 감행되었다느니 국회의사당 및 연방대법원 건물에서도 폭탄이 터졌다느니 등등의 유언비어들이 항공기 충돌을 전후로 대대적으로 퍼지며 주요 정부기관이 일제히 마비되었다. 미 상하원 양당 지도부는 테러 직후 급히 전용 방탄차량을 타고 엄중한 호위와 함께 교외의 핵전쟁 대비 시설로 이동했다. 뉴욕항에 항모 2척이 입항했으며 준계엄령과 동시에 모든 항공기들은 착륙해 통제를 받아야 했다.
공중 납치한 민항기를 사용해서 자폭 테러를 한다는 발상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기상천외한 작전이지만 불과 9.11 테러 6개월 전에 《폭스 뉴스》에서 방영한 엑스파일의 스핀오프 시리즈 《론 건맨》 1시즌 1화에서, 미 정부가 민항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에 충돌시키려 한다는 내용이 나왔었다. 한편으로 톰 클랜시의 9.11 이전에 집필된 《적과 동지》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일본인 기장이 여객기를 몰고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 중인 미국 국회의사당에 돌진해서, 미 정부 요인 중 반수 이상이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44][45] 이 때문에 톰 클랜시는 9.11 직후 한층 더 유명해졌고, 실제로 CNN는 사건 초기 방송에서 톰 클랜시와의 생방송 중 인터뷰를 하루에도 수차례 했다 사건당일 방송. 그리고 펜타곤은 할리우드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들을 불러 모아 '가능한 모든 미 본토 침공 시나리오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공중 납치는 아니지만, 비행기를 납치해 자폭 테러를 한 시도는 이미 예전에도 있었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도 다룬 사건으로 알제리에서 반정부 테러리스트들이 공항에서 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파리에 날아가 에펠탑에 자폭테러를 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조종사와 프랑스 정부의 대응으로 마르세이유에 중간기착을 한 후 프랑스 국가 헌병대 소속 GIGN를 투입시켜 막아냈다. 생존자들 중에는 9.11 테러를 보고, '만약 저들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의 목표는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 미 국방부의 펜타곤, 그리고 백악관이었다. 백악관이 위치해있는 워싱턴 D.C. 로 날아가던 UA93편은 승객들의 강력한 저항에 결국 목적지와는 다른 펜실베이니아 주 섕크스빌 벌판으로 추락했다.[46] 이 사건 전에 전투기로 3분 거리에 있던 가장 가까운 공군기지에도 발령이 났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한편 재난 대책 업무를 맡은 뉴욕 시 경찰 및 소방당국에서는 일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라는 희대의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에 더해서 당시 경찰과 소방, 기타 행정부서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 이후 경찰과 소방 인원들을 통합 지휘하는 기관인 커맨드 센터는 제대로 설치되어 있어 제 역할을 해야했는데 하필이면 이 기관이 세계무역센터 로비에 있었다. 붕괴 직전까지 역할을 다했으나 결국 붕괴 직전 인원들이 급히 철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 것.
3. 원인
위에서도 계속 언급이 되었지만 당시 미국의 항공 보안은 구멍투성이었다. 조종실 문을 열고 침입하는 게 쉬웠던 것은 물론이고 탑승객의 신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무기로 사용될 여지가 있는 소지품까지 허용하는 등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과 9.11 테러의 전조를 감지한 정보기관들은 90년대부터 테러를 큰 위협으로 여겨 우려하고 있었다. 실제 93년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을 비롯해 연이은 대사관 테러와 USS 콜 테러사건 등으로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알 카에다와의 전쟁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정보기관 일선의 판단과 우려에 비해 미국은 소련 붕괴 후 찾아온 90년대의 대호황에 국가도 아닌, 일개 테러조직 따위가 미국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 클린턴 행정부 전반기는 셧다운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중동의 테러조직 따위에는 관심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이후 미국 행정부가 관심을 두려할 시기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코소보 전쟁이 터져서 모든 관심이 발칸 반도로 집중되었다.
-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제법 위반 등의 이유로 두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미리 화근을 제거할 기회를 놓쳤다는 정황들이 발견되면서 클린턴 정권에도 9.11 테러의 책임이 일정 정도 존재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 미국의 항공보안에 심각한 허점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 개선을 요구하는 의회, 정부 보고서가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여러 차례 올라왔으나 무시되었다. 이러한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조사위에서는 CIA와 FBI를 비롯한 정보당국이 항공국에 위험인물의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권고했으나 정보당국은 이를 무시했다.
- CIA와 FBI를 비롯한 정보당국끼리도 정보 공유를 꺼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으로 밀입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FBI가 정보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CIA는 정보제공에 비협조적이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을 찾는 수사관은 단 1명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났고 이는 테러가 일어날 때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CIA는 테러 발생 후 자신들이 경고했으나 정부가 무시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만 하다가 실속은 없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병크를 저지른 것이 유명한 고문 스캔들이다.
- 부시 행정부의 안보 담당들은 취임한 지 1년도 안 되다보니 알 카에다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알 카에다의 위험도가 고조된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어서 아랍 쪽 첩보 담당자들을 제외하면 미국 수뇌부들 중 그 누구도 알 카에다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클린턴 정권의 안보 담당자들이 업무를 인계하면서 '알 카에다를 경계하라'라고 이야기하자 부시의 안보 담당자들이 "알 카에다가 도대체 뭐요?"라고 되물어 볼 정도였다. 게다가 하이난도 충돌사고로 중국과의 사이가 냉각되면서 알 카에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 FBI가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로 건물에 테러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2001년 8월에 보고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테러리스트들이 거의 모든 준비를 다 끝마쳤을 시기였다.
- 민간항공과 공군이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 테러 초기에 정보전달이 잘 되지 않아 혼동이 발생해 이미 추락한 비행기를 찾는 등의 혼선이 벌어졌다. 게다가 미국 공군에서는 적국의 침공만 상정하고 있던 상태라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내륙에서 날아와 공격을 가했는데도 공군의 전투기들은 대서양 방향으로 출격했다. 오로지 미 공군의 강력한 제공권 장악력만 믿고 있던 당시 미국의 방공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방공부대가 전혀 없었다.
4. 반응과 여파
5. 이후
9.11 테러 당시 미국은 냉전도 끝나서 딱히 외부적인 위협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대외정책에 대한 명분과 필요성, 그리고 예산의 부족으로 슬슬 해외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려던 시기였지만, 테러 이후 약 10여 년간 분위기가 반전되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치르는 등 개입정책에 나섰다가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개입이 줄어든 상태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47] 라고 불리고 있으며, 건물 붕괴 후에 쌍둥이 빌딩의 철골 구조물 중 일부가 십자가 형태로 남아있어, '굴하지 않는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재 여기에는 9.11 메모리얼 파크가 조성되었고 신세계무역센터가 지어졌다. 현장 옆의 빌딩에는 소방관 추모비도 걸려있다.
현재 그라운드 제로 주변에 모스크(이슬람교 사원)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미국민들이 들끓고 있는 중.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무너진 건물 주변에 이슬람 사원을 건립한다는 건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라는 반대의견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지지를 천명한 상태. 이 때문에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본인의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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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있는 Pool 근방에는 Tribute in light라는 서치라이트 설비가 설치되어, 해마다 9월 11일이 되면 위와 같은 조명을 밝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같은 항공기 시뮬레이션들은 과거에는 표기되었던 장소[49] 들이 사라진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테러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으며, '''테러리스트에게는 인권 따위 없다''' 수준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처벌도 불사하고 있다. 국내 테러리스트들도 주범은 사형. 공범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기본이고 해외 테러단체나 국가가 미국에 대한 무력 도전을 하거나 테러 가지고 장난을 친다면, 정말이지 지구 끝까지 찾아내어 응징하고야 만다.[50]
사건 당시 CNN을 비롯한 주요 보도 채널에서 순간마다 쏟아지는 관련 보도들을 소화하기 위해, 뉴스 내용을 실시간 자막 스크롤 형식으로 내보내야 했다. 이후 세계의 여러 보도 채널들이 자막 뉴스 보도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 쪽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미국에서 건물에 관한 규제가 강화되어서, 설계를 할 때에는 그 건물이 테러에도 견딜 수 있는지 고려를 해야 된다고 한다.
5.1. 끝나지 않은 피해
9.11 테러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천 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에 시달리고 있다. TV로 비행기가 충돌하여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생방송 되었으니, 이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이로 인해 보안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9.11 테러 이후 1년간, 미국의 무슬림 400명 이상이 애꿏게 증오범죄를 당했고, 그 뒤로도 매년 100명 가량이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이슬람이랑 아무 관련 없는 시크교도들까지 터번을 쓴다며[51] 공격당했다. 조지 부시는 이로 인해 악화될 무슬림계 미국인들의 여론을 달래기 위해서 9.11 테러 직후인 9월 17일 워싱턴 D.C의 모스크를 방문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무슬림계 미국인들 역시 소중한 미국의 국민이다.'라고 연설하였다.
피해자가 워낙 많다보니 무슬림의 피해 사례도 있는데, 특히 미 의회에서도 언급된 사례로, 파키스탄계 미국 귀화인으로 뉴욕 경찰[52] 이 된 이슬람 신도 모하메드 함다니의 사례도 있다. 초기에는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이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의료가방'''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어 영웅으로 명예회복이 되었다.#
5.2. 후속 테러
9.11 테러의 재현을 노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53] 세계적인 공조를 통해서 많은 테러시도가 저지되었지만, 일부는 실제 실행에 옮겨졌다. 굵직한 것만 해도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2015년 튀니지 수스 테러, 파리 테러 등등. 이외에도 자잘한 사건들이 많다.
6. 음모론
일반적으로 음모론은 자잘한 사례를 통해서 실체가 불분명한 거대한 음모가 존재한다는 식이라 그다지 대중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반면, 9.11 사건은 역으로 정황 자체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 정황을 입증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사실로 받아들였다.[54]
음모론은 크게 2가지인데, '부시 정부의 자작극' 설과 '자작극은 아니나 미리 테러 정보를 입수하고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방관했다'는 설이다.
당시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사건 자체가 워낙 세계사적인 대사건이었고 전세계에 극적으로 생중계 되었던 점.
- 일종의 인지부조화 현상으로 항공기가 충돌하고 거대한 건물이 불에 타 쓰러지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목격했던 이들이 이 충격적인 장면이 사실이라는 것을 수용하기 어려워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부시와 미국 보수 매파의 불리했던 정치적 입지가 극적으로 반전된 점.
- 음모론이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이때는 부시 대통령의 임기 첫해였고(01년 1월부터 임기 시작) 중간선거 또한 02년도에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 굳이 정치적으로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았다. 설령 음모론으로 본다 해도 그 어떤 정치인이건 하이재킹으로 민항기를 자국 빌딩에 자폭시킬만큼 무모하진 않다. 차라리 갱단이나 마약 밀수업체, 반군들한테 무기나 지원해주면서 싸움을 일으킬지언정...
- 통킹만 사건 같이 미국이 실제로 여론 전환을 위해 조작한 사건이 정보 공개를 통해 대중에 많이 알려진 점.
- 부시 일가가 오사마 빈 라덴 일가와 친분이 있었던 점.
- 빈 라덴의 집안은 “사우디 빈 라덴 그룹”을 소유한 소위 재벌가였고, 부시 일가와는 CIA국장, 부통령, 대통령을 역임한 아버지 부시 시절부터 친분을 맺어오고 있었다. 특히 아들 부시의 석유관련 사업에 큰 돈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테러리스트로 전직한 빈 라덴과는 오래전부터 절연한 상태였다. 오사마 한명 때문에 온 가문이 영문 이름을 Laden에서 Ladin으로 개명했다.]
- 오사마 빈 라덴과 CIA와 연관이 있었던 점.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때 아프간의 무자헤딘 반군을 CIA가 지원했는데, 오사마 빈 라덴도 그러한 지원을 받은 인물 중 하나이다. 즉 “빈 라덴은 CIA의 훈련을 받았다”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팩트다. 물론 그 당시는 소련이 멀쩡히 살아있던 냉전 시절이고 빈라덴은 반미 테러리스트가 되기 전이지만...
- 항공기에 탄 희생자들의 명단이 없는 점.
- 부시가 군수 및 석유업체의 지지를 받았던 점.
- 9.11 테러로 인해 강행할 수 있었던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러한 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무엇보다 이후 석유 때문에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는 국내외 비난 여론과 막대한 재정 지출을 감수하고 부시 정권이 적극적으로 강행했던 이라크 전쟁[56][57] 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었던 군수업체와 석유기업들의 배만 불린 채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 무기가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음모론이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다.
대표적인 게 《루스 체인지(Loose Change)》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은 다음과 같다.
- 비행기에 부딪히지 않았는데 세계무역센터 7번 건물은 왜 무너졌나?
- 철골로 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어떻게 비행기 충돌 하나만으로 자유낙하 속도로 무너졌나?
- 항공기의 충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또한 충돌과 동시에 4만 리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가 유출되면서 폭발했고 건물 안에 남은 항공유도 엄청나게 뜨거운 열을 내뿜으며 연소되면서 건물이 전체적으로 약해져서 무너졌다. (9.11 테러/세계무역센터의 붕괴 문서 참조) 또한 붕괴될때 밖으로 튀어나온 외벽 파편들만 보면 아무런 저항이 없으니 자유낙하 속도랑 얼추 비슷하게 나오지만 실제 외벽 파편들이 땅에 닿았을때 아직 건물은 30~40층정도 남아있었던 상태였다. 거기다가 붕괴가 꼭대기층인 110층이 아닌 70~80층에서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낙하 속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 붕괴된 층보다 20~30층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편들은 대체 무엇인가?
- 건물 내부가 먼저 무너졌기 때문에 나온 파편들이다. 건물 내부 코어가 먼저 무너지고 그 층들에 있는 수많은 배선, 수도관, 사무용품 등등이 코어와 함께 밖으로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 왜 세계무역센터의 건물주(래리 실버스타인)는 9.11이 발생하기 6주 전에 35억 달러짜리 테러보험과 함께 건물을 임대계약을 했나?
- 6주전에 계약을 한 것은 정말로 운이 없던것이고(...) 테러 보험을 들은것은 세계무역센터는 이미 1993년, 큰 테러를 한 번 당했기 때문에 든 것이다.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 문서 참조.
- 9.11 이전 몇 주 동안 예고에 없던 대피훈련은 무엇인가?
- 전술했듯 이미 세계무역센터는 93년에 초대형 폭탄테러를 당한 건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훈련은 매우 정상적인 훈련이다.
- 건물 내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폭발음을 들었다는데? 특히 소방관들은 건물 안 밝은 섬광을 보았다는데?
-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1000도에 육박하는 엄청난 열기에 녹은 비행기 동체(알루미늄)가 층에 있던 구멍 곳곳으로 새나가면서 하층부에 있던 물과 만나면서 산화알루미늄이 만들어졌고 이 상태에서 엄청난 열과 에너지를 내뿜어서 폭발처럼 느껴졌다는 가설이다.
- 왜 펜타곤 충돌 현장에서는 보잉 757기 파편이 없는가?
- 비행기가 스쳤다는 펜타곤 잔디밭에는 왜 아무 흔적이 없나?
- 펜타곤에서 엔진이 들이받았을 자리는 왜 멀쩡한가?
- 펜타곤 피해상황을 찍은 많은 사진들이 소방수나 짙은 연기, 화재에 가려 엔진과 날개 충돌부위가 제대로 안보였기 때문에 크게 제기된 설이다. 실제로는 날개, 엔진이 있던 자리도 크게 충격을 받아 그 부위에 흔적이 남을정도로 부숴졌고, 기수(機首)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 날개가 살짝 안쪽으로 꺾이면서 충돌했기 때문에 날개 및 엔진이 들이받은 자리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 펜타곤 직원들은 사고 당시 군용 화약 냄새를 맡았다고 하는데?
- 미국 정부는 왜 사고기의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나?
- 블랙박스를 회수했으면 그것이 더 기적이다. 세계무역센터 충돌 같은 경우에는 충돌 이후에도 1000도가 넘는 화염이 1시간 가량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거기다가 2개의 건물이 붕괴된 충격을 생각하면 블랙박스는 커녕 잔해를 찾는거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펜타곤의 경우에도 충돌 이후 무려 40시간이나 화재가 지속됐는데 이러한 열기에서 멀쩡하게 살아남는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경우에는 건물이 아닌 평지에 추락하여 화재가 금방 진압되어 FDR(비행정보기록장치), CVR(조종실 음성 녹음장치) 모두 회수에 성공하였고, 2006년에 민간에 모두 공개하였다.
- 흔적 없이 사라진 UA93편은 어디로 갔을까?
- 미국 정부는 9.11 테러 당일 주요 각료들의 비행 탑승을 왜 금지시켰는가? 미 공군은 왜 비행기가 납치된 시각으로부터 2시간동안 늑장을 부렸나?
- 거짓 전화통화 // 거짓 빈라덴 비디오 // 거짓 납치범
- WTC 지하에 숨겨져 있던 1,600억 달러의 금괴 중 2억 달러어치만 발견한 점.
-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 (제트 연료의 연소로는 쌍둥이 빌딩의 철제 골조를 녹일 수 없다.)
- 진실: 말 자체는 사실이나 녹지 않아도 충분히 약화된다. 음모론자들은 철근의 녹는점은 대략 1400도 정도이고 제트연료의 연소온도는 900도 정도인데 왜 철근이 죄다 녹아 건물이 무너졌냐, 화재를 대비해서 철근에는 화재대비코팅 처리가 되어있을텐데 왜 화재로 무너졌냐 라고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실제로는 시속 수백 km/h 로 여객기가 건물에 부딪혀 기둥, 바닥, 여객기등 온갖 자재들이 순식간에 파편화된 상태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기 때문에 충돌층의 대부분의 코팅이 벗겨졌다. 또한 철근이 녹는온도까지는 도달하기 힘들지만, 건물 무너뜨리려면 녹게 하지 않아도 그냥 열을 가해서 약하게 만들기만 해도 된다. 쉽게 예를 들어 종이를 돌돌 말아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책을 얹은 상태에서, 굳이 그 종이기둥을 치우지 않고 기둥에 물을 뿌려 약하게만 만들면 책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58]
그리고 '9.11 테러 직전 찍은 사진'이라며 한 남자가 쌍둥이 빌딩 옥상 위에 올라가 있고, 그 뒤로 비행기가 날아오는 사진이 떠돌아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나중에 합성으로 밝혀졌다. 원본. 덕택에 이 사진은 Tourist guy라는 이름으로 필수요소가 되어버렸다.
아프가니스탄의 년도별 양귀비 재배 면적 #
이외에도 마약과 관련된 루머도 역시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마 역시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UN에서도 당해년도 마약 시세를 알아보는데 일단 아프가니스탄부터 언급을 할 정도로 마약 생산 대국이다. 만일 아프가니스탄에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의 지하경제가 초비상에 돌입한다고 봐도 될 정도이다. 그런데 매우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탈레반[59] 이 아프간을 장악한 이후, 이슬람법에 어긋난다고 마약 생산을 금지했던 것이다. 물론 금한다고 쉽게 걸려들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큰 타격은 받지 않고 있었지만, 탈레반은 완전 근절을 위해 UN과 협력하여 아편 생산을 무려 90% 이상 줄여버린다. 이는 안티드럭 캠페인 역사상 가장 큰 쾌거라고 모두가 기뻐했는데… 이게 바로 2001년이다. 그리고 이 일이 있고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으며, 미국은 아프간을 지목해 탈레반을 몰아냈는데, 미국이 점령하고 나서 아편 생산량은 순식간에 원상복구되어 지금까지도 왕성히 아편 생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2004년에 출간된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1권 초판 p247에선 해당 테러의 원인을 '유대인의 미국 장악'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애시당초 WTC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에 있고, 이마저도 유대인이 장악한 터라 사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해당 이론은 2007년에 미국의 유대인 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 등이 항의를 하면서 저자가 사과한 뒤 다음 판본에서 지워졌고,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사장됐다.
한국에는 아직도 9.11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우스 파크》 시즌 10 에피소드 9 'Mystery of the Urinal Deuce'에서는 9.11 테러 음모론을 주제로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들 4분의 1은 음모론 따위를 믿을 정도로 멍청하니, '''직접 음모론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포하게 하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그리고 나머지 4분의 3에게는 진실을 말한다고 했다.
'''2000년도'''에 출시된 게임인 데이어스 엑스는 음모론과 세계를 뒤에서 조종하는 비밀조직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데 주인공이 속한 대테러 조직 UNATCO가 설립된 건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로 파괴됐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게임 용량 문제로 삭제된 것을 테러 때문에 날아갔다고 설정을 붙인 것이었는데...여기서도 사람들은 이 일이 미정부의 자작극, 즉 Inside job이라고 생각한다. 테러로 사라진 세계 무역 센터 설정도 그렇고 어떻게든 앞을 내다본 게임.
7. 9.11 테러를 다룬 대중매체
7.1. 게임
- 08:46: 오큘러스 리프트 전용으로 나온 게임으로 9.11 테러를 추모를 위해 제작된 게임으로써 9.11 당시 북쪽 타워 내부 상황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엔딩이 탈출을 하는 게 불가능하고 질식사해 죽거나 떨어져 자살하는 선택지[60] 밖에 없어서 영 좋지 못한 평을 듣고 있다. 이렇게 선택지가 없는 이유도 존재하는데, 9.11 당시가 얼마나 비참하고 살인적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선택지가 없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7.2. 서적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61] 》[62] : 아버지를 9.11 테러로 잃은 9살 소년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상당히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 페이지가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든지, 한 장에 한 문장만 있거나 아예 빈 종이라든지, 텍스트가 겹쳐 알아볼 수 없다든지, 특히 결말부의 사진[63] 을 리와인딩하는 기법 등이 특이점이다.
- 《102분》[64] : 세계 무역 센터에서 항공기가 충돌한 후 북쪽 타워가 붕괴되기까지 102분간 벌어진 일을 그린 논픽션이다.
- 《문명전쟁[65] 》[66] :
7.3. 영화
- 《2001년 9월 11일[67] 》[68] : 각각의 에피소드가 11분 9초 1프레임 길이가 되게끔 맞춘 단편 11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에피소드 순서대로 사미라 마흐말마프, 끌로드 를르슈, 유세프 샤힌, 다니스 타노비치, 이드리사 오에드라오고, 켄 로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아모스 지타이, 미라 네이어, 숀 펜, 이마무라 쇼헤이 연출.
- 《화씨 911[69] 》[70] -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 《루즈 체인지 제2판[71] 》[72]
- 《플라이트 93[73] 》[74]
- 《월드 트레이드 센터[75] 》[76] : 9.11 테러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명작.
- 《레인 오버 미[77] 》[78] : 9.11 테러로 아내와 세 딸을 잃고 정신적 충격을 겪는 치과의사 찰리 파인맨의 이야기.
- 《시대정신#s-2[79] 》[80]
- 《내 이름은 칸[81] 》[82]
- 《주저하는 근본주의자[83] 》[84] : 모신 하미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85] 》[86] : 조나단 사프란 포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스토리는 훈훈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산만한 영화라서 호불호가 좀 갈렸다.
- 《제로 다크 서티[87] 》[88] : 9.11 테러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주인공 '마야'가 10여 년간 추적하는 과정을 다루며, 촬영 직전에 빈 라덴이 넵튠 스피어 작전을 통해 실제로 사살되어 스토리가 변경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9.11 테러 당시 무전, 통화 음성들이 나와, 영화 시작부터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 《9/11》: 테러 직후 무역센터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버린 5명의 인물들을 다루는 이야기. 찰리 쉰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2017년 9월 개봉.
7.4. 드라마
- 《CSI : NY》 시즌 1 1회: 주인공인 맥 테일러 반장의 아내인 클레어가 9.11 테러의 희생자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맥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아내를 찾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후에도 클레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언급된다.
- 《뉴스룸》 시즌 1 7회
- 《웨스트 윙》 시즌 3, 0회(특별편) "Isaac and Ishmael" - 9.11 테러로 인해 추가된 특별편. 에피소드 내용에서는 9.11 테러와 직접적 연관성은 나타나지 않고, 극단적 종교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그에 대처하는 자세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에피소드 시작 전 9.11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관련 단체의 후원을 독려하는 부분이 나온다.
- 《본즈》 시즌 8 6회
- 《더 루밍 타워》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7.5. 음악
- Yellowcard - Believe[89] : 생존자와 희생된 소방관의 관점에서 쓰인 노래인데, 간주 부분엔 전 뉴욕 주지사 조지 퍼타키, 마지막 부분엔 전 뉴욕 시장인 마이클 블룸버그의 연설이 들어가 있다.[90]
- Dream Theater - Sacrificed Sons[91] :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에서 죽어나간 이들에 대한 곡.초반부에 전세계의 뉴스 보도가 흘러 나온다.
- 조성모 5집 《내 것이라면》 뮤직비디오: 9.11 테러 때 사망한 소방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모델인 '제이 임'이 남주인공인 소방관 역을, 임은경이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 Lily Allen - Him[92] , 2009
- anti-flag - 911 for peace
- My Chemical Romance[93] - Skylines and Turnstiles, Sleep, The Only Hope for Me is You
- John Mayer - Covered In Rain
- Velvet Revolver - Messages
- Green Day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원래 보컬인 빌리 조 암스트롱이 어릴적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 충격을 받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어머니에게 "9월이 끝나가면 깨워 주세요"라고 말한걸 토대로 작곡한 곡이다. 가사의 내용은 9.11테러와 큰 연관은 없어 보이나 빌리 조는 9.11 테러의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작곡을 했다고 한다. 노래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 때문에 이후에도 미국에 굵직한 사고가 터질 때마다 추모곡으로 자주 쓰였다.
- Celine Dion - A New Day Has Come: 911 테러 3개월이 지난 후에 발표된 곡으로 미국민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 Madonna - American life: 마돈나의 곡 중 유일하게 가장 심한 여론의 비판을 받은 노래다. 당시 마돈나는 9.11 테러를 빌미로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는 부시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가 있는데 이 당시 대중들은 이러한 의지에 대해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돈나가 뮤직비디오를 수정하게 되는 계기를 주었다. 지금에서는 잘못된 국수주의라고 비판을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자기나라 도심 한복판에 빌딩이 추락했고 여러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에 대한 복수를 비판한다는 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는 현상이었다. 물론 결과는 복수로 인한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지금도 중동 쪽에서 큰 증오를 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 Coldplay - Politik: 9.11 테러에서 영감을 얻은 크리스 마틴이 작곡한 곡.
- Wilco - Jesus, etc.: 윌코의 최고 명반인 Yankee Hotel Foxtrot에 수록된 곡. 'Tall building shake'나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같은 가사를 보면 9.11 테러를 강하게 연상시키지만 사실 곡 자체는 9.11 테러 이전에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테러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가사로 많은 찬사를 받은 곡이다.
- Interpol - NYC: 데뷔 앨범인 Turn on the Bright Lights에 수록된 곡으로 NYC는 뉴옥의 자원봉사 단체인 'New York Care'의 약자이다. 인터폴다운 공간감과 폴 뱅크스의 읊조리는 듯한 저음으로 시작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며 빛을 환하게 밝히자는 희망적인 가사로 마무리하는 구조가 인상적인 곡.
- 카라바오 - เดือน 9 เช้าที่ 11 (9월 11일): 존 레논의 Imagine의 구절을 인용하며 서로간 복수가 아닌 평화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7.6. 뮤지컬
- Come from away -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9.11 테러 당시 모든 비행기가 비상착륙을 해야 했는데 대서양을 횡단중이던 비행기들은 모두 제일 가까웠던 뉴펀들랜드 Gander 공항으로 몰려들었고, 그 인원은 당시 Gander 공항 지역 인구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식량, 숙박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지역민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먹고 마실 것과 집을 내주었고 이때의 경험이 매우 특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승객과 지역민이 결혼한 사례도 나왔다고 한다. 결국 이 훈훈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으로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 4.19 혁명, 6.25 전쟁과 함께 사건이 일어난 날이 사건의 이름이 된 대표적인 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의 숫자는 미국의 응급구조번호인 911과도 같다.[2] 정확히는 모하메드 아타를 비롯한 19명의 테러리스트. 그 외에 직접 테러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알카에다의 수장으로 테러를 지휘한 오사마 빈라덴이 매우 유명해, 사건 이후 2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테러리즘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다.[3] 41층 건물이었으며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어 2011년에 결국 완전히 철거되었다.[4] 민간인 2,977명, 테러리스트 19명. 테러 및 건물 붕괴로 인한 사망자수로는 현재까지 '''세계 최다'''이다. 종전 기록이었던 1985년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의 희생자수는 329명이었는데, 9.11 테러는 무려 '''10배'''에 가까운 희생자수로 이 기록을 경신해버렸다. 9.11 이후에도 ISIL, 보코하람 등 수많은 테러 집단들이 천명 단위의 희생자수를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20년동안이나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5] 영문 모르고 당한 민간인이 아닌,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 및 경찰 공무원 412명과 경찰견 1마리도 매몰되어 순직했다.[6] 붕괴할 때 가루로 흩날린 석면으로 인해 암에 걸린 사람들의 수[7] 그 외 분진으로 건강이 나빠진 사람들의 수. 이는 뉴욕시 시민들의 '''0.9%'''에 달하는 엄청난 수이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 사람들의 수만 따지면 수십 ~ '''수백만명'''을 넘어간다. 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전까지 단일 사건으로는 뉴욕시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킨 사건이다.또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후의 중동 관련 전쟁 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간접적으로도 매우 큰 사망자를 만들었다.2차 간접(테러와의 전쟁이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까지 나왔다.[8]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매년 9월 11일을 추모하는데, 이때 항상 등장하는 표어이다. 구글이나 Bing을 미국 지역으로 맞추고 Never Forget을 검색하면 9.11 테러 관련 자료가 나온다.[9] 심지어는 미국과는 늘 사이가 나쁜 북한조차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북한이 일으킨 사건이 절대 아니라고 공식 논평까지 낼 정도였다.[10]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를 제외하면, 뉴욕시에 있는 소방서 중 순직자를 배출하지 않은 곳은 1곳도 없었다. 특히, Ladder 3의 대원들, Ladder 21의 대원들, Rescue 2의 대원들 등 '''한 소방서의 대원들이 하루 만에 전멸한 경우도 있다.'''[11] 항만경찰이라고 배 타고 다니면서 중국어선을 잡는 한국 해경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항만도 관리하지만, 도로나 공항 등의 시설도 이들의 관할이다. 뉴욕에서 가끔 등에 ‘Port Authority Police’ 라는 이름을 단 경찰관이 있다면 여기 소속, 또한 결정적으로 WTC가 이들이 관리하는 관할 시설이었다. 항만경찰임에도 순직한 경찰관과 경찰견이 있는 이유이다.[12] 제1 세계무역센터에 충돌.[13] 2001년 한국의 한 뉴스기사에서 언급된 부분.[14] '''셰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셰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15] 제2 세계무역센터에 충돌.[16] 펜타곤에 충돌.[17] 펜실베이니아 주 인근에 추락. 테러 목표는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추정.[18] Computer-Assisted Passenger Prescreening System Version 1, 컴퓨터 보조 승객 판별 시스템.[19] Barnett, A. (2004). CAPPS II: The foundation of aviation security?. Risk Analysis, 24(4), 909-916.[20] 참고로 나레이션도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관 중 1명이었던 제임스 핸론(James Hanlon) 소방관이 맡았었다. 9월 11일 당시 이 분은 비번이었던 날이어서 테러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21]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 소방서의 서장. 2018년에 정년퇴직했다.[22] 존 오닐(John O'Neill) 소방관. 이 분 역시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이 분의 얼굴도 원본 영상에 나온다.[23] 원본 영상과 한국어 번역 영상은 유튜브에 각각 '9/11 (documentary, 2002)', 9/11 (소방관 다큐멘터리, 2002)라는 제목으로 올라와있다.[24]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에 2~3개월 전 쯤 들어왔었던 토니 베네타토스(Tony Benetatos) 소방관. 지금도 뉴욕 소방국 대원으로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25] 참고로 테러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대원들은 사망자 없이 모두 무사 귀환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들이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서 기적 또는 천운이라고 말했다.[26] 쥘 노데는 그의 형인 게데옹 노데(Gédéon Naudet)와 함께 소방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6월 말~7월 초 쯤부터 9.11 테러 몇 주 후까지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서에서 그곳의 대원들과 함께 지냈었다. 9월 11일 당시, 쥘이 기디언 대신에 촬영 연습차로 가스 누출 의심 신고 현장에 대대원들과 함께 출동했었다. 그 현장에 도착해서 촬영하던 도중에 비행기가 날아와서 부딪혔고, '''이 때부터 평범했던 일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재난 현장이 된다.'''[27] 첫 번째 충돌이 담긴 다른 영상들도 있지만 우연히 주변에서 다른 곳을 찍다 폭발 직후 카메라를 돌린 뉴스 촬영기사 영상, 몇 초에 한 번씩 사진을 찍은 웹캠 영상, 그리고 도로 위 차량에서 찍어 전부 다 충돌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영상들 뿐이다.[28] 2001년 당시엔 스마트폰은 커녕 카메라폰도 없었고, 무선인터넷도 있긴 하나 요금이 비쌌다.[29] 실은, 휘발유나 LPG 등의 가스는 주변의 열이나 압력이 급상승하면 폭발하는데 9.11 테러 때 하필이면 WTC에서 떨어지는 여러 불붙은 잔해들이 차량들이나 주위 건물의 LPG 가스통을 덮쳐서 폭발한 것.[30] 충돌 이후에도 대피 방송은 1WTC와 달리 충돌부와 상층부에서도 멀쩡히 나왔다. 이는 1WTC와는 달리, 2WTC에 충돌한 UA175편은 측면에 충돌하였기 때문에 건물 중심 코어부분을 지나는 전기라인은 손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충돌 이후에도 상층부, 심지어는 충돌층에서도 전기가 멀쩡히 공급되었다.[31] 테러 관련 자료를 찾을려다 본의 아니게 우연히 본 위키러들도 있겠지만 구글 이미지에 911 Jumper라고 검색하면 테러 당시에 추락사한 희생자들의 끔찍한 사진들이 몇 장 나오므로 아직 검색을 해보지 않은 위키러라면 검색 시 주의를 요함. (추락한 사람들의 내장이 보이는 등 사진이 끔찍하다.)[32] 수업 참관에 들어가기 직전 첫 번째 비행기의 충돌 사실을 전해들었지만, 이때는 부시는 물론 보좌진들 모두가 '사고'로 취급하고 있었다.[33] 영상 20초경, 아이들과 선생님이 발음을 공부하고 있던 단어가 순서대로 '''Hit, Steel, Plane(때리다, 철, 비행기)'''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저화질의 동영상과 불분명한 발음이 맞물려 발생한 루머이며, 실제로 사용된 단어는 '''Kit, Steal, Playing'''이다. #[34] 사건 이전에 설치된 펜타곤 CCTV로 인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35] 위 영상은 CG로 재현한 장면으로 실제로 펜타곤과 여객기가 충돌한 장면을 찍은 영상은 검문소에 설치되어있던 CCTV 영상이 유일하다.사고 영상 하지만 당시 CCTV 기술의 한계로 인해 영상품질이 1fps 남짓이라 온전한 충돌과정을 파악하긴 어려웠고, 때문에 고층의 세계무역센터와 달리 5층 밖에 안되는 낮은 펜타곤을 비행기가 수평으로 충돌할 수 있는가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있었고, 미국의 자작극이란 말도 나왔었다. 이유는 비슷한 크기의 여객기가 충돌한 사건인데 세계무역센터는 완파된 것에 비해, 펜타곤은 상대적으로 너무 멀쩡했기 때문이고, 비행기가 저렇게 낮게 날아 수평으로 충돌할 수 있느냐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자작극을 하겠다고 국방부 건물에 비행기를 충돌시켜 공무원과 승객 등 189명을 죽인다는 건 초등학생도 안 믿을 헛소리이다.[36] 다른 4개의 편은 붕괴되지 않고 서쪽 편 일부만 붕괴.[37] 이 날이 벤 슬라이니가 National Operations Manager 직책으로 일을 시작한 첫 날이었다[38] 이 때문에 벤 슬라이니는 9.11을 다룬 다큐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플라이트 93》이라는 극영화에도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39] 이 비행기가 승객의 저항이 없어 목표에 도달했으면 더 치명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40] 다른 항공기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자살 테러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하여 저항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하이재킹 범죄는 항공기를 착륙시킨 후 승객들을 인질로 삼아 협상을 요구하는 대형 인질극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항공기 자체를 테러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전무후무한 계획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41]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로 유명한 아트 슈피겔만이 디자인했다.[42] 군용기와 연방보안국 죄수호송기만이 계속 비행할 수 있었다.[43]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쟁이었던 '인디언 전쟁'은 카운트를 하지 않는다. 사실 원주민과의 싸움은 영국령 식민지 시기와 미국 건국 초기에 툭하면 산발적으로 일어난 전투였기 때문에 몇 번을 싸웠는지 정확하게 카운트하기가 불가능한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인디언 전쟁은 원래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백인들이 약탈하고 침략한 싸움이라서 외부에서 미국을 공격한 것과는 사정이 다르기도 있다.[44] 충돌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경호원들이 맨패즈로 요격 시도를 하지만 워낙 대형기체라 미사일을 맞고도 그대로 들이받는다.[45] 실제 톰 클랜시는 소설 출간 전에 자문을 위해 미 공군 고위 장교에게 이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는데, 상당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클랜시는 이런 시나리오를 군쪽에서 대비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말한 거지만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고.[46] 초기 알 카에다가 계획한 공격 목표물은 펜실베니아주의 원자력 발전소였다. 사실 원자로 쉘터의 경우 각종 폭탄테러는 물론 항공기 충돌까지 상정하고 만들어진다. F-4 팬텀을 이용한 초음속 충돌에도 완전방호되므로 원자력 발전소 공격은 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47] 본래 '폭발 등의 진원지'를 뜻하는 일반적인 표현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이 지점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48] 2011년에 Park51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슬림 센터가 근처에 생겼다.[49] 예를 들면, 과거엔 있던 미군기지 같은 곳이나, 항공기로 자폭 테러하기 적절한 것으로 취급되는 장소.[50] 실제로 한국인이 한국 땅에서 인터넷 장난전화로 테러 협박을 했다가 FBI에서 한국 경찰에 수사 요청을 한 사례도 있다. 단 완벽한 장난전화로 밝혀지자 미국 입국 금지하고 스와트 출동비용 청구 후 한국에서 업무방해죄로 벌금 물리는 선에서 마무리. 한국 언론에서는 복자 처리되었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용의자의 사진과 실명이 공개되었다.[51] 무슬림과 시크교도는 서로 다른 터번을 쓴다. 정작 시크교도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수백년간 이슬람을 믿는 무굴 제국에 탄압받고 싸워왔던 종교이며, 가르치는 교리 또한 완전히 다르다.[52] 정확히는 경찰 견습생[53] 어이없게도 이들은 9.11 테러의 성공이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무슬림들에게 심한 피해를 안겨줬다는 걸(그 피해라는 것은 비극단주의 무슬림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 찍힌 것을 의미한다.) 배우지 않았고 그저 증오해마지않는 서방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만 보고 배웠다. 한마디로 나무만 보고 숲을 안 본 셈이다.[54] 음모론자들이 내놓은 근거들이 당시에는 명백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몇년 혹은 길게는 10여년이 지나서야 반박된 것도 음모론이 오랜기간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원인 중에 하나다.[55] 이 문서의 많은 자료들도 기밀 기한이 마감된 후 대중에 공개된 내용이 많다.[56] 이라크 전쟁도 9.11 테러가 없었으면 추진하기 어려웠다.[57] 심지어 부시 정권의 실세였던 딕 체니 부통령은 측근들과 9.11 테러 바로 당일 오후부터 이라크 침공을 논의했다고 한다. 아직 사건의 전모나 배후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전부터 이라크침공을 주장하던 네오콘 그룹이 9.11 테러가 일어나자마자 팩트체크는 생략하고 바로 전쟁으로 돌진한 것이다.[58] 실제로, 1000도정도에 도달하면 철은 상온 강도의 5% 조차 못내는 사실상 말랑말랑한 덩어리가 되고만다.[59] 탈레반의 시작은 종교 학교였다.[60] 빌딩 내부에 계속 남아있으면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며 게임이 종료되고 빌딩 밖으로 뛰어내릴경우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 화면이 어두워져 게임이 종료된다.[61]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62] 2005, 조너선 사프란 포어[63]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찍은 것[64] 2005, 짐 드와이어[65] The Looming Tower : Al-Qaeda and the Road to 9/11[66] 2007, 로렌스 라이트[67] 11'9''01 September 11[68] 2002, 사미라 마흐말마프 외[69] Ferenheit 9/11[70] 2004, 마이클 무어, 다큐멘터리[71] Loose Change 2nd Edition[72] 2006, 딜런 애버리, 다큐멘터리[73] United 93[74] 2006, 폴 그린그래스[75] World Trade Center[76] 2006, 올리버 스톤[77] Reign Over Me[78] 2007, 마이크 바인더[79] Zeitgeist[80] 2007, 피터 조저프, 다큐멘터리[81] My Name Is Khan[82] 2010, 카란 조하르[83] The Reluctant Fundamentalist[84] 2012, 미라 네이어[85]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86] 2012, 스티븐 달드리[87] Zero Dark Thirty[88] 2012, 캐스린 비글로[89] Ocean Avenue, 2003[90] 다만 테러 당시인 2001년까지의 뉴욕 시장은 루돌프 줄리아니였다.[91] Octavarium, 2005[92] It's Not Me, It's You[93] 보컬 제라드 웨이가 뉴욕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두 눈으로 직접 9.11 테러 공격으로 인해 구조되지 못한 사람이 무역센터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지금 그림이나 그릴 떄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밴드의 결성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